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챕터46. 퍼지다 (9)
다들 조차지의 미래를 그려보지만, 어찌 될지는 정녕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뻔히 보이는 수이긴 한데, 이게 모두에게 이득이 되니 누군가 앞장서서 나서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자동일세. 만약 자동상인들이 연맹을 만들고, 곧 복건연맹으로 발전해서 자동에 조차지를 내어주면 어찌되겠는가.”
“...”
누군가의 말에 안 그래도 무거웠던 분위기가, 물 먹은 솜처럼 축 가라앉았다.
“자동이 과연 그런 짓을 할까?” 싶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쉬울 것 없던 절강상인조차도 상해조차지를 통해 이득을 봤는데, 부활을 꿈꾸는 자동상인들이 가릴 게 있을까.
“그보다 먼저 따질게 있네. 자동연맹이 만들어지긴 하는 건가?”
“분명히 만들어지네. 다들 알다시피 이미 복건연맹을 만들려고 호족들끼리 이합집산을 하고 있는데, 자동이 빠지면 어떻게 되겠나? 일개 가문으론 복건연맹에 발도 내밀지 못할 테니, 자동부터 하나로 뭉쳐야지.”
“흐음... 여긴 회회인 세력이 강한데, 하나로 뭉칠 수 있겠나?”
“생존의 문제니까. 복건연맹에서 자동이 제외되면, 회회인이건 한족이건 할 것 없이 죄다 몰락하고 말 걸세. 일이 그렇게 진행되면 조선은 별 볼일 없는 자동보다, 복건연맹과 손을 잡고 거래를 할 테니까.”
“실제로도 조선이 등장한 후로, 호족간의 회합이 매일 같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분명 유의미한 결론이 나오고 있을 겁니다.”
누군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창가를 앉아 밖을 보고 있던 중년인이 양념을 뿌렸다.
“맞는 말씀입니다. 작금 중국의 현실을 꿰뚫어보고 연맹을 처음 만들어 낸 게 조선입니다. 그들은 분명 복건 또한 하나로 뭉쳐 연맹이 만들어지길 누구보다 바랄 터, 그걸 위해서라면 자동을 얼마든지 버릴 수 있을 겁니다.”
“바짓가랑이를 잡아야 하는 건 자동호족이란 말이군.”
“문제는 자기들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바람에, 우리가 끌려들어가게 생겼다는 거지.”
“맞네.”
“끄응...”
다시금 결론을 되짚자, 하나같이 미간을 찌푸리며 장고에 빠져들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녹은 철처럼 묵직한 침묵을 깨고 누군가 다시금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웠다.
“헌데... 조선이 이주섬을 차지했다고 해도, 그곳에 무역항을 열어주겠나? 조선은 지금까지도 제주에 절강상인을 받아주지 않고 있지 않나.”
“그건 제주라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주섬은 바로 코앞에 있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만약 이주섬에 무역항을 열면 조차지가 굳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
누군가 희망 섞인 이야기를 내뱉자, 또 누군가가 먹칠한 절망을 집어던졌다.
“이주섬에 무역항을 개방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설령 개방을 한다고 해도 강남상인은 거부하고 남방소국의 상인만 받으면 어찌할 거요? 우리 힘으로 조선을 움직일 수 없으니, 조차지와 이주섬의 무역항은 따로 놓고 봐야할 거요.”
“끄응...”
“흠.”
다시금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장고에 들어갔다.
‘이번 일이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날 일이 아니지 않나.’
‘앞으로 남방무역의 판도가 뒤바뀔 문제야.’
‘게다가 자동을 비롯한 복건과 달리, 우린 상황이 더 심각하지 않나.’
광주상인회를 대표해서 온 이들은, 각자가 다르면서 또 같은 우려를 떠올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광주상인은 동남아시아와 서역의 물건을 사와서, 중국내륙, 일본에 팔았다.
조선에 직접 팔고 싶지만 의주까지 가는 건 너무 멀고, 이미 산동,절강상인이 꽉 잡고 있어서 비집고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았다.
중국내륙에 물건을 팔기 위해선 산동, 절강상인에게 넘겨야 했으니, 안면무시하고 무작정 조선시장을 공략할 수도 없었고.
헌데 그간 광주상인이 바라만 보고 있던 조선시장이, 코앞에 등장했다.
이젠 절강,산동상인을 통하지 않더라도 조선과 직거래를 할 수 있게 됐고, 반대로 웃돈을 붙여서 사오던 조선물산을 곧장 살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지.
“남방까지 진출했는데, 조선이 남방물산의 수입을 줄일 리가 없지 않소? 분명히 더 많은 수입을 하게 될 것이외다.”
“그건 분명하오. 지금 당장도 자동에서 온갖 물건을 다 사들이고 있지 않소.”
지금 역사의 조선은 원래 역사의 조선보다 훨씬 부자이며 다른 나라에 관심도 많아서, 염료, 향신료, 향료, 기타 서역물품과 같은 남방물산을 아낌없이 수입하는 나라다.
광주상인들 입장에선 결코 놓칠 수 없는 미개척시장이지.
“결국 이주섬에 과연 무역항을 열어줄 지는 미지수이나, 조선이 남방까지 진출을 했다면 어디가 됐건 조차지를 만들어 무역을 하지 않겠소?”
“맞습니다. 그리고 그간 조선의 조심스러운 행보로 봤을 때. 조차지에서만 무역을 할 가능성이 크고, 청도와 상해의 예를 보건데 조차지를 내어준 상인회에게만 독점권을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정도면 다행이지. 만약 조선이 직접 남방소국으로 상단을 보내면 어쩔 거요? 우린 전부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할 판이외다.”
모두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다시금 머리를 굴려댔다.
조선의 진출로 산동, 절강 또한 손해를 입겠지만 그들에게 물건을 넘기는 복건, 광주상인 또한 손해를 입을 거다.
그리고... 결코 쉽진 않겠지만, 만약 조선이 일본까지 진출해서 남방물산을 팔기 시작한다면? 그때 광주에게 남은 건 산동, 절강상인을 거쳐야만 하는 중국시장만 남게 될 거다.
“결론은 우리가 조선시장에 진출하는 걸 넘어서서 기존 시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물고 늘어져야 되는 거군.”
“그렇지 않겠소? 자동상인을 비롯한 복건상인을 경쟁하는 건 둘째 치고, 조선의 손을 잡지 않으면 기존 시장을 다 빼앗기게 될 거외다.”
“끄응...”
“음.”
다들 답도 안 나오는 외통수에 신음을 흘려댔고... 누군가 다른 의견을 입 밖에 토해냈다. 헌데 이것 또한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조차지를 끌어오는 게, 우리가 무작정 손해를 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이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크흠.”
“하...”
뜻 모를 소리를 하건만, 모두는 금세 납득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광동성의 성도이자 최대 무역항인 광주.
이곳은 미래 중국의 3대 무역항 중 하나로 번성하는 곳이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나라 시절에 편입이 되었으니, 그 당시에는 흔히 남월이라고 칭하던 곳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당, 송시절에 본격적으로 한족이 남하했고, 소수민족을 몰아내고 한족이 주류가 된 광주가 완성됐다.
송의 마지막 황제를 비롯한 남송인들이 결사항쟁을 했던 장소 또한 광주일대였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냐면. 원나라조차 중국대륙 끝자락에 위치한 광주를 제대로 통치할 수 없어서, 한족의 문화와 관습을 그대로 인정해줄 정도였지.
그래서 원말명초시기에 장사성을 비롯한 군벌들이 광주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거고.
이런 상황은 그대로 이어져서, 원래 역사에선 명청교체기 시절에 명나라 군이 마지막까지 저항. 청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문제는 광서는 물론이고 광동 또한 광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선 한족의 세가 강하지 않다는 점.
사실 원이나 명나라 시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이 땅은 딱히 욕심을 낼만큼 구미가 당기는 땅도 아니고, 문화적으론 한족보단 월족에 더 가까웠다.
해서 대충 광주를 필두로 한족으로 구성된 명 조정의 지배를 받아, 소수민족은 자치권을 행사해 왔었지.
헌데 운석핵꿀밤으로 명이 망해버렸고, 월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지배하던 현 단위의 지방행정조직은 그대로 소멸 당했다.
다른 지방과 달리 한족의 세가 약하다보니... 상인이나 호족세력이 지방행정조직을 흡수해 재편된 게 아니라, 자치권을 누리던 소수민족이 그냥 군벌이나 독립세력으로 튀어나온 거지.
나아가 이들은 이권이나 명분으로 뭉친 세력이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뭉친 터라... 다른 지방처럼 연맹을 이뤄 하나로 합쳐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래서 광서와 광동이 아직까지도 개판이었고, 조금 과하게 말하면 수십개의 소국으로 분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원래 역사에선 영락제가 베트남 정벌을 떠날 때.
광서, 광동의 소수민족도 싹 한번 정리해서 기를 꺾어놨겠지만... 지금 역사에선 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지.
“지금껏 우리가 육로상행을 통해 손해를 본 게 얼마입니까?”
“끄응.”
“빌어먹을...”
누군가의 말에 다들 그간의 고행이 떠올랐는지, 눈에 불을 켜고서 열불을 토해냈다.
지금까지, 그리고 원래 역사에서 앞으로도. 광주가 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중앙조정을 등에 업고 중국물산을 전부 끌어와 동남아시아에 팔아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해로를 통해 물산을 가져오는 건 물론, 산악이 우거진 남방 산맥을 뚫고 육로로도 물건을 옮겼지.
허나 명이 망하면서, 이 모든 게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과거 원, 명의 중앙정부는 각 지방의 상인세력을 조정해서, 서로의 이권을 어느 정도 선을 그어줬지만... 지금은 무한 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산동, 절강, 복건, 광동 상인들 모두가 따로 놀기 시작하면서, 전에 비해 지출되는 부가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지.
“그게 끝입니까? 다른 지방과 달리 우리는 신경 써야할 게 하나 더 있지요.”
“빌어먹을 이족놈들...”
“안 그래도 이곳에 오기 전에, 육가주는 호광으로 상행을 떠났다가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이족놈들은, 결코 광주를 노리는 걸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를 박박 갈아도 분이 가시질 않는지, 누군가는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중국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족과 이족의 투쟁으로 점칠 되어있고, 지난 세월동안 한족은 끊임없이 남하해 소수민족의 땅을 빼앗아왔다.
광동의 소수민족들 입장에서 광주는, 자신들의 땅을 끊임없이 탐하던 한족왕조의 중심이자 앞잡이나 다름없는 곳.
명이 망하며 군대도 날아갔고, 반대로 그간 봐왔던 명의 지방조직을 얼추 따라하며 자신들만의 독립세력을 완성한 상황.
앞뒤가 딱 떨어지니, 소수민족들이 상행을 나가는 광주상인들을 약탈하고 노략질하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닌가. 나아가 아예 광주 일대까지 내려와서 도적마냥 노략질을 하고 도망가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들 입장에선 약탈품을 얻는 것도 좋고, 그간의 분풀이를 하는 것도 좋고, 반짝반짝 빛나는 무역항인 광주를 빼앗는 것도 좋으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어떻게 됐습니까. 호광이나 강서로 상행을 나갈 때마다, 이족놈들의 습격을 받아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까.”
소수민족들 입장에선 먹잇감이 알아서 제 발로 찾아온 꼴 아닌가. 한족이 우글거리는 광주를 직접 공략하는 건 힘들지 몰라도, 상행을 나온 이들을 뜯어먹는 건 누워서 떡먹기다.
“우리와 거래하는 부족이 있긴 하지만, 그놈들도 속이 시커멓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세가 부족해 보이면 거리낌 없이 칼부림을 부릴 놈들입니다.”
“맞소. 이족들은 이족끼리도 싸우기를 그치지 않는 놈들인데, 우리라고 달리 보겠소? 아무리 우리와 거래를 한다고 해도, 결코 우리를 좋게 보진 않을 거외다.”
암울한 이야기만 계속 흘러나온다.
이러한 상황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든지, 아니면 사생결단을 내서 싸우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 해결된 문제인데... 둘다 불가능하다는 게 지금 광주의 현실이었다.
“그러니 조선을 끌어들여서, 최소한 바다는 맡기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이족들이 날뛰어도, 그들도 조선의 소문은 들어봤을 터... 해적놈들이나 이족놈들이 바다로 공격해 오진 않을 겁니다.”
“...”
“흠.”
다들 눈을 번뜩이며, 서로의 속내를 읽어갔다.
조차지에 이렇게 열을 올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
엉덩이 무거운 광주상인회 대표들이 이곳 자동에 직접 행차한 건, 조선전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조선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청도와 상해의 예를 보건데, 조차지는 무역항인 동시에 조선군 주둔지다.
광주 근처에 조차지를 만들면, 조선이 광주상인을 대신해 적을 처치해 줄 수 있는 거지.
“그러니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각 가문 가병들의 소모와 피로도가 극심한데, 상선에 따라갈 가병을 줄일 수 있다면 육로상행에 투입할 가병을 늘릴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바다를 조선에게 맡기고, 가병을 육로상행에 투입. 군비를 줄이는 동시에 육로상행의 안전을 강화하겠다는 뜻.
“그런데 조선이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이겠소?”
누군가 조심스럽게 반문을 내밀자, 다들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의 의도가 아니라, 조선이 알아서 움직일 겁니다. 조선이 청도와 상해를 차지하고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알아서 군선을 부려 순찰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소.”
“그러니 설령 조차지가 있든 없든, 이주섬을 차지한 이상 조선은 분명 남해바다를 제 앞바다처럼 누비며 다닐 겁니다.”
“음... 어차피 조선군은 움직일 거고, 그걸 막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조차지를 통해서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게 낫다는 말이군. 그래야 오히려 우리입장에선 통제... 아니 제한을 걸기 쉬우니까?”
“그렇습니다.”
“음. 그런데... 조차지 말고, 이족들과의 싸움에 조선군을 아예 불러들이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절대 불가요!”
“힘들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은근히 제안하자, 하나같이 손사래를 치며 반대를 표했다.
“내륙에 조선군을 끌어들이는 게 말이나 되오? 다들 짐작하다시피 조차지조차 앞으로 조선땅이 될 지도 모르는데, 조선군을 광주로 불러들이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소?”
늑대를 몰아내려고 호랑이를 집안에 끌어들이는 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