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챕터43. 진출하다 (5)
“자네들은 사탕나무를 구해오게. 뿌리까지 다 가져와도 상관없네.”
“아...”
“사탕나무 말씀이십니까.”
다들 의아한 표정과 납득한 표정을 동시에 지었다.
설탕은 조선에선 너무 귀해서 약제로 쓰였지만, 복건, 광서, 광동과 동남아시아에서는 그냥 길거리에서 뜯어먹을 정도로 흔했다.
다만 미래의 백설탕과 같이 완전히 정제된 물건은 값이 엄청나게 비쌌고, 흑설탕이나 당밀이 포함된 당액과 같은 형태로 파는 게 보편적이었지.
이러니 복건상인들이 당혹스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거래 대금에 맞추려면 대체 몇 그루나 필요한 거야?’ ‘사탕도 아니고 사탕나무를 사겠다고? 조선에서 이걸 심을 수 있나?’라는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원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와아!”
“오오오!”
장원 저편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경매에 참석한 이들이 놀라서 내지르는 함성이 여기까지 들려온다.
다들 “갑자기 왜 저러나.” “또 뭐가 나왔나?” “호피라도 나온 건가?”라고 속닥거렸지만, 관원은 속으로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보나마나 유리거울이겠지.’
관원조차도 그 물건을 보고서 화들짝 놀랐는데, 복건상인들이라고 뭐 다를까.
지금까지 없던 큼지막한 거울에, 분해할 수 없게 나무틀을 짜서 탁상거울로 만들어서 가져왔으니... 분명 까무러치게 놀랐을 거다. 어마어마하게 비싸게 팔린 건 당연할 테고.
“자자. 집중하시오. 다른 건 자동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오. 소목과 주목, 홍화, 남초와 같은 염료 나무를 가져오시오.”
“끄응...”
“흠.”
잠시 한눈을 팔았던 복건상인들은, 갑자기 폐부를 찔러 들어오는 말에 다들 미간이 찌푸려졌다.
남인염포라고 해서 운남성에서 유명한 염포제조 기술이 있었고, 복건에서도 그와 흡사한 염료들이 여럿 존재했다.
이러한 염료는 강남에선 흔하지만, 조선에는 없어서 꽤 비싼 값에 팔리던 물건들이지.
허나 이제 독점해서 꿀 빠는 시절이 끝났다고 말하고 있으니, 염료상인들의 얼굴이 구겨질 수밖에.
‘하지만... 지금 손을 잡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채갈 것 아닌가.’
문제는 자동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조선은 복주나 더 남쪽인 광서나 광동의 무역항으로 가서 염료를 구할 거라는 점.
나아가 지금까지 대규모 거래에서 배제되어 하청업체처럼 일하던 자잘한 중소상인들이라면, 자동 호족상인의 눈치를 보던 말건 조선의 요구를 어떻게든 들어줄 거다. 황금동아줄이 내려왔는데, 이걸 안 잡으면 바보지.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복건상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제 아쉬운 사람은 조선이 아니라 자동 염료상인이 되었으니, 살기 위해서라도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자동은 지난날의 위세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데, 조선이 내민 손을 내치는 건 미련한 짓이니까.
“또...”
조선관원은 계속해서 필요한 물건을 읊어댔고, 자동상인들은 일희일비하며 얼굴이 펴졌다가 구겨졌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 요구에, 다들 턱이 빠질 듯 놀라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끝으로, 물품대금의 일부를 용선료로 갈음할 생각이오. 그러니 자동에 있는 모든 상선을 비워두시오.”
“...!?”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사서 가져가야할 물품이 많으니 상선이 동원되는 건 당연한데, 그걸 자신들에게 맡긴단 말인가? 다들 머릿속으로 계산이 복잡해졌다.
“조선으로 간단 말입니까? 하오나 의주까지 갔다오면 시간이 보통 오래 걸리는 게 아닐 텐데...”
누군가 총대를 메고 대표로 불만을 털어놓자, 관원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아국까지 간다고 했소? 여기서 가까운 곳으로 갈 거요. 이주라고. 그대들도 저 남쪽에 큰 섬이 있는 걸 알고 있지 않소? 거기로 갈 거요.”
“...!”
“헙!?”
거래를 할 때부터 논란을 계속 일으키더니, 마지막까지 큼지막한 폭탄을 떨어뜨렸다.
*****
시간을 다시 되돌려 현재.
이순지는 난장판이 된 부두를 정리하며, 기병을 관아로 보내 관원을 더 불러오게 시켰다. 원주민들의 혼란은 둘째 치고, 일손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대체 뭔 일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복선이 여기 왜 왔을까요? 설마 여길 노리고?”
“헛소리 하지마. 그게 말이나 되나.”
오 정랑은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이순지는 가볍게 무시했다.
신형전함과 무역선과 함께 왔는데, 복건상선이 여길 노릴 리가 있나.
허나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으니...
‘많아도 너무 많아.’
아무리 못해도 오십척이 넘는 복건상선을 끌고 오지 않았나. 꼬리를 물고 줄줄이 늘어서서, 단수이 강이 꽉 찰 지경이다.
게다가 저쪽도 이곳 남주 사정에 대해 몰랐던 게 분명.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배 위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난 게 보였다.
“저렇게 꼬리를 잔뜩 몰고 왔으니, 책임자가 왔을 거 아냐. 기다리면 답이 나오겠지.”
“예에...”
이순지는 그리 답을 했지만, 그도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이제 곧 이곳 남주도 원정이 시작된다는 건 머리론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마닥뜨리니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윽고 신형전함이 접안하고, 나무사다리가 올라가기 무섭게 관복을 입은 이들이 우르르 밀려 내려왔다.
‘어라?’
그리고 이순지는 냉큼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서, 걸음이 빨라졌다.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권준의 형이 왔는데 못 알아볼 리가 있나. 권준, 권제 형제는 나이차가 꽤나서 함께 하진 않았지만, 오가면서 알아볼 정도로 안면을 텄던 사이다.
“...!?”
“순지. 오랜만이구나.”
“예. 형님.”
이순지가 놀란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자, 권제가 성큼 다가와 환하게 웃었다.
“낯선 남녘에서 고생이 많구나.”
“뭐...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대체 이게 뭔 일입니까?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순지가 놀라서 허둥거리자, 권제는 그를 대신해 능숙하게 관원들에게 일러 짐을 하선시키고선 걸음을 옮겼다.
“... 사령관님을 봬야하는데, 어디로 가야하지?”
“이쪽으로 가시지요.”
길도 몰라서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는 권제를 이끌고, 이순지는 냉큼 관아로 향했다.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권제는 “다 같이 들으면 알 거다.”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고선 풍경 구경에 열중했다.
이윽고 다다른 관아. 3층 관아는 아직 다 완공되지 못했지만, 단층짜리 부속 관아는 이미 만들어서 사용 중이었다.
“허? 여긴 집이 높군?”
“워낙 벌레도 많고, 비도 많이 오고, 습해서 마루를 높였습니다.”
“흐음.”
자동에 있을 때도 건물을 눈여겨봤던 권제답게, 이곳 가옥도 특이한 점을 바로 알아차렸나 보다.
사실 못 알아보면 더 이상한 게, 이곳은 마루가 반층 정도 더 높아서 아예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했으니까.
“이 장령님!”
“사령관님 계시나?”
“예. 지금 택리부 관원들과 회의 중인데...”
연대병은 이순지를 보며 답을 하다가, 그의 뒤로 줄줄이 늘어서 있는 낯선 관원을 보며 말을 흐렸다.
“한성에서 오신 분들이네.”
“충성!”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장 경례를 했고, 동시에 안색이 굳어졌다.
부두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문은 벌써 퍼졌는데, 이렇게 직접 관원이 왔다라... 이제 진짜로 원정이 코앞으로 다가온 게 실감나는 모양이다.
“들어가시지요.”
“그래.”
권제는 찌를 듯이 치솟은 처마와 용케도 단청을 칠한 처마 밑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님!”
“순지 왔나?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령관 이정호는 권제를 보며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권제 또한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과거 이정호는 특전대장으로 오랜 시간 활약했고, 권제는 호주에서 관원생활을 하지 않았나. 나름 엮인 일이 많아 아는 사이였다.
이순지는 연오랑의 밑에서 컸으니, 이정호와는 당연히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고.
“자네가 왔나?”
“예. 자동에서 거래가 있어서 말입니다.”
“음...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옙!”
권제와 이정호가 아는 척을 하자, 택리부 관원들은 눈치 있게 냉큼 밖으로 나갔다.
“큼.”
관원들이 빠져나가기 무섭게, 권제의 뒤를 조용히 따라왔던 관원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이제 자기 차례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다.
예전이라면 선전관을 보냈겠지만, 지금은 조정과 왕이 뿌리는 명령서가 워낙 많지 않나.
선전관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어 승정원에 흡수됐고, 어지간하면 사람을 직접 보내지 않고 체신처에서 알아서 처리했다.
허나 지금처럼 직접 승정원 관리가 왔다면, 진짜 중요한 특명이라는 뜻.
“어명이외다.”
“...”
이정호는 냉큼 의관을 정제하고 관원이 내미는 교서를 받아들었다. 다만 과거처럼 땅에 꿇어 앉아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하고 받진 않고, 그저 깊게 읍을 하고 서서 넘겨받았다.
이런 예식도 과거에 비하면 꽤나 간략해졌는데,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조선이 워낙 외부활동을 많이 하다보니까, 교서도 엄청나게 많아졌기 때문. 왕이 직접 내리는 경우도 있지만 부서장이 뿌리는 명령서도 혼재해 있었지.
조선은 나름 유학적 예법을 지우고 실용주의로 나아가지 않나. 군부는 특히나 더욱 그런 경향을 보였다.
“허...”
이정호는 교서를 읽기 무섭게 자리에 앉았고, 다들 눈치껏 주인 잃은 의자를 끼고 앉았다.
“자세히 설명해 보게. 계획이 당겨졌다고?”
“예. 조정에선 올해 봄이 오기 전에, 이주를 시작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용연군 대감께서 밀어 붙이셨나?”
“대감도 대감이시지만, 상왕전하께서도 동의하셨습니다.”
“음...”
“흐음.”
태종의 이름이 거론되자, 다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유는 대충 감이 잡힌다. 태종은 평안도에서 양전사업을 준비 중이니, 이제 몇 달 후면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을 삼남으로 보내 농사를 시작할 거다.
그리고 빈자리를 대만원주민으로 채워 넣을 계획인데, 붕 뜨는 시간을 줄이고자 일정을 앞당긴 것.
“가능하시겠습니까?”
“안 될 건 없지만...”
“그간 잘 해오시지 않았습니까? 장군께서 보고서에 조정대신들도 만족하셨습니다.”
“그런가...”
이정호는 승정원 관리의 물음에, 애매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날 선발대로 보낸 이유가 있구나.’
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정호는 착호군 1기 때부터 특전대장을 역임했다.
특전대가 덩치를 불려갈 때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강남원정이 시작되자 뜬금없이 사단장으로 승진해서 설주로 향했지.
그리고 설주에서 3년 동안 야인여진과 아웅다웅하면서, 계속해서 설주를 키우고 강역을 넓혀나갔다.
일은 나름 잘해서, 솔빈부. 미래에는 우수리스크라 불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미타호. 미래에는 힝카호수로 불릴 지역까지 조선 관리와 기업이 진출한 상태였지.
헌데 다른 쟁쟁한 장군들을 물리치고, 난데없이 그가 남주도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선발대로 파견됐다.
일년의 절반 가까이가 겨울인 북방에서 머물다가, 이제는 절반 가까이가 여름인 남방으로 내려온 거지.
뭐 이렇게 인생이 극적인가 싶었는데, 와서 보니 이유를 깨달았다.
“어떻습니까? 정말로 설주의 야인들과 이곳 남주도의 이족 성향이 비슷합니까?”
“맞네. 이곳이 조금 더 발전되어 있긴 하나, 큰 틀에서 보면 아주 흡사하지.”
“역시.”
“음...”
권제를 따라온 관리들조차, 이정호의 말에 조용히 살을 붙여댔다.
조선보다 뒤쳐진 문명수준, 큰 세력으로 뭉치지 못하고 수십, 수백개의 부족과 마을로 찢어진 정치체제, 동시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원수지간인 무리.
뛰어난 사냥꾼이자 야만전사가 있지만 진짜 대군을 만나보지 못한 미숙한 군사체제. 화포를 필두로 한 화약무기를 접해보지 못한 이들. 등등.
기후가 다를 뿐이지, 연해주의 야인여진과 대만의 원주민 무리는 조선 입장에선 거의 똑같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그 경험을 한껏 살려야 하지 않겠나.
이정호는 여진족을 정탐하고 지도를 만들기 위해 특전대를 무장상단으로 운영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똑같이 움직였다.
말을 잘 듣는 부족과 마을은 회유하고, 말을 안 듣는 이들은 기병과 화포로 기를 죽여 놓고, 조선과 중국의 선진물산을 마구 뿌려대며 조선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이젠 그 결실을 따먹을 시간이 다가온 거지.
“그렇군요.”
“헌데, 자네가 여기 왔다는 건...?”
“예. 자동에서 물산을 구입해서 왔습니다. 여기.”
권제가 가볍게 손을 까닥이자, 뒤에 있던 관원이 냉큼 서류철을 내밀었다.
“...”
이정호가 쓱쓱. 보고서를 읽어나가는 속도에 맞춰, 승정원 관리와 권제가 음률을 타듯 말을 이어갔다.
“조정에선 이주를 진행하는 동시에 남주를 개발할 예정입니다. 다만 전답을 개간해서 수확을 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탓에, 돈이 되는 작물을 먼저 키워서 군자금을 벌충할 생각입니다.”
“그게 사탕나무라는 건가?”
“예.”
이정호라고 설탕을 모를 리가 있나.
설탕은 엄청나게 비싼 물건인 터라, 일반 연대병들조차도 사탕나무에 눈이 뒤집혀져서 명령을 안 해도 열심히 조사하고 다녔다.
“이곳에선 이미 키운다고 들었습니다만.”
“맞네. 몇몇 마을에서 키우는 걸 봤지. 크게 하진 않았지만.”
이정호의 말에 다들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원주민이 사탕나무 농사를 지을 줄 안다면, 일이 더 쉬워질 것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