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챕터45. 정복하다 (6)
“이쪽은 됐다. 가자.”
“옙!”
연오랑은 다시금 반대편으로 달려갔고, 슬쩍슬쩍 뒤로 물러나는 중대와 대대, 더 큰 덩어리인 연대의 뒤쪽을 스쳐가며 연대장들과 눈을 마주쳤다.
총사령관의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가는 연오랑을 보며, 하나같이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그는 계획대로 잘 되고 있다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그저 다시금 전열을 돌파해 중군에 도착했다.
“많이 밀렸군?”
“예. 작전대로 잘 딸려오고 있습니다.”
헐떡거리는 전마의 목덜미를 쓸어주고, 손바닥에 흥건한 말의 땀을 털어내며 연오랑은 다시금 전선과 땅바닥을 살폈다.
지금 적군은 자신들이 딸려오고 있는 걸 알고나 있을까.
연오랑이 서 있는 자리는 도하하고 나서, 진군할 때 표시해둔 자리까지 밀려나 있었다.
“여기는 잘 됐고... 우군으로 가자.”
“기동!”
중군의 상황을 확인하기 무섭게, 다시금 말을 달려 반대쪽으로 달려나갔다.
하늘 위에서 보면 조선군은 연대, 중대별로 쪼개져 풍차처럼 빙빙 돌아가고 있을 거다.
그와 동시에 전선을 더욱 크게 벌려서, 양익이라 할 수 있는 좌군과 우군은 점점 더 평야 안쪽으로 파고들어 누르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중군은 팽이처럼 돌면서 점점 군을 뒤로 물리고 있는 상황.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지금.
하늘 꼭대기에서 봤다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전선이 어느 순간 작은 말굽 모양으로 점점 좁혀지고, 조선군이 적군을 삼면에서 포위해 중앙에 밀어 넣은 걸 확인할 수 있을 거다.
다만 전선이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이리 끌려갔다가 저리 끌려갔다가, 사방에서 먼지구름은 피어오르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말발굽소리와 비명소리가 진동하니...
적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처지에 처했는지도 모르고 있을 거다.
적 중심부에 분명 마을 대표, 촌장, 지휘관들이 몰려 있거나 어쩌면 마을 전체를 이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병력을 한손에 움켜쥐고 움직이기에는 판이 너무 커져버렸다.
연오랑은 세 번에 걸쳐 계속 좌,우군을 왔다갔다했고, 그 때마다 점점 적들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걸 느꼈다.
처음에 출발했던 중군에 도착할 때마다, 미리 표시해 놓은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걸 느꼈으니까.
‘2시간쯤 지났나? 힘이 빠지는 모양이군. 줄다리기가 잘 된 것 같아.’
연오랑은 먼지구름으로 가득한 전장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적들은 어떻게든 기병에 달라붙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중군을 강으로 밀어붙이려 했지만 이 또한 막강한 화살비의 위력 앞에 돈좌 당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외치며 밀어붙이고 있지만, 조선군이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막고 있던 걸 알 리가 있나.
“조금만 더!”라는 미련은 적들을 조급하게 만들고 무리하게 만들어서, 오히려 좌,우군으로 가야할 힘을 중군에 쏟아 붓게 했다.
하지만 애초에 전열과 전선은 한계가 있어서, 사람을 밀어 넣는다고 다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아마 분명히 적진 중앙에선, “뭐야. 나보고 어디로 가라는 거야?” “싸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적은 어디 있는 거야?”라고 어리둥절하면서, 남들 뒤통수만 보며 이리저리 따라다니고 있을 거다.
“다 된 것 같지?”
“예. 아마도... 이제 곧 될 겁니다.”
윤평의 말이 끝나고, 잠시 전장을 살피고 있자... 하늘을 수놓는 폭죽세례가 이어졌다.
“좋아! 방포하고, 시간차를 두고 밀어붙여라!”
“옙!”
드디어 기다렸던 명이 떨어지자, 두두둥! 북채는 다시금 시원하게 살풀이를 벌였고.
북소리에 장단을 맞추듯, 피융! 붉은색 폭죽이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뜬금없이 터진 붉은색 폭죽은 먼지구름을 뚫고 하늘에 붉은 빛과 연기를 피워냈고, 난데없는 괴사에 적군은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천지를 찢는 굉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쾅콰콰쾅! 미리 자리를 잡고, 이때만 기다리던 화기대 아닌가.
그들은 어부들이 힘이 빠진 물고기를 물가 근처로 끌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쉬면서 비축해둔 힘을 여실히 토해냈다.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콰콰쾅!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터진 굉음은 이내 곧 비명으로 변해 적진을 뒤흔들었고.
콰콰쾅! 또 다시 터진 굉음은 조금씩 중앙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악!” “으억!” “컥!”
화포를 겪어보지 못한 원주민들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땅에 처박고 벌벌 떨었고, 화포에 대해 풍문으로 들어본 적이 있는 강남 이주민들은 오히려 혼비박산해서 낯빛이 하얗게 질려갔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피냄새와 화약냄새, 철냄새가 진동을 하니,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오그라들어 사지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콰콰쾅! 굉음의 향연은 끝나지 않고 이어지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서, 그저 옆집 친구의 뒤통수만 보며 뛰어다니던 중앙 제대의 적군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퍼퍼퍽! 단순히 벼락이 떨어지는 괴사에 기가 질리기도 전에, 바로 코앞에서 보이지도 않는 뭔가가 날아와 피보라를 일으켰으니까.
후두둑. 십여개의 철환은 바글바글 몰려 있던 중앙을 그대로 강타. 비록 땅이 바짝 마르지 않았음에도, 철환은 퉁퉁 튀면서 자신의 앞을 막는 모든 걸 박살냈다.
“으아악!” “아악!”
“도망가라!” “후퇴!”
“벼락이다! 벼락을 부린다!”
알게 모르게 말굽모양으로 포위진을 형상한 조선군은, 좌군부터 시작해서 우군까지 순차적으로 화포를 쏘아 보냈고...
백여문이 넘는 화포의 순차포격에, 적진은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와아아!”
“승리다!”
동시에. 뭐가 뭐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조선기병들은 모든 화포가 침묵하기 무섭게 승리의 함성을 외쳐댔다.
“됐군.”
“예!”
연오랑과 윤평 또한 마찬가지.
먼지구름 때문에 적진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확실히 적들의 기세가 완전히 꼬꾸라지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위풍당당하게 밀려오던 적들의 선두는 죄다 벌벌 떨고 있고, 적진 사방에서 휘날리던 거적때기 같던 깃발들은 전부 쓰러졌으니까.
“천천히 밀어붙여라! 화살을 쏠 필요도 없이. 그냥 밀어붙여.”
“옙!”
두두둥! 진군의 북소리와 대라소리가 퍼지자. 승리를 확신한 조선군이 일제히 호각소리를 불어대며 적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검은 그림자가 온 사방을 뒤덮고, 위풍당당 질서정연하게 밀려오기 시작하자... 예상했던 대로, 적들은 무질서하게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역시! 대감! 제대로 먹힌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네.”
연오랑과 윤평 또한 중군의 움직임에 맞춰서 천천히 진군하고 있었는데, 적의 무질서한 패퇴를 보며 윤평은 자기도 모르게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다행이야. 질질 끌지 않고 한 방에 꼬꾸라뜨렸네.’
그는 계획을 잘 따라준 연대병들을 떠올리며, 기특해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일을 이렇게 까지 복잡하게 한 이유가 뭔가. 전선이 넓어지면 승리는 쉬워지지만, 적들은 자신들이 지고 있는지 이기고 있는지 알기가 힘들다.
그러니 줄다리기를 하듯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힘을 뺐고, 동시에 최대한 밀집하게 밀어 넣었다.
그래야 중구난방으로 항복을 하거나 의지가 꺾이는 게 아니라, 적군 전체가 한방에 기세가 꺾여 무너질 테니까. 그래야 전투도 빨리 끝나고, 후속 정리도 빨리 끝나지.
그 결과가 지금 보는 것과 같았다.
일제 포격을 했다지만 한문당 한발 밖에 쏘지 않았으니, 엄청난 피해를 입은 건 아닐 테지만... 정신적 타격은 이미 전멸과 다름없는 상황이지.
‘패퇴하기 시작하면, 안 그래도 지휘체계가 엉망인 적은 수습을 하지도 못할 거다. 이대로 밀어붙인다.’
“예비대는 준비됐지?”
“옙! 39,40연대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적들이 보이는 거리를 두고 전장 옆으로 휘감아서 들어가라. 그대로 남쪽에 위치한 강까지 달려가서 적들이 강을 건너서 도망치지 못하게 막아라.”
“...”
“지금쯤이면 화포소리를 듣고 해군도 상륙하고 있을 터, 함께 강을 막으면 될 거다.”
“옙!”
연오랑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령이 달려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와!” “오합!” 우렁찬 함성소리가 밀려들었다.
도하했던 다자강 근처에서 손가락만 빨면서 기다리고 있던 예비연대병들은 연오랑이 있는 지휘부를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가, 기운차게 연대병의 뒤를 돌아 돌진했다.
노인네 이빨처럼 듬성듬성하게 서 있던 조선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철벽으로 변해 단단히 뭉치기 시작했다.
기창을 휘두를 거리만 남겨두고 바짝 달라붙어서는, 거대한 그물로 변해 천천히 적군을 향해 진군을 시작.
이건 그대로 밟아 죽이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이자 선포였으니, 안 그래도 기세가 완전히 꺾인 적들은 감히 대항하지도 못하고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 포위망 가장 끝. 우군 끝자락을 책임지고 있던 45연대장 이진은 느긋하게 말을 몰아가며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원래 역사에서 파저강 전투에서 이름을 날린 이진은, 지금 역사에서도 어째 비슷한 길을 걸었다.
몽골원정을 끝마치고 돌아올 때, 건주위와 이만주를 함께 날려버리지 않았나. 그 때도 무관이었던 이진은 착호군이 아닌 갑사와 토관으로 구성된 북진토군에 속해 이만주 정벌에 함께 했다.
그 일에 크게 감명을 받은 이진은 아예 착호군으로 소속을 옮겨 연오랑 밑에 있었고, 그 후로 온갖 전쟁을 다 따라다니면서 결국엔 연대장 자리까지 오르게 됐지.
홍사석과 비슷한 상황이긴 한데, 이진은 거의 초창기 착호군에 속해 있던 터라 보다 빠르게 연대장이 된 편이었다.
“저기. 저놈들 보이나?”
“예.”
“저거. 총사령관님이 말씀하신 산악부족이 맞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연대장임에도 제대 선두에 서서 진군하고 있던 이진은 망원경을 함께 보던 대대장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충 무두질한 가죽과 나뭇잎인지 뭔지 모를 요상한 하의를 입고, 웃통을 까놓고 있는 무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총천연색을 자랑하는 요란한 깃털모자, 깃털띠를 차고 있는 이들이 부지기수고, 짐승 이빨처럼 보이는 장신구를 차고 있었다.
게다가 뭔가 피부색도 묘하게 까무잡잡했고, 알아보기도 힘든 문신을 어지럽게 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확실히 뭔가 달라.’
사실 조선도 문신을 여러 형태로 했다. 연인이나 의형제 끼리,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군인들이, 그리고 죄수들의 이마에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
다만 이건 전부 글자를 새기는 편이라서, 저렇게 얼굴과 몸을 뒤덮을 정도로 하는 건 절대 아니었지. 중국도 조선과 사정은 거의 엇비슷했고 말이다.
저들은 생김새만 봐도 평야부족과 뭔가 달라보인다.
“그런데 산악부족은 평야부족과 사이가 안 좋다고 하지 않았나?”
“그야 그렇지만... 개별차가 워낙 크지 않습니까. 아군을 상대하기 위해 머릿수를 불려야 했을 거고, 이 근방에 사는 산악부족도 아군을 상대하려면 평야부족의 손이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하긴...”
순망치한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대대장의 추측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수는 대략 이천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럼 못해도 3,4개 부족은 몰려 왔겠네.”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요. 산악부족이 평야부족보다 부족민의 수가 많진 않을 테니까요.”
이진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적들을 지긋이 압박해 들어갔다.
조선군이 촘촘히 뭉치면서 양익으로 길게 퍼져 있던 포위망도 좁아지지 않았나.
괜히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서로 압사당할 일이 발생하지 않게, 조선군은 일부러 퇴각로를 열어주고 정면에서 압박하고 있었다.
그래야 진짜 낚시꾼으로 변해서 뒤를 따라잡으며 쓱쓱 낚아챌 거니까.
허나 저 놈들만은 유독 도망치지 않고, 지들끼리 웅성거리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렇게 날뛰는 걸 보면... 아직 기세가 꺾이지 않은 건가?”
“이곳 남주도의 산악야인들이 워낙 거칠다고 듣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아쉬운 모양입니다.”
“음...”
‘하긴 듣기론 성인식이라는 의식이 있고, 목을 잘라오는 걸로 대신했다고 했지.’
이진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정호를 비롯한 선발대 지휘관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대감께서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저놈들은 사정없이 밟아도 된다고 했고 말이야.’
생각을 정리한 이진의 눈에 순간 살심이 맴돌았다.
이걸 임무형 지휘체계라고 말해야 될지 애매하지만, 군부가 창설되면서 연대장은 작전지휘에 있어서 나름 폭넓은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다.
작전구역과 작전목표만 지킨다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지휘부의 명령을 기다릴 것 없이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던 것.
물론 평시에는 꿈도 못 꾸고, 지금처럼 전쟁을 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
아무튼 그래서일까? 이진은 저들을 제대로 밟아주기로 마음먹었다.
‘대감께서도 산악부족은 평야부족과 기질이 다르다했다. 실제로 듣기로도 그러했고. 그러니 귀화시킬 수 있으면 귀화시키고, 힘들다 싶으면 사정없이 처리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는 스스로 각오를 세우듯 납득했고, 이내 입을 열었다.
“저놈들은 제대로 밟는다. 그리고 도망치는 놈들을 뒤쫓아서 산악부족의 마을까지 쫓아가지.”
“... 마음대로 전장을 이탈해도 되겠습니까.”
“지휘부에 일러두고, 판단에 따른다. 어차피 저들을 뒤쫓으려면 평야전장에서 벗어나야 할 테니까. 그 때쯤이면 대감께서 명을 내려주시겠지.”
“옙!”
대대장 또한 마음 한쪽에선, 진짜 야만인 오랑캐로 보이는 산악부족이 심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별다른 반문도 없이 동의했고, 45연대는 순식간에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투창을 꺼내들었다.
“돌격!”
“진군!”
그리곤 포위망을 깨고 다른 연대보다 빠르게 말을 몰아서, 산악부족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