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챕터46. 퍼지다 (4)
두창의 예방법을 알아낸 연오랑 앞에서, 의약을 논하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다들 반문을 삼가고 그저 조용히 뒤를 따랐다.
‘음... 이게 이질이란 말이지.’
연오랑은 끙끙 앓고 있는 병자를 멀리 떨어져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도 이질은 생전 처음 보지만 텍스트 정보로, 정확히 말하면 게임으로는 수도 없이 겪어봤다. 위생관리가 안되면 툭하면 터지는 게 이질과 같은 수인성 전염병이었으니까.
다만 실제로 보니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끙끙 앓다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주륵주륵 설사를 계속하는데, 그 냄새에 코가 찢어질 지경이다.
“그나마 설사는 제대로 담는군.”
“오물을 제대로 처리 못해서 이 사태가 터졌는데, 그냥 내버려 두진 않겠지요.”
“음...”
연오랑은 윤평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볍게 갸웃거렸다.
“침상을 새로 만드는 게 좋겠군. 이렇게 해라.”
그가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뒤따르던 호위기병 중 하나가 냉큼 종이와 연필, 그리고 밑에 받칠 수 있는 받침대를 대령했다.
쓱쓱 손을 놀려 그려나갔다. 대충 등이 확 젖혀진 나무의자인데, 밑이 뻥 뚫려 있는 모양새였다.
“저 설사는 막을 수도 없어. 계속 저렇게 그냥 싸야하는데 지금 침상으론 여러 사람이 피곤하지 않냐. 대충 만들어도 되니, 최대한 빨리 만들라고 일러라.”
“옙!”
호위기병 중 하나가 냉큼 몸을 날렸다.
상류에서 보내온 뗏목을 뜯어내 자재로 만드는 공작기업들이 슬슬 자리 잡고 있었고, 이들은 농기구와 건설공구를 만들고 있었다.
물론 철제부품은 조선에서 가져왔고, 여기선 나무를 깎아 조립하는 거였고.
그러니 임시방편으로 쓸 의료용 침상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사체도 있나?”
“예. 저쪽에...”
냉큼 발을 놀려 다가가자, 화장하기 위해 모아둔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온통 두들겨 맞은 것처럼 푸르딩딩하게 피부가 괴사되어 있거나, 바싹 마른 고목처럼 말라 비틀어져 있는 이들이 보였다.
‘음... 수분이 빠져나가면 저렇게 되는 건가.’
파리가 날리며 악취가 풍겨 나오지만, 연오랑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눈에 새겼다.
이 낯선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 죽는 걸 무수히 지켜봤는데, 이제와서 거리낄 게 있나. 거부감보다는 오히려 탐구심이 치솟는다.
‘특이하고만.’
“화장할 거지?”
“그렇다고 합니다. 다만 마을 주민들을 모아 제를 지내야 할지, 아니면 그냥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답니다.”
“그냥 태우라고 해. 괜히 분위기만 뒤숭숭해진다.”
이미 죽은 사체지만 또 어찌될지 모르는 일. 의원들이 연구용으로 남겨 놓을 사체를 제외하곤 나머지는 빨리빨리 태워버리는 게 낫다.
‘그래야 적어도 우리가 역병을 진압하는 모습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이 멍청한 놈들도 이 꼴을 봐야 경각심을 갖지 않겠어.’
연오랑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체를 모아둔 장소에서 발길을 옮겼다.
다시 환자를 보기 위해 천막촌에 이르자.
“대감!”
“오셨습니까!”
저쪽에서 환자를 다스리고 있던 의원과 군의관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다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오랑은 이미 제대로 관리 하지 않으면 전염병이 터질 거라고 신신당부하고 가지 않았나. 그런데 이 사단이 났으니, 이제 몰아칠 후폭풍이 두려운 거지.
“송구하옵니다.”
“됐다. 환자는 몇이냐.”
연오랑이 꾸중도 하지 않고 대충 손을 쓱쓱 흔들며 묻자, 전순의는 분위기를 탔다는 듯이 냉큼 달라붙어 입을 놀렸다.
“2431명이고, 사망한 이는 153명입니다.”
마을 두어개가 한방에 날아난 꼴.
“병이 퍼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많이도 죽었군.”
“...”
무슨 뜻인지 몰라 전순의를 비롯해 모두가 넙죽 머리를 숙였다.
“노인들?”
“예... 노인과 아이들입니다.”
원래 허약한 이들이니, 당연히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은 모양이다.
“치료는 어찌하고 있냐.”
“그게...”
전순의는 기다렸다는 듯이, 열심히 혀를 놀렸다.
조선은 이질과 같은 수인성 전염병에 익숙하고, 향약집성방을 만들기 전부터 어느 정도 증상과 치료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
누구의 제제도 없이 중국의학서를 닥치는 대로 수집한 지금 역사에선, 세종 때에 편찬해서 세조 때 완성한 의방유취醫方類聚가 수십년 일찍 세상에 선보이기 직전.
워낙에 의원이 많고, 조선군이 사방팔방 싸돌아다니면서 긁어모은 게 많아서, 이런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하오나... 남주에 있는 약재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고, 배를 보냈으나 오려면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음...”
연오랑은 반쯤 흘려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의학에 대해서 솔직히 아는 게 많지 않으니, 그가 딴지를 걸 부분은 따로 없다.
다만 이질에 관해서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 따로 있지 않나.
“사탕과 소금을 가져오라 일렀다. 둘을 녹여 끓인 물과 버드나무 잎을 달인 물을 섞여서 계속 먹여라.”
“...?”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연오랑의 굳은 표정에 차마 반문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질은 결국 설사가 지속되어 수분이 빠져나가서 죽는 병. 반대로 말하면 수분을 계속 섭취시켜서 어떻게든 병원균을 떨쳐내고 버티면 살아날 수 있다.
미래에도 경구수액과 항생제로 이질을 이겨나는데, 경구수액이라는 건 사실 설탕, 소금을 섞어 만든 미네랄워터와 크게 다를 게 없지 않나.
“알아들었냐?”
“옙!”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그가 슬쩍 쌍심지를 켜기 무섭게, 의원들과 호위기병들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빗물에 쉽게 녹는 소금은 특별히 관리해서 잔뜩 쌓아놨고, 설탕 또한 사탕수수를 심으면서 중국남부에서 함께 가져온 물량이 있었다.
버드나무 잎이야 조선군이 애용하는 물건이니 당연히 넘쳐나고.
“시간을 정해서 꼬박꼬박 먹여. 먹기 싫어도 억지로 먹이고. 이질은 결국 버티면 낫는 병이다.”
“예.”
“음...”
조선의 치료법도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는 터라, 전순의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버티게 도와주는 물건이 소금설탕물이라는 게 특이해서 그렇지, 격하게 거부할 만큼 특이한 조치는 아니었던 거지.
‘쓰벌... 말라리아가 문제가 될 줄 알았는데, 이질이 문제가 될 줄이야.’
대만의 풍토병을 몰라서 온갖 약재를 잔뜩 준비하고, 학질의 특효약인 개똥쑥 또한 잔뜩 준비해 놨는데... 뜬금없이 흔하다면 흔한 이질에 발목이 잡힐 줄은 몰랐다.
“...”
연오랑은 명을 내리고 다시 환자를 보러 나갔고, 까닥거리는 그의 손가락에 따라 전순의를 비롯한 몇몇 의원이 뒤를 따랐다.
“어떻게 된 거냐?”
“그게...”
전순의는 그간 있었던 일을 줄줄이 털어놨다.
누가 보면 꼭 고자질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애처롭다.
“음...”
“송구하옵니다. 대감. 남중주와 남하주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됐어. 거긴 여기처럼 수해가 터지지 않아서 그런 거지, 언제든 터질 문제였어.”
‘하여간... 무식한 놈들 가르치는 건 힘들고만.’
조선에서야 왕을 등에 업고 밀어붙일 수 있지만, 여기선 아니지 않나.
사실 연오랑도 전순의의 고충을 똑같이 겪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는 전순의보다 권한이 많아서,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며 마음껏 휘두를 수 있어서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았던 거지.
“차라리 잘됐다.”
“...?”
“불을 보고도 뜨거운 줄을 몰랐지만, 이번에 한번 데여서 생각이 바뀌지 않았겠냐. 이번 일을 계기로 남주도의 위생상태를 개선할 수 있겠지.”
“아...!”
“아무리 말귀를 못 알아먹는 원주민들이라고 해도, 목숨이 달린 문제에 자신들의 방식을 고수하겠냐.”
“그렇습니다.”
연오랑의 속뜻을 읽고, 다들 오뚝이 마냥 고개를 끄덕여댔다.
한발 더 나아가면, 이번 일을 계기로 조선군이 역병마저 몰아낼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지 않나.
한번 더 저들의 마음속 심지를 꺾어버릴 수 있다.
“그렇게 위생 상태를 개선해 나가면, 이들의 문화와 풍습을 빠르게 지워내고 조선문화를 심을 수 있을 거다.”
“분명 그러할 겁니다.”
이걸 우월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어찌됐건 조선문화를 따르면 무병장수 까지는 아니어도 무병은 할 수 있지 않나.
조선 입장에선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병에 안 걸리고 편하게 살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의약과 관계없는 체제와 제도를 쑤셔 넣을 수 있는 거지.
“넌?”
“상벽이라 하옵니다.”
“특이한 법명이군.”
연오랑의 말에 맨들맨들한 머리를 빛내던 군종승이 히죽 미소를 머금었다.
군의관과 함께 환자를 돌보고 있던 모양인데, 이 자리에 있는 걸로 보아 군종승의 대표쯤 되는 모양이다.
“이번 일을 너희 또한 기회로 삼아라.”
“...?”
“역병이 터졌으니 보나마나 원주민들 사이에서 분위기가 흉흉할 것 아니냐. 멋도 모르는 놈들은 우리가 사제와 주술사들을 데려가서, 신이 노했다니 뭐니 하면서 호도하고 다닐 지도 모르지.”
“예...”
상벽이라 불린 군종승은 무슨 뜻인 줄 알아차리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남상주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사제들과 박수무당과 같은 종교지도자를 싹 긁어갔다. 조선 입장에선 이들을 남겨둬 봐야 통제에 걸림돌이 될 뿐이니까.
그러니 알게 모르게 이에 대한 불만 또한 내재되어 있을 터... 그 마음의 공허를 조선불교가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냐?”
“예.”
“이곳이 아무리 평야지대라지만 산이 없는 건 아니지.”
“...”
연오랑의 시선은 천막촌 너머 바다로 향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낮게 솟아 있는 산이 보였다.
“동쪽 산맥 쪽에 하나, 저기 보이는 남쪽에 하나. 연대병을 붙여줄 테니 절부터 짓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대감.”
“감사할 것까지야.”
그는 손을 휙휙 내저었지만, 상벽 입장에선 결코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지금이야 허허벌판이지만, 이곳 또한 북방신도시처럼 도시가 들어설 것 아닌가.
그럼 당연히 북방신도시에 만들어진 사찰처럼 이곳 사찰도 번성하게 될 거다. 조선불교의 교세가 강해지는 건 당연한 말이고.
“저들의 믿음을 전부 조선불교로 끌어와야 한다. 이주민이든 원주민이든 회회교가 아니고서야 다들 별 것 없어. 사실 회회교를 믿는 이 땅의 신도들은 딱히 독실하지도 않고.”
“예. 그래 보였습니다.”
군종승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포교 겸 정보수집을 계속 하고 있던 터라, 상벽은 연오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곧잘 알아차렸다.
“전부 지우고, 너희로 갈아타게 만들어라. 이건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종교를 그저 갈아타는 걸로만 보는 연오랑의 행태가 꽤나 가벼워 보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교세를 밀어주는 게 어딘가.
상벽은 군말 없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3차 보급대가 오기 전까지 치료를 끝마칠 수 있겠냐?”
“음...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할 거다. 3차 보급대는 남상주의 원주민을 데려갈 테니까.”
“예.”
전순의를 비롯한 의원들뿐만 아니라, 얼렁뚱땅 함께 따라온 관원들 모두 고개를 숙였다.
대만을 조선의 강역으로 삼는 건 장기목표고, 단기목표는 원주민을 조선본토로 데려가 일꾼으로 써먹고 백성으로 만드는 거다.
해서 남주에 거창하게 보급품을 쏟아내고 간 2차 보급대는 빈 함선에 남주의 원주민을 싣고 떠났다. 그 수가 무려 팔천.
남주에 거주하던 원주민은 반토막이 났고, 그 빈자리를 남상주와 남주 사이에 살던 원주민들을 남주로 끌고 와서 채웠지.
그러니 3차 보급대는 이번에 남상주의 원주민을 데려갈 차례.
이들 관원들이 이번 사태에 재깍 대처하지 못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유사왕국이라고 해도 무방한 원주민연맹을 분석하고, 적대부족 및 부족관계를 파악해서, 본토로 데려갈 부족마을을 추려야 했다.
물론 가는 길에 배에서 할 것도 없으니, 세세한 인명조사를 실시하겠지만... 누굴 보내고 남겨야 할지는 이들이 정하는 일 아닌가.
이곳은 이제 신도시가 들어설 거고, 사이가 안 좋은 부족을 함께 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니까.
이 일에 몰두하느라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너희가 고생하는 건 안다. 남중주나 남하주도 마찬가지니까.”
“송구하옵니다. 대감.”
“어찌됐건 정리되고 있고?”
“예.”
“기왕이면 거친 놈들을 보내라. 여기선 지들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라도, 본토의 낯선 땅에 가면 잔뜩 기죽기 마련이니까.”
“...”
연오랑은 대만 원주민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보여줄 추태를 상상하며 피식 웃었고, 다들 웃음이 전염되어 키득키득 소리를 냈다.
평양처럼 거대한 도시를 언제 봤을까.
이들이 아무리 강남 이주민이라고 해도, 제대로 개발되고 있는 평양을 보면 까무러치게 놀랄 거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참고 버텨라. 원주민이 본토로 떠나는 만큼, 본토에서의 이주민이 이곳으로 오게 될 거다. 그럼 너희 수고도 그만큼 줄어들겠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다들 각오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혼내지 않고 격려를 하는 게, 확실히 더 효과적인 모양이다.
“이번 사태를 널리 알리는 건 내가 처리하마.”
“옙!”
그리 말을 하고서 연오랑은 물러갔고, 다들 넙죽 허리를 굽히며 배웅했다.
연오랑은 잠시 남상주에 머물며 후속처리를 도왔다.
아무래도 권한이 있는 그가 중심을 잡고 교통정리를 해주면, 밑에 사람들도 일하기 편하니까.
그가 특별히 신경을 쓴 건 원주민 인질들. 부족마을에서 하나둘씩 챙겨온 촌장자제는 구십명에 육박했고, 촌장일가는 2차 보급대가 돌아갈 때 싹 실어서 함께 보냈다.
물론 반항을 심하게 했던 부족마을의 촌장일가는 애어른할 것 없이 죄다 목이 잘려서, 원주민을 끌어 모은 신도시의 푯말이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