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 챕터46. 퍼지다 (5)
연오랑이 이들을 따로 관리한 건 나팔수로 써먹어 선전하기 위해서였는데... 녀석들은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조선군을 힘겹게 쫓아다니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 기가 꺾인 상황.
이런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질을 비롯한 전염병은 대만 원주민 사이에서도 심심치 않게 돌 던 역병.
한번 발생할 때마다 해결방법이 없어서 원주민들은 마을을 버리고 떠났고, 그 때마다 세력구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던 문젯거리 아니었나.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해결했다는 것 자체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지.
그렇게 3주가 훌쩍 지나자, 삼십여명의 사망자만 추가로 발생하고서 역병은 잦아들었고... 연오랑은 계획대로 움직였다.
이게 또 일이 웃기게 된 게... 촌장일가는 자식을 인질이라고 생각해서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는데, 이젠 거꾸로 이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가족의 생사가 위험해진 꼴 아닌가.
해서 인질들은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조선의 선진 의술을 목청 높여 외치고 다녔다.
“그래서. 분위기가 상당히 좋아졌단 말이지?”
“들려오는 소식으론 그렇습니다. 역병이 퍼졌다는 소식에 살짝 동요하긴 했는데, 오히려 역병을 손쉽게 잡았다는 소식에 더 동요하더군요.”
“촌장 자제들이 나름 힘이 있는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 지내왔으니 얼굴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마냥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잘 됐군.”
“예.”
윤평은 그간 올라온 보고서를 읽으며, 미소를 숨기질 못했다. 급조한 계획이건만, 제대로 착착 진행됐으니까.
“나가볼까?”
“옙!”
서류를 정리하기 무섭게 연오랑은 게르의 천막을 벗어나서, 윤평 및 호위병들과 함께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음...”
“...”
다만... 어째 연오랑과 일당을 대하는 원주민의 태도가 너무 부담스럽다.
저 멀리서 흰빛깔이 아른거리기 무섭게 웅성거리더니, 이내 곧 발걸음이 절로 멈춰진다.
이내 곧 연오랑 일행이 눈에 들어오자, 짊어지고 있던 짐을 죄다 내팽개치고 넙죽넙죽 엎드려 절을 하는 게 아닌가.
대만 원주민 문화에도 절을 하는 게 있는지 모르겠는데... 강남이주민들이 하는 꼴을 보며 따라하는 것 같다.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하나? 왜 저렇게 벌벌 떨어?”
“...”
연오랑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지만, 윤평을 비롯한 호위들은 슬그머니 웃다가 얼른 표정을 굳혔다.
“총사령관님께서 워낙 눈에 띄지 않습니까.”
“...”
‘당연한 말을 왜 하냐?’는 듯, 윤평은 힐끔 연오랑이 입은 백호갑옷을 가리켰다.
대만 원주민이나 이주민이나, 둘 다 맹수갑옷은 처음 보지 않나. 맹수가죽도 살면서 한번 볼까 말까인데, 그걸 갑옷으로 입고 있다.
거기에 생전 본적도 없는, 그런 맹수가 있는지도 몰랐던 백호갑옷을 입고 있는 연오랑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안 그래도 머리하나 큰 거인이 백호피를 입고 있으니,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쩝... 눈치 보이는 고만.”
“...”
아무리 남들 시선에 무신경한 연오랑이지만, 이건 과해도 너무 과하다.
본토에서 이랬으면 “불경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거다.
“이러지 말라고 좀 해라. 한성에서 오는 조정관원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냐.”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계획이 잘 먹혀도 너무 잘 먹히지 않았습니까.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지요.”
“끄응...”
할 말이 없어 신음만 절로 나온다.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 본적이 없는 원주민들 입장에선, 연오랑의 존재를 정복자이자 이곳을 다스릴 왕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명나라 시절을 기억하거나 들어본 적 있는 강남이주민도 마찬가지.
그들 기준으로 보면, 연오랑은 행정,사법,군권을 모두 거머쥔 인물이고, 이건 명나라 시절 번왕과 크게 다를 게 없지 않나. 실제로 연오랑이 부마이기도 했고.
약삭빠른 건지 아니면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 몰라도, 저들 눈엔 연오랑이 앞으로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책임지고 대만섬을 봉토로 삼을 거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놈들은 내 이름을 팔아서 일을 쉽게 처리하는 거고 말이야.’
윤평을 비롯한 관원들이 알면서도 별 말 안하는 건, 분명 그의 이름값을 이용해 먹기 위해서 일거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그제야 다들 몸을 일으키는데, 그럼에도 시선은 연오랑의 등판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다들 힐끔힐끔 쳐다보며, 귓속말을 하는 게 들릴 정도다.
“백호갑옷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는 호랑이도 없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동쪽 산맥 깊은 곳으로 가야 표범을 겨우 볼 수 있다고 하니... 낯설겠지요.”
“원주민이야 그렇다 쳐도 이주민들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강남에 호랑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괜히 호피가 비싼 값에 팔리는 게 아니지요.”
“흐음...”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모세의 기적마냥 연오랑 일행이 지나갈 때마다 원주민들은 죄다 흩어졌고, 일행은 거리낄 것 없이 곧장 개간지로 나아갔다.
저기.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유독 홀로 몸을 일으키고 있는 건물이 유독 눈에 먼저 들어온다.
“관아를 먼저 짓는 게 여기서도 효과가 있나?”
“적어도 선발대가 확인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관아는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통치의 상징이지 않습니까.”
“그걸 저들이 이해한다고?”
“완벽하게 이해는 못하더라도, 뭔가 바뀌었다는 걸 바로 알려주는 지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음.”
이들이 본적 없는 생경한 3층관아.
아직 뭐 제대로 만들어진 것도 없어서, “쓸모도 없이 크기만 한 관아를 짓는 게 뭔 의미가 있나?” 싶은데... 이들이 느끼기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 거대한 위용도 위용이지만, 윤평의 말처럼 관아가 세워진다는 것 자체가 이 땅이 조선의 강역이라는 걸 선포하는 명백한 상징물이라는 것.
그랬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웅장하게 완성해야, 조선과 조정의 권위가 살아나 원주민을 복속시키는 게 쉽다고 했다.
북방의 여진을 정복하고도 비슷한 방침을 취했는데, 여진과 사정이 다른 원주민들도 똑같이 먹히나 보다.
‘하여간 순진한 건지 영악한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미래의 기억을 가진 연오랑 입장에선 관아는 그냥 건물일 따름이지만, 이 시대 사람들이 보기엔 그게 아닌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자 원주민들은 화들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조선인 석공들은 냉큼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선 손을 멈추지 않았다.
확실히 이들은 본토에서 별의 별 난리를 다 겪고 와서 그런지, 연오랑을 보고도 싱거운 반응을 보였다.
다만 그의 눈을 사로잡는 건, 석공이 아니라 석공이 깎고 있는 돌들.
‘대리석인가?’
조선에서 지겹도록 볼 수 있는 돌이 아니라, 누가 봐도 번쩍이는 흰색 돌을 다듬고 있다.
“대리석?”
“산맥에서 대리석 산지를 찾아 채석장을 완성했답니다. 사실 채석장은 크게 준비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꽤 빠르네? 뗏목에 실어서 옮겨 보내나 보지?”
“예.”
‘서쪽에도 있긴 있었나보네...’
미래의 지식을 더듬어보면, 산맥의 중앙부 동쪽지역은 미래에도 대리석 산지로 유명했다.
다만 지금 당장 굳이 동쪽해안까지 가서 캘 필요는 없다고 봤는데... 운 좋게 암석군 일부가 서쪽까지 뻗어 있었나 보다.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사람 손으로 파려면 얼마 파지도 못할 거 아냐. 한동안은 충분히 쓸 수 있겠어.’
“석공들은 어때? 대리석을 다뤄본 사람들은 흔치 않을 텐데?”
“큰 어려움 없이 잘 다듬고 있습니다. 본토의 돌보다 훨씬 무르지 않습니까. 실패하더라도 부두자재로 써먹으면 되니, 마음껏 쓰고 있습니다.”
“음...”
‘그건 그렇겠네.’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조선이 화강암 천지인건 유명하고, 당연히 화강암을 다듬는 기술 또한 예로부터 발전해 왔었다. 오죽했으면 벽돌을 쓸 바에는 그냥 돌을 깎아서 쓰자는 말이 흔하게 나왔을까.
중국석공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조선석공들은 용케도 결을 찾아 화강암을 쪼개고, 모래실을 사용해서 화강암을 절단해 써먹었었다.
그러니 화강암보다 무른 대리석을 사용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겠지.
게다가 이젠, 시간을 왕창 단축시켜 줄 새로운 채굴, 채석방법도 생기지 않았나.
“돌을 캐낼 때도 화약을 쓰고 있겠지?”
“예. 채석장에서 써먹고 있다고 합니다.”
갱도를 파는 거나 채석장에서 돌을 캐는 거나, 따지고 보면 큰 차이도 없다. 화약을 못 써먹을 이유가 없지.
“흐음... 원주민들 반응은?”
“뭐. 지금도 이해를 못하고 놀라곤 하는데,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답니다.”
“큭...”
윤평의 설명에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훤히 짐작이 된다.
남상주에선 다짜고짜 두들겨 패서 제대로 확인을 못했지만, 남중주와 남하주를 정복할 때 보지 않았나.
원주민들은 화포가 무슨 벼락을 부르는 물건인 줄 알고, 몇몇 마을은 주술사가 겁도 없이 튀어나와 기도하고 춤추고 생난리도 아니었다.
계속 걸음을 옮겨 마을 하나를 지나치자, 뻥 뚫린 공터에 빼곡하게 박혀 있는 천막촌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자기도 모르게 슬쩍 눈이 찌푸려진다.
곡식을 심기 힘든 척박한 땅을 갈퀴로 잔뜩 긁어 놓았는데, 그 위에 수백명의 꼬마들이 달라붙어 있다.
속옷인지 하의인지도 모를 짧은 옷을 입고, 신발은 신지도 않은 맨발에, 망태기를 질질 끌면서 조막손을 놀려 자갈을 주워 담고 있었다.
미래라면 상상도 못할 아동착취의 현장이지만... 어째 부려먹는 이들이나 하는 아이들이나 딱히 불만은 없어보였다.
무리 중 어디에선 깔깔 웃는 소리와 함께, 애들이 망태기를 메고 신나서 뛰어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연병장이자 운동장을 정리하는 아이들 반대편 천막에선, 같은 행색을 한 아이들이 나뭇가지로 열심히 땅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교육부 관원이 일러주는 훈민정음을 땅바닥에 쓰면서, 글자를 익히고 외우고 있는 중이다.
어설픈 조선말로 따라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저게 향교라니 참...”
“곧 만들어질 겁니다. 심려치 마시지요.”
“씁...”
연오랑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자, 얼른 윤평이 말을 붙였다.
원주민 모두가 나와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애들이라고 놀 수 없는 노릇. 저렇게라도 부려먹어야, 제 때 공사기간을 맞출 수 있나 보다.
“마을을 섞어서 모았나 보지?”
“예. 지금 만들고 있는 향교는 총 6개. 마을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을 전부 모아서 함께 교육하고 있습니다.”
“불만은?”
“딱히 없습니다. 지금 당장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어른들 모두 전부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손이 없어서 애를 돌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저희가 단체로 데리고 있으니 오히려 좋아하더군요.”
“우리가 안 보이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야 이를 말씀이십니까.”
윤평은 줄줄이 애들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원주민이라고 자식사랑이 없을 리가 있나.
뭐가 뭔지 정확히 몰라도, 아이들이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워 와서 익히는 걸 마다할 리가 없다.
지금 당장에도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원주민들이 통역으로 대접받으며, 중간관리직 같은 위치를 얻어내지 않았나.
솔직히 더 정확히는. 저렇게 향교에 모아놓고 교육을 시키면서, 꼬박꼬박 밥을 먹여준다는 말에 홀라당 넘어갔지.
‘그래도... 생긴 게 저렇게 허름해도, 교육 자체는 나쁘지 않단 말이지. 오히려 본토가 더 문제일 거야.’
연오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래전 그에게 향교에 대한 개선점을 문의하는 서신이 왔었고, 그는 이걸 문화사업과 연계해서 조정에 개선안을 올려 보냈다.
향교를 대규모로 증축해서, 그 문호를 크게 넓히자는 것. 이를 위해 향교를 미래의 학교처럼 거대화시키고, 운동장을 다용도로 써먹어서 재원을 확충하자는 내용이었지.
헌데 현실의 문제에 발목이 잡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말이 쉽지. 연병장이나 마찬가지인 운동장을 만들고, 수백 수천명의 아이들을 동시에 교육시킬 수 있는 향교를 만드는 게 어디 쉬울까.
사람이 많은 도시 인근에선 하나둘씩 만들어졌지만, 지방의 현에서는 진척이 너무 더뎠다.
허나 백성들을 미리미리 교육시킨다는 것에는 나름 감명을 받은 걸까?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해답으로 순회교육을 꺼내들었다.
어차피 매일같이 한자리에 모여 수업을 진행할 수 없으니, 향교의 교생들이 직접 마을을 돌면서 일주일에 한두번씩 수업을 하며 돌아다닌 거지.
‘뭐. 크게 호응이 없다고 듣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아동노동이 당연시 되는 시대 아닌가.
게다가 아무리 엘리트교육에서 벗어나 보편교육으로 나아가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한참 멀었다.
커리큘럼도 미숙하고, 교생도 부족하고, 교과서도 아직 미완성. 더 중요한 건 백성들 스스로가 “과연 학비를 내고 배울 만큼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교육열을 무시할 순 없을 거야. 특히나 생활에 밀접한 기술을 가르치면 달라지겠지.’
미래의 불안을 밀어내며, 연오랑은 지금도 열심히 싸우고 있을 조정을 떠올려봤다.
조정에선 유학을 비롯한 신학문을 교과과정에 넣는 것은 찬성했지만, 어떤 학문을 넣을지는 아직도 설왕설래 말이 많았다.
십학을 넣는 건 당연. 그 외에 농업학, 야금학과 같은 신학문을 애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건지, 신학문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 건지, 기업이나 연구소와의 연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고민할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오히려 일하면서 배우는 원주민 꼬마들이 더 많이 배울지도 모르겠어.’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선 진짜 직업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애어른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가르치고 있지 않나.
미래를 생각하면 어떻게 될지 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