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챕터46. 퍼지다 (8)
‘대체 이걸 어떻게 만든 거지?’라는 물음이 눈빛으로 변해 흘러내렸다.
이게 톱니바퀴를 달아서 만든 원시적인 기계식 직조기로, 면직기업에서 대량생산한 물건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거다.
“2척이나 되는 면포는 처음 봤겠지? 딱 봐도 알겠지만 여러 곳에 다양하게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일세.”
두 상인은 자기도 모르게 냉큼 고개를 끄덕이다가, 관원의 말을 더듬기 무섭게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2척... 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아. 강남과 조선의 척이 다르긴 하지.”
“...!”
관원은 깜빡 잊어먹었다는 듯 별 일 아니라고 덧붙였지만, 둘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도량형은 왕조마다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이 시대엔 보편적으로 신체에 빗대어 규정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쉽게 적응하고 적용할 수 있으니까.
해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긴 하지만, 자고로 1척이라는 건 성인 팔뚝 정도의 길이를 의미했지.
헌데 조선인이 무슨 거인도 아니고, 누가 봐도 3척은 넘어 보이는 길이를 1척이라고 우기고 있지 않나. 아무리 나라별로 도량형이 차이가 난다지만, 이건 해도 너무 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이거 보게. 이것도 나름 잘 팔리는 물건이네.”
관원은 놀란 둘에게 접이식 철자를 내밀었다.
거의 1미터 크기의 줄자에 빼곡하게 눈금이 파여 있었고, 중간이 딱 접혀서 들고 다니기 편하게 만든 물건이었다.
“이게...”
“허!?”
두 상인이 정신없이 철자에 빠져 있는 걸 보며, 관원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을 흘려댔다.
이런 모습을 한두번 보는 게 아니건만, 볼 때마다 놀라서 똑같은 표정을 짓는 중국상인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긴 나도 깜짝깜짝 놀라는데, 너흰 오죽할까.’
그는 속마음을 애써 숨기며,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도량형의 통일.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로. 이건 어느 나라든 왕조가 새로 생겨나면 정립하는, 왕조의 대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왕조가 바뀔 때는 물론, 왕이 바뀔 때마다 연호와 함께 도량형의 기준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때의 도량형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 만든 도량형이 혼합되어 사용되고 있었고,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게 어느 정도로 혼잡했냐 하면, 포목을 잴 때는 포백척布帛尺이라는 기준을 사용했고, 각종 예기를 만들 때는 조례기척造禮器尺을, 천측기구나 거리측정을 할 때에는 주척周尺을, 예악 악기 중 하나인 황종관을 만들 때는 황종척黃鍾尺을 사용했다.
이러니 아무 생각 없이 “10척짜리 물건을 만들어주시오.”라고 하면 이게 포백척인지, 황종척인지, 주척인지 헷갈려서 엉뚱한 물건이 나오기 십상이었지.
길이만 이랬을까. 무게를 재는 관, 근斤 또한 마찬가지로, 고기를 잴 때 쓰는 근과 야채를 잴 때 쓰는 근의 기준이 달랐다.
이래서 원래 역사에서 세종은 영조척營造尺을 새로 만들어서 건축기준으로 삼았고, 이걸 기준으로 도량형을 통일하려고 했던 거지.
오죽했으면 어사의 필수품 중 하나가 유척鍮尺이라 불리던 자였겠는가.
허나 여기에도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모든 도량형을 없애고 영조척만 남겨둔 게 아니라, 영조척에 맞춰 각기 다른 척을 규정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역사에선 이 모든 게 뒤집혔다.
연오랑은 기업을 만들 초창기 때부터, 뭐 할 때마다 뒤죽박죽인 도량형에 진절머리가 났었다.
미터법을 조선의 척관법으로 바꾸는 것도 힘든데, 지들끼리도 제멋대로면 이걸 어떻게 써먹겠나.
해서 아예 근본도 없는 도량형. 미터법을 가져와 1미터를 1척으로 하는 기업척을 밀어붙였다.
사실 이런 도량형의 통일은 감히 일개인이 나서서 주장할 수 없는 행위지만... 웃기게도 워낙 도량형이 난잡한 터라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연오랑이 만든 기업척이라는 것도 그냥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잡다한 기준 중 하나가 되어버린 거지.
허나 처음에는 이렇게 미약했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기업이 공인되자 상황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연오랑은 초창기부터 기업은 기업척을 기준으로 삼으라고 밀어붙였고, 기업들은 아니꼽고 귀찮아도 어쩔 수 없이 이를 따랐다.
안 그러면 어쩌겠나. 온갖 물품이 전부 기업척 기준으로 만들어져 나오고 있으니, 이걸 다시 기존 도량형으로 바꿔서 계산하면 일을 두 번 하는 꼴이 되는데.
다만 이내 곧 이게 기존보다 훨씬 편리하다는 걸 깨닫고,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기업척으로 통일.
나아가 단순히 길이뿐만 아니라 넓이와 부피 또한 영향을 받았다. 그냥 제곱, 세제곱으로 곱하기만 하면 되니까.
이로써 척을 넘어서 무게의 단위인 관貫, 부피의 단위인 되나 석까지도 하나로 통일된 거지.
그리고... 기업이 이렇게 따라가기 시작하자, 기존의 도량형을 따르는 백성들도 서서히 기업척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조정이나 기업이 “기업척을 따라라!”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모르면 손해를 보는 건 백성들 자신 아닌가. 귀찮고 번거로워도 따라하게 됐고, 하다 보니 이게 더 편리한 걸 깨닫게 된 거지.
일이 이렇게 별 탈 없이 진행된 건, 사실 도량형이라는 게 원래가 근본이 없는 통일규칙, 사회구성원간의 약속과 다를 게 없기 때문.
1척이 30센치미터든, 50센치미터든, 1미터든, “앞으로 이걸로 통일해서 간다!”라고 정하면 끝나는 문제 아닌가. 기업척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야금야금 민간의 도량형을 밀어내고 표준도량형으로 자리 잡게 된 거지.
세종을 비롯한 조정관원들이 이걸 놓칠 리가 없고, 이 시대엔 아직 영조척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
안 그래도 자주화에 발맞춰서 “통일규칙을 만들어 도량형을 정리해야 한다.”라는 논의가 있었는데, 민간에서 알아서 통일규칙을 만들어냈지 않나.
그래서 그냥 기업척을 끌어와서, 아예 법률로 규정한 조선척으로 삼아버린 거지.
그렇게 십여년의 시간이 훌쩍 넘은 지금.
이젠 기존의 잡다한 도량형이 전부 없어지고, 모든 것에 조선척이 적용된 상태였다.
“어떤가? 사겠나? 광주상인이라면 나름 면포에 관심이 있을 텐데...?”
“...”
관원의 은근한 제안한, 철자를 살피며 놀라고 있던 두 사람이 제정신으로 찾고 입술을 깨물었다.
면포와 생사는 광주상인들의 주요상품 중 하나고, 이들은 중국물산을 동남아시아의 소국에 내다팔았다.
일본도 면포를 제대로 못 만들고 있는 판국이니, 동남아시아의 소국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질 좋은 비단 같은 경우에는, 아예 천축을 비롯한 서역까지 팔려나가는 물건이었고.
‘매섭구나. 우리를 알고 있어.’
노인은 철자에 아직도 홀려 있는 청년을 보며, 조심스럽게 침음을 되삼켰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니다. 아마도 절강이나 자동상인이 나불거렸을 게 틀림없겠지만, 조선은 광주상인의 취급품목이 뭔지 알고 있다.
결국 이걸 광주상인이 사들이지 않는다면, 자동상인이 동남아시아의 면포시장에 진출할 거라는 협박과 다르지 않다.
안 그래도 무슬림 네트워크로 이어진 자동상인인데, 한족이 주축이 된 광주상인과 대립하면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예측 불가다.
“사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럼 어디 셈을 해볼까?”
조선관원은 노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마냥, 냉큼 주판을 꺼내 손가락을 튕기기 시작했다.
‘음... 저것도 신기하군.’
상인답게 얼른 정신을 차린 노인은 관원과 치열한 혀씨름을 하며 조금이라도 더 깎으려고 입을 놀렸고, 그러는 와중에도 중국식 주판과 다른 조선식 주판을 눈여겨봤다.
‘조선... 예상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구나.’
동시에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광주상인들에게는 사실 조선보단 고려가 더 익숙했고,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었어도 크게 달라질 게 없을 거라 봤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점이 꽤나 엿보였다.
그리고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판단하기 애매했다.
“다른 물품도 있는데, 또 보겠나? 아. 여긴 없고 옆 점포에 가면 있네. 아마 강남 물산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물건이 꽤 될 걸세.”
“예... 혹시 생사도 팔고 있습니까?”
“물론이지. 아국의 비단도 질이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네. 사천의 촉금이나 이름난 비단과 비교하면 밀릴 수 있을지 몰라도, 나머지는 엇비슷할 걸? 그리고 이 광목처럼 큰 비단뭉치도 팔고 있지.”
“예에...”
능글맞게 웃으며 답하는 관원을 보며, 노인은 또 한번 찔린 아픈 가슴을 애써 숨기며 미소를 머금었다.
노인과 청년은 광목계약을 하고서 다른 점포를 구경하며 돌아다녔고, 이내 날이 저물 때쯤 되자 걸음을 멈췄다.
자동에서 유명한 객잔의 후원에 자리 잡고 기다리고 있자, 자동포구를 둘러보고 온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
헌데 하나같이 표정이 잔뜩 굳어서,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어째 거래는 다들 잘 한 것처럼 보이는데, 손해를 본 것 마냥 굴고 있다.
“다들 모였소이까.”
“효가가 아직 오진 않았지만, 이제 곧 올 거외다.”
“그럼 우리끼리 이야기라도 나눕시다.”
어스름한 노을빛이 비추는 창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노인과 중년인들은, 성토하듯 자신이 살펴본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조선이 이주섬을 정복한 게 확실한가?”
“맞네. 잠깐 발을 담근 게 아니라, 아예 확실히 조선땅으로 만들 속셈이 분명하네. 자동에서 나가는 물량뿐만 아니라 영파에서 나가는 물량도 있다고 하더군.”
“그 큰 조선배들이 떠나지 않고, 계속 이주섬을 돌아다니고 있고.”
“음... 결국 일이 이렇게 됐구려.”
“끄응.”
“흠.”
누군가의 말에, 다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전쟁은 전조가 있기 마련이고, 준비과정이 필요한 것 또한 당연하지 않나. 조선본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눈에 띄는 특이점은 분명히 있었다.
조선본토로 넘어갔어야할 미곡이 상해조차지에 계속 쌓이고 있는 건 분명 수상쩍은 움직임이었고, 미곡을 운반해야할 절강상인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숨기지 못하고 조선과 상해를 지켜봤다.
조선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무려 일만이 넘는 기병을 상륙시켜 남직례를 휩쓸어버리지 않았나.
기병을 야금야금 옮겨오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건 공청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지 조선의 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수십척의 거대함선을 동원해서 남통성을 포위, 격파할 줄은, 정작 조선군을 불러들인 절강상인들 스스로도 몰랐던 사실이니까.
이러한 절강상인들의 불안감은 어느덧 다른 지방의 상인들에게도 야금야금 퍼져나갔다.
“대체 뭘 하려고 저렇게 식량을 쌓아둔 걸까? 설마 또 어딜 공격하러 가는 걸까?”라는 의문이 계속 쌓여갈 때.
조선은 뜬금없이 이주섬을 공략해서 교두보를 마련했고, 이내 본심을 드러냈다. 엄청난 수의 전함을 동원해서, 이주섬에 기병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거지.
이런 조선의 움직임에 모두가 다들 한시름 놓았다.
적어도 자신들이 공격목표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고, 더 이상 마음을 졸일 필요가 사라졌으니까.
그렇게 조선이 대만섬을 공략한지 벌써 두 달에 가까워진 지금.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복건뿐만 아니라 광서와 광동, 멀게는 대월과 참파 등의 동남아시아 소국에까지도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광동의 대표적인 무역항인 광주상인들이, 죄다 물건을 싸 짊어지고서 자동에 찾아오게 된 거지.
“어찌 봤나? 자동이 되살아 날 수 있을 걸로 보이나?”
“확신할 수 없지만, 불가능한 건 절대 아닐세. 자동이 과거 어땠는지 다들 들어서 알지 않나. 조선이 이주섬을 경락하고, 이주섬이 계속 자동과 거래하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자동이 커지겠지. 복주상인은 어떤가?”
“자동을 견제하기 보단, 조선과의 연줄을 잡으려고 하고 있네. 허나 자동상인이 가만히 있겠나? 그들은 어찌됐건 조선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라서 복주상인보다 후한 값으로 물건을 내어주고 있네.”
“끄응...”
“흠.”
“설마... 그들이 자동에도 조차지를 내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무도 모르지.”
“조차지라...”
다시금 다들 미간이 찌푸려졌다.
조차지라는 생경한 걸 조선이 들고 왔고, 이는 중국상계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땅을 내어준다는 것이 걸리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수혜를 얻는 건 분명한 사실 아닌가.
“절강에 상해조차지가 생긴 후로, 절강상인의 수익이 늘어난 건 분명한 사실이겠지?”
“그럴 걸세. 그치들만 조선물산을 구입할 수 있고, 나아가 바닷길이 안전해지지 않았나. 조선수군이 일본의 바다 근처까지 돌아다니진 않지만, 남해 근처만 돌아다녀도 이득은 이득일 걸세.”
“맞네. 우리조차도 그러한데, 더 많은 상선을 부리는 절강상인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허면 앞으로 어찌될 걸로 보이나? 30년간 조차지를 약조하긴 했으나... 이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 나중에 조선이 발을 빼려고 하겠는가.”
“아무도 모르는 일일 걸세. 어쩌면 아예 그 땅이 조선땅이 될 지도 모르고.”
누군가 무서운 말을 내뱉자, 다들 고심이 깊어졌다.
헌데 무거운 돌덩이는 또 날아온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조차지에선 이미 조선법이 적용된다고 하더군. 조선인과 절강,산동인이 머무는 구역을 완전히 구분해서 분리하고 있다고 하니... 어쩌면 조선의 술수가 진행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약속한 30년이 지나면 다들 거기에 익숙해지겠군...?”
“그렇지 않겠나? 그리고 만약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조선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으면, 산동이나 절강연맹도 조차지를 되찾으려는 생각을 하기 힘들 걸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