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챕터45. 정복하다 (3)
객가인이 확실한지 촌장은 민남어와 북방한어가 뒤섞인 것 같은 객가어로 말을 토해냈는데, 제대로 알아듣는 이가 없어서 통역끼리 서로 의견을 나눠야 했다.
“그게... 명이 망하고 나서 왔다고 합니다. 어찌된 건가 하면...”
통역 중에서도 나름 조선군과 친분이 깊은 이가 있는지, 조선말을 할 줄 아는 고려계 원주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놀렸다.
두서없는 설명이 이어졌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운석핵꿀밤으로 명이 망하고 나자, 온 사방에서 쟁투가 벌어졌고, 그 결과 광서,광동,복건의 수많은 한족들이 소수민족에게 밀려 다른 곳으로 떠 밀려갔다는 거다.
말 그대로 대이주와 비슷했는데 강남에서 거꾸로 호광,섬서,하남등지로 떠났고, 그에 못지않게 많은 이들이 동남아시아와 이곳 대만섬까지 흘러들어 오게 됐다고 했다.
“흠. 그렇게 심각했던가?”
“헌데 어째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
“명이 망한지 벌써 삼십년에 가까워지지 않았나. 이미 끝난 사안일 걸세.”
“그게 맞을 걸세. 호족세력이 힘을 키우면서 이미 쟁투가 벌어지지 않았나. 그 사건에 끼어서 관심을 받지 못했겠지.”
연대장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놨다.
‘버려뒀던 대만섬까지 온 걸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분쟁이 훨씬 격렬했던 모양인데? 하긴 충분히 그럴 만하지. 대리국이 부활했으니,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거야.’
연오랑 또한 보이지 않는 과거를 유추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다.
원,명 모두 제국이었고, 거대한 덩치를 가진 제국은 토착세력을 포섭하고 각지의 문화와 관습을 어느 정도 인정해 제국의 통치하에 놓는 게 일반적이다.
게다가 한족이 주류가 된 미래에야 소수민족이라고 부르지만, 이 시기에는 소수민족이라는 말도 없고 각기 다른 민족으로 정체성을 형성해 서로를 구분하고 한족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지.
굳이 객가인까지 가지 않더라도 남하한 한족과 소수민족은 끝없이 싸웠고, 피를 섞어 한족화 되고, 한족의 발달된 체제에 흡수되어 갔으니까.
허나 명이 망하자, 이러한 밀월관계가 끝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중앙의 힘이 약했던 광서,광동,복건이고 한족 호족조차 들고 일어난 판국에 소수민족이 가만있었을까.
다만 이러한 분열이, 연오랑의 생각보다 훨씬 격렬하고 급격하게 진행된 것 같다. 소수민족이 “빼앗겼던 우리 땅을 되찾겠다. 다 꺼져라!”라면서, 한족을 무더기로 쫓아낼 줄은 몰랐으니까.
‘오죽했으면 대만섬까지 왔겠어. 강남의 내륙 쪽은 진짜로 난장판이겠네.’
애초에 광서,광동,복건 내륙은 산이 많은 지역이라서, 해안가 위주로 발달해서 소문이 퍼지기도 쉽지 않은 곳. 아마 조선은 물론이고 다른 성의 호족들도 그곳 사정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허... 잠깐만, 그럼 원래 대만섬에는 이보다 더 적은 수의 원주민이 살았다는 거잖아?’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자, 연오랑은 뜬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근 삼십년사이의 급작스런 이주로 사람이 늘어서 이 정도라면, 원래 역사에서의 대만 원주민은 대체 몇 명이었을까.
‘진짜로 10만명도 못 됐던 거 아냐?’
천명 남짓한 네덜란드 무역상이 다두왕국과 싸워서 승리한 걸 보면,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
‘운이 좋았군. 더 늦게 진출했으면 일이 꼬였을 지도 모르겠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한족이 꾸준히 이주를 했다면, 원래 역사와 전혀 다른 역사가 펼쳐졌을 거다.
덩치가 작긴 하겠지만, 원주민 왕조가 아니라 한족 왕조가 생길 가능성도 있지.
어떤 측면에선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겠다.
‘뭐. 이래나 저래나 나쁠 건 없잖아? 어차피 죄다 끌고 갈 거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연오랑은 그리 생각하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회의는 나중에 하면 되고, 일단은 객가인들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다른 곳에도 객가인이 있냐?”
“그렇다고 합니다. 서로 자주 교류하진 않지만, 위치는 알고 있다고 합니다.”
“좋군. 촌장의 혈족을 통역으로 데려가겠다.”
“...!”
연오랑의 단언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이들은 화들짝 놀라 머리를 쳐들었다가, 이내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선 다시 푹 숙였다.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됐는데, 이제 와서 반항할 수도 없는 노릇.
확실히 강남에서 넘어와서 그런지 혈족을 데려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곧잘 알아차린 모양이다.
“촌장 일가는 따로 모아서, 다른 마을의 촌장과 함께 데려가라.”
“알겠습니다.”
연대장들은 하나같이 답을 하고선, 곧장 토루를 들쑤셔 객가인들을 포로로 잡아 숙영지로 데려갔다.
“빨리 움직여라!”
“쓸데없는 짐은 줄여!”
“어차피 가면 식량이 있다. 짐을 최대한 줄여라!”
연대병들은 나름 온건하게 무기도 빼어들지 않고 객가인들을 부렸고, 함께 따라온 원주민 통역들만 목청을 높여댔다.
그래도 확실히 기가 꺾이긴 꺾인 모양인지, 객가인들 치고는 꽤나 얌전히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촌장 일가를 정리하는 건 잘 되겠지?”
“그야 저희가 매번 해오던 일 아닙니까. 이 장군이라면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음.”
연오랑은 윤평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조선은 여진을 흡수하면서 그들의 결집력과 구심점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나.
촌장 일가, 암묵적인 권력자, 주술사와 같은 종교지도자를 전부 털어내서 부족과 단절시켜서 따로 관리했다.
이들은 자기 부족과 있을 때야 상전이지만, 조선인들 사이에 던져 놓으면 그저 흔한 귀화인 가족에 불과했으니까.
십여년 동안 이 작업을 꾸준히 해왔으니, 대만 원주민 촌장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그나저나... 어떻게 생각 하냐? 근래에 이주민이 이렇게 많이 몰려 왔는데도 몰랐던 걸 보면, 조사가 잘못된 거 아냐?”
“그게...”
윤평은 이정호의 허물을 들추는 것 같아 말을 조심하다가, 나름 친분이 깊어서 그런지 몰라도 옹호하는 말을 내뱉었다.
“사실 선발대가 남주에 정착하고, 개척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치지 않았겠습니까. 학질의 예방책을 찾지 못했다면 쉽게 움직이기도 힘들었을 터...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이 남주도를 몇 안 되는 인원으로 샅샅이 훑고 다니진 못했을 겁니다.”
“그런가...?”
“예. 일 년 남짓한 사이에, 이 정도까지 부락의 위치와 인원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힘을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정체와 이주역사까지 알아내는 건 쉽지 않았겠지요. 이들도 아국을 경계해서, 거래를 거부하는 곳이 분명히 있었을 테니까요.”
“...”
“따지고 보면 이들의 가호수와 무장상태, 생활수준이 중요하지, 근원이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연오랑은 열심히 변호하는 윤평을 보며, 결국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맞는 말이긴 해. 사람 수에 비해 일이 많긴 많았어.’
“게다가 택리부 관원들은 진공경로를 짜는 것에 더 집중했을 거고 말이야.”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윤평은 얼굴이 펴진 연오랑을 보며, 히죽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내 정리가 끝나고, 연대는 객가인을 이끌고 다시 거꾸로 올라갔다.
다들 이삿짐을 한 꾸러미씩 안고 걷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기병들은 간식거리로 가져온 어포를 찔끔찔끔 나눠주며 환심을 사고 있었고, 뭣도 모르는 객가인 꼬마들은 부모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포를 주워 먹으며 돌아다녔다.
“와아아!”
“흐히!”
사정 모르는 꼬마들은 무거운 분위기를 금세 잊어버리고선, 생전 처음 본 기병대의 위용에 홀려서 눈을 떼지 못하고 흥에 잔뜩 취해 있었다.
반대로 객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걸으면서도, 목소리를 잔뜩 죽이고서 대화를 이어갔다.
“조선?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거기가 어디야?” “고려 아닌가 고려?” “저들이 여기까지 왜 왔지? 여기도 조선땅이 되는 건가?”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등등.
귀뚜라미 우는 소리 마냥, 온 사방에서 소곤소곤 귓속말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고 있다.
“대대장들을 모아라.”
“충성!”
느긋하게 걷던 연오랑이 중얼거리기 무섭게, 연락병 역할을 맡은 특전대원 사방으로 달려가 연대장과 대대장을 데려왔다.
“부르셨습니까.”
“가는 길에 얘기 좀 하자.”
“...?”
“원주민이 아니라 근래에 넘어온 이주민이 많다는 건 들었지? 어떻게 생각 하냐? 우리에 적대적일 것 같냐? 아니면 쉽게 순응할 것 같냐?”
“음.”
“그게...”
뜬금없는 질문이건만, 다들 고민을 하긴 했는지 이런저런 의견을 털어놨다.
“강남에서 넘어온 이들이라면, 저희에게 쉽게 굽히지 않겠습니까? 이래나 저래나 저들은 명나라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아국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도, 듣긴 들어봤을 겁니다.”
“맞습니다. 강남에서 살던 이들이라면 그 시절을 잊지 못할 터, 지금처럼 빈궁하게 사는 걸 좋아하겠습니까. 아국의 지원을 받는 걸 크게 반길 겁니다.”
“사실 우리로선 이해하기 힘들지만, 한족 입장에선 아국이나 강남이나 낯설긴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차피 저치들은 말도 풍습도 다른 곳에서 다른 민족과 섞여 살던 이들이니, 아국의 지배하에 들어온들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일이 쉽게 풀릴 거라고 말하는 대대장들의 의견이 있었고.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저치들은 어찌됐건 이 낯선 남주도까지 흘러들어온 이들 아니겠습니까? 악에 받쳐 있을 지도 모르니, 사방을 경계하고 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쉽게 고개를 숙일 이들이라면, 이미 강남에 흩어져 자리를 잡았을 겁니다. 아무리 호족세상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영농이 있고 빈 땅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전란을 피해서 온 이들이니, 아군이 무력으로 병탄하는 것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일이 어렵게 될 거라고 말하는 반대의견이 첨해하게 대립했다.
대만 원주민을 놓고 이어지던 말싸움은 어째 강남의 정세로까지 이어져서,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조선에게 이득이 될지에 대해서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
다만... 연오랑은 말싸움을 붙여놓고서, 혼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실실 웃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가 잘들 돌아가는데?’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
무식한 칼잡이들이 외교관마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퍽 뿌듯함이 차올랐다.
조선군이 점점 비대화됨에 따라서, 기존 무관 역시 야전지휘관으로 변모.
정확히 말하면 개개인이 알아서 익혀야 할 일을,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을 통해 능력을 향상시켰다.
훈련원에서의 고급지휘관 교육은 전술, 전략을 넘어서, 군행정 및 민관군의 합동, 국제관계에 대한 논의까지 이어졌으니까. 이를 위해서 지휘관을 교육시킬 행정관료를 조정에서 불러왔을 정도지.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자리 잡은 모양이야.’
새로 임명된 연대장과 대대장들이 저렇게 국제정세를 논하는 걸 보면, 확실히 제대로 배우긴 배운 것 같다.
기존 무관들은 무과로 인식되는 훈련원 초급과정에 합격했으면, 그 다음 수순은 알아서 경력을 쌓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 조선이라면 이게 맞았고.
허나 연오랑은 미래의 제도를 가져와서, 대대장급 이상이 배워야할 고급교육과정을 집어넣었다.
다만 무과가 군부로 완전히 분리되자 조정에선 “이제 무관이 조정에 들어올 수도 없는데, 군인이 그런 걸 왜 배우냐?”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내 곧 필요성을 깨달았다.
상비군체제로 바뀌면서 미친 듯이 치솟는 군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육군은 맹수사냥을 통해 얻은 부산물, 산길을 개척하면서 생긴 부산물, 기타 산이나 습지 등을 개간해서 얻은 땅을 민간기업 및 개인에게 팔아넘겼고.
기존 기선군은 만주일대 및 본토에서 조운선을 운영하는 동시에 민간기업의 물산을 대신 유통해주는 일을 겸했고, 작금에 이르러 수군호가 해체되자 해군의 일거리로 넘어왔다.
바다로 나간 해군은 창설 초창기부터, 동해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팔아넘겼지.
군비를 줄이기 위한 이 모든 작업은 결국 지휘관의 행정, 재정능력을 필요로 했고, 늘어난 개인무장, 불어난 병사 수는 보급, 군수능력까지 요구케 했다.
이래서 예전처럼 그저 칼질을 잘하고, 전술을 잘 짠다고 해서 무작정 지휘관으로 임명할 수가 없는 거지.
그래서 인지 몰라도 초창기에 임명된 연대장들 말고는, 절대다수가 조선인 출신이었다.
‘귀화인이 민관군 합동활동을 하는 건 힘들 테니까. 배워야 할 것도 많을 거고... 아마 한 세대는 지나야 귀화인 지휘관이 등장하지 않을까?’
연오랑은 혼자서 먼 미래를 그렸고, 그러는 와중에도 말싸움은 숙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됐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자, 연대장 대대장들이 모두 모여 거하게 한바탕 토의가 다시 벌어졌지만... 사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원주민이든 이주민이든 조선군에 적대하면 깨부수면 그만. 그 경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달라질 건 없지 않나.
강남에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 무장이 더 충실할지도 모르니, 그저 조금 더 조밀하고 세심하게 작전계획을 짜면 그만이다.
그리하여 조선군은 다시금 말을 달려 남하를 시작했다.
택리부 관원들은 도하할 지점을 미리 정해 놨었고, 조선군은 동쪽 산맥 근처에 살던 원주민들을 쏙쏙 뽑아내 남주로 이주시키면서 계속해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