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97화 (297/538)

297. 챕터41. 확인하다 (7)

“흐음... 크기가 이 정도면 대로에 시계를 놓는 계획은 무산됐겠군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더 크게 만들든지, 더 작게 만들든지 해야 쉽게 써먹지 않겠습니까.”

“음.”

역시나 세자도 같은 생각을 했나보다.

대로가 이어지는 회전교차로의 광장에 시계탑을 세울 생각이었는데, 원하는 물건이 안 나와서 취소된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이걸 만든 게 어디야.’

지금까진 나인이나 내시들이 직접 발로 뛰어서 시간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이젠 시계가 저절로 알려주니 수고를 덜지 않겠나.

과도기이니 궁에 몇 개 더 설치하면, 나름 쏠쏠하게 써먹을 거 같다.

이윽고 편전에 다다르자, 세자가 먼저 작별을 고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연오랑은 세자와 세자비에게 인사를 건넸고, 세자비는 애써 당황한 모습을 숨기고 곱게 허리를 접고 멀어져갔다.

‘음... 꽤 큰 거 같은데? 2년 만에 완성한 것치고는 꽤 빨리, 잘 만들었어.’

연오랑은 경복궁의 편전을 떠올리며 비교해 봤는데, 이쪽이 월등히 큰 것 같다.

형태는 다를 게 없었고, 특이한 점이라면 진짜 청기와를 사용했다는 정도랄까.

지금은 자기기업이 늘어나면서, 고려청자를 만드는 기술로 만든 녹색 빛깔의 청기와가 널리 쓰이고 있었다. 다만 편전에 쓰인 건, 염초를 넣어서 만든 남색 빛깔의 진짜 청기와다.

‘원래 역사에선 광해군 때 저거 만드는데 돈과 염초가 많이 들어간다고, 만드니 마니 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네.’

시대를 거스르는 것 같아 보여,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째 과거 조선이 미래 조선보다 더 부자인거 같다.

‘돈이 많이 들었을 것 같긴 한데, 여전히 궁궐건축에 한발 내딛고자 하는 건설기업은 넘쳐날 테니까... 문제는 없었겠네.’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훤히 보였다.

궁의 설계와 건축은 건설부로 확장된 선공감과 영조사. 궁궐 유지 관리 담당하는 제거사提擧司. 궁중의 정원 관리를 담당하는 상림원上林園이 힘을 합쳐 끝마쳤을 거다.

이건 예전부터 하던 거니, 어려울 것도 없을 거고.

건축물 중의 제일 명품이 궁궐이고, 명품은 디테일에서 차이가 난다고 하지 않던가.

처마의 기둥을 세우고, 처마의 마감인 추녀春舌와 공포栱包를 끼우는 것 자체가 기술이며 노하우다. 이런 고급기술을 공짜로 배워갈 수 있으니, 눈이 뒤집힐 수밖에.

그렇게 전국의 건설기업이 궁궐의 건축기술을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을 거고, 호조에선 “야. 무려 궁궐 짓는 기술을 배워 가는데 공사비를 비싸게 부를 거냐?”라며 가격을 후려쳤겠지.

그러니 “궁궐 짓는데 돈 낭비 한다! 백성들이 노역으로 힘들다!”라는 말 따위는 나오지도 않았고, 괴소문이 퍼질 겨를도 없이 쓱쓱 편전 공사를 끝마친 모양이다.

‘이거... 생각해보니, 한성재개발계획에 처음부터 궁궐 증축계획도 포함되어 있던 거 아냐?’

연오랑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고, 돌아가는 꼴을 보니 맞는 것 같아 보였다.

백성들 입장에선 도로가 중요하지 궁궐이 중요하겠나. 한성을 뒤집은 도로건설에 파묻혀, 궁궐 개축은 소리소문도 없이 진행됐나 보다.

사람 없이 비어 있는 편전을 지나치자, 편전 뒤편에 자리 잡은 더욱더 크고 웅장한 건물이 눈을 사로잡았다.

편전과 같은 크기의 중앙 건물이 위치해 있고, 특이하게도 그 양 옆으로 햇빛과 비바람을 피하기 위한 통로가 옆으로 뻗어 있었다. 그 통로의 끝은 세로로 배치된 2동의 건물과 이어져 있었지.

하늘에서 봤다면 이 또한 디귿자 형태를 하고 있을 거다.

‘거참. 궁궐에도 저런 걸 지어놨단 말이지? 잘 베꼈네.’

원래 궁궐에 전각을 이어주는 가림막 통로가 있기나 했나. 저건 배봉연구소가 용마산에 지어놨던 북방가옥들을 보고, 따라 만든 게 분명하다.

용마산에는 연오랑이 미래의 기억을 끄집어 와서 온갖 형태의 생경한 건물을 마구 지어댔고, 그 낯설음과 신기함에 이끌려 왕족이 노는 북청별궁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그곳의 건축양식이 궁궐로 이어져 이식되었나 보다.

“음...?”

“처음 보시지요?”

“어.”

연오랑이 걸음을 멈춰 서서 구경하고 있자, 함께 온 금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긴 뭐하는 곳이냐?”

“중앙은 국무회의실. 한쪽은 승정원, 다른 쪽은 궁내원입니다.”

“오... 저게 바로 궁내원이란 말이지.”

연오랑은 감탄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승정원... 하긴 승정원이면 편전 옆에 붙어 있는 게 편하겠지.’

육조가 분화하면서 당연히 승정원 또한 확장 분리됐다.

의정부가 없어지고 왕과 각 부서가 직접 통교하는데, 그 부서 또한 한두개가 아니다.

중간에서 조율작업을 하던 승정원의 역할이 부각될 수밖에 없고, 겸직조차 사라지니... 원래도 왕의 비서실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그 경향이 더욱 심해졌지.

덩치는 분명 커졌는데, 조정부서와 왕 사이에 낀 어중간한 독립부서로 변했다고나 할까.

‘지금은 내 방식이 표준이 됐으니까.’

그는 속으로 실실 웃어댔다.

행정전문화와 독립화가 진행되면서, 이젠 책상에 모여 앉아 보고서를 펼쳐놓고 토의하는 게 일상이 되지 않았나.

이렇게 안 하고 예전처럼 대충 말로 논의하면, 다른 부서장은 서로 무슨 내용을 말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한다.

승정원에선 그 사전작업을 전부 담당하고 있을 거다.

‘아마. 저 안에선 인간복사기들이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겠지.’

보이지 않아도 부산스러움이 느껴지는 듯해서, 다시금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건 궁내원이라...’

낯선 명칭을 다시금 혀에 굴리며, 곱씹어 봤다.

이 시대는 궁녀의 조직과 체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했다. 그러니 공주가 연오랑과 혼인할 때, 자기 휘하의 궁녀를 다 데리고 나올 수 있었지.

원래 역사에서도 이맘때쯤. 세종은 내명부內命婦를 만들어서, 궁궐조직을 재정비 했다.

하지만... 지금 역사의 궁내원은 원래 역사의 내명부를 아득히 뛰어 넘는다.

궁궐에는 조정관리들 말고도 꽤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왕의 수족과 다름없는 내시, 환관. 왕족을 보필하는 시녀 겸 비서 역할을 하는 궁녀.

궁녀를 도와 청소, 빨래, 식사 등을 하는 무수리. 궁궐의 청소, 유지보수, 정원관리 등을 하는 공노비까지.

이들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지.

조선의 환관은 관직에 오를 수 없고, 중국의 환관처럼 권력이 강하지도 않으니 넘어가고.

문제가 생긴 건, 공노비였던 잡직관원이 전부 속량되어 정식관원이 되면서 부터다.

예컨대, 공조 속아문인 제거사의 경우. 궁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부서인데, 이 잡직관원을 진짜 관원으로 인정해줘야 할까?

과거시험이 변했긴 해도, 관리는 자고로 시험을 봐야 될 수 있는 거다. 그렇다고 빗질 하는 시험, 수레 끄는 시험을 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 논리라면 지방관아에서 허드레일하는 공노비도 전부 관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고, 확장해석하면 관기가 관리가 되는 해괴한 사태가 펼쳐지는 거지.

‘그건 조금 웃기긴 하겠다.’

연오랑은 기녀가 떵떵거리며 명령을 내리는 걸 상상하며, 속으로 웃고 말았다.

이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거니... 세종은 육조 속아문 중에서 궁궐과 관련이 있는 부서를 전부 뜯어내 분리시켜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궁내원.

왕족, 내시, 궁녀, 무수리, 기타 공노비들이 전부 포함되어, 조정과 분리된 독립조직이 만들어진 거지.

‘효율로 보면 나쁠 건 없고, 미래를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겠지.’

이렇게 정비된 궁내원은 궁궐을 관리할 인력을, 조정이 아닌 궁내원 자체적으로 선발해 뽑았다.

궁궐의 유지보수든, 궁녀들이 사고를 치든, 궁에 들어가는 식재료 및 일상품 조달이든. 조정이 떼어주는 예산을 어떻게 사용하든.

이제부턴 조정이 신경 쓸 필요 없이, 궁내원에서 자체적으로 굴리겠다는 거지.

궁내원에 속하는 공노비는 전부 속량되어, 머슴과 흡사한 사용인이 되었으니... 어쩌면 공기업 사원. 아니면 궁궐기업 사원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전국 관아의 공노비를 어떻게 처리할건지 보여주는 시범모델과 다름없다.

아마 재정적 여건이 충족되면, 지방관아의 공노비도 속량되어 돈 받고 일하는 공기업 관청사원처럼 변하지 않을까?

‘하지만... 감이 좋은 이들이라면,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연오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눈이 침잠해졌다.

행정적으로 보면 좋은 선택이고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속으로 깊게 들어가면 전혀 다른, 건들면 대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를 문제가 튀어나온다.

이건 조정과 왕, 왕실이 서로 거리를 두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으니까.

물론 긍정적인 측면은 확실히 있다.

궁내원이 자체적으로 돌아가면 조정신료들은 더 이상 왕실에 개입할 수도, 뒤로 수작을 부리는 짓도 불가능해진다.

외척? 권신? 간신? 이들 전부 왕의 권위를 빌려 위세를 부리는 거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할 수 없으니 꼼수를 쓰듯 왕실 사람들과 결탁해 조정을 흔들고 장악하는 거지.

허나 궁내원과 조정이 분리되면 이게 불가능해진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궁궐의 왕족이나 내관, 혹은 왕실 어른이 조정대신들과 결탁해 이리저리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게 되기나 하겠나.

왕과 세자를 제외한 왕족과 왕비는 이제 관직 및 관리들과는 엮일 일조차 없게 됐으니, 물밑에서 이리저리 관리들을 흔들 수도 없게 된 거지.

자리를 놓고 거래를 한다든가, 낙하산으로 꽂아달라는 청탁 등도 힘들어진다.

외척이 득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장난이 아니지.’

연오랑의 심상은 심해 속으로 더욱 가라앉아, 밑바닥을 훑어갔다.

이 시대는 왕이 곧 나라고, 나라가 곧 왕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 왕이 자기 마음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다면, 지금껏 양반사대부, 지방호족을 찍어 누르기 위해서 태종이 개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

여기에 운석핵꿀밤으로 인해, 왕의 근원이자 명분이 되었던 천명사상이 쪼개지고 박살났다.

유학적 논거에 의거하면 왕의 존재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초법적인 존재이고, 그래서 백성들을 다스릴 자격이 주어지는 거다.

하지만 이 논리가 통하지 않게 됐다면, 대체 왕은 왜 왕이 되는 걸까. 왕의 권한은 어디까지 일까. 왕이 먼저일까 법이 먼저일까.

왕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종묘를 치켜세우고, 사직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 또한 이와 관련이 있을 거다.

‘천명을 써먹을 순 없을 테니까 말이야.’

물론 왕이 없는 건 말도 안 되니, 지금껏 조선사상계가 분열을 거듭하고 자본유학을 받아들인 와중에도 별 탈 없이 굴러갔다.

백성들 대다수는 “왕이 있는 건 당연한 건데 왜 있는지를 왜 따져? 등 따듯하고 배부르게 먹고 살면 그만이지.”라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도 없을 거다.

관리들조차도 “음... 그렇다고 다른 수도 없고, 왕이 없으면 어쩌자고? 백성들을 관리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다는 일만으로도 바쁘다고.”라고 대충 회피하고 넘어갔겠지.

‘이걸 계속 파다보면 국민주권론, 입헌군주제로 발전하게 되겠지만... 세종 형이 여기까지 생각했을 것 같진 않고.’

아무리 세종이 천재라도 이건 무리다.

아마도 왕권강화를 위해 조정-왕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행정관료가 정치관료로 변질되는 걸 막기 위함이겠지.

그러면서 적당히 콩고물. 각 부서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던져줘서, 유학자들이 노래 부르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다른 식으로 이루려는 걸 테고.

‘어쩌면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한 포석을 까는 걸까?’

문뜩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 조선의 행정조직은 명나라의 행정조직과 확연히 달라서, 어떤 의미에선 현대 국가의 행정조직과 흡사하게 변해가고 있다.

진짜 관료제로서. 최상급자라고 한들 누구한명이 휘두를 수 없는, 나라의 부속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지.

육조에서 분화한 수십개의 부서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고 있고, 까놓고 말해서 왕이 태업을 감행해도 나라가 적당히 굴러갈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아마 세종도 자신의 후손들이 전부 영명하고 똑똑할 거라고 믿지 않을 거다.

미친 듯이 왕권만 강화해서 왕에게만 의존하게 만든다면... 언제가 됐건 삽질한번으로,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짐작하고 있겠지.

그러니 그 어떤 이도 왕권에 도전할 수 없게 만드는 한편, 반대로 그 왕이 헛짓거리를 해도 나라에 피해를 최소한으로 끼칠 수 있게 작업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모순적인 상황인데, 그 해답이 이건가?’

왕권의 강화와 조정의 독립성 강화는 상충하는 거니, 세종은 왕과 조정을 살짝 분리해서 꼼수 아닌 꼼수를 쓰려는 움직임처럼 보였다.

‘내수사를 정비한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일지도 모르겠어.’

상념은 확장되어 내수사로도 이어졌다.

흔히 말하는 암군이나 패군이 삽질하는 경우는 조정의 예산을 전용해 마구 써먹다가, 나라가 재정결핍에 시달려 휘청거리는 게 보통 아닌가.

사람을 마구 잡아 죽이거나 사이코패스적인 문제를 보이면, 유학적 기조가 남아 있는 조선에선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니까.

‘그러니 쓸데없이 조정예산을 까먹지 말고, 내수사와 궁내원 재산이나 까먹으라는 뜻 아닐까.’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고, 또 다른 상념이 끼어들었다.

‘더불어 궁내원과 내수사를 왕실이 장악하게 되면, 훗날 왕이 헛짓거리를 하더라도 왕실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뜻이겠지.’

종친부, 공친부와 같은 부서는 조정관직에서 사라졌고, 공신도 흔한 양반기업가로 격하시켜 왕실만 우뚝 서게 만들고 있지 않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