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 챕터46. 퍼지다 (6)
항교를 보고 나선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하늘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의 벽이 보이지만, 반대로 그 뿌리가 보일 정도로 평지가 이어진다.
“...”
고개를 돌려 북쪽과 남쪽을 번갈아 살피면 끝도 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이 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황토색 대지가 어느 순간 뚝 끊어져 푸른 바다와 이어져 있다.
‘와서 보니 확실히 엄청나군. 조선의 어지간한 평야보다 커.’
대만섬은 동쪽에 거대한 산맥이 자리하고 있긴 하지만, 그곳을 제외한 서쪽은 제대로 된 산 하나 없는 지형.
낮은 구릉이 이따금씩 튀어나와 있다고는 하지만, 산 넘어 산인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만하고 매끈하다.
‘제대로만 개간할 수 있다면, 정말 엄청난 소출을 기대할 수 있을 거야.’
가볍게 눈을 감자, 이 허허벌판의 평야가 전부 황금빛으로 물든 상상이 떠올랐다.
결코 먼 미래가 아니라, 몇 해 후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다.
미래를 상상하며 걷고 있자,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굴뚝마냥 사방에서 흰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 수가 못해도 백 개가 훌쩍 넘는다.
난데없이 불을 지른 건 아닐 터, 가까이 다가가자 임시로 만든 취사장이자 급식소라 할 수 있는 곳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는 원주민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애들도 일을 하고 있는데 노인이라고 놀 수 있나.
머리가 허옇게 선 이들이 취사병들에게 타박을 들어가며, 밥 짓는 걸 배우고 도와주고 있다.
“밥은 어때? 잘 적응하고 있냐?”
“기존에 먹던 것과 달라서 불평이 있긴 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적게 먹는 것보단 배부르게 먹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못되지요.”
“흐음.”
‘하긴 지들만 있을 때보다 오히려 우리가 더 풍족하게 먹이고 있는데, 입맛에 안 맞다고 불평하는 놈들은 없겠지.’
“게다가 모든 부족마을이 전부 같은 쌀을 먹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렇단 말이지.”
역시 맛이 있든 없든, 배부르게 먹는 게 최고인 모양이다.
‘저건 딱히 걱정할 거 없겠네.’
연오랑은 속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조선식으로 바꿔버려야 하니, 식생활부터 바꿔야 하는 법.
대만 원주민과 이주민들은 장립종 계열의 쌀을 먹었고, 조선과 일본, 중국북부에선 단립종 계열을 먹었다. 이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대만에서 나는 쌀은 다수의 장립종과 소수의 단립종이 섞여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장립종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그게 뭔 상관이랴. 조선에 맞추는 게 중요하지.
다만 찰기에서 차이가 나는 두 품종은 밥을 지을 때부터 차이가 나는 바.
제대로 밥을 해먹기 위해서는 물의 양을 조절하는 것부터 배워야 했기에, 저렇게 힘을 쓰기 힘든 노인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있는 중이다.
“노인들이라서 고집이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군?”
“원주민들은 조금 그런 경향이 있지만, 이주민들은 오히려 쉽게 받아들이더군요. 아무래도 명나라 시절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
연오랑은 윤평의 대답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과연 명나라 시절에 살기가 좋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시절에는 질서와 법, 통치라는 게 있었다.
중국은 지금도 개판이지만, 피의 투쟁을 겪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서 이 정도 아닌가. 호족세력이 완전히 전면으로 등장하기 전엔, 허구한 날 칼부림이 벌어지던 진짜 개판이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노인들이라면, 조선의 통치를 충분히 반길 만하다. 지금 대만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은, 중국에서 벌어졌던 난장판의 축소판이니까.
“다른 취식소도 사정은 비슷하고?”
“예. 처음에는 식량을 나눠주고 집집마다 알아서 해먹게 시켰는데, 그게 오히려 분란만 벌어졌다고 합니다. 차라리 손이 조금 더 들더라도, 지금처럼 단체 배식을 하는 게 나아 보입니다.”
“집안 어른들이 한 밥이니, 군말도 없을 테고 말이야.”
“그것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윤평은 속뜻을 읽고, 피식 미소를 지었다.
원주민이든 이주민이든, 밥투정을 부렸다가는 어린시절마냥 주걱으로 뺨을 얻어맞을 거다.
‘게다가 집안 어른들마저도 일을 하고 있으니, 장정들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겨를도 없겠지.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보호해주는 거기도 하고.’
조선이야 편리함과 효율을 찾아 이렇게 움직이는 거지만, 저들 눈엔 집안 어른을 한 곳으로 모아 연대병이 보호해 주는 꼴.
심리적으로 체감하는 게 조금 다를 거다.
취식소를 지나 계속 나아가자, 이번엔 개간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인 눈에는 퍽 생경하게 보이는 거대한 소. 날카로워 보이는 긴 뿔을 머리 양쪽에 달고 있는 물소가 코뚜레에 꿰어 사방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이 개간을 담당하는 건, 마을의 여성들.
남성들은 힘을 써야하는 수로 공사나 건물, 부두공사에 전부 동원된 터라, 여성들이 대신 농사를 짓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온가족이 다 함께 농사를 지어왔으니,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라서 불만도 없었고.
역병이 휩쓸고 지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3차 보급대가 왔고, 이곳 남상주에서 이주민을 또 왕창 싣고 되돌아가지 않았나.
당연히 보급대와 함께 온 자동상인들은 이곳에 엄청난 생필품과 물소 등을 풀었지.
“물소를 몇이나 가져왔지?”
“사백두가 조금 넘습니다. 저희가 물소를 현물로 받는다는 게 소문이라도 났는지, 자동상인들이 미리미리 물소를 구해 뒀다고 하더군요. 앞으로는 더 많이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문이 퍼졌다라...”
“...”
연오랑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다들 이번에도 속뜻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자동에서 물소를 전부 구해오긴 힘들었을 테니, 다른 지역 상인의 손을 빌렸을 게 분명, 이제 조선이 대만섬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소문이 중국에 파다하게 퍼졌을 거다.
‘이제 슬슬 반응이 오겠네.’
일이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할 거고, 지금 당장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지금은 이곳 정착지를 제대로 만드는 일에 집중해야할 때다.
“개간은 어때? 이건 좋아했을 거 같은데?”
“예. 안 그래도 파종을 어찌하나 고민했던 모양인데, 저희가 도와주니 무척 좋아하더군요.”
“적어도 농사를 시작했으면, 본토로 끌려가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모양이네.”
3차 보급대에 원주민을 실어 보낼 때, 작게 실랑이가 있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거대한 배에 자신들을 태워 가겠다고 하니, 난리가 나는 건 당연하지 않나.
다만 조선군이 보여줬던 무력이 워낙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서, 죄다 들고 일어나는 봉기는 벌어지지 않았지.
허나 조정도 이런 부분은 미리 예상을 했었고, 2차 보급대에 끌려갔던 촌장일가 몇몇을 다시 데려와 불만을 날려 보냈다.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 이들이, 그들이 상상해 보지 못한 별 세계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오히려 혹 할 수밖에.
그럼에도 원주민들 마음속엔 “이러고 있다가 또 어디론가 끌려가는 거 아냐?”라는 의구심이 남아 있었는데... 파종을 시작하면서 안도하는 모양이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을 거고... 어찌됐건 농부는 농사를 지어야 마음이 놓이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럴 거야.”
연오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땅에 목숨을 거는 게 어디 조선인들뿐이겠나. 중국에서 넘어온 이주민이나 원주민도 다 마찬가지일 거다.
“농기구에 대한 반응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
“그야 이를 말씀이십니까.”
윤평은 당연한 말을 왜하냐는 듯, 너스레를 떨어댔다.
질 좋은 강철로 만들어진 쟁기, 괭이, 호미만 손에 쥐어도 좋아서 춤을 추던 이들이다. 거기에 톱니바퀴가 달린 거대쟁기와 같은 신문물까지 왕창 가져오지 않았나.
농사에 진심인 조선인조차도 좋아 죽던 물건인데, 그보다 한참 수준이 떨어지던 원주민들 입장에선 놀라서 까무러칠 지경이었을 거다.
‘무기로 써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이런 물건을 이들이 언제 봤겠어.’
그는 자기가 생각해도 뿌듯해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연오랑이 생산한 강철주괴는 전국으로 팔려나갔고, 그 대다수는 농기구로 탈바꿈했다.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론 당연했던 게, 조선 내에서도 나무 농기구나 잡철 농기구를 쓰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나. 강철로 무기나 정교한 부품보단, 농기구를 만드는 게 우선이지.
이런 농기구의 개량은 곧 일의 효율을 높였고, 궁극적으론 일인가구가 경작할 수 있는 농지 크기를 늘려줬다. 이래서 지금까지 수년간 농업생산량이 끝도 없이 증가할 수 있었던 거고.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야. 분명 똑같이 일을 해도, 지금보다 많은 경작지를 일구지 않을까? 한번 파면 될 걸, 두번 세번 파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야.’
그의 속마음처럼, 실제로도 강남이주민들조차도 강철농기구를 보며 찬양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중에 돌려달라고 했다가는 칼부림이라도 벌일 기세였지.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수전을 못 만든 게 조금 걸리는 군.”
“당장 논을 만들기엔 일손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것도 손이 남는 김에 하는 거고, 품종을 확인하기 위해서 실험하는 것에 가까우니까요.”
“실험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지 않나?”
“뭐...”
윤평은 딱히 할 말이 궁색해져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허나 틀린 말은 아니지. 어찌됐건 여기서 잘 자라는 벼품종을 확인해야 하니까. 다만 수전에 쓸 품종과 밭에 뿌릴 품종이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닐 텐데... 그래도 큰 차이는 없을 거야.’
그는 속으로 연신 머리를 굴려댔다.
장립종에서 단립종으로 입맛을 바꾸려면, 당연히 키워야 하는 품종이 달라져야 하는 게 선행되어야 하지 않나.
지금 이들은 기존에 쓰던 볍씨가 아니라, 조선에서 가져온 볍씨를 심고 있는 중이었다.
“밭에 심긴 하지만 그래도 줄을 맞춰서 심고 있으니, 잡초를 제거하는 건 그나마 조금 쉬워질 것 같고...”
“...”
“전라도와 제주에서 가져온 품종 말고, 일본과 절강에서 가져온 품종도 심었지?”
“예. 각각 구역을 분리해서 심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음...”
‘농업부 관원에게 제대로 물어봐야겠군.’
연오랑은 윤평의 대답을 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농업연구소를 세우고 또 외국의 온갖 작물 종자씨를 받아들이면서, 조선의 농업은 원래 역사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제주의 왜관을 통해 일본의 볍씨를 받은 건 이미 오래된 이야기고, 지금도 여전히 볍씨를 비롯한 온갖 일본산 작물을 들여오고 있는 중이지.
‘이곳은 조선보다도 일본의 기후와 더 가까우니까... 어쩌면 일본산 벼가 더 잘 자랄지도 모르겠어. 이곳에서도 농업연구소를 지어서 교잡을 해야겠네.’
생각을 계속 이어나간다.
중국 남부지역은 장립종을, 북부는 단립종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중국의 작물품종은 이곳 기후와 잘 안 맞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든 예외는 있고, 복건과 절강에서도 단립종 벼를 심는 곳이 있지 않나. 그곳의 볍씨를 가져와 심었으니, 이곳에서 잘 자라는지는 지켜봐야 할 거다.
‘실험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긴 하지만, 윤평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야.’
연오랑은 제발 큰 문제없이 벼가 잘 자라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일단 벼만 잘 자라고 나면, 다른 작물들은 후순위로 놔도 충분하다.
‘여긴 앞으로 조선의 식량창고가 되어야 하니까 말이야.’
기후대와 지리가 다르면, 자연재해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 또한 커지기 마련. 설령 조선본토에서 난리가 터진다고 해도, 대만섬이 제대로만 성숙된다면 어떻게든 극복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먼 미래에 경신대기근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지 않을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을 생각해도 식량생산지를 여러 곳에 두는 건 나쁘지 않을 거야.’
그는 아무도 모를 먼 미래를 그리며, 속마음을 애써 되삼켰다.
경작지를 넘어 계속 걸음을 옮기자, 또 다른 경작지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은 마을 여성들뿐만 아니라, 연대병들 까지도 함께 손을 보태고 있었다.
그 크기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서, 말 그대로 대평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지평선 끝에서 산맥 끝까지 닿을 모든 지역이 죄다 갈려나가고 있다.
“이럇!”
“그쪽 아니야! 옆으로!”
심지어 물소뿐만 아니라, 제주에서 데려온 예비마에 쟁기를 씌워 말이 다치지 않게 천천히 밭을 가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
“...”
착호군을 이끌면서 개간작업을 한두번 해본 게 아니지만, 윤평은 자기도 모르게 기가 질려서 고개를 내저었다.
볼 때마다 보고 또 봐도 놀랍다.
“이 평원 전체가 전부 사탕나무밭이 될 거란 말이지.”
“너무 크게 시작한 게 아닐지...”
“무슨 소리. 이것만 제대로 되면, 올해 수확량으로 이번 원정에 소모한 비용은 전부 충당하고도 남을 거다. 여기 말고 남중주, 남하주에서도 사탕나무밭을 만들고 있으니까.”
윤평은 호언장담하는 연오랑을 보며, “배포하난 역시 으뜸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정도는 돼야 플랜테이션 농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사탕수수는 키우는 데 크게 손이 많이 드는 작물도 아니고.’
기후가 맞고 물만 충분하면 알아서 쑥쑥 자라는 게 사탕수수 아닌가.
대충 줄기를 잘라 심기만 해도 알아서 자라나니, 지금 저렇게 대충 심는 것처럼 보여도 저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물론 수확할 때는 손이 많이 들긴 하지만, 이 시대엔 다른 작물도 손이 많이 가는 건 매한가지고.
“구역은 잘 나누고 있지?”
“예.”
죄다 헤집어놔서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밭과 밭 사이를 공터로 비어놔서, 나름 도로 비슷한 걸 만들어 놓았다.
나중에는 저 빈자리에도 나무를 심어서 확실히 구분을 해놓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