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챕터45. 정복하다 (8)
“충성! 데려왔습니다.”
“...”
우람한 전마에 탄 연오랑과 지휘부 앞으로 끌려온 인질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울대를 벌컥거리며 침을 삼켜댔고, 차마 눈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냉큼 내리 깔았다.
“고송.”
“예. 장군님.”
연오랑이 부르기 무섭게, 고송이라는 특이한 법명을 가진 승려가 나와 합장을 했다.
“강남원정 때 어떻게 했는지 들었지?”
“예.”
군의관이 따로 관리되어 자신들만의 네트워크가 있는 것처럼, 군종승 또한 따로 관리되어 자신들끼리 어울리는 건 당연한 말.
게다가 애초에 군종승이 되기 전부터 청석사에서 함께 시험을 치르던 이들 아닌가.
몽골원정, 여진정벌, 강남원정 때에 군종승이 무얼 어떻게 했는지는 이미 다 전파되고도 남았다.
“역관과 함께 마을에 가서 항복을 받아내라. 크게 어렵지 않을 거다. 원주민들도 어느 정도 불교에 대해 알고 있을 거고, 강남 이주민이라면 더욱 그럴 테니까. 너희가 가야 오히려 겁을 덜 먹겠지.”
“알겠습니다.”
고송은 냉큼 고개를 숙이며 합장했고, 이내 곧 인질들과 함께 연대병을 따라 앞서 나갔다.
조선군은 계속해서 밀고 나갔고, 적들은 마을로 도망치기 무섭게 식솔을 챙겨 강 건너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해군과 함께 연대병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해안에 상륙한 해군도 놀고만 있진 않았는지, 아예 해안가 근처 마을 몇 곳을 점령까지 해놨었고.
이쪽은 야전화포보다 더 강력한 함포를 싣고 있지 않나.
제대로 싸우기는커녕, 그냥 마을에 닿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 펑펑! 물보라를 일으키며 화포의 맛을 보여주자... 알아서 허리를 굽히고 들어왔다.
예비대로 놀고 있던 연대는 확실히 제 역할을 해서, 마을 주민들이 도망치기도 전에 이미 강을 가로 막고 있던 상황.
그들이 직접 마을 하나를 통째로 사로잡은 경우도 있었지.
연오랑이 속한 본대는 느긋하게 계속 나아갔고, 항복한 마을을 가볍게 살피고 있자 묘한 기분이 든다.
‘흠...’
이미 목청 높여 적대했던 이들은 전장에서 죽거나 꼬리를 말고 도망쳤는데, 마을 주민까지 동원해서 반항하려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 수긍하고 항복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애매하다.
억울해서 울부짖는 것도 아니고, 울음바다가 된 것도 아니고, 몇몇은 낯선 호기심과 기대감이 서린 눈빛을 뿌리기도 하고... 진짜 애매모호 하다.
“생각보다 저항이 적군?”
“당장 패배해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생각보다 많이 안 죽었으니까요.”
“그런가...”
“예.”
이상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전장은 피바다가 되었어도 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불만을 갖지 않게, 그리고 대규모 시체처리 방법도 제대로 모르니 전염병이 퍼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연대병 직접 사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정확히 집계되진 않았지만, 원주민 사망자 수는 대략 이천명 정도라고 알려왔다. 그 중 반수가 산악부족.
중상자는 이미 다 죽었고 화살에 맞은 경상자들만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연대병이 쏙쏙 낚아서 군의관에게 데려가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지.
연대병들조차 “굳이 이렇게 까지 해줘야 되나?”라는 마음이 가시질 않았으니, 당사자인 마을 주민은 어떻겠는가.
이걸 좋아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모호한 마음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사망자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그래도 이천명을 넘어가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럼 마을 하나당 열명에서 많으면 삼십정도 밖에 안 되는 숫자 아니겠습니까.”
“음.”
“억울한 마음을 품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런 이들이라면 이미 전장에서 다 죽었을 겁니다.”
3만쯤 되던 병력에서 천명 정도 죽었으면 30분의 1정도가 죽은 꼴. 유독 특별하게 나서지 않았다면 마을 주민도 비슷한 비율로 죽었을 거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아. 진짜 애매하게 됐군.’
냉병기로 싸우는 이 시대엔 한 번의 전투로 이 정도가 죽는 게 오히려 이치에 맞고, 진짜 전과확대는 패퇴하는 적의 등을 때리면서 사상자가 늘어나는 게 일반적이다.
허나 조선군은 그 등을 때리지 않고, “봐준다. 가서 조용히 항복해라.”라는 걸 몸으로 보여줬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조선군이 내민 손을 잡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리가 없지.
“그래도 생각보다 쉽게 순응을 해서 말이지.”
“강남 이주민들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하니까요. 원주민들은 지금껏 이렇게 압도적인 전력으로 싸워본 적도 그리고 마을이 통째로 귀속된 적도 없는 것 같지만...”
“...?”
“여긴 그래도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연맹 비슷한 걸 확실히 만들긴 만든 모양입니다.”
윤평은 그리 말을 하고선, 저쪽에서 끌려오는 이들을 가리켰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촌장일가 쯤 되는 이들이 끌려오고 있었는데... 전장에 갔다 온 게 맞은 지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핏자국을 지우지도 못한 걸로 보아, 죽도록 도망쳐서 마을로 오자마자 다시 사로잡힌 모습이다.
다만 전에 봤던 마을에선 본 적이 없는 특이한 행색을 하고 있다.
‘이 놈 봐라?’
“저거 설마 왕관이나 뭐 그런 것 쯤 되냐?”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이들도 뭐 주워들은 게 있는지, 끌려오고 있는 촌장은 꽤 특이하게 생긴 나무관을 쓰고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팡이를 함께 가져온 게 아닌가.
“그... 다두연합? 연맹?의 대촌장이라고 합니다.”
통역을 맡은 고려계 역관은 조선말로 정확히 바꿀 말이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고.
“하...?”
‘와. 진짜 연맹을 만들었어? 원래 있던 건가, 아니면 이것도 역사가 비틀린 건가?’
연오랑은 감탄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다두왕국의 역사가 얼마나 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이 연합체가 몇 개로 구성됐는지 언제부터 형성됐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헌데 그래도 그렇지... 원래 역사와는 다르게, 이거 덩치가 꽤 되는 것 같다.
“다른 부족장은?”
“속속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연합이라고? 언제부터 만들어졌고, 부족은 몇이나 되는지 읊어봐라.”
“그게...”
연오랑은 이런저런 물음을 던졌고, 왕관과 지팡이 비슷한 걸 바치고 넙죽 엎드려 있던 대촌장은 더듬더듬 대답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런 대촌장의 모습이 또 나름 모범이자 허락이라고 받아들인 걸까? 속속 끌려오는 다른 촌장일가 또한 흠칫! 놀라기 무섭게 똑같이 넙죽넙죽 엎드려 자비를 바랐다.
‘역시 나름 왕 비슷한 게 있어서 쉽게 받아들인 거군. 그리고 원주민 연합체라고 해봐야 몇 되지도 않고, 이번에 모인 건 말 그대로 죽기 싫어서, 이주민들이 충동질해서 하나로 뭉친 거였어.’
“그래서...”
통역은 계속 설명을 이어갔고, 연오랑 또한 생각을 이어갔다.
‘그리고 결국 실패했지. 가장 힘이 세던 연합체의 대촌장이 무릎을 꿇었으니 파장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놈들은 패전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돌아오기도 전에 우리에게 넙죽 엎드린 거군?’
“...”
‘이것도 약았다면 약은 건가?’
연오랑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피식 웃고 말았다.
이들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그게 뭔 상관일까.
‘최근에 들어온 강남이주민이 많다보니, 중국의 통치방식을 기억하나 본데... 조선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단 말이지.’
중국은 명나라 시절에도 호족과 지방지치 비슷한 게 존재했으니, 허리를 굽히고 들어온다면 자신들을 나름 대접해 줄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잘 못 짚어도 아주 잘 못 짚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 당장 날을 세울 필요는 없잖아? 일단 촌장들을 다 불러 모은 후에, 한 번에 처리해야겠군.’
“...”
“...”
연오랑은 그런 생각을 품고 윤평과 연대장들을 바라봤고, 다들 이심전심인지 히죽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를 머금었다.
항복식 아닌 항복식은 계속 이어졌다.
허허벌판의 공터에 죄다 엎드려 있으니, 누가 봐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나.
이런저런 마을에서 촌장일가는 죄다 끌려와서 연오랑 앞에 속속 엎드렸고, 일가의 자제 중 한명은 인질 겸 통역으로 끌려 나왔다.
“고송.”
“예.”
그리고 촌장일가를 데려온 빡빡머리를 불러 세우자, 그는 냉큼 달려와 조아렸다.
“마을마다 주술사나 회회교 사제, 아니면 승려. 하여간 뭐든 사제들을 찾아냈지?”
“그렇습니다.”
올 게 왔다는 걸 느꼈는지, 고송은 가볍게 눈을 반짝였다.
“따로 불러 모아서 마을 주민과 이격시켜라. 그리곤 토의를 하든 뭘 하든 찍어 눌러. 이제부턴 이곳에 조선불교를 심어야 하니까.”
“...”
“합동 장례와 제사를 치러야 하는 건 알고 있지? 사체 정리가 끝나면 곧장 화장을 시작하도록.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해도 되지만 연대병과 함께 움직이는 걸 잊지 마라.”
“예.”
꽤나 과격하고 직설적인 말에, 고송은 차마 쉽게 입을 떼지 못했지만... 고개는 절로 끄덕여졌다.
군종승과 함께 일반 승려들이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가 뭔가. 이곳 원주민을 조선불교 신자로 만들려고 온 것 아닌가. 방법은 조금 과격하지만, 어쨌든 해야 될 일이다.
계속해서 항복을 받아내는 동안 연대장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유독 환하게 웃는 인물도 등장했다.
“총사령관님!”
“왔나?”
“예!”
함대를 이끌고 온 왕인은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입꼬리가 춤을 추고 있었다. 상륙작전을 하면서 나름 보너스 공훈을 세운 꼴 아닌가. 기쁨에 춤을 출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됐지만... 저희가 상륙하기 전에 빠져나간 이들이 있습니다.”
“포로로 잡은 이들에게 들었다. 남쪽 강 건너의 마을에서도 합류했다지?”
“신분을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쪽배를 타고 강 건너로 도망친 이들이 있었습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소문은 널리 퍼져야 좋은 거니까.”
“예.”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연오랑의 확답을 받자 왕인은 더욱더 얼굴이 밝아졌다.
“식량과 자재는 충분히 가져왔지?”
“부두를 건설할 물건과 원주민 인부를 먹일 식량을 가져왔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함선을 다 끌고 왔는데, 저 안에는 당장 공사를 하는 데 필요한 삽, 곡괭이, 쇠스랑, 갈퀴, 톱 등과 같은 수공구, 농기구들이 가득했다.
그 뿐만 아니라 거중기, 외발수레, 이륜수레, 트레일러와 닮은 공사용 마차, 파쇄를 위한 수차까지. 온갖 공사기계를 부품으로 분리해 싣고 왔지. 삼물회의 재료도 물론이다.
“짐을 내려놓고서 전함 두 척은 따로 빼라. 한척은 남중주의 해안을, 다른 한척은 남하주의 해안을 감시해라.”
“예.”
“원주민이야 배를 몇 척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 문제 될 게 없을 테지만, 그래도 조심하고. 해안을 돌면서 위력시위만 해도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대략 보름정도는 해상에 머물러야 하는데, 식량은 충분하나?”
“문제없습니다.”
배에 가득 실린 게 식량인데, 몇 명 되지도 않는 선원들 식량이 무슨 걱정일까.
왕인은 걱정 말라고 가슴을 두들기듯 자신했다.
“그리고 남주로 돌아가는 길에, 촌장일가를 싹 데려가고.”
“옙!”
뒤이어 연오랑은 눈을 반짝이는 연대장들을 쓱 훑다가... 한 지점에 멈춰 섰다.
“38,39연대장.”
“옙!” “넵!”
지목 받은 둘은 냉큼 목청 높여 답을 했다.
“38연대는 남하주로, 39연대는 남중주로 가서 동쪽 산맥과 이어지는 지역을 점령해라. 아군은 이곳에서 대략 7,8일 정도 머물면서 정리해야 하는데, 그 사이에 평야의 원주민이 산으로 들어가면 곤란하니까.”
“예.”
지목받은 둘 뿐만 아니라, 다른 연대장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오기 전에 세워놨던 계획이니까.
달라진 점이라면... 원래 이 역할을 맡아야 했던 44,45연대가 산악부족을 쫓아 자리를 비웠다는 점이지.
“원주민 마을이 힘을 합쳐서 산맥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무리해서 막을 필요는 없다. 파종도 못했는데, 이대로 마을 주민을 끌고 산으로 들어가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을 거야.”
“예.”
“알아서 기어 나올 테니 대규모 무리는 막지 말고, 마을 단위로 도망치는 이들은 사로잡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해라.”
“충성!”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경례를 하고 사라졌다.
명령에 맞춰 움직이기만 하면 공훈을 차지한다지만, 그래도 직접 적을 상대하는 게 훨씬 낫지 않나.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지, 둘은 누가 딴소리하기도 전에 냉큼 몸을 날렸다.
남상주에서의 전쟁이 끝났을 무렵, 남주에서는 다른 의미의 전쟁을 하고 있었다.
조선군이 남하하면서 흡수해 온 원주민은, 애어른 다 합쳐서 대략 만오천명 정도 됐다. 이는 기존 남주 원주민의 수를 뛰어넘는 머릿수 아닌가. 그리고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조선에서 새로 온 관리들은 곡소리를 내며 이들을 정착시키느라, 전쟁터가 따로 없었지.
그리고... 진짜 전투를 하러 떠난 이들도 있었다.
“여긴 볼 때마다 익숙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군.”
“본토와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르군요.”
“그렇지?”
“예.”
특전대대장 이징석은 중대장의 대답에 히죽 미소를 지었다.
대만은 온대와 아열대 기후가 뒤섞였으니, 당연히 조선의 숲과 비교하면 묘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숲은 숲이고, 나무는 나무다.
밀림은 아닌 터라 나름 빠르게 적응한 편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