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챕터42. 개입하다 (3)
이 때문에 일본은 꾸준히 조선에게 전처럼 동래에 왜관을 더 열어주면 좋겠다고 읍소를 해왔다. 물론 조선은 사신을 한성으로 불러들이지도 않고, 대충 알았다고 하고 무시했고.
이는 조선이 제주를 통해 일본에 목줄을 걸어 통제하려는 계획이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너무 잘 먹혔다.
개혁으로 인해 조선제품이 중국제품의 질을 엇비슷하게 따라잡은 건 물론이고, 가죽제품과 같은 북방무역품에 있어서는 중국을 뛰어넘지 않았나.
“중국이 있으니 이젠 너희 필요 없어!”라며, 객기를 부릴 상황이 아니게 된 거지.
해서 막부나 다이묘나 조선의 말을 너무 잘 듣게 됐고, 그들의 요청을 마냥 무시하는 건 힘들어지면서 다른 방책이 필요하게 된 것.
이 방책은 나름 혁신적인데, 조선이 직접 일본으로 진출해 무역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겸사겸사 은행도 진출하고.
“또한 아국이 귀화인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구주의 대명(다이묘)들이 알게 모르게 아국으로 일본 백성들을 넘기기 시작했소이다.”
“허...?”
“음.”
심상치 않은 이야기에 다들 귀를 기울였다.
역시나 이 안건을 꺼낸 건 인구증가와 관련이 있나보다.
“확인을 해보니 대부분 땅을 잃고 밀려난 농부들과, 강남과의 무역이 활성화되자 다른 국(구니)에서 넘어온 빈민과 무사 출신이었소.”
“사람이 몰려 많아지니 경쟁에 치여 빈민이 되거나, 빈한한 선원으로 생활했고... 그런 이들 중에서 제주의 번화함에 혹해서 아국으로 귀화를 결심한 이들이 많았다는 뜻이지요?”
“그렇소이다.”
“구주의 대명들은 빈민을 처리할 생각으로, 오히려 아국으로 귀화하는 걸 장려했겠지요?”
“맞소이다.”
이예는 흡사 만담을 하듯 대화를 이어갔고, 다들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머릿속에 그려봤다.
‘청도와 상해에서 벌어졌던 일의 복사판이잖아? 다만 일본은 신분제의 제약이 심하니, 더욱 불길이 붙었겠지.’
이미 겪어본 일 아닌가.
사람이 많으면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만, 그만큼 사람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해야하는 잡다한 비용이 증가한다.
산동과 절강의 호족들은 청도와 상해를 건설할 때. “잘됐구나. 거지새끼들을 쫓아내라!”라면서 무역도시의 빈민을 죄다 몰아줬었지.
보나마나 일본 영주도 똑같은 마음일거다.
영지는 한정적이고 이제 막 이앙법을 시작했을 테니, 농지도 한정적.
게다가 이 시기의 일본은 중세유럽과 거의 흡사한 봉건제를 유지하고 있다.
조선으로부터 선진문물이자 고가귀중품들이 들어오니, 귀족이나 마찬가지인 영주들은 사치하기도 바쁜 판국에 거지떼들을 신경 쓸 생각도 없을 거다.
그 밑에서 영주를 보필하는 무사집단도 마찬가지.
이 시기엔 유럽의 장원기사처럼, 일본 무사도 일정한 토지를 소유하고 영주의 밑에서 치안 및 군사활동에 협력했다.
이들은 농지와 소작농이 곧 재산이며 기반인데, 어중이떠중이 떠돌이들이 자기 앞마당을 오가는 게 신경 쓰였겠지.
영주의 무사장원만 있겠나.
영주 직영지, 자영농지, 막부 직영지, 승려가 소유한 토지, 월경지등이 다 섞여 있을 테니... 고려나 조선보다 토지관계가 복잡할 거다.
‘이게 끝이 아니지. 조선과 달리 상업세력과 농업세력이 바로 맞붙은 꼴이잖아?’
이 또한 운석핵꿀밤의 여파로, 원래 역사와는 전혀 다른 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이 집중되면 집중될수록, 사회가 급격하게 혼란해지고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도시화 현상이 가속화되면 지금의 일본 행정,정치체제로는 감당하기가 힘들어질 테니,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세력과 농지를 기반으로 한 무사간의 대립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바.
그 위에 있는 영주는 무역을 통해 돈을 벌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칼이 되어주는 무사들을 다독이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거다.
일본은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사농공상. 아니 무武농공상의 극명한 차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상인과 공인을 낮게 보는 건 마찬가지니까.
‘헌데 그 해결책이 조선이 되어주겠다는 말이군?’
이러니 연오랑 입장에서 퍽 재밌게 느껴질 수밖에.
몽골에 이어 일본에도 조선이 자본과 무역품이라는 독을 뿌리는 건데, 과연 이걸 거부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결론은 귀화인을 받아들을 속내로 일본에 진출하고, 영주를 옭아매기 위해 은행을 세우겠다는 뜻입니까? 허면 어떤 식으로 진행됩니까? 은행은 아국 내에서도 아직 세우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맞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은행을 세우는 건 중국호족과 일본대명의 자본과 토지를 아국이 일부나마 소유하는 건데, 아국의 재정과 합쳐지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전조 때를 생각해 보시지요.”
이예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허조를 향해 맹렬한 반격이 날아들었다.
하나하나가 일리 있는 반론이다.
특히나 고려 때에 원나라의 경제와 하나가 됐다가 피똥을 쌌던 경험이 생생하니, 조선이 다른 나라와 돈으로 엮이는 걸 경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허나 허조도 고려 때의 인물. 우려하는 바가 뭔지 모를 리가 없고, 그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 놨다.
그는 세종과 슬쩍 눈을 마주치고선, 앞으로의 은행 운영에 대해 풀기 시작했다.
“은행을 어떤 식으로 운영하느냐... 일단 은행을 두 개로 분리할 생각이외다. 하나는 조선내지의 백성들이 이용하는 조선은행, 다른 하나는 기업과 외국호족이 이용하는 조선왕실은행.”
“음...?”
“흠.”
다들 가인가미인가하자, 허조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물론 둘 모두 보유금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을 계획이오. 다만 은행금고에 은,금이 쌓이는 추세를 볼 때, 올해 말이면 조선왕실은행은 문을 열 수 있을 거외다.”
‘왕실은행이라... 생각보다 꽤 잘 만들었는데?’
연오랑은 허조의 말을 들으며 세종의 눈치를 슬쩍 살폈고, 세종은 말없이 들으며 고개를 까닥거리고 있었다.
조선왕실이라는 이름값이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니, 외국을 압박할 때는 그 무엇보다도 유용하다. 아무리 나라가 달라도, 왕실의 돈을 떼어먹진 않을 것 아닌가.
실제로는 왕실이 소유하는 건 아니지만, 외국에서 볼 때 조선왕실이 곧 조선이니 차이를 느끼지도 못할 거고.
‘미래의 산업, 기업, 수출입은행이 다 섞인 거라고 보면 되겠네. 뿌듯하고만.’
은행과 금융은 연오랑이 세종에게 알려준 내용 아닌가.
세종은 그걸 지금 현실에 맞게 잘 버무려서 은행을 만든 것 같았다.
“그래서 조선왕실은행과 조선은행은...”
다들 무의미한 성토는 관두고, 허조의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조선이 은행을 만드는 궁극적인 목적은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려면 지금 시중에 돌고 있는 쌀과 면포를 전부 주화로 바꿔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엄청난 양의 보유금이 필요했고, 조폐부 및 은행이 전국의 공창을 관리할 수밖에 없다.
그 외에 사채억제나 기업 및 호족이 집안에 꿍쳐놓을 자본을 은행으로 빨아들이는 계획은, 화폐유통에 비하면 부차적인 일이고.
문제는 외국자본이 조선은행에 흘러오면, 이 과정이 헝클어지고 복잡해질게 분명한 일.
해서 조선국내에 도는 돈과 외국에서 도는 돈을 분리하려는 거지.
‘고려 때 심하게 당한 게 있으니까,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묶이는 건 막아야겠지. 특히나 중국은 더욱 그렇고.’
연오랑은 충분히 대신들의 마음이 이해가 됐고, 실제로도 그가 강력히 나서서 주장한 내용이기도 했다.
“또한 조선왕실은행은 앞으로 만들어진 아국주화를 사용하지 않고, 전표를 활용할 계획이외다.”
“전표라...”
“흐음. 그러면 확실히 다행이긴 할 텐데...”
전장의 개념이 조선에 들어온 게 몇 년 전인데, 대신들이 그걸 모를 리가 있나.
다들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느껴졌다.
‘맞는 말이지. 조선의 주화가 무제한적으로 외국에 풀리면... 감당 못할 거야.’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의 손이 닿아 있는 조선주화는 이 시대 기준으로 보면, 예술품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견고하고 정교하다.
규격화로 인해 통일성이 있는 건 당연한 말이고.
이런 은화, 금화가 중국에 풀린다면, 각기 다른 민간 주제소에서 만든 마제은이 남아나겠는가.
거래할 때마다 무게와 은품위를 확인해야하는 귀찮은 마제은을 조선은화로 대체하려 할 게 분명했다.
문제는 중국이 커도 너무 크다는 점.
조선은화가 기축통화가 되는 건 나쁠 게 없지만... 남미에서 뽑아온 스페인 은화와 일본의 은을 다 빨아먹고도 부족해서 헉헉거리던 게 중국인데, 이 시기의 조선이 이걸 어떻게 감당하겠나.
조선주화가 외국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고, 그 대안책으로 나온 게 무역전표라는 거지.
“무역전표라...”
“그렇소이다. 조선왕실은행이 발행하는 이 무역전표는 오롯이 의주,제주,창주,조차지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물건으로 주화가 아닌 현물을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이 될 것이외다.”
‘흐흐. 곧잘 써먹는고만?’
연오랑은 속으로 실실 웃어댔다.
저것도 그의 아이디어로, 무역전표는 미래의 상품권이나 신용장과 비슷한 물건이었으니까.
지금 조선의 무역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꽤나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공무역과 사무역이 섞여 있다고 할까.
무역관은 조선상인과 외국상인이 자유롭게 거래하는 장소로, 둘 모두 무역관원의 입회하에 거래를 진행했다. 당연히 현물거래였지.
문제는 이게 생각보다 엄청 번거로웠던 것.
예를 들어. 중국 미곡상이 조선 가죽상과 거래하고 싶은데, 가죽상은 미곡이 필요 없다. 대신 비단이 필요했지.
이런 경우 미곡상은 중국 비단상인과 직접 미곡을 교환하거나, 아니면 중국 비단상을 가죽상에게 소개시켜주고 미곡으로 계산하는 삼각거래를 해야 했다.
만약 이게 잘 안된다면, 원하는 물건을 가진 상인끼리 서로 연합해서 다 같이 거래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러니 무역관은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고, 다들 짜투리로 남은 물품을 어떻게든 팔아넘기기 위해서 서로의 상점을 들쑤시고 다녀야 했지.
거래가 빨리빨리 진행되지 않는 건 당연한 말이고.
“하지만 앞으로는 은행이 둘 모두를 중간에서 관할할 것이외다. 그리고 물품대금은 현물이 아닌 무역전표로 대신하겠지요.”
“음...”
“확실히 그러면 편하긴 편하겠군요.”
똑똑한 대신들답게, 허조가 하는 말을 곧장 이해했다.
앞으로는 은행이 플랫폼이자 물류창고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
외국상인이 가져온 물건을 은행이 전부 사들인 후에 그 대가로 무역전표를 발행하고, 외국상인은 무역전표를 가지고 조선상인에게서 물건을 산다.
그리고 조선상인은 다시 무역전표를 들고 은행을 찾아와서, 은행이 가지고 있는 외국물품으로 교환해 가는 거지.
“그런 방식이면 아국의 주화가 외국으로 빠져나가지 않겠군요.”
“그런 것 같네. 어찌됐건 현물교환이고 그걸 은행이 중간에 껴서 편하게 해주는 거니까.”
“단순히 편리하기만 하겠습니까. 조세부 입장에선 적극 환영할 일입니다. 관세를 걷기 쉬워질 테니 말입니다.”
외국상인에게 무역전표를 발행할 때 관세를 한번 걷고, 무역전표를 조선상인에게서 회수할 때 또 한번 걷으면 간단하지 않나.
지금처럼 상인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에 비하면,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없다.
“또한 무역전표는 사용기간을 명시해 둘 것이고, 각 무역관에서만 거래를 허가할 것이며, 사용기간을 늘리거나 무기명전표를 발행하는 경우에는 추가금을 받을 계획이외다.”
‘오...? 수수료 개념을 그렇게 써먹는단 말이지?’
연오랑은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봤고, 대신들은 허조가 말한 내용을 곰곰이 곱씹다가... 다들 하나같이 반색하며 웃어댔다.
“허허.”
“하하. 묘수입니다.”
“어떤 경우든 아국이 손해를 볼 일은 없겠군요.”
“그럴 겁니다. 지금처럼 물물교환을 하는 것보다 무역전표를 활용하는 게 훨씬 빠르고 편할 테니, 거부하긴 힘들지 않겠습니까.”
대신들은 반색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토해냈다.
사용기간을 명시해 두면 어떻게든 그 기간 내에 사용을 해야 하니, 빠른 거래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만약 기간이 지나버리면 그 물건은 은행의 소유가 되어버릴 테니까.
각 무역관을 구별하는 것도 묘수다.
하나로 통합해서 운용하는 게 효율적이겠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행정적으론 오히려 과부하가 걸리기 마련.
또한 각 무역항으로 어쩔 수 없이 외국상인이 찾아오게 될 터. 무역항을 활성화시켜 조선내지의 유통망을 강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무기명전표란 말이지...? 꽤 재밌는 생각을 했는데?’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세종과 허조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말았다.
전표와 물표는 세트로 이뤄져 있고, 본인이 아니면 사용할 수가 없다. 헌데 무기명전표는 물표 없이 전표만 있어서 아무나 사용할 수 있다.
‘주화를 유통할 수 없으니, 전표를 통화처럼 사용하겠다는 거군?’
만약 계획대로 된다면, 외국상인이 전표만 받아가서 이걸 대금 대용으로 써먹지 않겠나.
사용기간을 늘린 무기명전표는 미래의 수표나 채권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발휘할 테니까.
‘이러면 의주, 제주, 조차지의 무역전표를 서로 교환하려는 이들이 분명 나오겠지.’
보나마나 외국상인들은 웃돈을 받고 서로 팔아먹을 텐데, 그게 조선과 상관있나. 어찌됐건 무역전표가 외국상계에 확실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다.
‘사용기간이 정해져 있으니 어찌됐건 써야 되는 물건이잖아? 과거의 종이돈인 저화나 교초, 보초의 문제점이 발생할 일도 없겠지.’
꽤나 재밌는 생각이라서 미소가 절로 지어졌고, 허조에게 반대하던 이들도 납득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