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챕터42. 개입하다 (1)
미리 준비를 해둔 모양이다.
이인은 벌떡 일어서서 회의탁자 옆으로 가서 서더니, 엉성하게 그린 지도족자를 펼치고선 손으로 집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명이 망하면서 북원은 기사회생했고, 영혼까지 끌어 모아 중국을 침공. 북원잔당은 섬서를, 오이라트는 한중을 집어삼켰다.
허나 더 이상 나아가질 못했고, 일단 숨을 고르면서 점령지 통치를 시작하며 눌러앉았지.
그러는 동안 요동의 우량카이 3위가 몽골초원 동쪽을 차지했고, 몽골초원에서 세력다툼이 벌어졌다.
헌데 이 싸움에서 도움을 줘야할 섬서의 몽골세력이 “여기 처리하기도 바빠.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며 미적거리자, 훌룬부이르를 장악하고 있던 아자이가 우량카이와 싸우며 영역을 넓혔다.
여기에 조선군이 뜬금없이 튀어나와 거용관을 박살냈고, 몽골초원 남쪽 항명출신 만호들이 중국북부를 침공하며 힘을 키웠지.
십여년이 지난 몽골의 판세는 한중의 오이라트. 섬서를 양분하고 있는 본아실리(부냐시리), 아로태(아룩타이).
몽골초원 북부와 중부를 손에 넣은 아다이(아자이).
이 모든 견제세력을 버텨내기 위해 결집한, 몽골초원 남부의 항명출신 만호들.
끝으로 옛 동방3왕가의 중심이었던 오왕부의 부활을 외치는 우량카이 3위가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동쪽은 아국과 중국으로 막혀 있으니, 이들이 힘을 키울 방법은 서쪽으로 가는 것이겠지요.”
이인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서쪽 공백지를 향해, 손가락을 옮겨갔다.
그렇게 섬서의 몽골족이 서쪽으로 나아가 중소유목민을 흡수해 힘을 키우자, 이에 반응한 아자이 또한 중부부족과 손을 잡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서쪽의 옛 동료들과 합류해, 시원하게 한바탕 하면서 휩쓸고 돌아왔다고 했다.
‘허...? 썩을.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연오랑은 넋이 나간 듯 혹은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대신들을 뒤로하고,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미 원래 역사와는 백만년쯤 멀어졌지만, 동아시아가 아닌 유럽에까지 여파가 끼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니까... 티무르 사후에 개판이 된 중동과 중앙아시아, 심지어 동유럽까지, 이 미친 말박이들이 가서 깽판을 치고 왔다는 이야기 아냐?’
“허면 그 색목인 노비라는 건, 어디서 온 것이오?”
“이곳. 대식국 위쪽에 위치한 출적 한국에서 온 이들입니다.”
“허...”
대식국은 대충 아랍, 출적 한국은 주치 칸국, 킵차크 칸국를 의미했는데, 이인의 말을 따르면...
‘진짜로 루스인을 끌고 온 거야? 지금?’
연오랑은 속으로 기겁하며 놀라고 말았다.
루스 공국. 키예프 루스라고도 불리는 이 소국들은 러시아 제국의 모태가 된 나라들이다.
지금은 몽골에게 두들겨 맞고 북쪽으로 쫓겨나서, 모스크바 공국이 중심이 되어 킵차크 칸국의 속국신세가 되어 있었지.
‘더럽게 먼 곳에서도 왔네.’
연오랑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혼자서 연신 머리를 굴려댔다.
‘이게 말이 되나 싶긴 한데... 또 말이 된단 말이지.’
지금 상황을 감당하기 쉽진 않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딱 지금. 우연인건지, 필연인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야 말로 비집고 들어가기에 딱 적기였어.’
일이 이렇게 꼬인 건. 티무르가 동서남북으로 다 두들겨 패고 다닌 것과 얻어맞은 나라들이 유목민족국가라는 점이다.
북쪽의 킵차크 칸국은 티무르에게 얻어맞고 칸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나 속국인 루스 공국의 거센 반격을 받았고.
서쪽의 오스만 제국도 티무르에게 맞고 내분이 터졌다가, 이제야 겨우 숨을 돌리며 수습하고 있고.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하는 동쪽의 모굴 칸국도 티무르에게 맞고 빈사상태가 되었다가, 다시 숨을 고르며 부활하고 있고.
힌두교를 믿는 남쪽의 인도는 이슬람교를 믿는 티무르에게 유독 심하게 갈려서 아직도 빈사상태였다.
헌데 이 모든 난장판을 만든 티무르 제국은 티무르 사후에 내분이 벌어졌고, 혼란은 진정되었으나 적당히 봉합한 수준에 그쳤다.
이렇듯 하나같이 죄다 내란이 터진 건, 형제상속을 따르는 유목민족의 관습 때문에 그랬던 거고.
‘그야말로 힘의 공백기에 제대로 치고 들어간 거지.’
원래 역사도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동방 몽골족이 끼어들었으니 오죽했겠나.
동방 몽골족은 모굴 칸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혼란을 정리했고, 이내 곧 티무르 제국을 피해 북서쪽으로 계속 나아갔고, 끝내는 킵차크 칸국의 칸과 손을 잡고 분란을 일으키던 적대세력과 루스 공국을 작살냈다.
수만리를 넘어 조선까지 오게 된 루스인들은, 이 과정에서 포로로 잡힌 거지.
“헌데...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몽골부족이, 이번에는 하나로 힘을 합쳤다는 건가?”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건가?”
“우리 입장에선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몽골부족이 싸웠다가 합쳐지는 게 하루이틀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득 앞에서는 어제의 적과도 손을 잡는 게 몽골부족입니다.”
대신들은 앞뒤가 안 맞는 몽골부족의 움직임에 의문을 표했지만, 숱하게 겪어본 이인은 간단하고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생필품을 자체 조달하기 힘든 유목민족은, 생존을 위한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다.
약탈을 하거나, 거래를 하거나.
이런 특징은 나라간의 관계에도 나타나는데, 수틀리면 문을 걸어 잠그는 조선과 달리 몽골은 앞에선 싸우면서 뒤에선 장사를 하는 이들인 거지.
그러니 서방원정이라는 더 큰 이득 앞에서 다 같이 손을 잡는 건, 조선이 보기엔 이상해도 이들에겐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노비 거래는 이번이 끝이다고 했더냐? 아니면 계속 하겠다고 하더냐.”
“아국이 원한다면 계속 한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계속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음...”
세종의 말에 모두는 잠시 침묵에 잠겼고... 이내 침묵을 만든 당사자가 얼음을 깨듯 침묵을 깨트렸다.
“비단길. 초원길이 다시 부활했다는 말이군.”
“...!”
“허허...”
“음...!”
자문자답한 세종의 발언에, 대신들 모두 헛기침을 집어삼켰다.
고려의 기억이 남아 있는 대신들인데 초원길을 모를 리가 있나.
몽골제국이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섰을 때도 유지됐던 게 초원길이고, 동쪽의 마지막 종착지가 고려였다.
이번 사건의 주요점은 루스인 포로가 왔다는 게 아니라, 조각났던 초원길이 이번 일을 계기로 합쳐졌다는 거지.
“맞습니다. 몽골계 후예들이 멀쩡히 남아 있는데 초원길이 없어졌겠습니까. 명이 들어서면서 잠시 막혔던 것뿐이지, 없어진 건 아니었죠.”
“...”
“용연군 대감께서, 그걸 증명하기도 했고요.”
“...?”
다들 무슨 뜻인지 몰라 연오랑을 바라봤고, 눈을 찌푸리고 있는 그를 대신해 세종이 친히 대신 답을 했다.
“한혈마를 말하는 거군.”
“그렇습니다. 전하.”
“아...!”
“하긴.”
그제야 다들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감탄을 흘려댔다.
연오랑은 십수년 전부터 산동, 요동상인을 통해 한혈마를 들여왔고, 몽골이 섬서를 점령하자 우량카이 3위를 통해 거래했고, 조선이 북방을 차지하고부턴 제왕부와 북원잔당을 통해 한혈마를 수입했다.
이 때문에 그의 목마장에는 오십여필의 한혈마 종마가 살고 있었고, 미래의 은퇴한 경주마마냥 녀석들은 주지육림을 즐기며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말인 즉. 동쪽으로의 초원길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인해 서쪽으로의 길 또한 완전히 연결된 거지.
“어쩌면 아국 때문일 수도 있겠군. 특히나 아다이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끼어든걸 보면...”
“그렇습니다.”
세종은 행간을 읽고 그리 말을 했고, 이인은 곧장 맞장구를 쳤다.
초원길은 동서양의 무역로인데, 명이 있을 시절에는 동쪽에서 무역품이 출발을 안했지 않나.
헌데 조선이 북원잔당과 직접 맞닿고, 중국을 대신해 거래를 시작하자 꺼진 불길이 다시 피어오른 거지.
“그리고... 이제부턴 아국이 끼어들지 않아도, 결국 초원길을 부활하겠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비록 섬서가 낙후되고 생산력이 떨어졌다고는 허나, 그래도 중국의 일부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특산품만으로도 몽골은 초원길을 되살릴 수 있을 겁니다.”
“음...”
“흐음.”
다들 머리를 열심히 굴려가며, 미래를 예측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아귀가 맞네. 루스인 포로를 왜 이 먼 곳까지 끌고 왔는지 이해가 돼.’
연오랑 또한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초원길이 열린 이상, 조선물산은 중국 물산을 대체하고도 남는다. 또한 그냥 가만히 있다가는 섬서 몽골일파만 꿀을 빨고, 몽골초원일파는 손가락만 빨며 구경해야할 판국 아닌가.
어떻게든 끼어들어서 조선의 물산을 가져다가 팔아야, 섬서 몽골일파를 견제하고 스스로를 살찌울 수 있다.
문제는 조선물산이 넘쳐나도 그걸 살 돈이 없다는 것.
기껏해야 말을 비롯한 가축을 파는 것뿐이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왔지 않나. 허나 초원길 무역로를 이용하려면, 자기들이 먹고살 물건을 구입하는 것으로는 턱도 없다.
“그래서... 아국 물산을 구입할 대금으로 색목인 노비를 제안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아국의 가호를 늘리려는 측면에서 색목인 노비를 받아들이는 건 나쁘지 않으나,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정확히 알 수 없어도, 못해도 수만리는 떨어져 있는 곳에 사는 색목인들 아닙니까. 그들을 얼마나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 색목인들도 결국엔 포로로 잡혀오는 이들이 태반일 텐데,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
대신들도 이제 감을 잡았는지, 이런저런 의견을 토해냈다.
‘다 맞는 말이긴 한데... 우리나 몽골이나 그걸 따지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연오랑은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번에 만들어진 초원길은 기존과는 살짝 다르다.
기존의 초원길은 동로마로 향했으니 티무르 제국 영역을 거쳐 갔겠지만, 지금의 초원길은 킵차크 칸국을 거쳐 간다.
즉. 킵차크 칸국 서쪽에 위치한 리투아니아, 폴란드, 신성로마제국을 거쳐 서유럽으로 곧장 이어지는 거지.
이 시기의 리투아니아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어서, 우크라이나 지역을 거의 다 장악하고 있을 테니까.
‘이 말인 즉... 몽골계가 포로로 대금을 내려고 마음먹었다면, 두들겨 팰 곳은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뭉친 루스 공국 밖에 없다는 말이잖아?’
동쪽은 동업자, 남쪽은 무서운 티무르 제국, 서쪽은 구매자다.
킵차크 칸국이 뜯어낼 곳은 당연히 북쪽 밖에 없고, 북쪽의 루스 공국은 안 그래도 속국 주제에 덤비던 놈들 아닌가.
‘보나마나 사정없이 밟아댈 테고, 초원길이라는 새로운 돈줄이 생긴 이상 루스 공국이 바치는 공물은 신경도 안 쓸 거란 말이지.’
“문제 아닌 문제라면, 과연 몇이나 살아서 도착할지 의문이군.”
“...”
“그렇습니다.”
연오랑의 혼잣말이 꽤 컸던 걸까? 대신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멀어도 너무 멀지 않나. 100명이 출발하면 50명이나 도착하면 다행일 거다.
“하오나...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신경 쓸 부분도 아니고 말입니다.”
“음...”
“하긴.”
이인의 냉정한 말에, 또 다시 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팔랑귀도 아니고... 일이 너무 거창하다보니 중심을 못 잡고 왔다갔다하는 모양이다.
‘노예무역을 하겠다는 건데...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군.’
연오랑은 대신들의 반응을 보며 이런 생각이 무심코 떠올랐다.
‘하긴 노비가 노예인데, 다를 게 있나.’
조선인 노비를 사고파는 거나 색목인 노예를 사오는 거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게다가 사와서 노비로 부려 먹는 것도 아니고, 교육시켜서 양인으로 만들 것 아닌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건, 연오랑 밖에 없을 거다.
혼자 피식피식 웃으며 잠시 머리를 더 굴려보니... 아자이가 하는 짓이 마냥 헛짓거리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꽤 많이 들어올지도 모르겠어.’
이 시대엔 노예무역을 어디든 다 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은 카톨릭교도를 유럽 국가는 이슬람교도를 노예로 마구 팔아먹고 있고, 그 노예들은 인도로 흘러들어가서 동남아시아까지 넘어간다.
당연히 티무르제국이나 몽골계 칸국도 마찬가지일 거고.
자기만의 노예판매 루트가 있을 테니... 루스인을 끌고 온다고 치면, 징검다리를 건너듯 노예상을 거치고 거쳐 조선까지 오게 되겠지.
‘식량 값이 장난이 아니니까 노예값도 비싸지겠지만... 그래봐야 얼마나 되겠어. 사람 한둘 죽는 건 신경도 안 쓸 거야.’
“그래서 이야기를 나눈 결과. 성인 한 명당 도자기 하나면 충분할 걸로 입을 맞췄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인은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역시나 이 부분에 있어서 아자이와 합의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몽골 입장에선 최대한 많이 데려와야 그만큼 조선물건을 많이 사갈 수 있을 테니, 어떻게든 온전히 데려올 방안을 궁리했을 거고.
“흐음... 중요한 건 우리의 의사가 아니군.”
“...?”
그런데... 세종이 뜬금없는 말을 하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국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대로 놔두면 몽골의 균형이 깨진다는 말이다.”
“음... 아!”
“그렇군!”
세종의 뜻 모를 말을 더듬어가자, 대신들은 하나둘씩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조선만 보면 보이지 않던 맹점이, 몽골을 중심으로 보자 확연히 드러난다.
“섬서 몽골일파가... 너무 커지겠군요.”
“그렇지.”
세종이 추임새를 넣자, 대신들의 목청은 더욱더 커져갔다.
서안(장안)이 오랜 세월 중국왕조의 수도로 활약했다지만 지금은 쇠락한지 오래고, 섬서는 땅은 넓어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헌데 섬서 몽골일파가 색목인을 마구 들여온다면? 인구가 곧 국력이고, 노동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