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09화 (309/538)

309. 챕터43. 진출하다 (1)

때는 아직도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지만, 남방의 바다는 벌써부터 찬 기운을 떨쳐낸 것처럼 보였다.

“합!”

“이얍!”

해안가에 모인 낯선 이들은 모래밭을 가로지르며 뛰고 또 뛰고, 몇몇은 칼과 창을 들고 휘두르며, 또 몇몇은 남방에 어울리지 않는 우람한 전마를 타고 허허벌판의 땅을 활보했다.

“흐갸갸...”

“끄응...”

“이 장령님. 대체 우리가 왜 훈련을 받아야 되는 거요?”

“훈련? 이게 뭔 훈련이야. 아침 운동이지.”

“아침 운동은 무슨...”

사내는 청년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투덜거리고 말았다.

누군 팔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누구는 쌩쌩한 걸 넘어 팔팔 날아다니지 않나.

나이차도 얼마 안 나는데 이러니, 괜히 자기만 부끄러워진다.

“쯧쯧. 그러게 운동 좀 하지 그랬나? 나 때는 말이야.”

“나 때는 이라는 말 좀 하지마쇼. 몇 살이나 먹었다고 나 때는 이오?”

“하여간 착호군을 갔다와야 정신을 차리지. 쯧쯧.”

“또 그런다.”

청년이 자랑과 함께 놀리기 시작하자, 사내는 지겹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 착호군이 뭐라고 매일 이렇게 놀려대는지 모르겠다. 착호군 안 나온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그런 생각을 품고 주변을 쓱 훑어보는데... 그가 봐도 꼴이 퍽 웃기게 보인다.

“아. 개운하고만.”하는 표정을 짓는 이들이 있는 한편, “으억. 죽겠다.”라는 표정으로 기진맥진해 있는 이들로 구분됐으니까.

“내가 북방에 있을 때는 매일 같이 한 시간은 뛰었지. 아마?”

“거. 됐다니까.”

“크크.”

청년은 피식피식 웃어대고선, 다리를 후들거리는 사내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쿵쾅쿵쾅. 거인이 방아질을 하듯 우렁찬 소음이 귀를 때리고, 조선에선 이제 흔하게 볼 수 있는 거대수차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서도 저러네.”

“...?”

거대수차가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수차 근처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청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째 북방의 여진인들도 거대수차를 처음 보고 저런 반응을 보였는데, 남방의 원주민들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이게 그렇게 신기한가?’

문뜩 이런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했다.

지금이야 자기 손으로 직접 설계하고 만든다지만, 그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이런 건 없지 않았나.

“뭐가 말인가?”

“아닐세.”

“싱겁기는... 빨리 가게.”

둘뿐만 아니라, 모래밭에서 뒹굴었던 관리들 모두가 한 물결이 되어 한 곳으로 향했다.

조선인이 가는 곳이면 이제 빠질 수 없는 게 목욕탕이고, 이렇게 더운 남방에선 더욱 자주 씻어야 되지 않나.

모래밭을 지나 맨땅을 밟기 무섭게, 강가를 끼고 일렬로 줄줄이 세워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기와를 올리지도 않고 대충 나무판으로 막아놨지만, 어차피 임시 건물이니 씻는데 문제가 있을까.

후다닥 몸을 씻고 나서 관복을 차려 입고, 챙이 긴 짚모자를 쓰고 걸음을 옮겼다.

목욕탕에서 나와 걷고 있으니...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강과 이어진 수로를 파는 인부들, 그 옆으로 네모반듯하게 파여지고 있는 전답, 논두렁 너머로 이어지는 흙도로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 종착지에는 산을 뒤로하고 우람하게 일어서고 있는 검은빛의 건물. 이젠 조선 관아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3층 관아가 올라가고 있었다.

“...”

청년은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장내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그런가?”

“할 일이 줄어들질 않아서. 이거 언제 다 개간하지?”

“풉.”

실없는 소리를 내뱉자, 사내는 피식 웃고 말았다.

총괄 책임자가 그런 말을 하면 쓰나. 분명 말은 저렇게 해도 머릿속엔 이미 신도시가 만들어져 있을 거다.

“헛소리 말고 밥이나 먹으러 가지.”

“그럽세. 밥이라도 먹어야 힘을 내지.”

둘은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곳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군대 배식장이라도 되는 걸까? 허나 규모가 커도 너무 크다. 밥 짓고 국 끓이는 가마솥만 백 개가 넘었으니까.

이 배식장은 둘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한쪽은 대충 만들어진 의자와 대충 만들어진 탁자를 놓고, 관복과 군복이 어지럽게 섞여 몰려 있었다.

반대쪽은 상대적으로 어수선했다.

갑옷까지 차려 입은 군인들이 원주민들을 모아 줄 세우기를 시키고 있다.

허리가 굽은 노인부터,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신난 꼬꼬마 애들까지.

가족 단위로 모인 이들은 어색하게 식판을 들고 줄줄이 배식을 받았고, 의자나 탁자도 없이 대충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저를 놀리고 있다.

“저치들도 이제 귀찮게 안하는 군.”

“우리가 온 게 언젠데, 이제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겠어? 그래도 밥은 잘 먹는다고 좋아하더만. 가끔씩 고기도 나오고.”

“그야 그렇지.”

청년과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갔다.

생김새가 다르고 말이 안 통하는 게 무슨 상관이랴.

이 시대엔 자고로 밥을 잘 먹여 주는 게 최고고, 밥줄만 쥐고 있으면 쉽게 따라오게 되어 있다.

구경을 하면서도, 익숙하다 못해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인다.

줄줄이 늘어선 줄을 따라 이동해, 나무식판과 수저를 챙겨들고 다가가니, 배식을 담당하는 취사병이 성의 없게 밥과 반찬을 식판에 툭툭 올려놨다.

식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잡곡밥에 생선찜, 이름 모를 나물무침, 콩나물이 왕창 들어간 이름 모를 생선국이다. 그래도 오늘은 삶은 달걀이 나왔다.

“좀 더 줘.”

“안 첨정님. 뒤에 줄 안보입니까.”

어째 이런 실랑이가 한두번이 아닌 모양이다. 취사병은 사내의 관복을 알아보고도, 그저 턱짓으로 뒤를 힐끔 가리키며 반응도 안했다.

“쳇.”

“정량배식 모르나? 사단장님은 보급품 때문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텐데?”

“보급품은 넘쳐나는 데 무슨...”

“큰일 날 소리하고 있네. 저게 우리 보급품이야? 원정군 먹을 거지.”

“그거나 이거나.”

“원주민들이 계속 오는데, 생각 없이 막 파줬다가는 난리 날 걸.”

“끄응...”

말이야 맞는 말인 터라, 사내는 앓는 소리를 내뱉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몰라도, 원주민은 끝도 없이 야금야금 몰려오고 있지 않나.

원래 계획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터라, 덕분에 공사는 빨라졌지만 대신 보급품 조달은 정신없어졌다.

“순지. 여기다!”

“...”

청년. 이순지는 자기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냉큼 걸음을 옮겼다.

연오랑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꼬꼬마였지만, 착호군을 따라다니며 그 밑에서 구른 세월이 얼만가.

이젠 늠름한 청년이 된 건 당연하고, 나이는 어리지만 그간 경력을 인정받아 신도시 건설책임자가 되어 낯선 남방에 와 있었다.

어째 잘 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만, 이순지는 천문학자가 아니라 토목건축전문가가 되고 말았다.

“안 첨정도 함께 왔나?”

“비실비실해서 내가 챙겨줬지.”

“크크. 착호군 출신이 아니라서 영...”

“박 장령님도 참...”

누가 친구 아니랄까봐, 똑같은 소리를 하며 놀리고 있다.

원래 역사에서 몽유도원도를 그리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화원인 안견.

그는 지금 역사에서도 붓을 들었는데, 화원으로 된 건 같았지만 개혁이 시작된 후론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더 많이 그리게 됐다.

도화원 소속 화원은 지리감에 속해 착호군을 따라다녔으니까.

연오랑은 이미 오래전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과 각 동네에서 나름 천재로 소문난 애들을 데려다가 조기교육을 시키지 않았나.

그 아이들은 이미 다 커서 조정으로 들어갔고, 원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그려가고 있었다.

조선궁궐을 죄다 만든 건축천재 박자청의 손자 박현 또한 마찬가지.

원래라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역사에 파묻혀 쓰러졌겠지만, 지금은 버젓이 관리가 되어 남방까지 오게 됐지.

“자재 수급은 어때? 늦어지면 곤란한데.”

“제재소와 석회석 광산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돌아갈 거야. 원주민들도 이제 작업이 손에 익기 시작했고, 기업도 이 땅에 슬슬 적응했으니까. 앞으론 일반 가옥을 짓는데 써도 될 만큼의 양이 나올 걸?”

“천만 다행이네.”

이순지는 박현의 말에, 국을 퍼먹다 말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원래 역사와 다르게, 조선은 개혁이 시작되기 전부터 요동반도, 산동반도로 향하는 항로를 알아냈다.

명이 망하고 의주에서 사무역이 시작되었으니, 여길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서해북부의 재해권을 장악해야 했으니까.

그 후 청도를 얻고 나선, 청도-의주, 용연, 벽란도, 강화도, 평택, 옥구(군산), 무안 등. 조선 전역으로 가는 항로를 찾아냈지.

상해를 얻고 나서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젠 강남과 조선을 잇고, 대만과 조선을 잇는 항로를 찾아야 했고, 해군을 남중국해에 뿌려 해적들을 몰아내서 강남상인과 일본상인이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옭아매야 했으니까.

그렇게 항로를 찾는 동안에도, 선발대를 미리 보내 대만섬 북부. 미래에 타이베이라 불릴 지역을 장악하고 남주라 명명했다.

이곳에는 이미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뭐 어려움이 있었을까.

이들이 살아생전 보지도 못한 엄청나게 큰 배를 타고, 단수이 강을 거슬러 올라 벼락을 뿌리는 무기를 뻥뻥 쏴댔다.

제대로 싸울 생각은커녕, 죄다 넋이나가 주저앉아 목숨을 구걸했고, 선발대는 손쉽게 타이베이를 장악하고 이곳에 주둔지를 건설했지.

그 세월이 벌써 일년이 넘었고, 이제 원주민들도 다들 말을 잘 듣고 조선화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말을 안 듣는 불평꾼도 있었지만, 그런 이들은 이미 진출할 때 죽거나 중국으로 팔려갔지.

“석탄은 어때?”

“생각보다 여기저기 있던데? 강과 붙어 있어서, 옮기는데 문제는 없을 거야. 그리고 북쪽에는 유황광산도 발견됐어.”

“음... 그건 당장 필요 없는데, 어쨌든 나쁘지 않네.”

타이베이 바로 옆에는 양명산이 있고, 이곳은 수십개의 크고 작은 화산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유황이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좋아. 가마도 문제없고?”

“물론. 스무개 넘게 지었고, 앞으로도 계속 지을 거야.”

석탄, 석회를 구했으면 당연히 가마 또한 대규모로 완성했을 거다. 이제부턴 기와도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다.

이순지는 손 떼가 잔뜩 묻은 공책에 연필로 뭔가를 끄적거렸다.

“유 첨정. 초지는 어때?”

“다행히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벌목한 나무는 제재기업에서 다 가져갔고요.”

“이것도 문제없고.”

이순지는 체크하듯 이것저것 물으며 공책을 어지럽혔다.

이 시기의 대만은 개발과 개간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넘쳐나는 게 숲과 나무였다.

백오십년쯤 뒤에 포르투갈이 진출해서 이곳을 아름다운 섬이라 하여 일랴 포르모자라고 별칭을 붙일 정도인데, 더 과거인 지금은 말해 뭐해.

선발대는 조선에서 만든 최신장비인 강철톱, 강철도끼, 양날톱, 대패등을 원주민에게 제공했고, 이들은 신나서 숲을 박살내 놨다.

무기로 써먹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튼튼한 장비니, 눈이 뒤집혔지.

그렇게 작살낸 숲엔 곡식이 아닌 저 먼 북방에서 가져온 클로버계열의 생초를 심었는데, 천만다행히도 따뜻한 남쪽에서도 나름 잘 자란 모양이다.

“그런데 초지로 쓰기에는 조금 아깝지 않습니까? 이곳은 물도 많고 그간 농사를 안 지어서 꽤나 기름지던데...”

“그건 맞는 말이지만, 당장 필요한 건 농지가 아니라 부두와 건물이잖나. 나중에 사람이 차면 그때 농지로 바꿔야지.”

“예...”

유 첨정은 아쉬운 소리를 했지만 금세 납득했다.

담당자인 그가 몰라서 되물었을까. 그냥 아까워서 그랬던 거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지. 오늘도 바빠. 듣기로 원정군이 이제 곧 출정 한다고 했어.”

“맞는 말이야. 태풍이 오기 전에 와야겠지.”

대만은 남쪽에 있으니 여름도 빨리 찾아오고, 태풍도 빨리 찾아오지 않나.

이미 작년에 겪은 터라 보고서를 충실히 써서 올렸고, 그에 맞춰서 원정군도 여름은커녕 조선본토에서 봄이 오기도 전에 출항할 거다.

“어.”

“일어나시지요.”

“아... 난 다 안 먹었다고.”

늦게 먹은 안견은 생선찜을 뼈째 씹어 먹을 요령인양, 마구 입에 쑤셔 넣고서 엉덩이를 땠다.

또 다시 오리새끼마냥 줄줄이 줄을 서서 이동해, 수차에서 물을 끌어온 퇴식구에 식판을 씻었다.

“관원이 설거지까지 하냐?”라고 물을지 모르지만, 안 그래도 선발대는 사람이 부족하다. 하루 온종일 밥만 짓는 취사병에게 설거지까지 시키면, 당장 밥을 굶게 될 거다.

관원들은 각자 자기 일을 찾아 흩어졌고, 이순지는 홀로 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얼마 전까지 원주민들이 살던 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박살난 지 오래.

대패로 밀어버린 것처럼 깔끔하게 밀어버린 대지 위에, 질서정연하게 건물이 하나둘씩 올라가고 있다.

원주민들은 자기 집을 부수는 걸 보며 잠깐 소란을 피웠지만, 조선식 한옥을 지어주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환호했다.

생경하게 생겼지만 딱 봐도 좋아 보이지 않나. 그나마 따뜻한 남방이니 온돌을 깔 필요가 없어서, 가옥을 빨리빨리 올릴 수 있었고.

‘흐음...’

이순지는 듬성듬성 건물이 올라가는 허허벌판인 곳을 보며, 머릿속으로 연신 그림을 그려냈다.

오랫동안 만주신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도시설계에 그의 똑똑한 머리를 투자하지 않았나.

‘좋아. 저긴 확실히 관아가 들어서야 하고, 저쪽은 시장거리로, 저쪽은 선소와 창고로 써야겠어.’

연오랑을 따라다니면서 자기식으로 흡수한 지식이 꽤 있는 터라, 그는 또 한번 머릿속에 그린 설계도를 대지에 투영하며 비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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