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챕터42. 개입하다 (4)
“이렇게 무역전표 거래가 진행되면, 동시에 은행 본연의 역할도 하게 될 것이외다. 대신 왕실은행은 보관료를 받는 게 아니라, 작게나마 이자를 지급할 생각이외다.”
“음...?”
“뭔가 거꾸로 된 거 아니요? 어째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허조의 엉뚱한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아. 좋아. 공격적으로 나아가야지. 대신 대출 이자는 세게 받으면 될 테고.’
다만 연오랑 홀로 속으로 히죽히죽 웃어댔다.
미래의 은행은 예금이자를 주는 게 당연하지만, 이 시대는 거꾸로 보관료를 받는 게 보편적이다.
그러니 대신들이 의아한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 그리고 이건 외국호족이나 상인도 마찬가지일 것 아닌가.
무려 조선왕실이 보증을 하는 전장이, 보관을 해주면서 이자까지 준다? 혹하는 게 당연한 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민간 전장에 맡기는 것보단, 조차지의 조선왕실은행에 맡기는 게 더 안전할 수 있는 거지.
만약 이렇게 되어 조선왕실은행이 중국의 전장과 마찬가지로 대출업무를 겸하게 된다? 그럼 중국호족의 목줄을 조선이 쥐게 되는 거다.
‘게다가 중국뿐이겠어? 몽골과 일본 지주호족의 재산을 은행에 보관하면...’
연오랑은 등줄기로 번쩍 번개가 내리치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아자이와 제왕부, 우량카이 3위가 직접 왕실은행에 자신의 재산을 보관하면 어찌되겠는가.
죽었다 깨나도 조선을 공격할 생각은 꿈도 못 꾼다. 자기 재산을 자기가 날려버리는 꼴이 될 테니까.
일본 영주도 마찬가지.
전국시대가 벌어지려면 아직도 수십년이나 남았으니 일단 뒤로 미뤄놓고, 만약 지금부터 왕실은행이 영주의 재산을 보관하기 시작하면 어찌될까.
원래 역사처럼 임진왜란을 일으키거나, 조선을 공격한다는 생각은 꿈도 못 꾼다.
‘전쟁이 일어나면 은행 문 닫고 자기돈 다 빼앗기는데, 그걸 감내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자기도 모르게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몽골과 일본 호족들도 이걸 모르진 않겠지만... 지금은 조선과 싸울 분위기가 전혀 아니지 않나.
분명 꽤나 탐스러운 제안이 될 거다.
‘독이 든 사과인데... 어찌됐건 사과는 사과란 말이지.’
그는 계속해서 속으로 웃어댔다. 뭐가 됐든 조선이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음... 하지만 외국자본이 너무 많이 들어오면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모두가 음험한 속내를 품고 한 번에 출금하면 문제가 생길 텐데요?”
“그에 대해서도 대안이 있소이다. 한 번에 출금할 수 있는 한도액수와 출금하면 일정기간 후에 다시 출금할 수 있게 정해놓을 것이고, 출금액이 크면 클수록 환급세도 높게 받을 생각이외다. 끝으로 기준치 이하까지 출금하면, 왕실은행과의 거래를 금지할 것이오.”
“음...”
“그 정도라면...”
다들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긍정적으로만 봐서 그렇지, 외국 은행에 쉽게 돈을 맡길 리가 있나.
동아시아가 개판이 된 터라 가능한 일이고, 생각만큼 예금을 안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아무리 출금을 많이 한들, 보유금을 미친 듯이 쟁여놓으면 문제없겠지.’
애초에 이럴 생각으로 꾸준히 은,금을 빨아들이고 있지 않나. 은행이 문을 열더라도 이 기조는 바뀔 생각이 없다.
‘게다가 한 번에 인출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거야.’
연오랑은 이중삼중으로 쳐있는 그물을 보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왕실은행은 단순히 돈만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무역거래소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여기서 돈을 뺀다는 건, 앞으로 조선과 거래를 안 하겠다는 건데... 애초에 왕실은행에 돈을 맡길만한 이들은 상인과 무역도시의 호족들 아닌가.
이들은 무역 안하면 망하는데, 조선과의 끈을 쉽게 놓을 리가 없다.
‘결국 평화를 담보로 이뤄진 거래인데... 이게 될 것 같단 말이지.’
연오랑은 결국 자화자찬을 하고 말았다.
조선이 사방을 다 두들겨 패놔서, 이렇게 말을 잘 듣게 된 것 아닌가. 자기가 생각해도 뿌듯할 수밖에 없고, 조선이 이제 외국자본을 받아들일 정도로 부자가 됐다는 것에 가슴이 떨려온다.
‘다만... 창주가 살짝 걸리는 군.’
머리를 계속 굴려보는데... 희망찬 미래에 슬쩍 먹구름이 끼는 것 같다.
무역전표의 발행이 루스인 포로를 끌고 오는 일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이런 우려가 잠시 들었으나, 생각을 거듭하니 문제가 크진 않을 것 같다.
‘아무리 무역전표가 있어도 결국은 창주를 거칠 수밖에 없어.’
저 먼 킵차크 칸국에 조선왕실은행 지점이 있으면 모를까. 지금은 창주로 향하는 일방통행 아닌가.
루스인 포로를 끌고 오든, 무역전표를 달랑 들고 오든, 결국에는 창주에서 조선물품을 사서 되돌아가는 거니까.
‘다만... 몽골초원에선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겠는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우량카이 3위와 제왕부가 대흥안령 산맥을 기준으로 창주로 오는 영역을 다 차지하고 있지만, 적대세력이 아니면 대충 대가를 주고 오갈 수 있지 않나.
그게 아니더라도 몰래몰래 오갈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 무역전표는 곧 돈이나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게 될 터... 어쩌면 이걸 노리는 약탈꾼이 창궐할 지도 모르겠다.
‘그건 오히려 조선에 나쁠 게 없겠는데?’
다툼이 치열해지면 결국 비빌 언덕을 찾기 마련. 그런데 아무도 못 건드는 조선이 딱 버티고 있다.
이곳에 미리미리 돈을 맡겨놓으면, 부족 간의 다툼으로 망하더라도 뒤를 도모할 최후의 수단이 되지 않겠는가.
더욱더 조선을 건들 세력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거다.
“은행에 대해선 알겠습니다. 허면, 일본의 어디에 진출한다는 말입니까? 또 조차지를 만드는 겁니까? 아니면 왜관... 아니군요. 조선관이라고 해야 합니까? 어쨌든 그 무역항은 어떻게 구성할 생각이십니까.”
누군가의 날카로운 물음은 허조를 넘어 이예에게 날아갔다.
허나 역시나 준비를 단단히 해왔는지, 이예는 세종의 허락을 득하고선 이인과 마찬가지의 지도족자를 꺼내 앞에 펼쳤다.
“오...”
“호오?”
모두가 하나같이 감탄을 내뱉었고.
‘이야? 이거 봐라?’
연오랑조차 눈을 끔뻑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대마도를 작살낸 후로는 일본에 관심을 끄고 살았는데, 일본통인 이예와 외교무역부 관리들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족자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일본 전도가 어설프게나마 그려져 있었으니까.
“일본이 저렇게 컸습니까?”
“이건... 아국 내지보다 더 크지 않습니까?”
다들 하나같이 놀라서 탄성을 질러댔고, 이예는 한방 먹여서 기쁘다는 듯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 시대의 조선인들은 일본에 갈 일도 없는데, 일본 지역에 대해 뭐 얼마나 알겠는가.
원래 역사에서도 통신사는 수십년에 한번쯤 보낼 정도로 관심이 없었고, 흔히 말하는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에도막부가 들어서고 나서부터 활성화 된 거다.
그 전에는 조선통신사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냥 통신사라고 불렀고.
지금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마도 문제를 놓고 소규모 사절단을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한두번 보낸 게 끝.
‘그런데 이렇게 거창하게 준비를 해놨단 말이지? 해군이 고생을 했겠는데?’
연오랑은 흥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간의 노력에 격려를 표했다.
지도는 일본 내부는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외각의 해안지방은 제대로 표시되어 있었다.
저게 뭘 뜻하겠는가.
해군이 직접 배를 몰고 가서, 측량을 하면서 해도를 작성했다는 거지.
“해도를 만드는 것에 대해 일본 막부가 허락했습니까?”
“허락을 받고 자시고 할 게 있습니까. 아국 함선은 그저 무역을 하기 위해 들렸다가 표류 아닌 표류를 한 것뿐이지요.”
“허허.”
“게다가 아국 물산을 잔뜩 싣고 갔는데, 어떤 대명이 이를 거부하겠습니까? 지금 사지 않으면 구주의 대명에게 웃돈을 주고 구입해야 하는 데 말입니다.”
조선이 먼 훗날 서양세력에게 당했던 수법을, 어째 그대로 써먹은 모양이다.
‘크크. 확실히 조차지를 만들고 나서부턴, 해군과 바다에 대한 인식이 꽤나 많이 바뀐 모양이야. 반대로 일본은 전혀 감을 못 잡는 것 같고.’
연오랑은 지도를 보며,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머릿속에 그려봤다.
왜구가 넘쳐나는 일본이니 당연히 선박건조 기술이나 수군에 대한 관심이 높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임진왜란 시절의 일본군조차도 육군이 주력이고 수군은 곁다리였는데, 유럽의 중세영주와 마찬가지인 이 시기 다이묘들이 수군을 신경이나 썼을까.
그러니 해안 측량이 무슨 의미인지, 해도를 작성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저 산만큼 거대한 신형전함에 화들짝 놀랐다가, 그 신형전함이 소문으로만 듣던 조선전함이라는 것에 두 번 놀라고, 전함에서 조선의 선진문물이 쏟아지는 걸 보며 세 번 놀랐다.
“허면... 한두번 확인한 게 아니라는 뜻이구려.”
“그렇습니다. 항로를 찾는 게 보통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해군은 동래에서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적간관赤間關에 이르렀고, 그곳에서부턴 해안을 따라 동진했소이다.”
이예는 말을 하는 동시에 일본지도를 쓱 훑었다.
적간관은 시모노세키를 말하는 거니... 규슈와 혼슈의 경계점인 시모노세키부터 혼슈 동북쪽을 훑고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다.
‘훗카이도는 이 시기에 당연히 없을 테고.’
아니나 다를까. 이예의 손가락은 혼슈의 북쪽에서 멈췄고, 당연히 그 북쪽에 위치한 훗카이도로 뻗어나가지 않았다.
이렇게 왔다갔다하면서 서서히 조선전함에 대한 거부감과 당혹감, 두려움을 줄여나갔고, 해안가의 다이묘를 통해 막부에 슬쩍슬쩍 약을 쳤다.
“왜관을 열어달라고 했지? 대신 우리가 직접 왔다. 어때? 어차피 너희는 배타고 조선으로 오지도 못하잖아.”
이렇게 은근슬쩍 얼러대니, 막부와 대명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일본이 과거 고려를 약탈했다지만, 그 배는 전부 규슈에서 출발해서 대마도를 거쳐 온 것 아닌가.
혼슈의 동북방 영주들은 조선으로 가는 직항로도 모르고, 그 정도의 장기간 항해를 하는 것도 힘드니, 언감생심 조선과의 직무역은 꿈도 못 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직접 왔으니, 머릿속이 복잡해졌을 거다.
‘이야... 이거 앞으로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잡히는데?’
돌아가는 걸 보니... 일본도 원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다.
본래 역사라면 개발이 제대로 안될, 관심도 없었을 혼슈의 동북쪽 해안가와 해안도시가 조선의 도움으로 힘을 키우게 생겼지 않나.
‘하지만... 이게 먹혀들 가능성이 너무 크단 말이지.’
연오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설명을 이어가고 있는 이예를 살폈다.
일본통인 이예가 일본의 사정을 모를 리가 없고, 그는 대외무역에 소외됐던 내륙 영주를 조선의 편으로 완전히 끌어들일 생각인 것 같다.
‘일이 이렇게 되면... 만약 전국시대가 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혼자만 아는 미래를 그려보는데, 이것도 영... 감이 안 잡힌다.
“허면 계획하고 있는 항구는 어디 입니까?”
“서쪽에서부터 보면 적간관, 익전(마즈다), 출운(아즈모), 조취(돗토리), 돈하(쓰루가), 금택(가나자와), 상월(조에쓰), 신석(니이가타), 추전(아키타)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비록 크진 않지만, 작게나마 항구를 만들 수 있는 입지를 가진 곳입니다.”
“허...”
“끄응...”
“흠.”
낯선 지명이 마구 튀어나오자, 지도를 보고 설명을 했어도 쉽게 머릿속에 안 들어오는 모양이다.
‘혼슈 북부를 다 먹겠다는 거잖아? 이게 되려나? 아닌가. 안 될 것도 없나.’
연오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고, 어째 실현 가능성은 점점 커져갔다.
‘진짜로 되겠는데? 쟤들은 죄다 깡촌 영주들 아냐? 아국이 직접 와서 무역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 같은데?’
“저 낯선 곳으로 향하는 직항로를 찾아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오...!”
“대단하구려!”
이예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다들 박수를 칠 정도로 환호했다.
‘진짜 고생했겠는데? 세종 형이 확실히 밀어줬나 보네.’
연오랑 또한 가볍게 탄성을 내질렀다.
바로 코앞에 있는 일본을 가는 게 뭐가 문제냐 하겠지만,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계절마다 바뀌는 계절풍과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해류를 알아야, 고생하지 않고 바로 순풍을 받아 이동할 수 있다.
조선이 강남 바로 밑에 있는 대만섬으로 원정가기 위해, 왜 지금까지 준비를 계속했겠는가.
항로도 모르고서 그냥 무턱대고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갔다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태평양으로 흘러가버릴지도 모른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서 해군은 조선-청도-상해를 거쳐 복건성 해안을 따라 남하해 복주에 다다랐고, 여기서 곧장 바다를 건너 대만섬을 찾아낸 거지.
그 후에는 거꾸로 대만섬에서 조선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 이번엔 반대로 동북쪽으로만 가면 조선땅이 나오지 않겠나.
이걸 작년부터 계속 반복하면서, 조선에서 대만으로 곧장 가는 항로를 찾아낸 거지.
일본에서 출발하는 항로를 찾는 것도 같은 방식이었을 거다.
일단 시모노세키에서 해안을 따라 이동해 각 항구로 간 다음에, 서쪽으로 향하면 어찌됐건 조선땅이 나오지 않겠나.
그렇게 계속 왔다갔다하면서 직항로를 찾아낸 거지.
“그럼 저 지역에 조차지를 만들어, 아국과 직접 교역을 하겠다는 뜻이지요? 방식은 조차지의 방식을 따를 테고. 허면 아국은 어디서 출발할 계획인겁니까? 대마도? 아니면 동래?”
“상해와 청도와 같은 조차지가 만들어질지는, 막부와 협의를 해야 할 겁니다. 허나 대명들이 강력하게 원하고 있으니 조차지까지는 아니어도 조차지에 준하는 무역관이 만들어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