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26화 (326/538)

326. 챕터45. 정복하다 (7)

‘정말 막으려는 건가?’

이진은 아직도 물러서지 않는 원주민 무리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기병대를 봤을 리가 만무한데... 하룻강아지 범 무섭다는 말처럼, 몰라서 오히려 더욱 까부는 걸지도 모르겠다.

‘음.’

그렇게 다가오는 45연대를 앞에 두고, 원주민 무리가 산개하듯 서로 거리를 벌리며 떨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손에 든 무기는 휘두르기엔 어중간하게 짧은 단창들. 딱 봐도 투창처럼 보인다.

‘허? 우릴 사냥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거칠게 내딛는 말발굽에 따라 흔들리는 시선 너머로, 흡사 사냥감을 상대하듯 서로 연계할 수 있게 거리를 벌리는 이들이 보인다.

이곳 남주도에도 곰이 살고 있었고, 수렵생활을 하는 산악민족이라면 분명 곰을 잡은 경험이 있을 터. 기병대를 정말로 곰처럼 생각하는 걸까.

‘어처구니가 없군. 내빼지 않고 버티는 게 용하긴 하다만...’

이진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생전 처음 본 기병을 곰으로 여기고 사냥을 하려한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인데, 그런 식이라면 지금은 곰 수천마리가 달려드는 꼴 아닌가.

그것도 원거리에서 공격을 할 수 있는 곰이다.

쇄에엑! 이진이 따로 명을 내릴 것도 없이, 적이 50보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사방에서 화살비가 무수히 쏟아져 들어갔다.

투창을 들고 있던 적들은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대신 적들 또한 허둥지둥 화살을 쏘아 보냈는데... 그 수가 비교하기가 민망할 수준.

후두둑. 콩 볶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화살비가 교차했지만, 화살이 지나간 자리는 누가 봐도 극명하게 비교됐다.

“크헉.” “컥.” “억.”

한쪽은 화살에 맞아 우수수 쓰러졌지만, 다른 한쪽은 멀쩡하게 달려들었으니까.

조선군이 쓰는 화살은 갑옷을 뚫기 위해 만든, 송곳처럼 생긴 화살촉이 박힌 유엽전. 적들이 쏜 화살은 제대로 정련이 안 된 잡철, 짐승뼈, 돌을 깎아 만든 화살이다.

활은 또 어떨까. 조선군이 쓰는 활은 어디 내놔도 밀리지 않는 각궁이고, 적들이 쓰는 활은 기껏해야 사냥용 목궁이다.

저런 활과 화살에 뚫릴 거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두정갑을 입을 필요가 없지.

“밀어 붙여라!”

“그대로 밟아라!”

소대원들은 흡사 자신들이 소대장이라도 된 것 마냥 목청을 높였고, 적들은 화살을 몸에 주렁주렁 달고도 쓰러지지 않는 기병을 보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미 뭘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50보의 거리는 화살 한번 쏘고 나면, 한 걸음에 닿을 수 있는 거리.

적들이 다시 화살을 날리고 진영을 짜기도 전에, 조선군 선두는 이미 부딪치기 일보직전이었다.

‘기병은 곰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지.’

선두에 선 기사대 출신 소대가 우악스럽게 적을 짓밟는 걸 보며, 이진은 다시금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병을 막으려면 틈을 줘선 안 되는데, 저렇게 헐렁한 방진을 짜면 쓰나.

유기적으로 투창과 화살을 날려 저지하려던 것 같은데, 그게 악수가 되어 오히려 기병이 돌격할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컥!” “끄악!” “괴... 괴물!”

햇빛에 번뜩이는 강철장갑이 일제히 움직이자, 하나같이 번쩍 빛을 반사하며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눈을 판 사이, 어디서 날아온 건지도 모를 쇠뭉치가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나 적들의 온몸을 때렸다.

언제 활을 쐈냐는 양 전부 편곤으로 무기를 바꾼 기병들은, 살풀이를 하듯 편곤을 휘두르며 나아갔다.

땅에서 치솟은 자편이 적의 턱을 박살냈고, 하늘에서 번쩍하고 나타난 자편이 정수리를 때렸고, 붕! 파공음과 함께 그림자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는 자편이 옆에서 튀어나와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퍽퍽퍽. 뚝배기 학살자라는 별명은 결코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왜구와 몽골, 한족의 뚝배기 맛을 본 편곤이 이번엔 대만 원주민의 피맛을 보고 있다.

가장 선두에서 서서 요란하게 기세를 높이던, 가장 화려하게 치장한 적 족장은 강철의 파도에 휩쓸렸다.

용케도 첫 번째 편곤의 공격을 피했지만 자세가 흐트러졌고, 뒤이어 날아든 편곤이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뼈가 부서져 움푹 파인 옆구리를 붙잡고 흔들리기 무섭게, 퍽! “컥!” 또 한 번 날아든 편곤이 하늘에서 떨어져 어깨뼈를 박살냈다.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허물어지지만, 강철의 파도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피할 틈도 없이 한 번 더 편곤이 날아든다.

뱀처럼 땅을 스치며 날아든 편곤이 족장의 머리를 때리자, 퍼석! 사방으로 피가 튀기며 족장은 그대로 절명하여 대자로 쓰러지고 말았다.

파팍! 선두 바로 뒤에 위치해 있던 이진이 족장에 닿았을 때엔, 족장은 이미 말발굽에 짓이겨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육편이 되어 있었다.

“아악!”

“도... 도망쳐라!”

“족장님이 쓰러졌다!”

족장만 이랬을까.

제대 전열에 엉성하게 서 있던 선두는 모조리 육편이 되어 갈려나갔고, 적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원주민 말을 내뱉으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기세등등하게 나섰던 것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로 쉽게 무너지고 있다.

“하!”

이진은 어디선가 날아온 뭔가를 갑옷으로 받아내고선,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적을 살폈다.

저게 대체 뭔 지 모르겠다만, 웬 이상한 작은 봉을 가지고 후후! 불어대며 뭔가를 쏴대고 있지 않나. 웬 나뭇가지 같은게 갑옷에 박혀서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었다.

사냥할 때 쓰던 바람총을 쏴보지만, 갑옷을 입은 기병에게 통할 리가 만무.

‘뭐야. 이건.’

그는 눈길을 금세 거두고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저들을 상대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컥!” “흡!”

이진에게 한눈을 팔던 적들은 어느새 날아든 편곤에 맞아, 퍽퍽! 머리통이 깨져 허물어졌다.

편곤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 뒤로는, 각자 독문무기를 꼬나든 기병이 줄줄이 스치고 지나갔다.

붕붕. 하늘을 수놓으며 풍차처럼 돌아가는 월도날에 맞아 적들은 등허리가 갈라져 쓰러졌고, 쾅쾅! 벼락처럼 내지른 기창에 적들은 몸에 구멍이 송송 뚫려 내장이 흘러나왔다.

장도를 꼬나든 이들은 붓질을 하듯 날렵하게 곡선을 그렸고, 휙휙!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날릴 때마다 적들은 살이 쩍쩍 찢어져 피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갑옷을 입어도 살까 말까 한데, 맨몸으로 덤비고 있으니 상대가 될 리가 있나.

일방적인 도살극이 펼쳐진다.

한칼에 한명씩.

기병은 적을 죽일 생각도 없는지, 그저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한 대씩 때리며 스치고 지나갔지만... 맞는 사람 입장에선 상대한 적이 수십명이지 않나.

기병이 스치고 지나온 자리에는,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이 없이 피웅덩이와 육편만 가득했다.

“하!” “후...!”

피보라를 뚫고 나오자,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상쾌한 공기가 맡아지는 듯 했다.

눈앞을 가득 채우던 적군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적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보고 있다.

“정렬!”

“정렬!”

삐빅! 호각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자, 적진을 아예 꿰뚫어버린 조선군이 일사분란하게 다시 모여들기 시작.

“끝났군.”

“예.”

이진을 비롯해 조선군은 크게 반원을 그리며 호흡을 가다듬었고, 언제나 그랬듯 대대장이 대답을 받았다.

“도망치겠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진은 휙휙. 편곤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물었고, 대대장 또한 먹물을 털듯 편곤을 털며 답을 받았다.

일천 정도 되는 보병을 일천이 못되는 기병으로 밟고 지나갔는데, 그 자리가 멀쩡할 리가 있나.

전장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혼이 나가서 땅을 기어 다니고, 그나마 정신을 차린 이들은 저쪽에서 다시금 정렬하고 있는 기병대를 보며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참... 저럴 거면 뭐 하러 버텼을까?”

“몰라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대충 눈치는 채야지.”

“...”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리고 땀에 흠뻑 젖은 전마의 약동하는 심장소리를 확인하며, 이진을 비롯한 45연대 전체가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하며 가볍게 말을 몰았다.

그 때. 검은깃발을 휘날리며 특전대원이 달려와 목청을 높였다. 연오랑에게 물어보러갔던 전령이 벌써 도착한 모양이다.

“뭐라 하시더냐.”

“말을 몰고 갈 수 있는 곳까지 적을 끝까지 쫓으라 하셨고, 산악부족의 마을을 찾는다면 지체 없이 들이치라 하셨습니다.”

“역시!”

이진은 잘됐다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44연대와 함께 하라고 하셨습니다.”

“좋아! 사냥을 시작한다.”

“정렬!”

삐비빅! 이진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각소리와 연대깃발이 휘날리기 시작했고, 숨을 가다듬던 연대는 다시금 길게 늘어서서 돌격진영을 갖추기 시작했다.

“동쪽 산맥을 향해 천천히 밀어붙여라! 적들이 마을로 도망치게 놔둔다!”

“옙!” “충성!”

깃발을 보고 순식간에 몰려들었던 중대장들은 먼지구름을 만들며 떠났고, 이내 곧 45연대는 다시금 한덩어리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장은 넓었고, 적들은 저쪽 우측 끝에서 45연대가 벌인 싸움을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 옆에 웅크리고 있던 이들만 화들짝 놀라서, 아예 자리에서 허물어져 꽁꽁 얼어 있을 따름.

이미 사방으로 도망쳐 버린 이들은, 우익에서 도살극이 벌어진 걸 알지도 못했다.

“대승이옵니다.”

“그야. 당연한 거고... 사상자는?”

“집계 중에 있습니다. 다만 다친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으니까?”

“예. 뭐... 지쳐 쓰러졌겠지요.”

윤평은 히죽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조선군 입장에선 가볍게 날뛴 수준이겠지만, 적들 입장에선 전혀 아닐 거다.

전투는 대략 3시간 정도 걸렸는데, 적들은 예비대도 없이 전부 동원돼서 뛰어다니지 않았나.

전열은 아무리 못해도 5키로미터를 넘었고, 이 거리를 이리저리 끌려 다녔으면 충분히 진이 빠지고도 남는다.

그냥 걸어다녀도 피곤한데,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 잔뜩 긴장해서 움직였으면 피로가 더 빨리 쌓이니까.

“그나저나... 많이 놀란 모양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연오랑은 완전히 넋이 나가서, 눈이 풀려 있는 적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조선군은 도망칠 시간을 충분히 줄 생각으로, 흡사 산책을 나온 것 마냥 느긋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대다수의 적들은 이미 도망을 갔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전장에 발을 붙이고 남아 있던 이들이 있었던 것.

“으으...”

“흐헉.”

아예 항복을 하겠다는 듯 무기도 내팽개치고 오체투지 하듯 엎드려 있는 이들도 있었고, 그냥 대충 주저앉은 이도, 아예 잔뜩 겁에 질려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조선군이 하나둘씩 툭툭 때려서 깨우고선, 한쪽으로 줄줄이 데려가고 있었다.

확실히 기가 죽었고, 또 조선군이 마구잡이로 죽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지, 적들은 군말 없이 흐느적거리며 따라가고 있었다.

전장 모든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연오랑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족장과 촌장들은 챙기고 있나?”

“두서없이 챙기고 있지만 확인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다들 넋이 나간 터라...”

“음.”

연오랑은 윤평이 보던 곳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끄아악!”

“아악!”

저쪽 한편에선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는데, 온통 엉망진창이 된 걸로 봐서... 포탄이 때리고 지나간 자리인 것 같았다.

도망치는 적들은 동료들을 구할 생각도 못했는지, 사지가 뜯겨져 나간 적들이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붉은색 갑옷을 입은 이들이 다가가 하나씩 살피고 있었다.

허나... 팔다리가 잘려나고 몸통에 구멍이 난 이들을 어찌 구할 수 있을까.

자상도 어지간해야 치료를 하는 거지, 이 시대의 의학수준으로 포탄에 정통으로 맞은 상처는 치료할 수가 없다.

사신의 판관이라도 되는 것 마냥 군의관들이 가볍게 고개를 내젓자, 푹푹! 함께 따라온 연대병이 심장에 창날을 박아 넣어 고통을 끝내줬다.

‘이 정도면 확실히 끝났겠군.’

연오랑은 머리 꼭대기에 떠 있는 해를 힐끔 살피며 중얼거렸다.

적 마을은 여기서 10키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으니, 느긋하게 밀어붙이면 패잔병이 전부 마을로 도망칠 터.

하나씩 접수하면 날이 저물기 전에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최대한 많이 살려서 데려가자. 이미 대패를 하고 마을로 돌아갔으면 더 이상 싸울 마음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인질들을 데려와라.”

“옙!”

윤평 또한 같은 마음인지, 뒤 따르던 전령을 뿌려 속도를 내라고 명을 내렸다.

전장을 뒤흔들던 비명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무서울 정도로 싸늘한 침묵이 천천히 밀려왔다.

대신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요란하면서도 황망한 발걸음 소리가 이어진다.

전장 뒤쪽. 다자강 근처에서 군종승과 함께 머물면서,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포로들.

인질 겸 통역으로 끌려 다니던 족장과 촌장의 자제들이 명을 받기 무섭게 전장에 발을 내딛었다.

“우욱.” “우웨엑.”

아무리 죽음에 익숙한 원주민이라지만, 이렇게 한자리에 수백, 수천구의 시체가 널려 있는 건 처음보지 않나.

군종승들은 쓰러진 시체를 보며 “아미타불.”을 외치며 작게 법문을 읊조렸고, 인질들은 헛구역질을 연거푸 하면서 다리를 벌벌 떨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엉망이 되어 있고, 자신과 똑같이 생긴 시체들은 널려 있고, 사방이 핏물로 가득 차 대지가 시뻘게 멍들어 있었다.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혔고, 머릿속에는 “항복하지 않았으면 우리도 이렇게 됐겠구나.”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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