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 챕터45. 정복하다 (10)
산길에서 완전히 내려온 조선군은 느긋하게 말을 몰아 마을을 향해 나아갔다.
경치도 좋고, 바람도 선선하고, 날도 좋지만, 전의가 끌어 올라 조선기병들 머리 위로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일 지경.
“화기대장.”
“예.”
“새로 가져온 총통은 어떤가? 숙달은 됐나?”
“그리 어려운 건 아니라서 문제는 없는데... 말 위에서 쏘긴 힘들 것 같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중대장들 틈에 조용히 껴 있던 화기대장의 발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쇳덩어리에 시선이 쏠렸다.
총통. 조선의 화약무기는 대포류라 할 수 있는 화포와, 개인화기류라 할 수 있는 총통으로 나뉘었다.
당연히 조총과 비교할 수 없는 물건으로 핸드캐논. 말 그대로 손으로 쏘는 화포였지.
조준장치, 방아쇠 등등. 조총이 가져야할 구조는 하나도 갖추지 않았고, 팔뚝만한 크기의 포신에 단창 정도 되는 손잡이를 달아 놓은 형태였다.
게다가 화살에 진심인 조선답게, 총통에도 쇠구슬뿐만 아니라 화살을 여러발 쑤셔 넣어 쏘기도 했지.
이런 원시적인 개인화기를 조총이 등장한 임진왜란 때까지 써먹었는데, 어째 나름 효과는 있었고 조총과 비교해도 일장일단이 있었다.
‘화포로 쏘는 산탄과 비슷하단 말이지.’
근거리에서의 위력사격은 조총을 압도했지만... 사정거리가 짧고, 화약도 많이 먹고, 조준도 힘들고, 발사하는 것도 어렵다.
위력 빼곤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터라, 조총이 등장한 후론 완전히 밀려서 사라지게 되는 무기지.
“새로 만든 총통이라고 했는데... 어떤가?”
“활에 비하면 여러모로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새로 개량한 만큼 나름 쓸 만합니다.”
“음.”
“흐음.”
중대장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야전화포의 위력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허나 손으로 들고 다니는 총통에 대한 감상은 "글쎄다." 싶다.
육군이 기병. 그것도 전천후 기병으로 변모하면서 창,활,도검을 모두 쓸 줄 아는 건 당연한 말. 그러니 “활이 있는데 저게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가시질 않는 거지.
수성전을 할 때는 분명히 쓸모가 있겠지만, 과연 특전대에게 어울릴만한 무기인가라고 묻는다면 애매했다.
“화포를 가지고 올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가져온 것 아닙니까.”
“에이. 그렇게 까지 무시할 만한 무기는 아닙니다. 원주민들이 언제 화포를 겪어 봤겠습니까. 굳이 화포가 아니라 총통만 앞세워도 놀라서 벌벌 떨 겁니다.”
화기대장이 헤실헤실 웃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받아내자, 다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다. 화포 대신 신형총통을 가져온 건, 그 위력을 증명하기 보다는 낯선 무기를 통해 적의 기세를 무너뜨릴 의도였으니까.
“준비하게. 화기대가 가장 손을 써야할지도 모르니까.”
“옙!”
화기대장은 답을 하고선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특전대는 점점 거리를 넓혀가며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마을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이내 곧 웅성거리는 모습이 망원경 사이로 들어왔다.
새카만 갑옷을 입은 기병이 튀어나왔으니 난리가 나는 건 당연한 말.
‘저들은 우리를 처음 보는 거지만, 이런 저런 소식은 접했을 거다.’
선발대가 남주에 머무는 동안, 알아서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굳이 복속을 청하러 오는 게 아니어도 거래를 하러 오는 이들이 있었지.
다만 산맥 넘어 온 적은 처음이고, 오히려 해도와 해안측량을 하러 돌아다니던 해군은 몇 번 봤을 거다.
‘그럼에도 찾아오지 않았고, 또 우릴 적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더는 봐줄 필요가 없겠지.’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혀 있는 이들인데, 또 미운 짓을 한다면 봐줄 필요가 있을까.
이징석은 그런 속마음을 넌지시 드러냈고, 조용한 그의 말에 중대장들 모두가 동의하며 각오를 다졌다.
이내 마을이 완전히 눈에 들어온다.
역시나 입지 좋은 곳에 자리잡아 다른 부족들을 약탈해 덩치를 불린 만큼, 나름 꽤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가호는 대략 사백정도 되려나?’
빠르게 훑어보니 움막인지 초가인지 모를 집들은 대충 그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뭔 자신감인지 몰라도 목책이 없어서 마을이 훤히 보인다.
조선군이 느긋하게 다가오자. “옥옥!” “와카가!”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원주민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무장상태는 역시나 예상대로다.
갑옷을 입은 이들은 한명도 없이 전부 맨몸. 나무를 깎아 날도 달아놓지 않은 목창. 조잡한 목궁. 몇몇은 철제무기를 들고 있었고, 또 몇몇은 정체가 뭔지 모를 날붙이도 들고 있다.
“항복하라고 일러라.”
“옙!”
눈에 흉흉하게 불을 켠 오단은 큰 목소리로 뭐라뭐라 중얼거렸지만, 적들은 두려움에 떨기는커녕 오히려 목청을 높여 괴상한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뭐라더냐.”
“그... 항복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오단과 몽골계 원주민은 적들이 하는 말을 전부 통역할 수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차라리 잘 됐다. 전부 쓸어버린다. 화기대 앞으로!”
삐빅! 삐빅! 이징석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넓게 퍼져 있던 이들 중 한소대가 훌쩍 말에서 내려와 앞장서기 시작했다.
특전대원 전원은 어느새 학익진을 펼치듯 소대별로 묶여 넓게 포위망을 만들기 시작했고, 60명밖에 안 되는 화기소대만 겁도 없이 성큼성큼 발을 내딛으며 적들의 정면을 향해 나아갔다.
“제대를 만들 줄도 모르는 군.”
“저들이 언제 이런 싸움을 해봤겠습니까. 기병을 처음 보니, 어떻게 상대해야할지도 모를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달라붙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
“예. 화살을 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달라붙으려고 할 겁니다.”
“좋아. 그걸 노리지.”
이징석과 중대장은 듬성듬성 대충 몰려 있는 적군을 보며, 피식 비웃음을 날려댔다.
그저 “와아아!”하고 달려들어서 서로 싸우거나, 아니면 숲에서 사냥꾼들 마냥 싸우던 게 고작이거나, 밤에 몰래 뱀처럼 기어 들어와서 기습하는 게 특기인 이들 아닌가.
훤한 대낮에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오자마자 칼부림을 부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모양이다.
화기대의 발걸음에 맞춰 느긋하게 나아가지만,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이것도 용연군 대감이 손을 쓴 물건이니, 효과는 확실할 거다.’
이미 훈련까지 마치지 않았나. 화기대장은 점점 가까워지는 원주민 무리를 보며 두려움을 떨쳐냈다.
개인무기술, 무술을 조선에 심으려고 하는 연오랑은 개인화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지금껏 신경도 안 썼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개입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물리적 효과보다는 정신적 충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산악부족을 쉽게 상대하기 위해선, 굉음과 불꽃, 연기를 뿜어내는 화기 그 자체가 필요했기 때문.
산에서 화포를 들고 쏠 수 없는 노릇이니, 대신 총통을 택한 거지.
다만 기존의 총통과 신형총통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구경은 작아졌지만 몸체는 더 길어졌다는 점. 예전 것이 팔뚝만한 크기였다면, 지금은 팔 전체정도로 길어졌다.
이는 화약소모량을 줄이고, 사정거리와 정확도를 늘리기 위함.
게다가 이렇게 만들면 청동이 아닌 철을 사용할 수 있어서, 가격과 무게를 오히려 더 떨어뜨릴 수 있었지.
‘사거리가 더 늘어났으니, 이제 불을 붙여야 제 때 나갈 거다.’
화기대장은 그리 중얼거리며, 쇠로 만든 창처럼 보이는 총통을 앞으로 세웠다.
“점화!”
일렬로 쭉 늘어선 화기대는 곧장 심지에 불을 붙였다.
화포의 축소판인터라 심지는 조용히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총통 끝에 달려 있는 손잡이와 단창처럼 붙여 놓은 나무창대를 붙잡고 정면에 세웠다.
본래 총통은 팔을 늘어뜨려 허리춤에 놓고 쏘는 물건이었지만, 신형총통을 만들면서 조준방식도 바뀌지 않았나.
나무창대를 아예 옆구리에 끼고서, 화기대장은 나름 총통 끝의 가늠좌를 보며 조준선을 맞춰봤다.
‘좋아. 이대로 가면 되겠군.’
다시 팔을 늘어뜨리고 정면을 놓고 전진.
성큼성큼 계속 다가가 50보쯤 다다르자 쉐에엑. 적들이 쏘는 화살이 툭툭 날아들기 시작했다.
허나 화기대는 갑옷을 믿고 겁도 없이 계속 전진.
적들은 혼자 튀어나온 화기대를 보며 “저건 대체 뭔 물건이냐.” “왜 쟤들만 혼자 나와 있냐?”라는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곧 해답이 펼쳐졌다.
펑! 괴상한 쇳덩어리 끝에서 굉음과 불꽃, 연기가 피어나자, 달려들던 원주민 무리는 화들짝 놀랐고.
“크헉!”
그런 놀람이 끝나기도 전에, 앞서 달리던 동료 중 몇이 갑자기 피를 뿜어내며 꼬꾸라졌다.
“헙!?”
“으응?”
“대체... 이게 뭔?”
원주민 무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기 바빴지만, 펑펑펑펑! 화기대 전체가 순차적으로 불을 뿜기 시작했다.
“크헉!” “헉!” “억!”
고작 60명밖에 안 되는 화기대지만, 이들이 들고 있는 총통은 따지고 보면 산탄총과 크게 다를 게 없지 않나.
순식간에 화기대는 화약연기에 가려져 모습이 흐려졌고, 불을 뿜기 무섭게 수십명이 우르르 꼬꾸라지자... 기세 좋게 달려들던 원주민의 발걸음이 뚝하고 멈춰 섰다.
이게 대체 뭔 일인지 이해를 못해서, 살짝 넋이 나가려는 모습이다.
헌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두두두!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근거리까지 산보하듯 다가온 기병들.
일부러 화기대만 앞세워 적들이 한곳으로 달려들게 유도하지 않았나.
기병들은 화기대가 발포하기 무섭게 속도를 높여 달려들었고, 적들이 발걸음을 멈췄을 때는 이미 코앞에 전마가 도착해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조리 밟아라!”
“살려두지 마라!”
순식간에 속도를 높인 기병들은 활도 꺼내들지 않고, 편곤과 기창을 들고 원주민 무리를 쑤시기 시작했다.
“크헉!” “억!”
“피... 피해라!”
말 그대로 폭풍처럼 몰아친다.
화약연기에 파묻혀 냉큼 뒤로 빠진 화기대를 스쳐 지나쳐, 이징석이 이끄는 본대가 그대로 돌진했다.
차라리 적들이 화기대에 겁먹지 않고 달려들었으면 엉켜 붙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생전 처음 보는 무기에 화들짝 놀라 스스로 발을 멈추지 않았나.
제대로 방진도, 제대도 이루지 못하고 우르르 달려 나가던 선두전열은 그대로 말발굽에 짓밟혔다.
사방팔방에서 날아드는 편곤은 원주민을 마구잡이로 농락했고, 붕붕 휘돌며 날아드는 기창은 원주민을 꼬치로 만들었다.
우르르. 소대별로 찢어진 기병대는 적 제대의 옆구리를 움푹 파고들어 뜯어먹었고, 안 그래도 듬성듬성하던 적 전열은 무질서하게 찢겨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뚫어라!”
“돌파!”
삐빅! 소대장의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소대원들은 피 묻은 무기를 털어내기 무섭게 다시 말허리를 걷어찼다.
히힝! 비록 마갑을 입히지 않았어도 전마는 전마. 맨몸뚱이로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원주민을 들이 받는 건 전혀 문제가 안 됐다.
펑! 말 가슴팍에 부딪치기도 전에 편곤이 먼저 날아들어 원주민의 안면을 박살냈고, 그 원주민이 쓰러지기도 전에 뒤이어 달려온 기병이 원주민의 머리통을 기창으로 쑤셨다.
“끄억!” “크헉!” “아악!”
온 사방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소리가 점점 늘어만 갔다.
적들은 그저 우르르 한 덩치가 되어 뭉쳐 있었고, 기병들은 정어리를 먹는 고래처럼 한 웅큼씩 잘라 먹었다.
매섭게 치고 들어가서 전마의 덩치를 이용해 적들을 안쪽으로 밀어붙이고, 그렇게 덩그러니 떨어져 나온 이들은 반전해서 난도질했다.
3인1조로 움직이는 특전대답게, 원주민 하나를 놓고 사방에서 기창과 편곤이 날아들었다.
어설픈 목창을 세워 편곤을 막아보려 했지만, 쾅! 목창을 휘감고 들어간 자편이 원주민의 손목을 때렸고. “으억!” 목창을 내려놓기 무섭게 푸헉! 옆에서 치고 들어온 기창이 그의 가슴팍을 쑤시고 지나갔다.
히힝! 기병이 기창을 뽑아내기 무섭게 울컥 핏줄기가 딸려 나오건만, 아직도 끝이 아니다. 시간차를 두고 바로 옆에서 달려온 기병이 또 다시 기창을 내리 찍었으니까.
창날이 쇄골을 뚫고 들어가자, “켁.” 단발마의 비명만 내지르고서 원주민은 쓰러졌다.
잘게 찢어진 기병이 적군을 뜯어내서 몰아세우고, 그들을 포위해 각개격파를 하는 동안.
잊혀있던 이들이 다시 등장했다.
“저길 노린다.”
‘중앙을 바로 노리지 않는 군.’
화기대를 스쳐지나간 이징옥 본대는 적진 선두를 무너뜨리고 그대로 적진을 돌파했고, 남은 기병대는 사방의 겉을 뜯어먹고 있다.
‘그러니 정면을 그대로 노리면 아군이 맞진 않을 거다.’
“장전!”
화기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총통 안에 화약뭉치를 쑤셔 넣었다.
이것도 나름 개량된 물건으로 종이화약뭉치 끝엔 구경에 맞는 작은 나무토막이 달려 있었다. 화포에 쓰는 격목을 아예 화약뭉치에 붙여 놓은 형태.
미리 준비해놓은 쇠구슬까지 털어 넣은 후엔, 꼬질대로 푹푹 쑤셔 총통 끝까지 쑤셔 넣었다.
“장전 끝!”
화기대원의 목소리가 줄줄이 이어졌고, 잠깐 동안 화약연기에 파묻혀 있던 화기대가 다시금 빼꼼 고개를 내밀고 총통을 들어 올렸다.
“심지를 짧게 해라.”
“옙!”
이들은 화포를 다루는 화기대고, 화포 또한 심지의 길이를 여러 개로 해놔서 발사속도를 조정하지 않나. 총통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에 불을 붙이기 무섭게 화기대원들은 다시 일렬로 정렬했고, 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나름 조준을 끝마쳤다.
파파팡! 이내 심지가 모두 타들어가자 또 다시 화약연기가 화기대원을 감쌌고.
“끄억!” “크헉!” “커컥!”
연기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는 저편에서, 적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소리가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