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20화 (320/538)

320. 챕터45. 정복하다 (1)

근 일주일간 출정준비를 끝마치고, 새로운 보급품이 들어오고, 사탕수수밭을 어느 정도 완성하자, 드디어 일만오천의 기병이 남하를 시작했다.

대만섬은 남북으로 길쭉해서, 타이베이에서 가장 남쪽 가오슝지역까지의 거리는 조선으로 치면 한성에서 목포까지 가는 거리와 거의 비슷했다.

물론 일직선으로는 더 길겠지만, 산 넘고 강 건너는 것 까지 생각하면 엇비슷했지.

그리하여 남주강을 따라 남하한지 하루만에 미래의 석문댐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석문댐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동쪽산맥에서 모여든 물줄기가 석문호수를 이루고, 이곳의 물줄기가 남주강으로 이어지는 거지.

그리고 이렇게 나름 입지가 좋은 지역인 만큼 원주민 부족이 살고 있었는데, 나름 사이 좋게 구역을 나눠서 함께 머물고 있었다.

해가 서서히 저물 무렵.

산을 옆에 끼고 달려온 조선군이 원주민 마을을 급습했다.

일만오천이면 그냥 걷기만 해도 지축이 흔들리는데, 예비마까지 포함해 3만필의 말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땅이 흔들리고, 산사태라도 난 것 마냥 굉음이 들이친다.

새카맣게 물들인 검은 두정갑이 깔리기 시작하자, 땅거미처럼 검은 그림자가 창칼을 따라 삐죽삐죽 솟아나 밀려든다.

“어...?”

“도망쳐라!”

“피해라!”

난데없는 괴사에 나무를 베던 원주민은 집으로 도망치고, 호수가에서 물고기를 잡던 이들도, 밭벼인지 뭔지 모를 작물을 심던 이들도.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죄다 내팽개치고 마을로 달아났다.

뭐가 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건만, 저 먼 곳에선 먼지구름과 함께 지진이 몰려오니 절로 두려움에 떨 수밖에.

그런 원주민들을 향해 기병들은 양떼를 모는 양치기처럼, 유려하고 매섭게 움직였다.

“그대로 몰아쳐라!”

“정렬! 제대를 유지해라!”

“쓸데없이 날뛰지 마라! 그냥 느긋하게 밀어붙여!”

연대별로 찢어진 기병들은 기병 특유의 기동을 선보이며 호숫가에 있던 마을을 하나하나 포위하기 시작.

줄줄이 이어진 기병의 띠가 빙빙 돌면서 사람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막고, 이따금씩 눈먼 화살을 쏘아 올리며 위력시위를 이어갔다.

“잘하는 군.”

“포위전술은 저희가 매번 하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실전에서 하는 건 또 다르지. 30번대 연대부터는 본토에서만 활동했던 녀석들이잖아?”

“그래도 선임병들은 기존 연대에서 차출된 녀석들이니, 얼추 분위기는 만들 줄 알겁니다. 본토에서 사냥할 때 매번 했던 거니까요.”

“음...”

연오랑은 연대장 윤평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특전대대장을 역임했던 윤평은 특전대에서 나와 연대장이 되었고, 신입 연대장들 중에서는 그나마 연오랑과 안면이 있지 않나.

연대장들은 부담스러운 연오랑과의 만남을 윤평에게 은근슬쩍 미뤘고, 그 탓에 그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었다.

굳이 연차로 따지면 착호군 시절까지 합쳐서 윤평보다 오래된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확실히 섞은 보람이 있는 것 같은데?’

연오랑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마을을 포위하고 있는 연대들을, 망원경을 들고 유심히 살폈다.

직접 창칼이 부딪치는 싸움이 아니어도, 기병의 기동을 보면 대충 훈련성과를 짐작할 수 있지 않나.

그도 이젠 짬밥을 먹을 만큼 먹어서, 대충 보면 감이 잡힌다. 저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기병들이다. 예전 착호군 1기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으니까.

“몽골원정 때부터 함께 했던 병사들은 전부 소대장쯤은 됐겠지?”

“예. 훈련원 성적에 따라 갈리긴 했지만, 다들 그 정도는 됐을 겁니다. 진급을 못 했으면, 군부에 있을 운명이 아니겠지요.”

“글쎄...”

연오랑은 놀랄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윤평을 힐끔 살피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조선군이 언제부터 공과를 가지고 진급을 논했다고, 이렇게 태평한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허나 그건 연오랑만이 알고 있는 미래이자, 이젠 지워진 과거지 않나.

십여년간 조선을 위대하게 만든 조선군 지휘관들은, 이미 옛 기억은 잊어버리고 죄다 신문물에 적응을 했나 보다.

연차와 신분에 따라 자리에 눌러 앉은 게 아니라, “능력이 부족해서 못하면 잘려야지.”라는 반응을 자연스럽게 보이고 있다.

“계급을 나눈 게 확실히 도움이 되나보네.”

“그렇습니다.”

윤평은 연오랑에게 자신하듯,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존경을 표했다.

조선군은 물론이고, 아마 전 세계의 군대에서도 병사들의 계급을 구분하는 나라는 없을 거다. 뭐... 연차가 높은 이들이 암묵적으로 선임병 역할을 하긴 했겠지만 말이다.

원래 역사에서도 병사의 계급을 나누기 시작한 건, 병사들에게 뭐 줄게 없으니 돈이 안 드는 명예와 완장이라도 채워주기 위해서 계급장을 나눠준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그것도 앞으로 수백년 후. 개인화기가 보편화된 근세 시절에 시작된 거니, 지금 시대에는 꿈도 못 꾸고 그런 생각을 해본 이들도 없었다.

그러니 계급을 만들어내고 적용시킨 연오랑을 보며, 윤평이 존경의 눈빛을 뿌릴 수밖에.

‘이 아저씨가 부담스럽게...’

연오랑은 윤평의 눈빛을 흘기면서도, 내심 흡족해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이미 오래된 이야기지만, 착호군은 착호군만의 계급이 있지 않았나. 허나 군부가 되어 덩치가 커지면서 계급의 구분이 더욱 심화됐다.

지휘관인 위관급 밑에 병사인 사관급이 들어서서, 병사들을 연차에 맞춰 대사,중사,소사로 구분했다.

다만 미래의 기억이 혼재하는 그에게는 부사관 급인 상사,중사,하사가 일반 병사계급으로 불리는 게 꽤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거지, 다들 아무렇지도 않아 하잖아? 그럼 됐지. 뭐.’

사실 조선군 입장에선 군 계급을 전부 대,중,소로 구분했는데 갑자기 상,중,하가 튀어나오면 이상하잖아?

부사관이 없고 그 역할을 위관급이 대신하다보니, 병사들도 대,중,소로 구분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금 조선은 군호가 점점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모병제로 전환되고 있는 상황.

조선인들 입장에선 훈련소에서의 훈련과 시험이 갑사임용시험으로 대체된 거고, 훈련원은 무과가 대체된 걸로 인식했다.

그러니 병사들이 하급무관인 갑사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서, 내외적으로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거지.

뭐. 병사들의 녹봉을 줘야할 재정부 관원들만 앓는 소리를 하겠지만.

그가 딴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연대병들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마을을 접수해 나갔다.

한 개의 마을과 부족이라고 해봐야, 그 수가 많아봐야 오천도 안 될 정도.

가호로 치면 천개 정도니, 두세개의 연대기병이 등장해서 말발굽소리만 내어도 허물어질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가지.”

“옙.”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요란스럽게 휘날리는 소대깃발을 따라, 연오랑은 느긋하게 이동했다.

사람들을 몰아넣어 온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진동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로 진입했다.

제대로 된 목책도 없어서, 그냥 듬성듬성 집들이 박혀 있었다.

‘씁... 냄새 봐라.’

두툼한 갑옷까지 입고 있는 터라 땀 냄새가 진동하지만, 마을의 악취는 그걸 뚫고 들어와 코를 찌른다.

“그래도 집을 짓고 살긴 사는군.”

“예. 기와가 없긴 하지만 이 정도면 뭐... 초가집과 비슷하군요.”

“그래. 토굴이 아닌 게 어디냐.”

“...”

농담인지 진담인지 몰라서, 윤평은 대답을 아꼈다.

‘흠... 전에도 느꼈지만 이 시대는 정말 요지경이란 말이지.’

그는 엉성한 초가집과 토굴의 중간쯤에 위치한 집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바다 건너 복건의 복주에선 5층짜리 목재건물이 즐비한데, 바로 코앞에 있는 이곳은 초가집조차 제대로 못 만들고 있지 않나.

문명의 격차가 이렇게 커도 되나 싶을 정도다.

‘괜히 야만인이라 부르는 게 아니고, 괜히 제국주의적인 생각이 드는 게 아닐 거야.’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 다 똑같은 놈들이 자신들만 잘났다고 우월감에 빠져서, 원주민들을 하등민족으로 구분해 노예로 부려먹은 게 아닐까 싶다.

‘이거 어쩌면 본토에서도 그럴지 모르겠네. 그건 아닌가?’

그는 홀로 자문자답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이런 문명의 격차는 원래 역사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나. 조선도 한성만 번화하고, 지방은 깡촌인 곳이 일반적이었지.

‘하지만 양전사업과 태종이 돌아다니면서 지방도 꽤 발전했지? 아마?’

허나 지금 역사에선 본의 아니게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도 함께 발전하고 있다.

먼 미래처럼 서울만 사람이 몰려 고도로 발전한 게 아니라, 어쩌면 지방 균등발전이 이뤄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쁜 건 절대 아니고... 어차피 본토에 사람을 밀어 넣으면 넣을수록 한성이 아니라 지방으로 퍼질 거 아냐. 그럼 다 같이 발전하게 되겠지.’

시대가 시대인지라, 운송수단의 미비로 고도로 밀집된 도시를 유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정에서도 돈을 쏟아 부어 한성과 그 인근에 수십만명을 밀집시키느니, 전부 지방에 뿌려서 돈이 덜 들게 먹여 살리는 길을 택하지 않을까.

‘그럼 뭐... 지금처럼 각 주도와 대도시 중심으로 덩치를 불리겠지. 없던 도시가 생기기도 할 거고.’

만주신도시는 물론이고, 철원, 김포, 함흥가 같은 곳에도 수만명이 모여 사는 새로운 도시가 생겨나지 않았나.

대만 원주민을 비롯해 온 사방에서 긁어온 귀화인이 들어와도, 같은 수순을 밟아갈 거다.

“충성! 총사령관님.”

“뭐냐?”

“촌장과 그 일가를 잡아뒀습니다.”

“다친 이들은?”

“연대병은 없고, 원주민 중 몇몇이 다치긴 했지만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닙니다.”

“오냐.”

자랑하듯 말하는 연대장을 보며, 연오랑은 히죽 미소를 지어줬다.

이렇게 많은 병력을 끌고 왔는데, 다치면 그게 더 웃긴 일이다.

‘쟤들은 이렇게 많은 병력을 처음 봤을 거 아냐? 싸울 마음을 먹은 놈들이 이상한 거지.’

원주민들 입장에선 보지도 못한 갑옷을 입은 대군이 등장했는데, 이에 대항해서 싸운다고? 미친 소리다.

조선군의 존재에 대해선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으니, 아마도 “올 게 왔구나.”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그런 탓인지 촌장 일가를 붙잡아 놓은 곳은 어째 부담스러울 정도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충성!”

“역관은?”

연오랑이 묻기 무섭게, 이미 남주로 자발적으로 합류해 찰싹 달라붙은 고려계 원주민이 달려왔다.

남주에 있던 원주민들은 연오랑을 필두로 조선군이 미친 듯이 밀려오자, 완전히 꼬리를 말고 엎드리지 않았나.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말을 끌고 줄줄이 하선하자, 이런저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완전히 굴복했다. 더불어 뭐라도 하나 더 얻기 위해서 역관이 되겠다고 달려든 이들이 한가득이었고.

“항복할 건지 물어봐라.”

“예. 장군.”

통역이 뭐라 말을 하기 무섭게, 촌장 일가는 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넙죽 엎드려 생존만을 간청했다.

“항복하겠다고 합니다.”

“그래? 고향이 어디라고 하냐?”

“자신들은 여기서 나긴 했는데, 촌장 일가의 조상이 복건에서 왔다고 합니다.”

“언제?”

“할아버지 대에 왔다고 합니다.”

“음.”

‘역시, 원말명초 시대에 넘어온 모양이네.’

연오랑은 역시나 싶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별거 있나. 촌장 일가는 지금 당장 남주로 데려가고, 나머지는 내일 날이 트면 데리고 가라. 33연대가 맡으면 될 거고... 2개 중대면 될까?”

“수가 많으니 3개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연대병이 점령한 마을이 이곳 하나가 아니니까요.”

“음...”

이 호수근처에 사는 마을이자 부족만 4개고, 지금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마을을 점령한 것 아닌가. 33연대가 그냥 통째로 맡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렇게 하자. 역관. 말을 전해라.”

“예! 장군.”

통역을 맡은 원주민은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 마냥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토해냈고, 촌장 일가는 연오랑을 힐끔 보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역관이 필요하니, 촌장 일가 중에서 한어를 할 줄 아는 이가 있는지 물어봐라.”

“...”

통역이 열심히 침을 튀겨보지만, 촌장 일가는 그저 “나 죽었다.”싶어서 넙죽 엎드릴 따름.

자칫 잘못하면 인질이 될까봐서 두려운 모양이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 대에 넘어왔으면 한어를 못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예.”

연오랑이 빈정거리기 무섭게, 윤평의 눈빛을 받은 호위들이 칼을 뽑아 들었다.

굳이 이런저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나서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라는 걸 몸으로 보여주자, 촌장 일가의 눈빛이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콩가루 집안이군.”

“그런가 봅니다.”

연오랑이 피식 비웃기 무섭게, 엎드려 있던 이들 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한어를 내뱉었다.

미래에는 광동어라 불릴 민남어라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연오랑은 물론이고 북방한어를 할 줄 아는 몇몇 지휘관조차 못 알아들었다.

대신 알아들은 건, 통역을 자처해서 온 원주민들.

“따라가면 목숨을 구제해 달라고 합니다. 장군.”

“큭. 안 죽인다고 하지 않았냐. 따라오는 이에게 상을 주고, 통역을 전담할거라 일러라.”

“예.”

통역을 맡은 원주민이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콕콕 찌르자, 촌장의 아들 중 한명으로 보이는 이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얼굴과 허리가 펴지는 게, 죽기는커녕 오히려 통역을 자처하는 게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기회인 걸 알아차린 것 같다.

‘나름 머리가 돌아가나 본데?’

연오랑은 그 속마음이 읽어져서,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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