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41화 (341/538)

341. 챕터47. 모여들다 (2)

바다의 도적인 해적을 믿는 게 오히려 더 웃기는 말. 해적에게 낭만이 있다는 소문은 헛소문에 불과하다.

애초에 건실하게 먹고살 생각이 있다면 어떻게든 땅에 붙어먹고 살지, 목숨 걸고 배에 타서 칼질을 하겠는가.

두목뿐만 아니라 모든 해적은 다들 한탕해서 육지에 가서 떵떵거리고 살고 싶은 거지, 있지도 않은 낭만을 찾아서 바다를 헤매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내가 아니어도 분명 다른 놈이 먼저 움직인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선수 치는 게 낫지.’

“야. 주가와 황가는 뭐하고 있냐?”

“그놈들도 저희처럼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주가와 황가는 두목을 따라서 수송업자로 변신한 옛 해적단 두목들.

“한번 보자고 알려라.”

“지금요?”

“어.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뜬금없는 명령이지만, 소두령 중 하나는 반문도 없이 냉큼 아래로 내려갔다.

두목은 앞날이 막막하진 해적생활에서, 시대를 읽고 수송업자로 변신할 정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지 않나.

분명 이번에도 뭔가 꾀를 냈다고 생각하는지, 소두령들은 하나같이 눈을 반짝이며 두목에게 집중했다.

*****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자동포구는 옛 영광을 되찾은 것 마냥 온갖 배들로 가득 찼다.

자동상인이 운용하는 배들, 복주와 상해에서 온 배들, 언제 왔는지 모르게 조용히 다가온 광주의 광선廣船. 끝으로 복선과 생김새가 조금 다른 대월의 배까지.

거의 백 척이 넘는 배가 한자리에 모였고, 그 속에는 조선이 주문한 물산이 빼곡하게 실렸다.

그 중 태반이 물소였는데, 물소의 덩치가 오죽 큰가. 작은 배에는 10마리만 실어도 꽉 찰 정도라서, 수송선단의 태반이 소똥냄새를 풍기고 있었지.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 해적두목의 배들도 알게 모르게 섞여 있었다.

중국배를 지역에 따라 사선,조선,복선,광선 등으로 분류하지만 이 시대엔 거기서 거기고, 운용방식도 거기서 거기다.

전투전용 함선을 부리는 나라는 조선이 유일하다시피 하니, 해적선이라고 해서 상선과 크게 다를 게 있나.

싣는 짐에 따라서 무역선이 됐다가, 군선이 됐다가, 수송선이 됐다가 하는 거니... 해적선이 이 틈에 끼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안 그래도 자동상인은 배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서, 일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진행됐지.

이내 곧 조선전함이 몸을 일으켰고, 어미를 따라가는 오리새끼들 마냥 수송선단은 줄줄이 돛을 펴고 뒤를 쫓았다.

속도를 맞추는 게 분명한 게, 저 거대한 전함은 돛의 절반을 펼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순풍을 받아 나아가니, 선두에 선 조선전함을 쫓기 위해서 다들 안간힘을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자동에서 출발한지 이틀 쯤 됐을까.

수송선단은 북쪽에서 내려온 또 다른 선단과 마주하게 됐다.

돛을 활짝 펴고, 파도를 들이마시듯 거침없이 속도를 내며 나아가는 조선의 함선들.

상해에서 미곡을 싣고, 조선본토에선 군수품과 생필품, 건설공구 부품, 공작기계, 전마, 조선이주민 등을 가득가득 채운 4차 보급대다.

“쓰벌...”

“와...”

“저것들과 싸운다고?”

선단에 껴 있던 두목과 해적들은, 위풍당당하게 나아가는 조선전함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선단 꽁무니에 닿아 있던 조선함선이 순식간에 수송선단을 앞질러 가고 있다.

놀랄 일은 그게 끝이 아니다.

“대체... 몇 척이야?”

“눈에 보이는 것만 서른 척이 넘습니다.”

바다 저편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흡사 흰 돛이 연처럼 날리며 사방에서 펄럭이고 있다. 거리도 한참 멀건만 돛이 휘둘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마냥 환청이 느껴진다.

헌데 그런 흰색의 향연은 끝나질 않고, 계속해서 눈앞을 가리며 앞서나간다.

서른 척은 무슨, 마흔 척이 넘어가는 것 같다.

“...”

누군가 꿀꺽 침을 삼키자, 전염이라도 된 것 마냥 다들 똑같이 침을 꼴깍꼴깍 삼켜댔다.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우리가 탄 배보다 작은 배가 단 하나도 없잖아?’

두목은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묻혀가며, 조선선단과 수송선단을 번갈아가며 살폈다.

조선배는 다 비슷한 크기를 하고 있으니, 저것들 모두가 싸움배일 게 분명. 그렇다는 건 전부 화포를 싣고 있을 거라는 뜻.

‘그럼 대체 화포가 몇 문이야? 생각을 바꾼 게 천만다행이다.’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내쉬어진다.

끝도 없이 스쳐지나가는 웅장함에, 해적들뿐만 아니라 수송선단 전체가 동요하는 게 분명. 뭐라뭐라 소리치는 고함이 온 사방에서 파도와 바람소리와 함께 밀려들었다.

구경하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 동안, 조선선단은 완전히 수송선단을 앞질러 지나가 바다 어딘가로 사라졌다.

“진짜 빠르긴 빠르군.”

“예. 지금도 최고속도 아닙니까?”

“...”

소두령 중 하나는 돛대가 끊어질 정도로 활짝 부풀어 오른 돛을 가리켰다.

애초에 돛의 숫자가 차이나니 속도 또한 다를 걸 예상했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체감이 확 된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저 배는 죽었다 깨나도 못 쫓아간다.

‘그리고 거리를 주는 순간 화포에 얻어맞겠지.’

암울한 생각이 불쑥 치솟고, 두목은 혹시 모를 불안감을 애써 억눌렀다.

이내 이틀간 더 달려가자, 드디어 아른거리던 이주섬이 눈앞에 성큼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보는 건 오랜만인데...”

“예. 그런데 너무 바뀌어서 못 알아보겠습니다.”

“그렇지?”

“...”

두목의 말에 소두령은 다짜고짜 고개를 끄덕였다.

대만해안선은 그리 고운 게 아니라서, 아무리 가볍고 날렵한 해적선이라고 해도 아무 곳에나 상륙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상륙지점은 얼추 정해져 있으니... 미래의 네덜란드, 스페인등의 세력이 익히 알려진 지역에 자리 잡은 것도, 조선이 신도시의 입지를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저곳.

남주강이 바다로 흘러나오는 저 지역은 과거에 두목도 몇 번 지나가면서 눈여겨봤던 곳인데... 지금은 모습이 꽤나 달라져 있었다.

“개간을 했나 본데?”

“그런가 봅니다. 저기 둑과 망루가 보이십니까?”

“어. 그런데 특이하게 생겼군.”

강 하구 양쪽으로 길게 토벽을 세워놨는데, 그 높이가 못해도 5미터를 넘어간다.

꼭 흙으로 만든 성벽을 보는 것 같아서, 강으로 올라오는 모든 이들을 감시하고 막아 세우려는 용도로 보였다.

그리고 그 의도는 꽤나 잘 통하는 모습이다. 해적들뿐만 아니라, 상선에 타고 있는 모두가 하나같이 감탄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토벽 위에는 흡사 무덤처럼 생긴, 큼지막한 반구형의 덩어리가 줄을 지어 박혀 있었다.

“허... 저건 대체?”

“저 무덤 같은 건 뭘까요?”

“포대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전에 광주성에 갔을 때 본 거 같은데...?”

“무슨 포대가 저렇게 생겨? 광주성의 포대는 그냥 터만 남아 있었고, 화포는 있지도 않았다고.”

“조선은 엉뚱한 걸 잘 만드니, 조선식 포대일지도 모르지.”

두서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토해냈는데, 어째 정답을 찾아갔다. 저건 진짜로 포대였으니까.

그 포대 뒤로는 우중충한 빛깔을 내는 탑이 올라가고 있었다. 돌인 것 같기도 하고, 벽돌인 것 같기도 한데, 뭐가 됐든 원형을 이루며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 옆에는 생전 처음 보는 큼지막한 기구가 탑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탑에 돌과 벽돌을 들어 올려서 쉽게 쌓을 수 있게 도와주는 물건 같았다.

“거참... 저런 게 있었나?”

“성벽 쌓을 때 편하겠어.”

“저거 비슷한 걸 예전에 본 것 같은데 말이야.”

“흐음...”

중국이 개판이 된 후로,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성벽을 보수하는 작업은 극히 드문 일이 되지 않았나.

호족장원을 보강하고 방어하는 건축은 흔하게, 또 더욱 발전된 형태로 이어졌지만... 도시 자체를 방어하는 성벽건축은 오히려 드물어졌다. 돈이 이만저만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그 탓에 나름 발전된 문명에 사는 한족들조차도, 개량된 거중기, 녹로와 같은 건설기구는 낯선 물건이었지.

이윽고 포대를 지나 강을 계속 거슬러 오르자, 강 옆으로 개간에 열중하고 있는 농부들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물소를 열심히 가져온 보람이 있는지, 하나같이 물소에 쟁기를 매달고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저기.”

“저건 또 뭐람.”

반대쪽에선 개간이 아니라 아예 땅을 헤집고 있는 게 보였는데, 그 옆으로 흙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마차에 실려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었다.

‘토벽을 쌓는 흙을 옮기나 보군.’

두목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고,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자 다들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개간되고 있는 땅을 지나가자, 이들에게도 익숙한 수전이 눈에 들어온다.

놀라운 건 물을 채운 논에서 반사된 햇빛은 끝을 보이지 않고, 빛의 바다를 만들고 있다는 점.

“진짜로 엄청나게 넓혔나 본데요?”

“그러게... 전에 봤을 때는 이런 게 없었잖아?”

“조선이 진출한지 일년이 조금 넘었는데, 벌써 이 정도라면...”

다들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러댔다.

이걸로 더욱더 확실해진다. 저렇게 거대한 평야를 만들려면, 사람이 수천, 수만명은 있어야 할 거다. 그리고 그런 인력을 충원하려면 대만섬의 원주민을 다 끌어와야 했을 거고.

논을 지나치자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고...

“와!”

“오...!”

“광주보다 훨씬 나은데?”

“광주가 뭐야. 영파 못지않은데?”

해적질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에, 부하들은 자기가 가봤던 항구와 비교하며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저기. 강을 향해 사선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는 부두가 열 개를 넘어간다.

꽤나 특이하게 생긴 게,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부두가 아니라 흡사 돌로 만든 부두처럼 보였다. 딱 봐도 기둥 없이 꽉 막혀있고, 색 또한 회백색을 띄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대항구의 부두와 비교해도 확연히 티가 날 정도로 엄청나게 길게 뻗어 나와서, 부두 하나에 배 여러척이 한 번에 정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부두 끝자락에는 조선전함 3척이 아슬아슬하게 묶여 있었는데.. 아마도 배가 너무 커서, 수심이 얕은 강가 쪽으로 붙이지 못한 모양이다.

“이거... 한참 걸리겠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거의 백척이 넘게 왔으니 오죽할까.

와글와글 뭉친 선단은 하나둘씩 부두에 몸을 붙였고, 파도를 넘어오면서 울렁이던 속을 시원하게 뱉어냈다.

선원들은 물론이고,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던 원주민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하역을 시작. 이게 한두번이 아닌 듯, 다들 손발이 착착 맞아서 순식간에 배를 비웠다.

그렇게 짐을 내린 배는 다시 반대편 강가로 옮겨졌는데, 이쪽은 공사가 아직 덜 끝난 모양인지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부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딱 봐도 배를 묶어 놓기 위해서, 얼렁뚱땅 대충 만들어놓은 물건이다.

“자. 내리자.”

“천천히 내려! 괜히 배다리 부셔먹지 말고!”

어느덧 순번이 다가와. 두목이 탄 배도 부두에 옆구리를 닿고, 싣고 온 물소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도 그리운 뭍에 발을 디디는 걸 느끼기라도 한 걸까? 올 때부터 죄다 코뚜레를 뚫어와서 그런지 몰라도, 반항도 없이 해적 손에 이끌려 매끄럽게 배에서 내려갔다.

이내 곧 물소를 전부 내리자, 배를 옮길 몇몇을 제외하고선 두목과 소두령들 모두 배에서 내려 부두를 밟았다.

“이야... 진짜 돌인데요?”

“그러게.”

부두를 돌로 만드는 건, 어렵기도 어렵지만 돈이 엄청나게 깨지는 공사다. 헌데 이렇게 바닥까지 매끈하게 만들 줄이야.

‘이걸로 더욱 확실해졌다. 그냥 대충 써먹을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좋게 만들지 않았을 거야. 조선은 여길 분명히 무역항으로 써먹을 생각이야.’

땅을 밟자마자 이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물소들과 함께 부두에서 빠져나오자, 자동에서 봤던 복식을 한 관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씨상단. 물소 39마리. 맞나?”

“그렇습니다.”

“이거 챙기고, 뒤쪽으로 가면 쉴 곳이 있을 거다.”

“예. 나리.”

통역을 거쳐 확인증을 넘겨받은 두목과 일행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선 자리를 떠났다.

해적들이니 성질머리가 있어서 불퉁거릴 법도 하지만, 그런 마음은 땅에 발을 딛기 무섭게 싹 사라졌다.

누가 봐도 위압적이게 생긴 검은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하나같이 기창을 빼들고 돌아다니는 꼴이, 걸리기만 하면 당장 꼬치로 만들어버릴 날카로운 기세를 뿜고 있었다.

“진짜 전마군.”

“뭘 저렇게 주렁주렁 매달고 다녀?”

“전부 활을 끼고 있어.”

조선기병의 과한 무장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다가, 이내 곧 다른 쪽으로 화제가 돌아갔다.

“조선에 말이 많다고 하더니, 진짜인가 보네. 이 먼 곳까지 말을 데려온 걸 보면 말이야.”

“맞아. 북방무역을 조선이 꽉 잡은 지, 벌써 몇 년째야? 저거 한 마리면 은원보를 주머니째로 받을 수 있을 걸?”

“흐응. 우리도 살 수 있으려나?”

해적이 무역품 시세를 잘 아는 건 당연하지 않나.

소두령들은 혹여나 기병들과 눈을 마주칠까 무서워 피하면서도, 전마를 보면서는 아쉬워서 입맛을 다졌다.

“주가와 황가는 어딨냐?”

“아까 배에서 내린 걸 봤는데...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래라. 우린 저쪽으로 갈 테니까. 찾으면 데려와라.”

“옙!”

부하들 몇명은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냉큼 발을 놀렸다.

부두 너머 서쪽은 허허벌판이었고, 배에서 내린 모든 이들은 관원의 지시에 따라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여기가 무슨 전쟁터라도 되는 걸까? 상단을 상징하는 깃발을 죄다 치켜세우고 있어서, 온 사방이 난잡하게 흔들렸다. 당장 해적단조차 두목의 성씨를 따서 “유”라는 글자를 크게 박아 넣은 깃발을 세웠지 않나.

덩치가 큰 진짜 상단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온 사방을 상단의 이름으로 뒤덮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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