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챕터45. 정복하다 (4)
촌장 혈족들을 계속해서 통역 및 인질로 흡수해서 끌고 다녔는데, 객가인들은 여기서도 산 근처에서 사는 걸 좋아했는지 무려 3개 마을을 추가로 발견해 흡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동료가 계속 늘어나니, 억지로 끌려와 죽을상을 하고 있던 통역들은 처음과 달리 이젠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일주일 사이에, 조선군에 합류해 끌려온 통역이 서른명이 넘어갔으니까.
그렇게 진격. 흡수. 이송작업을 번갈아 하며 일주일이 지나자. 1차 목적지인 타이중. 남상주의 북쪽을 흐르는 다자강을 마주하게 됐다.
“도하할 곳은?”
“찾았습니다. 수심이 엄청 깊은 건 아니지만 맨몸으로 건너긴 힘들 것 같고... 부교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자재는?”
“근처에 나무가 꽤 있으니 금방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오늘은 여기서 숙영하지. 보아하니 내일이면 한바탕 할 것 같으니까.”
“옙!”
연오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대병들은 재깍 손을 놀려 숙영지를 짓기 시작했다.
부교를 짓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편으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조선은 크고 작은 하천이 엄청나게 많고, 조운선을 비롯한 해상운송이 발달해서 함부로 다리를 놓지도 못하지 않나.
그렇다보니 본토에서 활동하던 연대병들은 부교를 만든 경험이 적지 않아서, 금세 뚝딱뚝딱 뗏목을 이어붙인 것 같은 부교를 만들어냈다.
“금방 하는 군?”
“애초에 이럴 줄 알고 부수재료를 준비해 오지 않았습니까. 용케 이 장군이 남주의 원주민을 이용해서 밧줄을 만들어 놨던 모양입니다.”
“여기나 아국이나 백성들이 밤에 할 일은 비슷한가 보네.”
“예...”
웃음기 섞인 연오랑의 말에, 윤평도 웃음을 함께 머금었다.
해지면 딱히 할 것도 없는 데 뭐하겠나. 조선백성들도 짚신이나 광주리, 혹은 물레를 돌려 길쌈을 하곤 했는데, 이곳 원주민도 비슷한 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여기도 대마와 같은 마포麻布로 쓸 종자가 있나 보네?”
“예. 들어보니, 중국에서 넘어온 이주민들이 퍼트린 길쌈 기술이 다른 원주민들에게도 흘러간 모양입니다. 종자들도 함께 흘러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요 근래에 이주민이 더 많이 들어왔고, 나름 선진기술이라면 선진기술이니... 열심히 배웠겠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옷으로 해서 입기에는 질기고 거칠어서 적합하지 않지만, 밧줄로 쓰면 딱 좋은 파초를 찾았답니다.”
“오. 그래?”
“예. 해군병이 남하주 근처를 정찰하다가 찾아서 가져와 옮겨 심었는데, 남주에서도 꽤 잘 자란다고 하더군요.”
“좋군!”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박수를 쳤다.
일개 병사들조차 이제 알아서 돈벌이와 쓸 만한 물건을 찾아다니는 행태가, 꽤나 마음에 들어서다.
사실 연오랑을 비롯한 모두가 모르고 있었지만, 이 파초는 미래에 마닐라삼으로 불리는 식물이었다.
햇빛, 물, 마찰에 강해서 과거부터 미래까지, 돛줄을 비롯한 각종 밧줄을 만드는데 널리 쓰이는 식물이었지.
“게다가 대못이 있지 않습니까. 부교는 금방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다 대감 덕분입니다.”
“내가 뭘...”
연오랑은 괜히 멋쩍어서,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대못은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한 길이를 가진 큰 못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기존의 못은 은근히 약하고 또 은근히 비싸서, 일회용품을 사용하듯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허나 고품질 강철이 생산되면서 못을 비롯한 꺽쇠, 고리, 와정 등과 같은 철물은 가격이 떨어졌음에도 품질은 높아지지 않았나.
연대병이 대못을 가지고 다니는 게 큰일이 아닐 정도로, 이젠 널리 쓰이게 됐지.
그리고 이걸 만든 게 연오랑이니... 윤평이 그저 연오랑이 기분 좋으라고 아부하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사방에서 동시에 공사판이 펼쳐졌다.
연대병들은 전투도끼를 들고 사방에서 벌목을 이어갔고, 꺾인 나무는 밧줄로 엮어 한 덩어리로 뭉쳐진다.
목수로 변신한 연대병들은 전투도끼를 눕혀 도끼머리로 대못을 쾅쾅 박아 고정시켰고, 이내 뗏목처럼 만든 또 다른 부교조각을 밧줄로 이어 붙였다.
“...”
‘음... 생각보다 빠르잖아? 이거 하룻밤이면 강을 건널 부교를 완성하겠는데.’
연오랑은 시선을 돌려 노을에 서서히 묻혀가는 강 건너를 바라봤다.
타이중. 남상주는 북으로는 미래의 다자강, 남으로는 다두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은 산맥으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이 사이는 비옥한 평야지대였지.
그래서 미래의 다두왕국이 이곳에서 발현할 수 있었던 거고, 지금 역사에서는 보다 빠르게 이주민, 원주민이 뒤섞인 연합왕국 비슷한 게 조직되어 있었다.
역사가 비틀려 강남에서 이주한 한족이 많아지면서, 초기 다두왕국의 형성 또한 빨라진 느낌이니까.
‘다두왕국이야 뭐...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된 연합체니까.’
그는 미래의 기억을 더듬으며, 저 멀리 평야에 살고 있을 원주민들을 떠올려봤다.
연합왕국이라고 하니까 뭔가 거창해 보이는데, 사실 그냥 고만고만한 마을과 부족의 연합체다.
대충 비유하자면 원래 역사에서 5,6개 부족이 뭉쳤다면, 지금 역사에선 그 두,세 배쯤 뭉쳐 있는 수준이랄까.
“저기 있는 마을과 부족이 몇 개라고 했지?”
“32개라고 했습니다.”
‘음... 확실히 많아. 이주민이 이곳에 많이 정착한 게 분명해.’
미래에 네덜란드는 몇 되지도 않는 병사를 가지고 다두왕국과 싸워 승리했는데, 아무리 화승총을 가지고 왔어도 머릿수에서 현격하게 밀리면 승리하기 어려웠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어. 32개 마을이면, 얼추 잡아도 3만이 넘게 산다는 말이잖아? 통합도 통합이겠지만, 저 안에서도 지들끼리 구설수가 많을 거야.’
연오랑은 이런저런 생각을 원주민들의 반응에 대응할 계획을 떠올리고 있을 때.
“충성!”
“...?”
“31,32연대의 보고입니다. 강 하류에 있던 6개 부족과 마을을 점령했고, 촌장 혈족을 데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피해는?”
“그게...”
연대병은 괜히 자기가 답하기 껄끄러웠는지, 냉큼 전투보고서를 내밀었다.
“씁...”
혼합지에 연필로 간략하게 적은 전투보고서지만, 왠지 모르게 검은 글자가 아닌 붉은 글자로 읽혀지는 것 같다.
“심하게 반항을 한 모양이군.”
“예... 항복하는 척 위장하고서, 31연대를 마을로 끌어들여 기습했습니다.”
“한족 이주민이었다...”
“예. 원주민과 이주민 한족이 섞여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용한 무기를 보니 대부분 강남인들이 사용하는 박도였고, 일부는 언월도와 창, 활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군 사상자는 없고, 마을 주민만 죽었군요.”
연오랑이 넘겨준 전투보고서를 받아 읽은 윤평은, 조심스럽게 평을 내놨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고 해도, 연대기병이 전부 마을로 진입해서 약탈을 하거나 노략질을 하진 않았을 게 분명.
보나마나 군기가 흐트러지지 않는 연대병을 보며 오히려 마을주민들이 조바심이 나서 엉성하게 칼을 들이밀었을 거고... 그 대가를 피로 치렀어야 했을 거다.
“씁... 다른 마을의 반응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나름 위력시위를 한 꼴이 된 걸까요?”
“글쎄. 일단 오면 들어봐야지.”
연오랑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윤평은 전투보고서의 다른 내용을 특전대원에게 물었다.
“그리고 해군을 만났다고?”
“예. 아군을 확인하고서 폭죽신호를 올렸고, 남상주로 남하한다고 알려왔습니다.”
타이중. 남상주가 목표지만 다자강, 다두강 하류 인근에도 마을이 있는 건 당연한 말.
그들이 연합체에 속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대는 분견대를 파견해 일단 굴복시켜서 데려오고 있었다.
여긴 이제 임시주둔지로 만들어서, 신도시의 기반을 닦아야 하는 곳 아닌가.
괜히 산맥 근처에 숙영지를 세운 게 아니다. 해안에서 끌고 온 주민들을 이곳에 머물게 하면서 나무꾼으로 활용할 계획이지.
그렇게 해안마을을 점령하다가, 해군과 마주친 모양이다.
“해군이 남상주 앞바다에 등장하면 깜짝 놀라겠군요.”
“그렇겠지. 지금까진 많아야 3척씩 움직였겠지만, 이번엔 9척이나 끌고 왔으니까. 그런데 적시에 해군을 동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저들이 남상주 남쪽 강을 건너서 도망치면 피곤해 지잖아?”
“글쎄요. 저들은 다리도 못 만들어서 나룻배로 돌아다니고 있는데, 쉽게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어차피 항구를 만들 곳을 찾고 있으니... 강 하구를 해군이 점거해, 일부 병력이 상륙하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
'맞는 말이야.'
연오랑은 괜히 혼자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우려를 털어냈다.
사실 피를 보는 건 문제가 아닌데, 그 뒷수습이 문제다.
압도적인 무력에 쉽게 굴복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억하심정을 품고 더욱더 반항적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
게다가 화포에 무지한 원주민이라면 상관없는데, 이주민은 이야기가 또 다르지. 참... 최대한 안 죽이고 이기려고 하니, 걸리적거리는 게 꽤 많다.
‘아닌가? 오히려 아는 게 더 무서운 법이라고, 화포에 더 겁을 먹는 건 이주민일 수도 있잖아?’
문뜩 이런 생각이 들자... 연오랑은 계속 고민을 해봐야 제자리걸음인 걸 깨닫고 생각을 접고 말았다.
다음날이 되자, 조선군은 아침 해가 떠오르기 무섭게 곧장 몸을 일으켰다.
전마들의 몸을 달구기 위해서 사방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기 시작.
밤새 걸어서 끌려 온 원주민들은, 밤에는 제대로 확인을 못했던 엄청난 기병대군의 위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들이 언제 이렇게 많은 기병을 봤겠는가.
이주민이라고 해서 원주민과 크게 다를 게 없었고, 오히려 연오랑의 생각대로 겁을 제대로 집어 먹은 이들이 더 많았다.
보병보다 기병이 몇 배나 무서운 건, 원나라 시절에 시도 때도 없이 밟힌 경험이 있는 강남인들이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준비는 다 됐냐?”
“예. 부교 4개를 모두 올렸고, 특전대는 이미 보냈습니다.”
“좋아. 강을 건넌다.”
“충성!”
부우웅! 웅장한 대라소리가 퍼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휘날리던 검은 깃발들이 속속 한자리로 모여 가지런히 줄을 맞췄다.
폭이 대략 10미터 정도 되는 부교를 기병들은 조심스럽게 건너갔고, 먼저 건너간 기병들은 소대별로 찢어져 주변을 정찰하며 기습에 대비했다.
허나 딱히 반응은 없는지, 본대가 전부 강을 건너올 때까지도 적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다만 그런 한가로운 분위기는 특전대원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내 끝났다.
“적이 오고 있습니다. 수는 대략 2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2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숫자에 자기도 모르게 되묻자.
“남상주 남쪽 강 건너에 살던 부족까지 다 긁어 모은 모양이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거기도 강남에서 넘어온 이주민이 대거 살고 있을 테니, 원주민보다 말이 잘 통했겠지요.”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무장상단이 조사한 내용이 몇 달 사이에 확 바뀔 리는 없을 테니까요. 여긴 진공경로에 속한 곳이라서, 택리부 관원들이 빼먹지도 않았을 겁니다.”
예상보다 많은 적병의 숫자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반기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역시 이놈들도 한번의 전투로 끝장을 보는 게 편하다고 생각하나 보군.’
“어차피 나올 거면 도하를 할 때 오지, 지금 오는 건 무슨 경우지?”
“저들은 확고한 중심이 없는 연합체 아니겠습니까. 원주민과 이주민간의 갈등도 있을 거고, 기존 연합체에 속하지 않은 이들도 있을 거고, 싸우고 싶지 않아하는 이들을 설득하는 시간 또한 필요했을 겁니다.”
“나아가, 저들이 과연 제대된 대병을 지휘할 수나 있겠습니까.”
“아군이 이렇게 빨리 도하할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연오랑의 물음에, 사방에서 답이 쏟아졌다.
“뭐 어찌됐건, 나름 배수진이라면 배수진이란 말이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른 곳으로 도망칠 부족과 마을이었다면, 아군이 남주에 정착해서 활동할 때부터 도망쳤을 겁니다. 이제 와서 급하게 도망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좋아. 회전을 하고 싶다면 맞이해 줘야지. 계획대로 군을 3개로 나눈다. 이곳은 평원이고 아직 수전을 만들지 않았을 터, 말을 달리기엔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최대한 전선을 넓게 만들어라.”
“옙!”
“충성!”
연오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자리에 모였던 연대장들은 각자의 깃발을 휘날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부교를 지키기 위해서, 하늘에서 보면 사각형 진형을 이루고 있던 조선군은 좌군, 우군, 중군으로 쪼개져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군이 항상 훈련했던 것처럼, 중대별로 쪼개져 하나의 제대를 이루고, 그 제대가 격자무늬마냥 겹쳐서 긴 띠를 만들어냈다.
일만이 넘는 기병이 그렇게 넓고 얇게 퍼지니, 제대의 끝과 끝은 당연히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곤 부우웅! 진군을 알리는 대라소리에 맞춰, 참새가 조잘거리듯 삐빅! 울리는 호각소리를 따라 말발굽소리가 지축을 흔들기 시작했다.
빗자루마냥 그대로 쓸고 지나갈 기세로, 멈추지 않고 느긋하게 진군을 이어갔다.
이윽고 망원경 시야로 적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어설프군.’
단합이 되지 않은 게 당연한 듯, 하나로 뭉치긴 했는데 제대와 전열을 제대로 만들지도 못해서 삐뚤빼뚤 제멋대로 튀어나온 곳이 부지기수다.
무장상태도 고르지 못했다. 어느 부족이 모여 있는 곳은 찰갑을 입고 있는 반면에, 또 어느 부족은 무기가 아닌 죽창이나 도리깨와 같은 농기구를 들고 나온 이들도 있다.
기병은 역시나 없고, 죄다 보병들 뿐이다.
“쉽게 밟을 수 있겠군요.”
“밟는 게 문제 겠냐. 얼마나 적게 죽이고 승리하는 지가 문제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