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챕터47. 모여들다 (3)
대나무 숲처럼 솟은 깃발의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 사람이 없는 빈집을 찾아 헤맸다.
인파의 파도를 한참 지나쳐서야, 적당한 자리를 찾았는데 공터의 거의 끝자락까지 닿고 말았다. 공터를 벗어날 수 없게, 뭔지 모를 나무로 만들어 놓은 울타리가 코앞에 있었으니까.
자리 잡은 곳 또한 빈집도 아니고 그냥 빈 공터에 배수로를 파고 막사를 세워놓은 것에 불과했는데... 어째 대충만든 것치고는 꽤나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거 괜히 거슬리는군.’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배수로만 죽죽 파여 있는데, 왠지 모르게 이걸 무시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두목은 자신만 그러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다들 배수로 안쪽의 막사에만 머물고 배수로 바깥의 길로 보이는 곳에 자리를 깐 사람은 없어 보였다.
“뭐야. 이건.”
“여기서 머물라고?”
막사 근처로 다가가자 다들 불평불만이 튀어나온다.
제대로 된 집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건 그저 천막과 판자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간이건물이지 않나. 말 그대로 비바람을 겨우 피할 정도다.
헌데 그 옆에 떨어져 나온 작은 건물은 그나마 제대로 된 지어놨는데, 출입구에는 종이를 붙여 “똥 싸는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옆에는 큼지막한 옹이에 물바가지와 함께 물이 가득 차 있었고.
“집이나 만들어 줄 것이지, 똥 싸는 곳은 왜 저렇게 잘 만들어 놨어?”
“난들 아나.”
누군가의 외침에 두목 또한 동의하고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부하 중 하나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목청을 높였다.
“들어보니 상인들은 이곳에 하루밖에 못 머문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집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나. 처음에는 이런 것도 없이 그냥 이슬 맞으며 노숙을 했었는데, 사정사정해서 이거라도 만들어 준 거라고 하더군.”
“그래?”
“맞아?”
“맞다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걸 왜 만들어 놓겠어.”
“저것도 괜히 만든 게 아니라고 하더군. 남쪽에서 역병이 터져서 죽다 살아났다는 소문이 쫙 퍼졌더라고, 저렇게 똥오줌을 따로 걸러내야 역병에 안 걸린다고 하던데?”
“뭔 소리야. 그게 말이나 되나?”
“말이 안 될 것도 없지 않나? 똥오줌이 더러운 건 당연한 거 아냐?”
“말이 되건 안 되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조선군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돌아다닐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지.”
부하들은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며 말을 늘어놨고, 두목은 한숨을 푹 쉬며 울타리 너머를 살펴봤다.
‘저게 조선식 집인가? 특이하군.’
바로 코앞에 벽돌과 석재, 나무를 전부 섞어서 만든 2층 가옥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형태가 일평생 봐왔던 건물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생각보다 많습니다. 대형.”
“뭐가?”
“집 말입니다. 진짜로 이주섬 사람들이 이곳에서 다 모여살 모양인데요?”
“맞습니다. 저렇게 죄다 비슷하게 생겨서, 나란히 줄맞춰서 지어놓지 않았습니까. 보나마나 나중에는 시장거리처럼 변할 겁니다.”
“흐음.”
나름 본 게 많은 해적들이니, 도시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대충 눈에 그려지나 보다.
일전에 봤던 이주섬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할 풍경이고, 오히려 온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봤던 남방소국의 도시와 더 가까운 형태. 다시금 조선이 이곳에 완전히 터 잡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이윽고 잠시 기다리고 있자, 막사 저편에서 소란스러움이 몰려왔다.
“유가 놈 왔냐?”
“넌 뭐 이렇게 멀리 자리 잡았냐?”
“자리가 여기 밖에 없어서.”
옷을 입은 건지 걸친 건지 모를 행색을 한 덩치 둘이 히죽 웃으며 두목을 반겼다.
둘 모두 몸에 자상이 있는 걸로 보아 평범한 인생을 산 게 아니었고, 정체는 당연히 두목이 그렇게 기다리던 해적단 두목들이다.
“애들 보낸 지가 언젠데 이제 오냐?”
“흐흐. 싸움구경을 하다가 와서 말이지.”
“...?”
두 두목이 킬킬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하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선군이 돌아다니는 곳에서 시비가 붙을 일이 있을까 싶어서다.
“대월과 참파 놈들이 동시에 왔어.”
“허...?”
“오자마자 한바탕 하더라고. 칼부림을 부려서 난리가 났다니까.”
“호오...”
모두는 귀한 구경을 못해서 아쉽다는 듯 침을 삼켰고, 두목은 슬쩍 눈을 찌푸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둘이 진짜로 왔어?”
“어. 떡하니 대월, 참파의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못 알아볼 리가 있나. 우리하고 생김새도 조금 다르잖냐.”
“맞아.”
“음...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나 보군.”
“조선군이 이주섬에 온 게 언젠데, 소문이 퍼지고도 남았지. 요새 조선 때문에 골치가 아픈 사람이 한 둘이 아니잖나.”
두 두목은 그렇게 말을 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유 두목 또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면 사생결단을 내도 부족할 둘이니, 당연히 피가 흘렀겠군.”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게 웬 걸. 조선기병이 단박에 달려와서 해산시켜버리더군. 와. 그런 기마술은 난생 처음 봤어.”
“그게 끝이던가. 휘휘휙 하더니 말 위에서 화살을 쏴서 흩트리고, 기창을 빼들고 흉흉하게 달려와서 밀어붙이더군. 한바탕 난리가 났지. 큭큭. 그 성질머리 더러운 대월이나 참파놈들도 화들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니까.”
두 두목은 계속해서 웃으며 말을 풀어냈지만, 눈빛만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강남. 그것도 가장 남단인 복건과 광동에서 진짜 기병대를 만날 일이 얼마나 있을까.
애초에 지형이 기병을 운용하기에 적당치 않고, 말이 귀해도 너무 귀해진 시대다. 아무리 돈 많은 호족,상인이라도 조선군처럼 중무장한 기병을 부리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
나름 칼밥 좀 먹었다고 자부하는 둘이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조선기병을 보며 적잖게 겁을 집어먹었을 거다. 몽골과 여진을 다 때려잡았다는 소문은 확실히 헛소문이 아니었다.
“음... 이리로.”
유 두목은 가볍게 손짓해 주가와 황가를 불러 머리를 맞대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두목끼리 이야기를 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부하들은 잽싸게 자리를 비켜줬다.
“뭐 특별한 소식을 들은 게 있나?”
“여길 벗어나서 조선관청에 드나든 상인에게서 말을 들었다.”
주 두목은 그리 서두를 떼고선, 이곳 남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놨다.
“허... 아무리 못해도 기병 만명을 동원했단 말이지?”
“그래. 그것도 최소로 잡아서 그 정도다. 상해에서 가져오는 마료馬料와 절강상인들이 옮긴 마료를 생각하면 그렇다고 하더군. 게다가 조선이 이곳에 터 잡은지 일년도 더 지났으니, 여기서 준비해 놓은 것도 있을 거고.”
“그럴 거야. 조선이 북방무역을 꽉 잡고 있지 않나. 말 키우는 건 몽골 놈들 못지않으니, 이곳에서도 준비를 해놨겠지.”
비록 조선과 거래를 안 해봤어도, 이리저리 들은 소문은 무수히 많지 않나. 조선에서 넘어오는 전마가 절강상인에게 엄청난 값으로 팔리고 있다는 소문도 지겹도록 들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손을 써볼 조선관원은 알아봤나?”
“그게 쉽지가 않아. 이놈들은 어떻게 된 놈들인지 선물을 쉽게 받지 않더군.”
“욕심을 내서 더 바라는 게 아니고? 이곳처럼 한몫 챙기기에 좋은 곳이 또 없잖아?”
유 두목은 그리 말을 했지만, 주가와 황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런 거였으면, 우리보다 돈이 훨씬 많은 자동이나 복주상인들이 이미 구워삶고도 남았겠지.”
“흐음.”
과거의 조선이 뇌물에 관대하다고는 하지만 중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이쪽은 정말로 뇌물을 선물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 거래를 할 때부터 뇌물을 가져다 바치는 게 일상이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 조선관원의 행태는 뭔가 이상해도 많이 이상한 축에 속했지.
“하긴 의주에서 선물 잘못 먹였다가 목 날아간 상인의 소문은 여러번 들어봤잖아? 조선인도 아닌 한족상인도 잡아 죽였는데, 조선관원이면 더욱 살벌하겠지.”
“음...”
“하긴.”
의주 무역항은 역사가 벌써 이십년 가까이 되는 터라, 중국상인들도 조선관원의 상황에 대해서 이래저래 듣는 게 있기 마련.
그리고 호사가들의 흥미를 끄는 이야기는 역시 붉은색을 띄지 않던가. 사람 죽었다는 소문보다 더 빨리 퍼지는 소문은 없었지.
“게다가 조선관원을 찔러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여기 찾아온 상인들 전부가 자기를 잘 봐달라고 손바닥을 비비고 있을 걸? 우리 같은 놈들이 상인들처럼 행동하면 씨알도 안 먹힐 거야.”
“허... 그럼 우리 계획은 어찌하는 게 좋을까.”
“별 수 있나. 정공법으로 가야지. 우리의 제안은 결코 조선에게 손해가 아니지 않나. 충분히 받아줄 걸세.”
유가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 눈을 빛냈고, 두 두목 모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헛둘.헛둘!”
“왼발! 왼발!”
우렁찬 구호가 들려오기 무섭게, 뭔가 어눌한 목소리가 악에 받쳐 터져 나온다.
짐을 한가득 어깨에 짊어진 이들.
제대로 된 옷도 입지 않고 어깨끈에 천을 칭칭 감은 전투배낭을 메고 있다. 허나 특이하게도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보병군화만큼은 신고 있으니, 조선인이 보든 원주민이 보든 꽤나 기이한 행색으로 보일 거다.
줄줄이 늘어선 이들 옆으로는 기병이 느긋하게 발을 옮기면서, 줄을 벗어나려는 이들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조선말을 몰라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냥 감으로 때려 맞추고선 얼른 제자리를 찾아갔다.
“흐음...”
“...”
“애들은 잘 따라 오냐?”
“제식을 왜 해야 하는지는 솔직히 이해를 못하겠지만, 그래도 시키는 건 그럭저럭 따라오고 있습니다.”
연오랑은 연대장 이진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의 진법훈련을 하던 조선군도 착호군식 제식훈련을 빡빡해 했는데, 진법 훈련이 뭔지도 모르는 원주민이라면 오죽할까.
이들은 발 맞춰서 걷는 것조차도 못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아기걸음마 가르치듯 알려줘야 했다. 지금의 행군 또한 그냥 행군이 아니라 훈련 아닌가.
“...”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아. 역병 때문에 살짝 삐끗하긴 했지만, 계획대로 되고 있어.’
남상주에서의 역병이 잦아들고 나서부턴, 개척과 개간도 슬슬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그간은 사실 인적사항을 조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지 않나. 3차 보급대에 원주민을 실어 보내고 나서부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여서, 이제부터 제대로 통치와 통제를 할 수 있게 된 거지.
그래서 남주를 관리하던 이정호를 남상주로, 연오랑을 따라다니던 윤평을 남하주로 보냈다. 대신 피로도를 감안해서, 그간 동쪽산맥 남부의 산악부족을 때려잡던 44,45연대를 불러들였다.
“너희가 그간 사로잡은 이들이 몇이나 되지?”
“5개 부족마을. 이천오백정도 됩니다.”
“음...”
이진은 자랑스럽게 답을 했고, 연오랑 또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남상주에서의 일전이 끝나기 무섭게 44,45연대는 동쪽산맥으로 질주했고, 본대가 남중주, 남하주를 점령할 때에도 산맥을 쑤시고 다녔다.
엄밀히 말하면 산맥 깊숙한 곳이 아니라 산맥 초입의 숲이다. 이 시기의 대만섬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숲이 널려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곳에 살던 산악부족을 꽤나 많이 사로잡았고, 신도시의 치장장식이 된 머리통들은 전부 44,45연대가 가져온 것이었지.
“남주 북쪽의 해안도 점거했고, 그곳에서도 꽤 큰 부락을 처리했고...”
“...”
‘카타갈란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꽤 큰 무리를 처리하고, 그 옆 동쪽에 살던 오키타라 부족은 흡수했지.’
연오랑은 이징석이 이끄는 특전대의 성과를 떠올렸다.
특전대의 괄목할 성과에 고무된 이정호는 남주 선발대 전체를 투입했고, 연대전체가 동쪽해안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진군 중이었다.
반대쪽도 마찬가지. 2개 연대가 동쪽해안을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고, 나머지 연대는 4개의 신도시에 고루 배치한 상황.
“남쪽에서도 꽤 성과를 올렸지?”
“예. 저격연대인 37연대와 38연대가 산악부족 3개 부족마을, 삼천여명을 사로잡은 걸로 알려왔습니다.”
“음...”
‘좋아. 지금까지 때려잡고 흡수한 놈들만 해도, 거의 구천에 가깝잖아? 남은 놈들은 진짜 산맥에 틀어박혀 있거나 아직 가지 않은 동쪽해안에 있겠지.’
가볍게 대만섬 지도를 떠올리며, 머리를 굴려봤다.
대부분의 원주민은 서쪽 평야에 살았지만, 미지의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동쪽해안에도 산악부족이 살고 있었다.
대략적으로 추산하건데, 산악부족은 1만에서 2만사이로 보았는데 벌써 그중 반을 처치하지 않았나. 나머지는 험준한 동쪽산맥 안쪽으로 들어가서 토벌을 해야 정리될 거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아니고... 동쪽도 마찬가지지.’
연오랑은 대만섬 동쪽해안을 경락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서쪽에도 땅은 남아도는데 뭐 하러 거기까지 갈까.
한곳에 왕창 몰아넣고 집체교육을 시켜야 효과적인데, 거리도 먼 동쪽에 신도시를 만들어 유지시키는 건 여러모로 비효율적이다.
‘나중에, 한참 나중에 서쪽이 안정되면 그때 동쪽으로 가면 될 거고... 우리가 서쪽을 완전히 장악해야, 산악부족이 동쪽해안가로 내려갈 거 아냐? 그때 또 낚시질을 하면 되겠지.’
그치들도 편하게 먹고 살려면 산에서 사는 것보단 평야로 내려와서 사는 게 나을 것 아닌가. 조선군이 원주민을 싹 쓸어 가면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내려올 거다.
“연대는 이제 이 상태로 고착화시키면 될 거 같고, 남은 건 원주민 연대인데...”
“...?”
“부족마을의 반응은?”
“특별할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좋아하던 이들도 꽤 되더군요. 아무래도 지금껏 대립하던 사이지 않습니까.”
“흐음.”
연오랑이 혼자 중얼거리자 이진은 조심스럽게 그의 기색을 살폈고, 질문하기 무섭게 재깍 답을 늘어놨다.
피정복민을 군인으로 삼아 부리는 건 유서 깊은 방법이고, 조선군이라고 해서 낯선 게 아니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민족,포로를 흡수했는데, 이제 와서 문제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