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 챕터47. 모여들다 (4)
게다가 원주민을 화살받이로 써먹을 생각이 아니라, 진짜 원주민 연대를 만들 생각이었다. 동등한 조선인 취급을 해줘야, 심적으로도 빠르게 동화될 테니까.
각 마을에서 골라낸 건장한 청년, 사냥꾼들로 모집해서 마을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곳 지리에 나름 능통한 이들을 이용해 산악부족을 정리할 생각이었지.
다만 대만 원주민은 국가체제를 경험한 기존의 포로들과는 사정이 조금 달라서 걱정했는데... 이쪽은 다른 쪽으로 열기가 뜨거웠다.
산악부족을 싫어하는 이들이 연오랑 생각보다 아주 많았다는 것.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아예 증오에 가까운 원한을 품은 이들도 상당했다.
“어째서일까...?”
“원주민이야 그렇다 쳐도 이주민은 한족이 대다수 아니겠습니까. 문화가 달라서 부딪치는 일이 많았을 거고, 그런 억하심정을 풀기 위해서라도 산악부족이 이주민 마을을 더 많이 약탈하지 않았겠습니까.”
“흐음.”
원래 무관으로서, 북방에서 근무했던 이진의 의견인터라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여진도 사이가 안 좋은 이들, 나약한 부족을 먼저 공격하고 그러지 않았나. 조선인마을 또한 억하심정이 있거나 방비가 약한 곳만 골라서 공격했다. 이들이라고 다를 건 전혀 없을 거다.
“이주민이 그렇게 털려대면 자연히 기존 원주민 부족마을도 동요할 거고... 애초에 하나라는 의식자체가 없지 않습니까.”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흐릿하니 도적떼로 밖에 보지 않고, 그 도적떼를 대신 소탕해준 조선군을 반기던 게 이들 아닌가.
이젠 원수를 자기 손으로 처단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걸, 꽤나 반기는 기색이었다.
“뭐랄까. 산악부족은 같은 원주민이 아니라, 예전 아국의 화척과 비슷한 느낌이려나?”
“그보다 더 심할 겁니다.”
이진은 연오랑의 눈치를 쓱 살피며, 한마디 덧붙였다.
‘흠. 화척보다 더 인식이 안 좋다라...’
문뜩 생각의 가지는 엉뚱한 곳으로 뻗어나갔다.
화척이 없어진 게 벌써 몇 년인가. 과거 농부가 대다수인 조선백성들에게 눈총 받던 화척들이, 지금 와서는 오히려 더 잘살게 된 이들이 대다수다.
가축의 사육두수가 늘어나면서, 그만큼 축산업자와 도축업자 또한 수가 늘어나서 돈을 많이 벌게 됐으니까.
신량역천인도 다 없어진 판국에, 도축업자를 무시하는 건 언제 어디서 돌을 맞을지 모르는 행동이지.
원래 살던 마을에서야 다들 얼추 서로의 과거를 알지만, 지금 조선은 죄다 뒤집혀서 모르던 가족이 옆집에서 살고 있지 않나.
신분을 들춰보는 건 꽤나 위험하고 서로에게 결례가 되는 행동이고, 양전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대놓고 양반,향리,지주를 찍어 누른 터라... 이젠 조선백성들의 인식 또한 “우리 모두 다 같은 양민.”이라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이들은 꼰대짓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막 크는 아이들은 생각이 전혀 다를 거야. 그게 설령 양반집 자제라고 해도 말이지. 이제 관리의 개념이 달라졌으니까.’
조선에서 관리가 되는 건 신분상승이자, 가문존속, 인생역전 등등을 모두 망라하는 기준점이었다.
양반신분이라는 건 그래서 나왔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양반끼리 뭉쳐대고 양반을 위한 정책을 펴왔으니까.
허나 지금은 양반이 아닌 온갖 계층의 사람이 전부 관리로 편입되면서, 기존의 양반관료제가 무너졌고 양반직위와 특권의 세습도 없애고 있다.
조정과 관청은 더 이상 양반 친화적이고 중심적인 조직으로 발전하긴 커녕, 오히려 기존 양반지주의 기득권을 줄여가고 있는 상황.
‘하지만 모두가 좋아하고 있지.’
양반을 사업가로 바꿔서 양민으로 만들고, 반대로 신량역천인 및 천민을 양민으로 만들어서, 왕실과 조정은 양반의 지지를 포기하는 대신 훨씬 더 많은 양민의 지지를 얻고 있지 않나.
조정에서 기존 기득권인 양반을 쥐어 패고 양민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칠수록, 대다수의 일반 양민백성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지.
‘이러한 상황은 대만 원주민과 같은 귀화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심화될 거야.’
지금까지 벌여온 수많은 전쟁과 귀화정책은 중국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조선의 내수시장과 인구, 내부경제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정책이었다.
허나 궁극적으로는 이 또한 조선의 신분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거다.
“...”
“사령관님?”
“어? 어.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어디까지 했지?”
“이주민이 훈련에 잘 적응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음.”
이진은 연오랑이 멋쩍은 표정을 짓자, 그 또한 피식 웃으며 답을 했다.
이진이 연오랑을 직접 봐온 세월이 얼마인가. 그가 저렇게 넋 나간 표정을 지으며 딴 생각을 하는 걸 한두번 본 게 아니라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제 사견이지만...”
“...?”
“강남이주민이 원주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지?”
“그게...”
뜬금없는 말에 연오랑이 눈빛을 번뜩이자, 이진은 얼른 말을 이었다.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건데,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오해할까 싶어서다.
“사실 저희의 교육방식은 기존에 없던 방식 아닙니까. 강남이주민이 느끼기에 자신들을 그냥 군병이 아닌 무관으로 키운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아...”
연오랑은 그제야 속뜻을 알아차리고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옛 명나라는 조선과 같이 군호를 통한 징집병을 부렸고, 그 실태는 조선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농한기 때 대충 훈련받는 이들이 뭐 얼마나 대단하겠나. 반대로 지휘관 급은 조선의 갑사나 무관과 같은 직업군인 형태였고.
게다가 지휘관 또한 조선과 마찬가지로, 알아서 준비하고 시험을 치러 뽑는 방식 아니던가.
헌데 지금 원주민이 받고 있는 훈련은 일반 징집병이 받는 수준을 한참 상회했고, 부모들로부터 명나라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강남이주민 청년들 입장에선... 이건 말로만 듣던 무관이 아닐까 싶은 거지.
개개인이 알아서 훈련하고 단련해야할 사항을 조선군이 직접 가르쳐준다? 자신들이 화살받이가 아닌 건 당연하고, 역으로 우릴 쉽게 포섭하기 위해 “기회의 장을 열어준 것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밖에.
“명의 기억이 남아 있는 강남이주민들에게, 신분상승의 길은 곧 관리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지. 그게 문과든 무과든 말이야.”
“예.”
“더불어 개개인의 욕심도 생기나 보군. 어찌됐건 군문에 오르는 걸로 비춰질 테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들은 아국의 기업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고, 연대병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니... 옛 명나라의 제도를 반추해 적용한다면 오해를 할 수밖에 없겠지요.”
“흐. 우리 입장에선 나쁠 게 없군?”
“아마... 실상을 알고 나면 꽤나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연오랑과 이진은 서로 마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댔다.
나중에 군병들을 부리는 무관이 될 거라 착각하고 있겠지만, 현실은 말단 연대병이 아닌가. 장밋빛 환상이 깨지면, 그 꼴이 볼만 할 거다. 그때가선 쌀이 밥이 된지 오래니 돌이킬 수도 없을 거고.
“다만... 중요한 건 그치들 속사정이 아니라, 과연 산악부족을 처리하는 데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 까인데...”
“훈련을 시키다보면 성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어찌됐건 이곳 지리와 풍토에 대해서 잘 아는 이들이고, 숲으로 깊게 들어가면 말을 타고 움직이는 건 힘들어질 테니... 저들만으로도 효과가 있을 겁니다.”
이건 확실히 맞는 말이다.
지금도 관리들이 부족마을의 연장자에 달라붙어 이런저런 정보를 뽑아내고 있으니, 이들도 연대에 도움이 될 만한 지식을 토해낼 수 있을 거다.
그게 돈벌이가 됐든, 아니면 군사적 요충지나 지도를 만드는 일이 됐건, 혹은 군수품에 쓰일만한 물건이 됐든지 말이다.
‘하지만 얘들 키우는 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단 말이지.’
“연대병이 되려면 기병이 되어야 하는데... 승마훈련은 아직 한참 멀었지?”
“예. 사실 승마뿐만 아니라 궁술훈련도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당장 부리는 건 불가능하고, 많은 원주민들에게 보여주는 식으로 부려야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겁니다.”
“음.”
승마는 하루이틀 사이에 될 일이 아니고, 마상무술 또한 마찬가지.
원주민들 중에서 활을 쏠 줄 아는 사람이 있다지만, 조잡한 목궁과 이미 테크트리를 최종까지 올려서 더 이상 개선하기도 힘든 최신식 각궁을 비교하면 쓰나.
도화지라고 생각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가르쳐야하니, 이들이 진짜 연대병이 되려면 몇 년은 걸릴 거다.
“보여주기 식이라...”
‘이건 확실히 먹혀들겠군.’
하지만 사기증진과 원주민 흡수 동화 측면에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고도 남는다.
이들은 남주부터 남하주까지 계속 돌아다니면서 기동,숙영훈련을 겸하게 될 거고, 각 도시에 일정시간 머물면서 무기술 집체훈련을 비롯한 각종 훈련을 원주민이 보는 앞에서 받게 될 거다.
이들 스스로도 신분상승이 길이 열렸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각 신도시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라고 생각이 다를까.
원주민 연대병의 훈련을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인질 아닌 인질 혹은 모범이 되어서 조선의 통제와 지도를 더 잘 따르게 되지 않을까.
“나쁠 건 확실히 없겠어. 허나 본질을 잊으면 안 된다. 훈련은 빡세게 시켜라. 나중에는 이들도 기존 연대로 들어가게 될 테니까. 신설연대를 만든다고 해도 원주민만으로 구성된 연대는 안 만들 테니까.”
“예. 걱정하지 마시죠.”
이진은 믿고 맡기라는 듯 자신 있게 답을 했다.
45연대는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연대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설주를 통해 새롭게 귀화한 야인여진이 꽤나 많이 포진되어 있었다.
그치들을 완숙한 연대병으로 만든 전력이 있는 이진은, 대만 원주민을 연대병으로 만드는 일의 적임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훈련을 지속하며 남상주에서 남주로 올라왔을 때.
조선본토에서 온 수많은 낯선 인물들과 낯익은 인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4차 보급대는 이미 남주에 짐을 풀고 떠났고, 남중주로 가서 원주민을 싣고 조선으로 출항한지 오래. 이곳에서 일을 하려고 온 관리들만이 따로 남아서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다만... 뜬금없는 인물이 후다닥 달려와 그를 반겼다.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네가 어쩐 일이냐?”
“흐흐. 제가 잠시 동안 이곳을 맡게 됐습니다. 여기도 뭐 뒤져보면 찾아볼 게 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오랜만에 본 정인지.
이젠 혼인해서 애를 본지도 오래라서 앳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털털한 모습은 여전했다.
“가시죠. 4차 보급대와 함께 일거리가 선더미처럼 몰려왔습니다.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다짜고짜 밀려왔는지 모르겠단 말이죠.”
정인지는 히죽 웃으며 그리 말을 하고선, 말에서 내린 연오랑과 함께 휘적휘적 새로 만든 관아를 향해 나아갔다.
“아. 그리고 이쪽은...”
동시에 아무렇지 않게, 그의 옆을 따르는 관원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다만 소개받는 관원들의 표정이 어째 하나같이 괴상하다.
첫 만남이니 예를 갖춰 연오랑에게 인사해도 모자랄 판에, 그냥 걸어가면서 “얘는 내 친구입니다.”라고 가볍게 소개하는 것 같지 않나.
헌데 그러는 정인지나 받아주는 연오랑이나 아무렇지도 않아하고 있으니, 모두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을 수밖에.
아마 속으로 ‘소문처럼 정인지와 연오랑이 친하긴 친한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이윽고 관아에 도착해 깔끔하게 씻고 나오자, 드디어 정식으로 회의석상에서 모두를 마주하게 됐다.
“...?”
다만 기존 남주에서 일하던 관원들이 위축될 정도로, 조정에서 보낸 관원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
“왜 이렇게 많이 보냈냐? 본토에서도 할 일이 많을 텐데?”
“다른 건 아니고, 태풍이 오기 전에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남주도가 완전히 조선의 강역이 되었으니, 이곳도 조사를 제대로 해서 편입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집현전에서 그걸 관리하는 거냐? 역사처에 관해서 아직도 말이 많고?”
“아무래도 뭐...”
연오랑이 아무렇지 않게 조정의 논쟁거리를 꺼내자, 이에 익숙하지 않은 관원들은 해쓱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인지는 아무렇지 않게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성은 다들 공감하고 있는데, 어느 부서에 넣어야 할지 말이 많아서 말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실무는 크게 다를 게 없으니, 지금 당장은 이곳에서도 일을 해보려고요.”
“...”
“원주민이 전부 본토로 끌려가고 나면, 두 번 조사를 해야 할 수도 있으니, 그냥 지금부터 시작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음.”
연오랑은 이어지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지는 원래 역사에선 다방면으로 능력을 뽐냈지만, 지금 역사에선 훈민정음과 교육 쪽에서 힘을 쓰고 있었다.
지금 역사에서 훈민정음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신진관료의 중심이 정인지였고, 그 일의 실무책임자 또한 정인지 아니었나.
해서 지금껏 온 사방을 떠돌아다니면서 훈민정음의 전파에 힘쓰며, 교육당의 교육커리큘럼에 대해서 검토,수정,전파를 계속해 왔지.
더불어 그가 이끄는 신입관리들이 하는 중대한 업무 중 하나는, 기존에 한문으로 적힌 고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 및 재편집하는 일이었다.
이 작업을 진행하면 당연히 옛 삼국시대, 고려, 기타 중국에서 건너온 역사서 및 원래 역사에선 있는지도 몰랐던 북방민족의 역사서도 함께 다룰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강역이 엄청나게 넓어지고, 중국의 서적뿐만 아니라 중국상인을 통해 구해온 온갖 나라의 서적을 무제한적으로 빨아들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