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챕터41. 확인하다 (8)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왕실에서 벌어진 일은 조정신료들이 끼어들 필요 없이 왕실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패도 내가 팰 테니까. 너흰 내말을 잘 들어라... 라는 건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똑똑한 세종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이윽고 상념을 끝마치고 걸음을 옮겼고, 새로 지은 국무회의실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다 왔으니 가 봐라.”
“옛!”
금군도 착호군 출신이라서 연오랑의 성격을 익히 아는 모양이다. 군말도 없이 재깍 경례를 하고선 사라졌다.
‘사람 많고만.’
확실히 예전과는 분위기가 다른 게 느껴진다.
국무회의실은 편전만큼이나 거대했고, 중앙회의실 옆에는 각 부서가 사용하는 부속실이 붙어 있었다.
저 안에선 하급관원들이 부서장에게 열심히 사정설명을 하고 있을 텐데... 몇몇은 느긋하게 건물 처마 밑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게 보였다.
‘궁궐에 벤치라... 뭔가 웃긴데 잘 어울리네.’
그는 다시금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등장하자 당연히 웅성거림이 시작됐고, 몇몇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댔다.
그와 엮인 이들은 너무 높거나, 아니면 아예 실무관리들이라서 모르는 사람이 태반 아닌가.
헌데 어째 그를 반기는 인물이 밖에 나와 있었다.
“형님!”
“대감!”
“어라? 네가 어쩐 일이냐? 현감은 또 어쩐 일이고?”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저 먼 북쪽 끝 창주에 있어야 할 공녕군 이인과 반대로 남쪽 끝 제주에 있어야 할 원길이 함께 있었다.
‘둘이 친분이 있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연오랑은 그런 생각을 잠깐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게 맞았는데, 사실 둘은 여기 와서 연오랑의 뒤담화를 하며 친해진 거였다.
“서로 아는 사이야?”
“흐흐. 형님이 하동에서 어렸을 때 어쨌는지 들었죠.”
“나야 그 때도 잘 나갔지.”
“뭐... 그런 것 같네요.”
이인은 빈정거리듯 히죽 웃었고, 연오랑의 싸늘한 눈빛을 받은 원길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원길은 아직까지도 제주도에 있었는데, 그 전에는 하동현감으로 있지 않았나. 그 누구보다도 연오랑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인물일 거다.
“살 많이 빠졌네? 제주 생활이 힘들었나봐?”
“예 뭐... 흐흐.”
하동 시절의 통통했던 현감은 사라지고, 이젠 나름 매서운 눈빛을 뿌리는 고관으로 변신해있다.
“아직 시간이 있는데, 형님도 앉으시죠.”
“오냐.”
이인은 나무 벤치를 탁탁 때리며 자리를 만들었고, 연오랑은 익숙하게 등을 기대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제주는 어떠냐? 잘 되고 있지? 애들 다 데리고 갔잖아?”
“그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마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제가 제2의 하동을 제주에 만들어 놨지요.”
“오...”
자신만만한 원길의 말에, 연오랑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과거. 원길이 제주목사로 부임할 때 하동의 기업가청년들을 왕창 데려가지 않았나. 연오랑에게 직접적으로 배운 녀석들이니, 보나마나 제주를 엄청나게 발전시켰을 거다.
“가호가 무려 3만호나 됩니다.”
“오...!”
‘엄청나잖아!’
확실히 원길이 자랑할 만했다.
원래 역사에서 이 시기의 제주도 인구는 대략 7만명. 1만호 정도쯤 됐고, 시간이 지날수록 살기 힘든 제주도에서 도망치면서 인구가 팍팍 줄어든다.
헌데 지금은 그 3배가 머문다는 뜻 아닌가.
“그렇게 많이 늘었어? 대체 어디서 온 거냐?”
“제주도는 원체 허허벌판이라서 개간만 하면 자기 땅이 생기지 않습니까. 왜관이 열리면서 거래하기 위해 들리는 상인들이 꽤 있는데, 그치들 중에서 이주하는 사람이 꽤 됩니다.”
“오...”
상인은 당연히 일꾼과 함께 움직일 터, 제주가 나름 살만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이 몰려들었나 보다.
지금 역사에선 양전사업으로 내지가 전부 뒤집어지면서, 이주를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됐으니까.
“하동출신도 꽤 넘어왔고, 수산기업을 하려는 이들도 넘어오고, 저 먼 북방의 여진과 몽골 귀화인도 넘어 왔습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몰라도, 제주가 전조 때에 목마장으로 써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나봅니다. 저 먼 설주에서 온 야인여진도 있죠.”
“이야...”
“흐흐. 그리고 일본과 중국 귀화인도 심심치 않게 넘어옵니다.”
“...?”
‘뭔 소리야?’
연오랑이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원길은 더욱더 혓바닥을 바삐 움직였다.
“그게 말입니다...”
제주의 무역관은 왜관뿐만 아니라 유구관, 대월관 등의 동남아시아의 상인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중국상인은 아직도 못 들어오고.
하지만 외국상선이라고 해도 한족 및 소수민족 선원이 속해 있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지. 이들은 원래 이렇게 무역을 해왔으니까.
문제는 상선의 선장과 선주들은 부자일지 몰라도, 말단 선원들은 부자가 아니라는 거다.
그들은 석회도로 및 잘 꾸며진 건물에, 번쩍번쩍하게 정비된 제주무역항을 보며 조선의 부유함을 몸으로 느꼈다.
그런 이들 중에서 인생 역전을 위해, 아예 가족까지 전부 데려와 조선에 귀화하겠다고 나타난 이들이 있었던 거지.
예전이나 원래 역사의 조선이라면 “아니. 골치 아프게 왜 거지 외국인이 와?”라고 기겁하며 거부했겠지만, 지금 역사의 조선은 왜인포로를 시작으로 해서, 귀화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데 거침없지 않나.
공짜노예를 부려먹는 방법에는 이제 도가 튼 거지.
이들이 첩자나 불순분자일 가능성도 있지만, 귀화교육당에서 구르다보면 적당히 걸러지기 마련.
그리고 조선의 상관은 외국인 자치권이 있는 게 아니라 연대병을 동원해 철저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조선의 비밀과 기술이 유출될 가능성도 없었다.
“그래도 문제가 있을 거 같은데... 조정에서 허락을 했다고?”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서 보통은 귀화인들을 내지로 보내고, 내지의 조선인을 대신 제주로 이주시키곤 했습니다.”
“오... 대단하네. 제주목사.”
연오랑은 원길을 다시 봤다는 듯,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며 뱃살을 쿡쿡 찔러댔다.
다만 확실히 살이 많이 빠져서 그런지, 옛날만큼의 손맛은 없었다.
“흐흐. 이제 제주목사가 아니라 제주부사입니다.”
“이야. 승진도 하고, 잘 나가는고만?”
“제주가 큰 것도 큰 거지만, 이제 목이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덕을 본 거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름 뿌듯한 모양인지, 원길은 나이도 잊고 헤실헤실 웃어댔다.
‘하긴 그 말도 맞긴 맞지.’
연오랑 또한 동감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지방행정조직은 상당히 복잡했다.
부,목,도호부,군,현으로 차등을 뒀는데, 이는 고려 때의 행정조직이 그대로 넘어왔기 때문.
도의 중심이나 인구가 많은 곳은 부로 만들어졌고, 군사적 요충지는 도호부로, 그 외에 전답과 가호 수에 맞춰 군,현으로 쪼갰는데 이는 고려 때의 천민거주지인 향,소,부곡을 현으로 정리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러한 행정조직은 상하관계가 존재해서, 사고를 친 현은 폐해서 합쳐버리거나 부나 목에서 사고가 터지면 현으로 강등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진짜 속내를 파고 들어가면, 역시나 재정적 요인이 때문이었지.
이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월경지越境地다.
지난날 조선의 지방재정은 지방이 알아서 충당해야했고, 이 때문에 비옥한 토지, 특산물이 많이 나는 지역 등을 자기 구역에 포함시키기 위해 눈치 싸움을 벌였다.
이러다보니 지리적 근접성 및 연관성과 관계없이, 다른 현 한참 너머에 위치한 땅이 같은 행정구역으로 묶이는 경우가 흔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양전사업을 통해 전답의 구획이 일정해졌고, 지방재정은 조정이 알아서 배정하니 돈줄을 찾을 필요도 없고, 군부가 창설되어 사단-연대로 이어지는 군주둔지가 곳곳에 자리 잡았고, 병농일치를 외치며 특수한 성격을 가지던 북방의 토관과 접경지역도 사라졌다.
그 결과. 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몇 개의 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현으로 통일된 거지.
진짜 중앙집권이라고 외칠 수 있는 쾌거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저야 불러서 왔습니다. 대감께서도 남주도 원정 때문에 오신 것 아닙니까?”
“어. 그런데 제주가 원정과 관계가 있나?”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진심인지 비밀인지 모르겠지만, 원길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어쩐 일이냐?”
“흐흐. 창주에서 사건이 크게 벌어졌죠.”
“...”
‘이건 또 뭔 소리야?’
연오랑은 뜻 모를 말에 눈을 가늘게 떴고, 이인은 계속해서 웃어댔다.
창주는 우랑카이 3위, 제왕부, 요동과 무역을 하느라 바쁠텐데, 거기에 사건이 터질 게 뭐가 있을까.
듣기로 드디어 성형요새로 설계된 창주성도 완성 돼서, 거긴 화포를 끌고 와도 쉽게 점령할 수 없는 요새로 변모했다.
사건이 터질 게 없는데, 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이인이 직접 여기까지 와야 했을까.
“뭔데. 말해봐.”
“흐흐. 비밀입니다. 회의실에서 들으시죠.”
“야. 인마. 알아야 미리미리 대처를 할 거 아냐.”
“형님이 대처할 것도 없을 걸요? 아마?”
“...”
‘원정과 관련된 건 아닌가보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대만원정과 상관없이 조정에 보고를 해야할 내용인가 보다.
손장난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
딱딱! 승정원 관리는 웬 나무토막 같은 걸로 소리를 내더니, 관원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회의가 시작된다고 알리는 모양이다.
“가자.”
“예.”
연오랑 또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관리를 따라갔다.
다들 한 아름씩 보고서를 들고 있고, 그만 빈손이라서 조금 머쓱했지만... 사실 그는 국무회의에 낄 자격도 없지 않나.
이번 원정에 대해서 개요만 듣고, 확인하면 끝이라서 따로 준비할 것도 없었다. 이미 필요한 사안은 군부와 조정에서 다 해놨을 거고, 그는 “이거 더 필요한데? 저건 없어도 되겠다.”라면서 손짓하면 끝이지.
‘호오... 잘 만들었는데?’
관리의 안내를 받아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연오랑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러댔다.
서서 회의하는 편전은 행사나 예식, 접대를 할 때 사용하는 곳이라서, 보통은 이곳에서 모든 업무가 처리되지 않나. 그 탓인지 벌써 사용한 흔적이 보였다.
놀라운 건 다른 거다.
사방 벽면에 창을 뚫어놓고 작은 유리창을 빼곡하게 박아놔서, 실내에 있는데도 실외에 있는 것처럼 밝았다.
‘유리를 벌써 상용화 했잖아? 우리가 한발 늦었네.’
연오랑은 판유리제작기법을 다른 연구소 및 공야사에 알려줬고, 중국 유리장인을 흡수한 연구소는 각자 독립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가장 실력 좋은 이들을 데려간 공야사답게, 이치들은 벌써 판유리를 만들어서 여기에 써먹은 모양이다.
아마 세종에게 가장 먼저 진상했을 테니, 가장 먼저 이곳 회의실에 써먹은 게 아닐까? 나중에는 편전에도 유리창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
세로로 긴 탁자의 양옆에 육조판서와 새롭게 만들어진 부서의 부서장들이 줄줄이 자리했고, 연오랑을 비롯해 꼽사리로 낀 이들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연오랑은 슬쩍슬쩍 눈인사를 날려댔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 섞여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오랑이 의도한 것이기도 했고, 착호군 소속이 아니고서야 조정관리가 그와 친분이 생길일도 없었으니까.
“...”
그의 묘한 눈초리에 따라 침묵이 자리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연오랑은 구경을 이어갔다.
‘황희. 저 영감은 농업부로 갔네?’
착호군의 활동은 드디어 끝이 다가오고 있었고, 이제 남은 곳은 황해도와 평안도 뿐.
전라도와 경상도의 양전사업을 끝낸 착호군을 하나로 합쳐서, 태종은 평양에서 머물며 착호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실업자가 된 황희는 어디로 가나 했더니, 농업부로 안착했다.
정승에서 부서장으로 내려온 거지만, 뭐 어쩌겠나. 이제 삼정승이 없는데.
대신 부서장 및 육조 판서의 품계를 높이고, 판서를 고려 때처럼 상서로 바꾸느니, 2품계에서 1품계로 높인다느니 말이 있는데...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 것 같았다.
이미 육부건 육조체계건 다 박살났으니, 명칭이야 어떻게 부르든 의미가 없지만... 품계를 올려서 부서장의 권한을 강화한다는 건 기정사실이었지.
‘황희라면 딱 맞는 자리긴 하지.’
농업을 목숨처럼 여기는 조선에서 지금껏 농업부가 없다는 게 웃기지만, 지금이라도 있으면 된 것 아닌가.
착호군을 지휘하며 수천만평의 땅을 갈아엎은 황희가, 농업부 책임자로 들어가는 건 꽤 합당한 인사 조치다.
‘산림부장은 누군지 모르겠네.’
그 옆에 앉아 있는 노인은 누군지 모르겠는데, 산림부라는 명패를 끼고 있었다.
산림부 또한 기존에는 있지도 않던 부서. 농업부와 겹치지 않나 싶은데...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조선은 땅, 해안가, 산을 전부 돈을 주고 팔았다. 당연히 산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도 벌어지고, 기존처럼 임산물을 아무나 가져다가 파는 상황도 아니다.
게다가 온갖 종류의 과수원. 뽕나무를 키우는 양잠기업. 나무를 벌목하는 제재기업. 버섯등을 키우는 농장. 무기로 쓰기 좋은 물푸레나무를 키우는 조병창등.
이젠 산이 그냥 산이 아니라 사업의 기반이 되었기에, 이걸 전답을 관리하는 농업부가 관여하기에는 일이 너무 커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