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 챕터47. 모여들다 (1)
“그래도 노를 저어가면 속도가 붙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해안가 근처에서나 그런 거지, 조금만 멀어지면 따라잡지도 못할 거다.”
“맞습니다. 제 배가 그렇게 잡혔죠.”
그게 자랑은 아니지만, 덩치가 몸으로 증명했다고 말하자 다들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노를 젓는 배는 해안가 근처에서나 탈 수 있는 거고, 파도가 크게 몰아치는 먼 바다에서 노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
해적질을 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본 이들이니,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흠... 그럼.”
두목은 그렇게 말을 하고선, 가운데 놓은 술잔을 중심으로 다른 술잔들을 여러 개 가져다 붙였다.
“조선군선을 상대하기 위해선 결국 속도가 붙기 전에, 최대한 빨리 달라붙어야 한다. 하지만 크기가 월등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 척으로는 턱도 없고, 최소한 4척이나 5척이 있어야 한단 말이지.”
그는 그리 말을 하고선, 뭉쳐 놓은 술잔 옆에 작은 술잔들을 하나둘씩 가져다 붙였다.
“...”
다들 이게 뭘 뜻하는지 알아차리고선, 조용히 침을 삼키며 눈을 굴렸다.
두목이 지금 조선군선과 싸울 계획을 짜고 있으니, 속에서 덜컥 간담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게... 그렇게 달라붙어도, 갑판에 오르는 게 쉽게 되겠습니까.”
“맞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우리 배에서 1장丈에 가까운 높이인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꺼내자, 다들 두목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담벼락도 위에서 창칼을 내지르면 타넘는 게 힘든데, 파도가 몰아쳐서 흔들거리는 담벼락을 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말 그대로 바다에서 벌어지는 공성전과 다름없어서, 배사다리를 올린다고 해도 과연 그걸 지탱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잠시 눈을 감으며 조선군선에 달라붙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는데, 그저 갑판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비가 얼굴에 틀어박히는 상상만 맴돌았다.
“그렇지? 사방에서 달라붙어 배가 속도가 붙지 않게 만들어도, 뱃전에 올라타는 건 쉽지 않겠지?”
“예.”
“그리고 화포가 있지 않습니까. 지난 전쟁 때를 생각하면, 조선군은 화포를 아끼지 않고 쏴댈 텐데요...”
“...”
소두령 중 하나가 무서운 소리를 내뱉자, 닭살이 돋을 정도로 싸늘한 침묵이 장내를 휘감고 지나갔다.
“끄응.”
“화포...”
“그건 상대하고 싶지 않은데...”
누구하나 나서지 못하고, 다들 우물쭈물 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과거 정난의 변 당시. 황제군은 복건, 광동의 군병과 화약장, 화포병들을 다 끌고 갔고, 운석핵꿀밤으로 싹 사라졌다.
그 후. 개판이 된 상황에서 어느 누가 화포를 제조하고 화약을 만들려고 노력했을까. 이건 일개 가문이나 상인회가 힘을 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본래 기반이 있던 북평부와 그 북평부에 대항하던 산동, 요동이 유별났던 거지, 다른 지방의 사정은 대동소이했지.
막말로 일개 해적단이 화포와 화약을 쓸 정도면, 그건 해적을 넘어서 군벌에 가까운 존재. 그런 이들은 이미 정리되거나 반대로 정착해서 호족이나 상인으로 변모한지 오래다.
‘우리 중에도 화포를 직접 다뤄본 사람은커녕, 화포와 화약을 본 사람도 드물지 않나.’
두목은 떫은 표정을 짓고 있는 소두령들을 다시금 살폈다.
“부하들 중에 화포나 화약에 대해서 아는 놈들 없지?”
“그런 장인이 어디 흔하겠습니까.”
“상인회에 속해 있는 장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꽁꽁 숨겨놨을 겁니다.”
“맞습니다. 지금껏 화포로 무장한 상선은 사실 본 적도 없지 않습니까. 특히나 광동과 복건에선 말이죠.”
혹시나 싶어 되물어보지만, 역시나 부정적인 대답만 들려온다.
화약기술자가 미쳤다고 해적질을 하고 있겠나.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그런 기술자는 분명 대우받아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거다.
“그럼 결국 조선군의 화포에 속절없이 얻어맞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그래도 뭐가 어떻게 되는지는 대충 알아야, 얻어맞아도 잘 얻어맞을 거 아냐. 조선수군을 겪어본 남통 출신은 찾기 힘들겠지?”
“예. 그것도. 조금.”
“강에서 놀던 놈들이 바다로 나오겠습니까.”
“예전 남통수병은 그대로 남직례 호족들에게 흡수됐고, 또 상당수를 조선이 상해를 통해 빨아들이지 않았습니까. 화포를 겪어 본 경험이 있는 수병을 찾는 건 어려울 겁니다.”
“끄응...”
‘참나. 답이 안 보이는 고만.’
빈틈을 찾아보려고 머리를 굴려보는데,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조선수군이 화포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화포가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화포를 이용한 전략과 전술. 나아가 화포를 싣고 다니는 진짜 전함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알아 낼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뜻 아닌가.
“그래도 남통포위전을 구경한 사람은 많지 않냐? 대충 이야기를 들어볼 순 있을 거 아냐.”
“뭣도 모르는 낚시꾼, 구경꾼들 이야기를 모아봐야 솔직히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보나마나 조선배에서 뻥뻥 화포를 쐈고, 남통수군이 펑펑 터져나갔다는 소리만 할 겁니다.”
괜히 화풀이 하듯 더 긁어봤지만, 역시나 꽉 막히고 말았다.
“결국 화포를 상대로 얼마나 상할지 모른다는 말이군? 그럼 4,5척이 한 번에 달라붙어 싸운다고 해도 조선배 하나를 당해내기가 쉽지 않다는 거네?”
“...”
선장은 한곳에 뭉쳐 있던 술잔을 신경질적으로 휙 쓸어냈고, 다들 그걸 보면서도 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진 못했지만, 조선수군은 백 척이 훨씬 넘는 남통수군을 반나절 만에 초토화시키지 않았나.
‘남통수군이 비록 강에서 활동했다지만, 싸우는 방식은 우리와 크게 다를 게 없을 터... 결국 조선수군을 이기려면 그에 몇 배나 되는 병력을 일시에 동원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게 될 리가 있나.”
두목은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남해를 떠도는 해적들을 다 규합해도 그 정도 병력이 만들어질까 말까다. 그런데 그렇게 모은 놈들이 어디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일까?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만약 하나로 뭉쳐서 싸운다고 치면, 분명 자기 목숨을 아껴서 남을 먼저 밀어 넣어서 화살받이로 쓰려는 이들이 한가득.
죄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싸우긴 커녕 눈치만 볼 게 뻔하고, 그렇게 분열되면 기동력을 앞세운 조선수군이 각개격파를 할 게 또 뻔하다.
“쓰벌... 됐다.”
“...?”
두목이 갑자기 욕을 토해나자, 다들 눈에 물음표를 그렸고...
“조선수군은 못 이겨. 그렇지? 뭐. 운 좋게 한번 이겼다고 치자. 이주섬을 점령한 조선이 가만히 있겠냐? 가본 적도 없는 조선에 싸움배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엄청나게 끌고 와서 초토화시키겠지.”
“...”
“지금껏 조선이 한 짓을 보면 그래.”
“그건 그렇죠.”
“예. 뭐... 천진이 그렇게 불바다가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어째 조선이 희대의 깡패국가가 된 모습이건만,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동의를 표했다.
사실 연오랑이 일으킨 개혁과 그 여파로 조선은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친 거지만... 외국인이 보기에는 근 십년 넘게 전쟁을 계속하며, 땅을 넓히고 있는 탐욕스러운 나라가 바로 조선 아닌가.
이번 일도 그 일의 연장선이 될 거고, 조선은 어떻게든 승리하기 위해 기를 쓸 거다. 그 명성 높던 천진을 깡그리 불태워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싸워서 이길 수 없다. 그럼 도망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하지? 남방소국의 상인들?’
문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광서, 광동보다 더 개판인 곳이 동남아시아의 남방소국인데, 거길 가는 건 알아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꼴이다.
과거 한족의 남하로 수많은 소수민족 일파가 동남아시아로 이주했지만, 무역에 열중하던 송,원 시절에는 한족 또한 그에 못지않게 많은 이들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했다.
미래에는 화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뭉치게 되지만, 이 시대에 그런 정체성과 동질성이 있을 리가 있나.
중국내륙에서도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쁜 한족이니, 남방소국으로 이주해 토착인과 혼혈을 이루면서 아예 지방호족이나 지주로 변신한 이들이 태반이다.
‘그놈들이 같은 한족이라고 도와준다고? 뜯어먹으면 뜯어먹었지,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두목도 해적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봐서 확실히 아는데, 그놈들은 남방이족보다 더 악랄하면 악랄했지 같은 한족이라고 반겨줄 놈들이 아니다.
그것도 과거가 지저분한 해적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언제 자기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이들이니, 품에 안으려는 이는 찾기가 힘들지.
‘그럼... 대월이나 참파? 아니면 그냥 진짜 남방소국으로 갈까?’
이런 생각도 떠올랐지만, 역시나 고개가 내저어진다.
이 시대의 동남아시아. 특히 해상무역의 중심이 되는 미래의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중이다.
각 지역마다 인도에서 넘어온 무슬림, 기존의 토착민, 중국에서 건너간 소수민족, 한족세력 등등. 종교, 문화, 민족이 죄다 달라 따로 놀고 있어서, 도시국가라고 봐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상황.
거기에서 벌어지는 해적질은 단순히 약탈하고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팽창과 생존을 위해서 소국의 명운을 걸고 벌어지는 싸움이다.
비록 규모가 작아서 전쟁이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성격 자체는 전쟁과 다를 게 없는 거지.
‘거기에 끼어들면, 이리저리 치여서 화살받이가 될 게 불을 보듯 뻔하지 않나.’
애초에 민족도 다른 나라에서, 한족 해적이 얼마나 대우받을 수 있을까. 거래를 하러 가는 거면 모를까, 의탁과 정착을 위해 거길 가는 건 미친 짓이다.
‘남은 건 그럼... 하나밖에 없네.’
“결국 조선에 붙어야 한다는 건데...”
“흐음.”
“음.”
두목의 중얼거림에 다들 반색해서 신음을 흘려댔고, 누군가 희망찬 미래를 뱉어냈다.
“사실 별 문제가 안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해적질을 그만둔 지 꽤 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저 놈을 조선군이 그냥 보내주기도 했고요.”
“...”
괜히 지목당한 덩치가 쌍심지를 켰지만, 소두령 중 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조선이 자동사정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또 저희를 비롯한 다른 놈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편으론 아예 모르는 건 아닐 겁니다. 만약 조선이 이주섬을 완전히 정복했다면, 우리가 실어 나른 유민에게서 사정을 들었을 것 아닙니까?”
“오. 그렇지.”
“이야. 어쩐 일이냐? 네가?”
조리 있게 말을 하자, 다른 소두령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약을 올려댔다.
“흐음... 일리가 있어.”
두목 또한 동의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유민이 먹고살기기 힘들다 한들, 누군지도 모르는 해적놈들의 배에 아무렇지 않게 탈 리가 없지 않나. 만약 그대로 싣고 가서, 어딘지 알지도 모르는 남방소국에 노예로 팔아버리면 어쩌려고.
해서 이 해적단은 자동상인 중 하나와 결탁해 나름 신뢰를 쌓았고, 꾸준히 수송작업을 하면서 인지도를 높여 어렵사리 수송업자로 변신할 수 있었지.
그리고 이런 꿀단지를 가만 두고 봤을까. 먹고살기 팍팍해진 다른 해적단 중에서도, 같은 업종으로 변신한 이들이 몇몇 있었다.
“유민을 통해 들었으니 우리가 뭘 했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그냥 풀어줬다. 결론은 한마디로! 조선은 유민이 들어오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이 말이군?”
“예. 뭐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이었던 남통수병을 쫙 빨아간 것도 같은 이치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건 그래. 노예로 삼을 거면 수병만 잡아가면 될 것을, 수병의 가족까지 함께 데려갔잖아?”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상해에선 능력 있는 장인이라면 신분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조선이 데려간다고 하더군. 그것도 가족 전부를 말이야.”
하나둘씩 지난 세월동안 강남을 떠돌던 기이한 소문에 대해 풀어놨다.
조선도 그렇지만 중국도 대가족을 이뤄 사는 게 일반적이고, 흔히 가족이라 하면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사촌, 육촌 등을 망라하는 양상을 보였다.
한마디로 장인 한사람을 챙기기 위해 수십명을 데려갔다는 말인데, 이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지.
‘이거면... 한몫 잡을 수도 있겠는데?’
소두령들의 이야기를 듣던 두목은 자기도 모르게 눈에 불꽃이 튀었다.
밀실에 파묻힌 것 마냥 빠져나올 구멍이 안보였는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한줄기 빛줄기가 내리 쬐는 것 같다.
“회합이 언제지?”
“그... 태풍이 오기 전에 만나야 하니, 한달쯤 후에 모일 예정입니다.”
“위치도 똑같고?”
“예. 뭐. 달리 모일 곳도 없지 않습니까.”
“음.”
두목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 거야. 분명 다른 놈들도 살아날 구멍을 찾고 있겠지.’
조선이 대만섬에 진출하고 나서부터, 남해를 떠도는 해적들 사이에선 위기감에 봉착했다.
보나마나 조선수군이 올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설왕설래 말이 많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고, 또 한번 해적단끼리 모여서 회의를 하기로 했다.
사실 굳이 조선군 때문이 아니더라도.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지 않게 위해선, 서로간의 중재와 만남이 필요하지 않나.
이번 회합도 그 연장선이라 볼 수 있었다.
‘분명히 이번 일에 대한 논의를 할 텐데... 딴 수작을 부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거야. 차라리 해적질을 때려 치면 쳤지, 그놈들은 못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