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챕터43. 진출하다 (2)
그 때. 그의 상념을 깨는 인사가 들려왔다.
“이 나리! 오셨습니까.”
“어. 밥은 먹었냐?”
“옙!”
이순지의 입에서 엉뚱하게도 몽골말이 튀어나왔건만, 말을 몰고 달려온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햇빛이 내리쬐건만 바짝 밀어버린 민머리가 뜨겁지도 않은지, 그저 히죽히죽 웃고 있다.
“타시지요.”
“어.”
이순지는 데려온 말에 냉큼 올라탔고, 민머리 사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아갔다.
“너희 마을은 별 일 없지?”
“물론입니다.”
“기 씨는 어디가고?”
항상 붙어 다니는 인물을 찾기 무섭게, 듣기라도 한 것 마냥 저쪽에서 후다닥 누군가 달려와 소리쳤다.
“화장실을 관리하느라...”
헌데 기 씨라는 작자도 신기하다. 상투를 틀고 자연스럽게 조선말을 내뱉고 있다.
“됐어.”
이순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훤히 아는 터라, 대충 손을 휘젓고 말았다.
공용화장실 문화는 조선에서도 전파된 지 얼마 안됐고, 그 잘났다던 중국도 없던 것 아닌가. 대만 원주민들이 당연히 알 리가 없고, 이렇게 식사가 끝나고 나면 항상 감시를 해줘야했다.
“너희 마을은 어떠냐? 문제없지?”
“예.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할 것 까지야...”
이순지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씰룩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거참... 이 낯선 남방 땅에서 몽골인과 고려인 후손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지.’
볼 때마다 놀라워서 그는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중국과 바로 코앞에 붙어 있는 대만이 동아시아의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앞으로도 이백년은 지나서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진출하고 부터다.
다만 중국은 대만의 존재를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삼국지 시절에 손권이 이주夷州에 가서 원주민을 잡아오라고 했다가 대실패를 하지 않나. 그 이주가 대만섬이지.
허나 그 이후에도 중국왕조의 관심은 크지 않았고, 명청교체기 시절에 이르러서야 정성공이 등장해 중국역사와 엮이게 된다.
하지만 역사에 편입되지 않았다고 해서 “중국과 관계가 없냐?”라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이 시기의 대만 원주민은 미래에 고산족이라 불리는 진짜 원주민과 온 사방에서 넘어온 온갖 민족이 다 뒤섞인 상태였다.
대외무역이 한창일 송나라 시절에, 상인들이 무역거점으로 대만을 이용하면서 한족 및 소수민족이 넘어와 원주민과 동화됐다.
그 후 송이 망하면서 한족이 대거 이주해서, 대만 서쪽 평야를 차지하며 원주민을 진짜 고산족으로 만들어 동쪽 산악지대로 밀어냈지.
헌데 원이 망하고 명이 들어서자, 웃기게도 이번엔 몽골인, 원에 살던 고려인, 색목인 후손들이 또 대만으로 도망쳤다.
이 뿐일까. 대만은 나름 해상무역의 요충지인터라, 왜구나 일본인, 동남아시아인들도 이곳에 살았고, 죄다 원주민과 합쳐져 혼합됐다.
사정이 이러하니... 조선군이 타이베이에 진출했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야인여진마냥 말도 안통하고 야만적인 원주민으로 가득 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없어서 땅은 넘쳐났고, 원주민이라는 자들조차도 조선말, 몽골말, 중국말, 일본말이 통하는 부족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실 부족이라고도 칭하기도 뭐한 게, 이들은 어찌됐건 문명국가에서 넘어와 원주민과 동화된 이주민들 아닌가.
심지어 어떤 곳은 미흡하지만 이앙법을 하는 곳도 있었다.
이앙법은 송나라 시절에 시작됐으니, 남송유민이 이앙법을 아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고.
즉. 나라만 없을 뿐이지 멀쩡히 마을 단위로 모여 살면서, 농사와 목축, 어업을 하면서 지들끼리 아웅다웅하면서 살고 있었던 거지.
‘그러면서도 또 마을끼리 싸워댔단 말이야. 하여간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고만.’
이순지는 이런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올랐다.
몽골계와 고려계 후손인 둘이 어째서 그와 조선군을 반겼겠나.
대만 서쪽 평야지대를 차지한 이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많이 넘어온 한족이나 한족화된 소수민족의 문화가 주류였다.
그러니 문화가 다른 몽골계와 고려계 마을은 알게 모르게 눌려 살았던 것.
애초에 말이 얼마 있지도 않은 대만에서, 목축을 하며 사는 마을은 몽골계와 고려계 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자신과 흡사한 문화를 가진 조선군이 왔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셈 아닌가.
‘그렇다고 우리한테 나쁠 것도 없지. 원주민 말을 통역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이순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피가 이렇게 섞였으니, 말은 또 어떻겠나. 원주민 언어에 이주민 언어가 뒤섞여 요상한 언어가 나왔고, 기존의 언어를 그대로 쓰는 이들도 부지기수.
몽골, 조선, 일본, 한어를 할 줄 아는 이들은, 당연히 조선군에게 우대 받아 역관역할을 겸하고 있었지.
이순지는 역관 겸 마을 대표를 이끌고, 강가로 나아갔다.
“공사는 어때? 다들 손에 익었냐? 앞으로 너희 마을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사람들도 공사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 텐데?”
“예. 나리. 다들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배워 놓으면 적어도 굶어죽진 않을 것 아닙니까.”
“흐응.”
‘역시 여기도 똑같네.’
이순지는 절로 콧바람이 세어 나왔다. 이 또한 북방에서 여진인이 보였던 반응하고 똑같다. 역시 먹고 사는 문제가 이들의 가치관이나 독립성, 민족성보다 더 중요한 모양이다.
‘당연히 그렇겠지. 지금 농사도 안 짓고 공사만 일 년째하고 있는데, 그 식량을 우리가 다 대주고 있잖아? 이놈들 입장에선 정말 기겁할 일이겠지.’
이순지는 조선군에 복속된 원주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조산말은 많이 배웠고? 빨리 배우고 익숙해질수록 얻어갈 게 많아질거다.”
“물론입니다. 나리.”
“명심하고 있습니다.”
둘 모두 각오를 다지듯 고개를 끄덕였다.
커봐야 만명도 안 되는 마을 단위로 살던 이들에게, 조선군은 천재지변과 같은 존재다.
이미 반항하던 부족장 및 마을 수뇌부가, 우악스런 기마병의 말발굽에 짓밟혀 쓰러지는 걸 눈으로 보지 않았나.
막을 수 없으면 빨리 받아들여서, 자기 몫을 챙기는 게 이득이지.
‘역시 이것도 여진하고 똑같네.’
이순지는 이러한 모습도 이미 만주에서 지겹게 경험한터라, 그저 히죽 웃는 걸로 우려를 떨쳐냈다.
한참을 나아가자, 드디어 강가에 불쑥불쑥 튀어나온 낯선 구조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완전히 굳혀지지 않아서, 붉은 속살을 보이고 있는 수벽들. 잔디와 풀을 심어놓긴 했는데 아직 미흡해서, 강어귀에 우뚝 솟은 수벽은 꼭 무덤이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 수벽의 한쪽은 뻥 뚫려 있었고, 강어귀를 따라 움푹 파인 곳에는 회색빛 거암이 강을 가로지르며 뻗어 있었다.
‘부두는 잘 되고 있는 것 같네.’
“이 장령님. 오셨습니까!”
“오 정랑. 벌써 나왔나?”
오 정랑이라 불린 이도, 이순지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개량관복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짚모자까지 쓰고 있으니... 이게 인부인지 관원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흐흐. 미리미리 나와야지요. 인부들도 다들 나왔습니다.”
“좋군. 오늘 작업은?”
“8번 부두를 마무리 지을 계획입니다.”
“음...”
이순지는 사람들을 이끌고, 망루처럼 생긴 곳을 올라갔다.
그리 높지 않아서 멀리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내려다보면 남주항구의 개요가 한눈에 들어온다.
“석회석 광산과 석탄 광산이 제대로 가동된다니까, 앞으로 더 빨라질 거야.”
“확인해서 채근해 보겠습니다.”
“음...”
이순지는 공책에 또 뭔가를 그리고선, 하나둘씩 만들어지는 항구를 굽어봤다.
선발대가 타이베이에 주둔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의아하게도 석회석, 석탄, 채석장을 찾는 일이었다.
원정군이 오는 건 둘째 치고, 보급품을 받기 위해선 항구와 부두가 필수적이니까.
허나 남주도로 오는 배가 오죽 큰가. 무조건 신형전함과 신형무역선이 들어오니, 어떻게든 보급선을 정박할 석회부두를 만들어야 했지.
그런 면에서 타이베이는 꽤 좋은 입지를 가진 곳이었다.
단수이 강이 수심이 얕다고는 허나 그건 미래의 수천톤급 함선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신형전함이 강을 오르내리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여 강 안쪽에 항구와 부두를 건설했고, 진짜로 미래의 타이베이 한복판을 신도시로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선소는 어때?”
“전함을 수리하는 건 힘들겠지만, 어선을 만들 정도는 됩니다. 이미 한척을 만들었고요.”
“다행이네. 여기가 안전한 동해도 아니고, 해군에게 생선만 잡게 하는 것도 문제지.”
“옳은 말씀입니다.”
오 정랑 또한 냉큼 동의했다.
아무리 조선군에 대응할 세력이 없다고 해도, 선발대를 보호해줄 해군을 어부로 쓰면 곤란하지 않나. 지금까지야 먹고 살아야하니 어쩔 수 없었지만, 계속 그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냥 조선에서 만들어 타고 오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그렇게 작은 배로는 목숨 걸고 타야하는 일 아닌가. 차라리 여기서 만드는 게 싸게 먹혔다.
‘계속 찍어내야 하니까, 선소는 어차피 만들어야 하는 거고.’
이순지는 옛기억을 떠올리며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헌데...”
“...?”
오 정랑이 말을 끌자, 이순지는 “뭔데?”라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 녀석은 어릴 적부터 연오랑과 함께 다니더니, 어째 막나가는 성격도 닮게 됐나 보다.
“곡물창고를 그렇게 튼튼하게 지어야 됩니까? 조선본토보다도 더 견고하게 짓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 자재를 부두로 보내면 부두 공사가 더 빨리 진행될 겁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안 돼.”
“...”
“자네. 작년에 여기 없었지?”
“예...”
오 정랑이 말을 흐리자, 이순지는 얼른 말을 이어갔다.
“이곳이 얼마나 습하고 덥고, 비가 많이 오는지 아나? 대충 지었다간 군량과 식량이 다 썩어버릴 거라고. 안 그래도 이제 원정군이 사용할 군량까지 상해에서 오게 될 텐데, 그거 망치면 감당할 수 있나?”
“...”
“넌 겪어보지도 않았으니까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하지.”라고 말하는데, 오 정랑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이다.
“뭐. 분명히 문제가 터질 테니, 상해와 복주를 뻔질나게 돌아다녀야겠지만, 초계를 해야 할 해군이 보급함으로 쓰이면 곤란해질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걸.”
“예...”
오 정랑도 나름 관리 생활을 오래 한터라, 쉽게 납득하고 말았다. 톱니바퀴처럼 얽혀 있는 상황에서 뭐라도 하나가 꼬이기 시작하면, 전체 계획이 엉망이 될 게 분명.
그 책임추궁을 당하게 되면, 이순지 말대로 정랑이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을 넘어가게 될 거다.
“부두 건설이 조금 늦어지면 하루 쯤 바다나 강에서 머물면 그만이지만, 곡물창고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다 굶어죽는 거야.”
“알겠습니다.”
이순지는 다시금 오 정랑에게 단단히 확답을 받고서 넘어갔다.
부두와 선소를 살피고, 항구의 구역을 다시금 살피고, 원주민 인부들을 쓱쓱 훑어가며 문제가 있는지 확인했다.
이곳엔 대략 8개 부족, 마을이 살고 있었는데 전부 흡수됐고, 미래에는 쿨룬, 바사이등으로 뭉뚱그려서 구분하지만 지금은 딱히 그런 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 혼혈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그저 예전부터 내려오는 대로 살았지.
대만 원주민만의 독립문화가 본격적으로 퍼지고 전파되는 건, 앞으로 백년은 더 지나서 다두왕국이 등장하고 부터니까.
‘생각보다 빨리 적응했단 말이지? 역시 여진과 너무 비슷해.’
이순지는 다시금 깨달았고, 그만큼 자신감이 치솟았다. 여진도 순식간에 조선에 흡수됐는데, 대만 원주민이 문제될 게 뭐가 있을까.
‘문제라면... 역시 동쪽 산악지역에 위치한 원주민인데 말이야.’
“혹시 또 뭐 안 좋은 소식 들은 거 있어? 산악부족이 내려왔다던가.”
“글쎄요...? 딱히 들은 건 없습니다. 일전에 원주민을 건드렸다가, 연대병이 출동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피를 꽤 봤으니, 다들 겁을 집어먹은 모양입니다.”
“아니면 다른 부족과 연합할 수도 있지.”
“...”
오 정랑은 말을 아꼈고, 이순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봤다. 여진을 정벌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미래에 고산족이라 불릴 이들은 안 그래도 평야 원주민과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 왜 안 좋았냐를 따지면 끝도 없고, 뭐랄까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이 겉도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조선군이 평야 원주민을 지배하자, 뭔가 상황이 애매해져서 간을 봐왔던 것.
문제는 이들은 성인식을 사람 목을 따오는 걸로 대신할 정도로 호전적이었고, 끝내 나무를 하러 갔던 원주민을 척살하고 말았다.
조선군이 이걸 가만 놔뒀겠는가. 당연히 산으로 쑤시고 들어가서 부족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돌아왔다.
“그후로 그냥저냥 대치 상태란 말이지?”
“예. 뭐... 원정군이 오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겠지만, 산을 헤집고 다니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걸.”
“저희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오 정랑은 답도 안 나오는 문제를 보며, 관리답게 자기 업무도 아닌 일에 신경을 끄기로 했다.
“맞아. 뭐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이순지 또한 마찬가지. 군사 문제를 그가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도시 짓는 것만으로도 정신없다.
이윽고 항구를 다 둘러보고 거주 지역을 살피러 갈 찰나.
“어...?”
“배다! 보급선이다!”
“와아아!”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부두에서 일하던 인부들의 시선에 한쪽으로 확 쏠렸다.
이미 익숙하게 봐왔음에도, 신형전함과 신형무역선은 여전히 낯설고 신기한 모양이다.
“다들 진정시켜! 쓸데없이 부두로 못 가게 해! 정박하면 보면 되잖아!”
“옙!”
“빨리빨리 움직여!”
이순지가 소리를 치기 무섭게, 말을 타고 돌아다니던 연대병이 사방팔방 퍼져서 요동치는 원주민들의 흥분을 다독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