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챕터46. 퍼지다 (1)
여느 날과 똑같은 날이었다.
하늘은 청명하고, 숲은 푸르다.
비가 내리는 기간이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 소년이 기다리던 시간은 속속 다가오고 있었다.
자랑스럽게 칼을 쥘 수 있을 때. 한 사람의 전사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을 때, 용맹과 우람의 상징을 몸에 그릴 수 있을 때.
모두가 기다리던 성인식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소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친구들이 모두 흥분해서 마을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삼삼오오 모일 때마다 주제는 항상 같았다.
누구는 만만한 서쪽 화산부족을, 누구는 조금 덜 만만한 동쪽 해안부족을, 누구는 자신들이 밀어낸 동쪽 산악부족의 전사를 사냥하겠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누군가 남쪽을 말하는 순간 입이 꽉 앙다물어졌다.
남쪽. 강줄기가 모여드는 평야와 해안에 느닷없이 등장한 괴이한 이들.
조선군이라고 했던가. 남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온 어른들은 생경한 모습을 한 조선군의 모습에 질겁했고, 또 그 숫자에 기겁했다.
이곳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괴한 무기로 무장한 이들의 수는 부족 전체의 숫자보다 많았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언제였던가. 언제는 화가 난 것 마냥 성질을 부려 파도를 몰아치고, 또 언제 그랬냐는 것 마냥 잠자듯 조용하고 평화롭던 바다에 등장한 괴기한 배.
산처럼 거대한 배가 이따금씩 해안을 돌며 지나간 적이 있었고, 그 때마다 마을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자 “그게 남쪽에 나타났던 조선군이 아닐까?”라는 의심과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지.
그렇게 거대하고 웅장한 배는 난생 처음 봤고,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배는 느닷없이 나타난 조선군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으니까.
허나 그런 우려와 두려움도 잠시.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자 마을은 그 때도 지금도 다를 게 없었고, 소년들은 과거는 잊고 이내 자신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신이 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온 소식에 솜털이 곤두섰다.
지금껏 산 너머로 넘어오지 않던 조선군이 나타났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쾅쾅! 굉음을 터트리며 산새와 산짐승을 전부 깨우면서 넘어오고 있었으니까.
정찰을 나갔던 어른들은 조선군의 움직임을 알려왔고, 마을 어른들은 장고에 빠졌다.
남쪽의 나약한 평야부족을 모두 집어삼키고, 자신들과 경쟁하던 암석부족을 박살낸 이들.
그들이 이곳에 온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마을이 난리가 나든 말든 조선군은 계속해서 산길을 내며 다가왔고, 토론은 점점 격해졌다.
허나 성인식을 앞둔 소년들은 “그게 뭐 대수냐! 싸워서 증명하리라!”라는 속마음을 드러내며 가슴 속에 날카로운 칼을 세웠다.
그리고 오늘. 조선군이 산에서 내려왔다는 말에 소년뿐만 아니라 성인식을 앞둔 모든 마을 소년들과 어른들이 전부 활과 창을 빼들고 달려 나갔다.
“...”
그리고 보았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전마.
물소만큼 크다는 네발 달린 짐승을 타고, 온통 검은빛으로 범벅이 된 무리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정련된 날붙이들은 그 짐승의 엉덩이에 박혀서, 햇빛을 받아 모래알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낯설음은 언제나 두려움을 수반하는 법.
기세등등하게 외쳤던 게 모두 거짓이었던 것 마냥 소년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이윽고... 소년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검은 옷을 입고, 또 팔다리는 번뜩거리는 이들이 창을 세우고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벼락을 불러냈다.
생전 처음 보는 괴사.
대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사람이 어떻게 화염과 연기를 부르고 벼락의 외침을 저 작은 창 안에 가둘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뭔가에 맞기라도 한 것 마냥, 굉음이 터질 때마다 소년의 앞에 있던 어른들이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신. 신이 분노한 게 분명하다. 소년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자기도 모르게 목창을 떨어뜨리고 부들부들 떨어댔고... 그게 소년의 마지막이었다.
몸이 덜덜 떨리느라 땅이 흔들리는 줄도 모르고 있던 그 때.
어느새 시야를 까맣게 만든 그림자가 코앞에 와 있었고, 뭔가 싶어 눈을 올려 뜬 찰나. 번쩍! 햇빛을 받아 번뜩이는 창날이 소년의 목덜미에 쑤셔 박혔다.
총통병은 두려움을 밀어내고 거침없이 진군하며 불벼락을 토해냈다.
총통병은 본래 화포병이고, 화포병은 애초에 간을 배밖에 내놓고 두둑한 배짱으로 무장해 적이 코앞으로 올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는 법.
호위기병 또한 마찬가지.
적이 화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어떻게든 달라붙을 게 분명하니, 목숨을 걸고 화포병을 수호하며 지원군을 기다려야 했다.
적이 오는 걸 받아치는 게 이들의 전술이지만, 지금은 거꾸로 적에게 다가가서 화력을 뿜어내고 있는 상황.
허나 본질은 궁극적으로 같았다.
화포병은 적을 격살하고, 호위기병은 화포병을 지킨다.
오히려 빠르게 기동할 수 있는 총통병이라서, 호위기병 입장에선 더 편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
퍽퍽! 넋이 나간 건지, 아니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건지 몰라도, 어떻게든 총통병 근처로 다가오려던 적을 말발굽으로 그대로 밟아버린 호위기병 소대장.
“정리됐습니다.”
“장전!”
그가 삐빅! 호각을 불며 신호를 보내기 무섭게, 호위기병 뒤에 숨어서 연기에 파묻혀 있던 화기대장이 목청을 높였다.
그리곤 지금껏 해왔던 행동을 또 다시 반복했다.
앞을 막고 지키던 호위기병이 시야를 트고, 장전을 끝마친 화기대가 성큼성큼 적을 향해 다가가고, 조준하기 무섭게 불꽃이 쏟아진다.
“효과는 확실한데?”
“예. 쉽게 끝날 것 같습니다.”
적진을 일도양단 해버리고서, 다시금 반전해 후방을 이리저리 뜯어낸 본대.
그 선두에 서 있던 이징석과 중대장은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총통병을 보며 작게 감탄을 흘렸다.
포탄에도 눈이 없고, 총통탄에도 눈이 없다.
괜히 저 앞에서 얼쩡거렸다가는 맞아죽기 십상인터라, 기병들은 전부 양익과 후미에서만 적을 뜯어먹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작 60명밖에 안 되는 총통병이 수백의 원주민 무리를 돈좌시킨 걸 넘어서, 오히려 거꾸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사실상 총통탄에 맞아 즉사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총통 그 자체에 전의를 상실해서 넋이 나간 모양이다.
“화포보다 효과가 더 크군?”
“아무래도... 포탄은 아예 보이지도 않지 않습니까.”
“그런가...”
중대장의 말은 얼핏 들으면 일리가 있었다.
포탄은 사실 뭐에 맞는 지도 모르고 맞아 죽는 물건 아닌가.
허나 총통은 바로 코앞에서 쏴대는 물건이고, 화염과 굉음이 눈에 보일 때마다 동료가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에 맞아 픽픽 쓰러진다.
화기를 겪어보지 못한 저들 눈에는 정말로 괴력난신이 따로 없을 거고, 총통병이 벼락을 뿜어내는 신군처럼 보일 거다.
그런 이징석의 생각처럼, 총통병이 진군할수록 원주민 무리는 알아서 무너져 와해됐고... 이내 사냥의 시간이 돌아왔다.
“끝까지 추적해서 말살하라!”
“달려라!”
“쫓아라!”
기병을 코앞에 두고 등을 보이면 그 다음 수순은 당연하지 않나.
특전대원들은 편곤과 기창을 마구에 걸어두고, 잠자고 있던 활을 꺼내서 과녁으로 변한 원주민 등판에 화살을 갈기기 시작했다.
고작 한 시간도 안 되서 전투는 끝이 났고, 일방적인 몰살로 이어졌다.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총통병의 총통탄에 맞아 죽은 이들보다, 도망치다가 등에 화살을 맞고 죽은 이들이 대다수.
특전대원들이 무섭게 말을 몰아 마을로 지쳐 들어가는 와중에도, 화기대장과 총통병들은 쓰러진 원주민 무리를 들쳐보며 분석에 들어갔다.
무신경해도 이렇게 무신경할 수가 있겠냐만은... 총통병도 조선인이고 산악부족을 멸시하는 마음은 매한가지 아닌가.
“이 무식한 야만인 놈들.”이라는 생각을 숨기지 않아서, 사체를 들쳐보는 손길은 우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확실히 잘 안 맞는군?”
“예. 뭐...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애매하군요.”
화기대장은 어깨에 구멍이 뚫린 사체들을 쓱 훑어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총통은 원래부터 쓰던 물건이었고, 당연히 그 장단점을 알고 있었다. 신형총통은 기존의 것을 개량했다지만 결과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던 것.
견착하고 쏘는 미래의 소총조차도 반동으로 총구가 들리는데, 대충 겨드랑이에 끼고 쏘거나 아예 옆구리에 놓고 쏘는 총통의 반동을 뭔 수로 잡을 수 있을까.
알게 모르게 총통탄은 죄다 위로 날아가서, 적들 중에서 하반신에 총통탄이 박힌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애초에 하체를 노리고 쏴야 제대로 맞을 거 같은데...?”
“그래 보입니다. 확실히 훈련했을 때와는 다르네요.”
“음...”
훈련할 때와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쏘는 실전은 확실히 달라서, 단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보고서를 잘 작성해야겠군.”
“예.”
화기대 입장에선 총통의 유용성이 더 드러나야, 지원도 더 많이 받을 것 아닌가.
총통을 그냥 내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화기대장은 어떻게하면 보고서를 잘 쓸 수 있을지 고민에 잠겼다.
어쩌다보니 전장정리를 화기대에게 맡긴 특전대는, 거침없이 마을로 밀고 들어갔다. 전사 취급을 받는 이들은 오는 길에 이미 다 죽었고, 몇몇이 살아남아 도망쳤다지만 어차피 죽은 목숨.
말을 몰고 가기 힘들 정도로 깊은 산속으로 도망치지 않는 이상, 기병의 추격을 따돌릴 방법이 없다.
그렇게 특전대는 마을을 사정없이 유린했고,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기를 들고 적대하는 이들에게는 사정없이 화살비를 먹여주고, 움막 비슷한 초막에 처박혀 벌벌 떠는 이들은 죄다 끌고와 한자리에 모았다.
따로 묶거나 강제하지도 않는다. 도망가면 뭐 어떤가. 그럼 그냥 등판에 화살이 꽂히는 거다.
“어찌할까요?”
“씁... 죽을 놈들은 다 죽었는데, 또 칼을 드는 건 조금 그렇지?”
“예. 뭐...”
중대장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뒤통수만 벅벅 긁었다.
아무리 산악부족민을 죽이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 죄다 붙잡아 놓은 놈들까지 싹 잡아 도살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
‘음...’
대대장쯤 되면 이제 전략, 전술 뿐만 아니라 예산 걱정도 할 줄 알아야 하는 법.
‘이놈들을 먹여 살리는 비용을 생각해도, 강남상인에게 팔아넘기는 게 이득이겠지. 적어도 손해는 안 보고 수지타산은 맞출 수 있을 거야.’
2차 보급선이 이제 곧 오는 걸 알고 있고, 당연히 조선본토에서 오는 보급선 이외에 자동에서 오는 중국상선도 함께 올 터.
그들에게 팔아넘기면 될 것 같다.
“포로로 데려가야지. 죽이는 것보단 파는 게 조금이나마 돈이 되지 않겠나?”
“그럴 겁니다.”
강남상인들이 과연 노예를 얼마나 쳐줄지는 몰라도, 안파는 것보단 이득일 거다.
“바로 옮길까요?”
“그래. 시체는 한자리에 모아서 싹 불태워버리고... 아니군. 불태우면 티가 많이 나겠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곳 항구를 차지한 부족은 이들 하나지만, 동쪽 해안가와 산을 따라 이동하면 다른 부족이 있지 않나.
이징석이 이끄는 특전대는 그들도 다 처리할 심산이었기에, 괜히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다.
“마을을 벗어난 이들은 없어 보이지만, 사냥을 나갔던 이들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예. 그들이 사정을 알고 다른 부족에게 알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곳 사정이 알려지는 시간을 늦출 순 있을 겁니다.”
“좋다. 일단 포로부터 옮기지. 남주에서 보급을 받고 다시 와서 숙영지를 세우자.”
“옙!”
이징석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특전대는 곧장 움직였다.
눈물범벅이 된 마을 주민을 동원해 죽은 시체를 전부 한자리에 파묻었고, 다음 날이 되기 무섭게 전부 끌고 남주로 향했다.
그리곤 남주에서 다시 보급을 받아 기륭으로 돌아왔고, 이곳에 아예 숙영지를 건설한 후에 동쪽 해안과 산맥을 쑤시기 시작했다.
*****
“...”
‘날 좋고만.’
연오랑은 포말이 일어나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하늘의 물을 잔뜩 빨아먹은 바다는 잔잔하면서도 웅장한 파도를 백사장에 토해내며 트림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으로 향하자, 사방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온갖 소음이 밀어닥쳤다.
이곳은 남하주. 미래에 가오슝이라 불리는 지역. 남하주 강 하류에 자리 잡고 본격적으로 건설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남주에서 출정한지 딱 한 달째 되는 날.
남상주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그 뒷수습을 한 후에, 조선군은 계획대로 찢어져 움직였다.
일군은 남상주에서 북상해서 남주로 향하면서, 앞에 보이는 마을을 전부 쓸어담았다. 이미 동쪽 산맥 쪽은 33연대가 순찰을 하면서 막고 있는 상황.
조선군의 움직임은 나름 신속해서, 남상주와 남주 사이에 있던 부족마을은 조선군이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고서야 조선군이 남상주를 정복한 걸 알아차렸다.
나머지 일군은 연오랑이 직접 지휘하며 남쪽으로 내려갔다.
동쪽 산맥에 가깝게 붙어서 이동해 원주민들이 산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고, 이내 곧 그대로 서쪽으로 몰아쳐서 남중주로 향했다.
남중주. 미래의 타이난 지역 또한 서쪽은 전부 평야요. 원주민 뿐만 아니라 이주민이 많이 살던 지역.
지금 역사에선 강남한족이 원래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이주했고, 광동과 가까운 남중주가 그 중심이었다.
시원하게 말을 몰아 남중주를 휩쓸었을 때, 원주민 마을보다 이주민 마을이 더 많아서 오히려 연오랑이 당황할 정도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