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44화 (344/538)

344. 챕터47. 모여들다 (5)

‘그래서 금석학당과 엮일 수밖에 없었겠지.’

이러한 문헌작업은 옛 유적을 찾아내서 연구하는 금석학당의 일과 겹칠 수밖에 없었고, 결론적으로는 금석학당의 덩치가 커지고 범위가 넓어져 아예 역사처라는 신설부서가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이것도 개혁의 여파라면 여파겠네.’

연오랑은 속마음을 숨기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조선이 역사에 무지한 건 아니지만, 역사서 등을 편찬할 땐 전문부서가 아닌 테스크포스 형식으로 관원을 모아 일을 진행하는 수준에 그쳤다.

허나 지금은 그럴 상황을 한참 넘어선 지 오래다.

만주땅이 조선땅이 되면서, 개간과 개척만하면 고구려, 발해, 금, 심지어 원과 요나라 시절의 유물까지 튀어나오는 판국.

나아가 북방뿐일까. 조선내지에서도 양전사업을 하면서 다 들쑤시고 다니자, 기존에 몰랐던 고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유물도 튀어나오고 있는 상황.

이건 착호군 휘하에 있던 금석학당이나, 임시적으로 만든 조직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역사와 유물을 관리하는 부서의 신설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상황이었고, 그 책임자로 정인지가 올라오게 된 거지.

‘패러다임이 변하게 된 거지, 조선인의 세계관이 변하고 있는 거야.’

연오랑은 손가락을 두들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거. 평범한 백성들에게 있어서 다른 지방의 소식, 혹은 이 땅의 역사등은 솔직히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막말로 남부에 사는 이들이 북쪽에서 여진에게 약탈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든, 혹은 북부에 사는 이들이 남쪽에서 왜구에게 약탈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든.

자기 동네 일이 아니라면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뿐이고, 그들 때문에 자신들의 마을과 고을이 대신 착취를 당하면 짜증을 냈을 거다.

왕실과 조정은 너무 먼 존재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사는 양반,향리 지주들이 더 중요하고 의지되는 존재였을 테지.

허나 지금은 이러한 향촌사회 중심의 세계관, 폐쇄적인 세계관은 깨어진 지 오래.

‘막말로 이제야 백성들은 자기 동네가 전부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게 됐지.’

백성들조차도 이제 자기 동네를 벗어나 더 많고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됐으니, 이젠 이들을 하나로 묶을 새로운 구심점이자 개념이 필요해졌다.

정서적으로 따로 놀던 지방, 마을을 하나로 묶기 위해선, 모두를 아우를 더 상위의 개념이 필요해졌고. 이는 곧 민족의식의 형성과 함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거지.

이러한 의식이 지금도 없는 게 아니니, 각 지방관아에선 “이제부터 너흰 어느 마을 사람이 아니라 조선인이다.”라고 직접적으로 주입시키고 있을 거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의식을 키우는 데 가장 효과적이고 편한 방법은, 과거의 역사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역사관을 확립하는 것.

태종과 세종이 바라던 중앙집권이라는 게, 바로 이걸 말하는 것 아니겠나.

‘세종 형이 과연 여기까지 예측했을까?’

자문해 보지만 솔직히 그건 아닌 것 같다.

조선이라고 옛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게 아니다.

어쩌다보니 그간 문헌과 전승으로만 내려오던 옛 유적과 유물을 하나둘씩 발견했고, 신나서 마구 일을 벌였겠지.

아마 자기가 뭘 하는 지 정확히 모르면서 여기까지 왔고, 이제 와서 보니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닌 걸 알아차렸을 터... 똑똑한 세종이라면, 이걸 수습하고 이용하기 위해선 역사관 정립이 필요할 때라는 걸 직감했을 거다.

‘과연 역사관이 민족의식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지금은 제대로 가고 있긴 한 거 같은데...’

“...”

연오랑이 생각에 잠겨 헤어나지 못하자, 다들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문제는 이러한 민족의식을 “어떻게 백성들에게 주입 시키는가?” 이다.

백성들 입장에선 조선이 고려건, 있는지도 몰랐던 발해를 계승하건... 그걸 안다고 해서 쌀이 나오겠나 돈이 나오겠나.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일 아닌가.

결국 꾸준한 교육을 통해서 백성들의 생각자체를 바꿔나가야 하는데... 이는 곧 뜨뜻미지근하게 진행되고 있는 향교의 확장문제와도 엮이게 될 거다.

돈이 없어서 기존의 엘리트 교육에서 보편 교육으로 전환하는 게 지지부진한데, 만약 정체성과 동질성을 위해 역사교육을 해야 한다면 향교를 통한 집체교육 말고는 답이 없지 않나.

‘이래서 역사처를 두고 말이 많나보군.’

연오랑은 중요성을 알면서도, 조정이 시끌시끌한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뭐... 그래도 세종 형이 알아서 교통정리를 하겠지. 게다가 지금당장부터 교육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찌됐건 자료조사만큼은 미리미리 하려는 생각 아니겠어?’

그랬기에 정인지를 필두로 역사처 관원을 보내, 대만의 유적과 유물을 뒤져보라 시킨 걸 테다. 이제 이 땅도 조선땅이 되었으니, 이 땅의 역사도 조선의 역사에 편입시켜야 할 테니까.

다만...

“그런데 여긴 유물 같은 게 많이 없을 걸? 제대로 된 나라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뭐라도 건져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없으면 없는 대로 나쁠 것도 없고요.”

정인지는 히죽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냉큼 답을 했다.

연오랑의 속내를 바로 알아차린 모양이다.

이 시대는 미래처럼 구석기, 신석기 유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이게 유물인지 알아보지도 못한다.

알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한문으로 적혀진 비문이나 고서 정도고, 옛 시대의 집터나 유물 같은 건 정체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돌이구나.” 생각하고 써먹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시대 이전의 대만 역사는 있지도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이게 뭘 뜻하겠는가. 피정복민이라 할 수 있는 대만 원주민보다 역사를 일군 한반도의 조선인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나.

피정복민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좋은 명분이 될 거다.

‘이거야 말로 제국주의적인 생각인데... 이 시대에 그런 걸 따질 사람이 있겠어? 막말로 명이 망하지만 않았으면 죄다 오랑캐라고 부르며 깔봤을 이들인데 말이야.’

오히려 지금 역사가 더 사람 취급을 해주는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앞으로 수백년간은 만만해 보이면 쳐들어가서 약탈하고 정복하는 시대가 이어질 텐데... 제국주의를 걱정하는 건 멀어도 너무 멀리 갔다.

연오랑이 제동을 걸어본다고 한들 먹혀들 리도 없고, 조선이 그런 쪽으로 변한다고 해도 다른 나라가 따라주지도 않을 테니까.

‘됐다. 넘어가자.’

답도 안 나오는 문제를 싸매고 있어봐야 골치만 아파진다.

연오랑과 정인지는 유적발굴과 원주민 교육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마저 나눴고, 이내 논의가 끝나자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이쪽은 외교무역부, 재정부, 조세부에서 온 관원들입니다.”

이곳에도 신형곡물창고를 건설하고 은행을 만들어야 하니, 돈 관리를 하는 관원이 파견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한데...

“...?”

“뜬금없이 왜 또 소개 하냐?”라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있자, 정인지는 얼른 말을 이었다.

“대감께서 오시기 전에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해야할 일은 아니지만, 또 한편으론 저희가 해야할 일이기도 했거든요.”

“...?”

“강남상인이야 뭐 알아서 처리하면 될 일이지만, 색다른 제안을 가져온 이들이 무려 넷이나 있었습니다.”

연오랑이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정인지는 그 모습이 웃기기라도 하듯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먼저 대월과 참파에서 사신을 보냈습니다.”

“음.”

이건 얼추 예상했던 일 인터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이 남방으로 진출한 건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고, 당연히 다른 세력 또한 사신을 보내 관계를 도모하려고 하고 있다.

문제는 조선이 사신을 안 받아준다는 점.

정확히 말하면 사신을 받아주기는 하는데 무역항에 묶어놓고 서면으로만 받지, 사신을 직접 한성으로 불러들여 대면하지 않았다는 거다.

까닭은 복합적이었다.

명이 망하고 나서 조선은 동아시아의 큰형님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기존의 중화, 사대에 입각한 외교관계를 조선이 주도해서 대체하는 건, 언제 생겨날지 모를 중국통일왕조를 생각하면 엄청난 부담이다.

나아가 명확히 상하를 나눠 조공,책봉과 같은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건, 조선이나 다른 나라나 솔직히 껄끄러운 일.

큰형님으로 모시겠다는 건, 어려울 때 큰형님이 도와줘야 한다는 전제가 내제되어 있다.

어중간한 덩치를 가진 조선은 현실적으로 명을 대체할 수 없고, 당장 자기 집을 뜯어고치느라 정신이 없다.

결국 말뿐인 종속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럴 거면 뭐 하러 서로 신경전을 벌여서 우의를 상하겠는가.

그냥 나라 간의 상하관계는 대충 덮어두고, “서로 무역해서 돈이나 법시다.”라는 쪽으로 간 거지.

중국의 각 성을 쪼개서 연맹으로 묶을 때도 이러한 기조를 유지했기에, 자존심 강한 중국호족들이 군말 없이 조선과 손을 잡았던 것이기도 하고.

이 세월이 벌써 30년 가까이 되자, 이젠 이게 익숙해지고 편해졌다.

다른 이유는 조선은 지금 천지가 개벽하는 수준으로 나라가 바뀌고 있고, 조정에선 이걸 다른 나라의 사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점.

조선이 무섭도록 커서 자신의 나라를 위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것도 있지만, 지금의 발전은 다른 나라가 따라하는 게 너무도 쉽다.

애초에 연오랑이 엄청난 화학, 공학기술로 무장한 게 아닌 이상, 그가 내놓을 수 있는 아이디어는 이 시대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물건과 개념들 아닌가.

이러한 발명품 같은 신물품과 새로운 제도는 조금만 틈을 주면 얼마든지 베껴갈 수 있고, 스파이 역할을 겸하고 있는 사신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는 일.

해서 어차피 알려지게 될 테지만 그 시간을 최대한 미루기 위해서, 통제되는 무역항에서만 외국상인과 사신을 마중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다른 나라 상인들도 얼추 알고 있는 바. 멀리 떨어진 조선본토로 가지 않고, 일단 남주로 죄다 몰려와서 먼저 허락을 득하려고 하는 거다.

“뭐라고 하든?”

“아... 그건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문제와 묶여 있어서 말이죠.”

연오랑이 고개를 까닥거리자, 정인지는 다음으로 얼른 넘어갔다.

“자동상인회와 복주상인회, 그리고 광주상인회도 사신을 보냈고요.”

“...”

이건 당연한 말. 이제부터 남방무역의 목줄을 쥔 게 조선이니, 알아서 딸랑이를 흔들어야 되는 판국이다.

“그리고... 대리에서도 사신을 보냈습니다.”

“대리?”

“예. 운남성의 대리국이요.”

재밌는 일이 있다고 하더니, 과연 재밌는 일이 터졌다.

“대월의 사신과 함께 왔습니다. 아마도 홍강을 타고 내려온 것 아니겠습니까.”

베트남 하노이를 관통하는 홍강은 무려 운남의 대리시에서부터 발원해서 중국남해로 이어진다.

이 홍강을 이용한 교류는 당송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이 시기의 대리와 대월 또한 당연하게도 홍강을 통해 꾸준히 무역을 하고 있었다.

몇해 전. 대리가 부활한 후 조선에 사신을 보낼 때도, 이 루트를 이용했었고.

“그 놈들이 왜 왔을까? 전에 사신을 보냈을 땐, 별 말 없었잖아?”

“예. 그랬죠.”

그때는 말 그대로 별 거 없이 “앞으로 잘해봅시다.” 정도의 입 발린 교류가 전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 조선과 대리가 직접 부딪칠 일도 없는 터라, 사정이 딱히 달라진 건 없지 않나.

“우리가 남주도로 진출한 것 때문인가?”

“그게... 저희에게 털어놓지 않더군요. 국서와 함께 무려 왕자가 직접 와서 말입니다. 꼭 대감을 만나야한다고 억지를 부리더군요.”

“왕자가?”

“예.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대월 사신들이 극진히 대접하던데, 가짜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정인지를 지나쳐 외교무역부 관원을 바라보자, 맞다는 듯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간의 상하관계를 따지지 않으니, 왕자가 직접 왔으면 조선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신분을 가진 이가 나와야 하는 게 인지상정.

왕자를 겁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연오랑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또 있냐?”

“예. 해적, 정확히 말하면 예전에 해적질을 하던 이들인데 꽤 재밌는 제안을 가져왔습니다.”

“해적놈들이라...”

‘거참. 별놈들이 다 튀어나오는 고만.’

풀숲을 건드리면 뱀이 튀어나오는 것 마냥, 조선이 남방에 발을 딛기 무섭게 온갖 놈들이 다 발작해서 날뛰는 모양이다.

“뒤지기 싫으면 알아서 고개 처박고 도망갔어야 할 놈들인데... 대체 뭔 제안을 한 거냐? 그놈들이 우리에게 제안할 게 있기나 하냐?”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써먹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정인지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 회의석상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함대장 왕인을 바라봤다. 나머지는 왕인이 말을 하라는 뜻이리라.

“뭔데?”

“음... 간단히 말하면, 해적놈들답게 다른 해적놈들을 팔아 넘겼습니다.”

“호오...?”

연오랑은 흥미로운 눈빛을 숨기지 않고, 계속 이야기 하라는 듯 왕인을 바라봤다.

뭐하지도 않았는데, 지들끼리 벌써부터 내분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저희를 찾아온 건 3개 해적단으로...”

왕인은 유가를 필두로 한 해적놈들을 탈탈 털어서 얻어낸 정보를 아낌없이 풀어놨다.

유 두목을 비롯한 주가, 황가의 속셈은 간단했다.

조선을 이길 수 없으니 바짝 붙어야 하고, 동시에 지금의 상세를 유지하기 위해선 조선에 혹할만한 제안을 던져야 했다.

조선 또한 분명 남해의 해적들을 신경 쓰고 있는 건 당연지사. 그렇다면 기존에도 경쟁관계에 있던 해적들을 제물로 넘기면 일타이피, 아니 일타삼피가 되지 않겠나.

조선에게 환심을 사고, 이걸로 거래를 이어가고, 경쟁자를 몰락시킨다.

이보다 더 좋은 계획은 없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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