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챕터45. 정복하다 (5)
“어차피 죄다 조선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많이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오히려 원한만 깊어져서 문제만 일으키겠지.”
“하지만 또 마냥 잘해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한번 쯤 밟아주지 않으면 저들은 자신들이 잘나서 우리가 봐준 걸로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줄다리기를 잘해야겠지.”
“...”
윤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고 있자. 두두두. 땅이 울리는 진동이 침묵의 빈 공간을 채웠다.
‘얼마나 퍼졌지?’
연오랑은 망원경을 들어, 다시금 전장의 양끝을 살펴봤다.
3군으로 나뉜 조선군은 빠르게 기동해 더욱더 거리를 벌리고 있었고, 흡사 보자기처럼 늘어져서 한 번에 다 싸잡아먹을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반응할까? 군을 나눌까? 아니면 한곳에 집중할까?”
“제대로 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면, 분열하는 건 힘들지 않겠습니까? 통제가 안 될 겁니다.”
“반대로 애초에 하나가 되지 못한 군대니, 단일명령을 따를 생각도 없이 각자 움직일 수도 있지.”
“그럴 지도요.”
연오랑과 윤평은 서로 맥없는 소리만 내뱉었다.
저들의 사정을 알아야 짐작이라도 하겠는데, 아무래도 모르겠다.
“지켜보면 알겠지.”
“예.”
그렇게 계속 지켜보고 있자, 저들의 움직임도 살짝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먼지구름이 확 일어나는 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무려 3만이다. 일렬로 다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숫자.
전열 뒤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병력이 양쪽으로 두서없이 뛰어가는데도, 정면으로 보이는 병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많긴 많군.”
“예비대일까요? 아니면 본대를 나눈 걸까요?”
“글쎄다. 저들이 예비대를 활용하는 방법을 알기나 할까. 흐음. 모르겠네.”
“...”
예비대의 존재는 언제나 중요했고, 예비대를 적재적소에 투입하는 것이 승부의 갈림길이 되는 건 고금의 역사가 증명하지 않나.
다만 병법을 제대로 익힌 이들이 없을 텐데, 과연 그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강남에서 넘어온 이주민이니, 책으로 병법을 익혔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실제로 적용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연오랑은 그런 생각이 절로 떠올랐고, 윤평도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남주도 원주민들은 이렇게 대병을 모아 싸운 적이 없지 않습니까. 아마도 그저 있는 병력을 전부 투입하는 게 아닐까요? 마을단위의 싸움이라면 그게 맞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 기껏해야 수백명 많아봐야 수천명이 서로 뒤엉켜 싸웠을 텐데 얼마나 정교한 전략전술이 필요했을까.
어쩌면 저들이야말로 개인의 무용에 기대는 전술을 썼을 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건 간에 적군은 가시거리에 확실히 들어왔고, 3군을 따라 그들 또한 넓게 퍼진 꼴이 됐다.
“계속 쫓아오겠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유인책인 걸 안다고 해도 쫓아올 것이고, 아군이 오늘 당장 부교를 건너왔으니 함정을 팔 시간이 없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
‘맞는 말이야. 저놈들은 어떻게든 우리에게 달라붙어 강 쪽으로 밀어붙이려고 하겠지.’
교묘한 전략이 없어도, 저들은 아군 기병이 전선에서 빠져나오는 걸 어떻게든 막으려 할 거다.
배수진이라는 말을 괜히 했을까.
여기서 밀려나면 곧장 저들의 마을이 있으니, 어떻게든 마을이 약탈당하는 걸 막으려 할 거다.
‘어쩌면 저들도 우리 소문을 듣고 저렇게 움직이는 걸지도.’
조선군은 침략자답지 않게, 죄다 죽이지 않고 꽤나 온건하게 원주민을 대하고 흡수하지 않았나.
대병을 이끌고 오면서 벌어진 일은 저들이 모르겠지만, 남주의 선발대가 벌인 흡수작전은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을 터... 아군이 저들을 놔두고 마을을 약탈하러 가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들도 참 고민이 많겠네. 어쩌면 이곳에 나온 게 전 병력이 아니라, 마을에도 병력을 놔둔 걸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가.
‘아니지. 어차피 이번 일전에서 쓰러지면 마을에 병력을 남겨두나 마나 상관이 없잖아? 어떻게든 승리하기 위해서 전부 끌어왔을지도 모르지.’
또 반대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적들은 조선군의 움직임을 예측하느라 머리가 아프겠지만, 연오랑도 마찬가지였다.
‘씁... 최대한 덜 죽이고 이기려니까, 걸리는 게 너무 많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병력은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고, 말발굽과 맨발에 밟힌 대지는 계속해서 신음을 흘려대며 울어댔다.
그리고 삐유웅! 펑! 하늘 저편에서 노란색 폭죽이 펑하고 터지더니, 도미노처럼 펑펑펑! 폭죽의 세례가 이어졌다.
“화기대가 방열을 끝마친 모양입니다.”
“좋아. 조금씩 접근하라 일러라. 화살은 적당히 자제하고.”
“옙!”
두두둥! 연오랑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쪽에 있던 고수가 큼지막한 북채를 사정없이 휘두르며 날뛰기 시작했고, 뒤이어 심장을 뛰게 하는 빠른 박자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와아아!”
“천천히! 평보平步!”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삐빅! 호각소리가 다시금 이어지자 온 사방에서 솔매가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가시거리에 들어서자, 한쪽은 웅성거리는 두려움이 다른 한쪽은 침묵의 결의가 감돌았다.
갑자기 뜬금없이 폭죽이 터진 것에 화들짝 놀랐는지, 아른 거리던 기병이 진짜로 모습을 드러내 성큼성큼 다가오자 적군의 움직임이 살짝 멈추는 것 같았다.
아직 오려면 멀었지만 벌써부터 겁을 집어 먹은 이들도 있는지, 안 그래도 요철처럼 중구난방 했던 전열은 더욱더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후흡.”
“...”
서로 거리를 한참 두고 떨어진 연대병들. 그 뒤로 첩첩이 쌓여 4열 횡대를 이룬 중대 제대 뒤로는, 언제나처럼 전령의 역할을 맡은 특전대원이 정신없이 깃발을 휘날리며 달리고 있었다.
특전대원이 중대장에게 명령을 전달하기 무섭게, 삐빅! 호각소리와 함께 명을 이어받은 소대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리를 더 벌린다. 이동!”
“이동!”
중대장이 앞장서서 움직이자, 앞으로 꾸준히 나아가던 제대가 순식간에 횡대에서 종대로 바뀌었다.
중대 하나만 그랬을까. 대대, 연대 전체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이동하니 벽처럼 다가오던 파도가 갑자기 뱀으로 변해 적진의 옆구리를 휘감기 시작했다.
“잘 하는군?”
“...”
연오랑은 저 멀리 보이는 연대병들의 움직임에 작게 감탄을 표했다. 명이 떨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일사불란하게 기동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군의 전열이자 포위망은 한번더 벌어졌고, 원주민 무리는 또 다시 그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넓게 퍼지고 있었다.
뭐랄까. 장기에서 보여주는 장군 멍군이 따로 없는 꼴. 다만 어째 조선군이 상대를 봐주면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의아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숨기지 못한 걸까? 연오랑은 괜히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윤평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아깝나?”
“저들의 반응속도가 예상처럼 느려서 말입니다. 저희가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따라오지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냥 빠르게 기동해서 측면을 감싸고 전열을 무너뜨리게?”
“뭐...”
윤평은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도 사정을 모를까. 알면서 그냥 푸념을 한 거다.
“그래도 혹시 아나. 대기병방진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강남의 호족군대나 옛 군병출신들도 못하던 걸, 이들이 할 수나 있겠습니까. 게다가 지금처럼 기병의 움직임에 맞춰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는데, 대기병장창을 들고 움직일 수는 없겠지요.”
연오랑이 상대의 전력을 한껏 띄우자, 윤평을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열을 구경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적들의 모습이 연대병들의 눈에 완전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던 형체가 온전한 형상을 만들어내자, 거대한 인의 파도가 앞을 가로 막았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어째 저들의 뿜어내는 악취가 밀려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걸 보고 있는 연대병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파고들면 파고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
각궁을 들고 있는 소대장이 혼자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연대병 또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조선육군은 전부 기병편제로 되어 있어서, 기병이 동시에 보병의 역할을 겸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기병훈련을 하면서도, 반대로 보병이 되어 대기병훈련도 함께 했지. 적을 알아야 나를 아는 것처럼, 둘 다 경험해보면 상대의 약점을 더 잘 알 수 있으니까.
그런 훈련을 지휘했던 소대장의 눈에도 허점이 보일 정도면, 중대장이나 대대장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겠는가.
당장이라도 저 얼기설기 흐트러진 전열의 틈을 비집고 파고들어서, 전열 자체를 일도양단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할 거다.
“사격준비!”
“준비!”
기병들은 느긋하게 평보로 달리고 있었기에, 활시위에 화살을 얹는 동작은 매끈하기 그지없었다. 척.딱.탁. 세 번의 구분동작으로 전부 사격준비를 끝내버렸다.
‘한 번에 무너뜨리지 말고, 질질 끌어서 흔들어 놓아야 한단 말이지.’
소대장은 도하하기 전에 들었던 작전 내용을 떠올리며, 괜히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최고지휘관인 연오랑도 골치가 아픈데, 하급지휘관들 입장에선 어떻게 느껴지겠는가.
“뭐 이렇게 어렵게 하나. 그냥 밟으면 안 되나?”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아마 지휘관이 연오랑이 아니었다면, “탁상공론 아니냐?”라고 불만을 표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고로 군인은 까라면 까야하는 법.
소대장은 불만을 날려버리고, 삐빅! 저 멀리서 들려오는 호각소리에 그 또한 호각을 불며 목청을 높였다.
“진군! 압박해라!”
“진군!”
“합!”
“저기! 요란하게 깃털로 치장한 놈을 노려라!”
말발굽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중대장의 외침에, 수십개의 화살촉이 한곳을 향했다.
이제 서로가 서로의 눈빛이 보일 정도로 접근하자, 뗏국물에 절어 있는 얼굴과 두려움과 당황으로 범벅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쏴라!”
쉐에엑! 중대장의 외침이 들려오기 무섭게, 화살비는 적 전열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이곳만 그럴까. 전선 전체에서 느닷없이 쏟아진 화살비는, 정말로 소낙비로 변해서 우악스럽게 전열의 선두를 휩쓸었다.
“크헉!” “컥.” “으억.”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난무하고, 제대로 된 갑옷도 없는 이들답게 화살을 맞기 무섭게 갈대마냥 픽픽 쓰러졌다.
혼란은 순식간에 적진을 감쌌지만, 냉정한 눈으로 살펴보면 그리 피해가 크지 않은 걸 알 수 있을 거다.
일제사격 아닌 일제사격으로, 화살에 맞고 쓰러진 이들은 가장 앞서서 요상하게 생긴 깃발을 들고 나섰던 이들이니까.
“후퇴!”
사격을 끝마치기 무섭게 중대는 냉큼 말머리를 돌려 옆으로 빠졌다.
제대간의 간격을 늘어뜨릴 대로 늘어뜨리지 않았나. 기병이 기동할 공간은 충분하고도 남아서, 중대는 순식간에 반전해 처음 출발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후...”
“음.”
연오랑과 윤평. 그리고 호위기병은 먼지를 마시며 바쁘게 뛰기 시작했다.
전선이 길어도 너무 길어져서, 이제 끝에서 끝이 안 보이는 건 당연하고 중군 내에서도 명령을 전하기 힘들어졌다.
발이 안보이도록, 제대 뒤쪽을 통해 달리며 좌,우,중군을 바쁘게 오가기 시작.
그런 연오랑의 움직임에 맞춰서 조선군 전체가 춤을 추듯 꿈틀거렸다.
달라붙어서 화살비를 먹이고, 딸려오면 도망가고, 그렇게 딸려온 적을 뒤따르던 제대가 달려와 화살비로 돈좌시키고.
이 짓을 보이지도 않는 전선 전체에서 하고 있으니, 적군뿐만 아니라 조선군 또한 혼란스러워서 어지러웠다.
몇몇 중대는 적에게 화살을 먹이지 못하고 뒤로 빠지기도 했고, 또 몇몇은 기동할 공간이 충분한대도 방향을 못 맞춰서 서로 부딪칠 뻔 했으니까.
하지만 전쟁터에서 이런 건 일상다반사 아닌가.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었다.
‘최신 연대라서 미흡한 점이 확실히 보이긴 하는데... 이 정도면 훌륭하다!’
연오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감상평을 늘어놨다.
적들이 정예병이 아닌터라 비수처럼 날카로운 반격을 가하고 있지 않지만, 조선군의 기동자체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지 않나.
이들은 포위와 동시에 유인을 하면서, 그것도 직접 창칼을 맞대지 않고 화살을 먹이면서 낚시줄에 걸린 물고기와 씨름을 하는 꼴인데...
아무런 문제도 없이 그냥 진행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흔들리는 것 같지?”
“마을이자 부족 제일의 전사들이 쓰러졌으니, 동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들은 아군의 움직임을 따라오느라, 전선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모를 겁니다.”
“음.”
마을 단위의 싸움에 익숙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개인무용에 기대기 마련.
조선군은 그걸 노리고 그나마 가장 멀쩡하게 서 있는 이들을 향해 화살비를 쏟아주지 않았나.
적진에서도 이따금씩 눈 먼 화살이 날아들긴 했지만, 만여발의 화살을 쏴대는 조선군에 비하면 세발의 피도 못되는 상황.
조선군은 스웜전술을 하듯, 그렇게 화살비를 먹여 기운찬 이들을 저격한 후에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반대로 적들은 분기탱천하면서도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서, 눈앞에 보이는 조선군을 쫓아 딸려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