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 챕터47. 모여들다 (6)
“하. 그래서 해적놈들의 회합이 언제 벌어지는지 알려주고, 또 회합이 벌어질 때 내부에서 우리와 보조를 맞추겠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걔들이 원하는 건 뭔데?”
“그게... 또 재밌게 된 게, 만약 한족 이주민을 계속 받을 생각이라면 자신들에게 맡겨 달라고 하더군요. 겸사겸사 무역도 허가해주면 좋고 말입니다.”
“설마...!?”
너무도 뜬금없는 말에 연오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기존에 남주에서 일하던 관원들 모두 베시시 미소가 번졌다.
그간 가지고 있던 의문이 뜻밖의 정보로 모두 풀렸으니까.
“예. 알고 보니, 해적놈들이 지금껏 남주도에 한족을 이주시켰더군요. 그놈들뿐만 아니라, 이주작업에 끼어든 해적단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푼돈 벌이였죠.”
해적이 무조건 약탈만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어차피 배를 놀리면 손해만 나니, 이들은 돈 되는 건 뭐든지 다한다. 약탈목표가 없을 때는 장사도 하고 운송도 하니, 이주민 수송 또한 짭짤한 푼돈벌이 중 하나였을 거다.
“하?”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건지, 감도 안 잡히는 고만...’
연오랑은 허탈한 신음을 내뱉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어쩐지 대만섬에 사람이 너무 많고, 한족 이주민이 너무 많다 했는데, 이런 이유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가 이주를 받아주는 건 어떻게 안 거냐?”
“그게... 순찰을 도는 전함에게 붙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왕인은 연오랑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군.’
순찰을 돌던 전함은 원주민이 도망치지 못하게 막는 용도였는데, 어째 거꾸로 밖에서 오던 놈들을 붙잡았던 모양이다.
“어찌 생각 하냐?”
연오랑이 곧장 핵심을 짚어가자, 왕인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해적놈들은 언제가 됐건 정리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알아서 해산했으면 상관없겠지만, 저렇게 한자리에 모였으면 일망타진을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음...”
그간 조선이 남해의 해적을 가만 놔둔 건, 남주도 개척이 먼저인 것도 있지만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레 겁먹고 알아서 해산할 수도 있는데, 강경하게 나가면 해적들도 겁먹고 단결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보나마나 전면전은 하지 않고, 이리저리 치고 빠지면서 도망 다니겠지.
그놈들 죄다 때려잡겠다고 쑤시고 다니다가는 대만섬-조선본토의 이주작업이 느려질 게 뻔한데,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 아닌가.
해서 해적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알아서 그물로 들어온 꼴이 됐다.
“그놈들은 믿을 만 하냐?”
“예. 아무래도 저희와 지속적인 거래를 바라고 있으니, 거짓은 아닐 겁니다. 또한 회합장소가 팽호제도라고 했는데, 그곳은 저희 또한 눈여겨보던 곳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팽호제도는 중국대륙과 대만 사이에 있는 군도로, 송나라 시절부터 한족이 이주해서 알음알음 살던 곳이다.
오히려 대만보다 더 일찍 알려지고 더 자주 드나들었던 곳인데, 이곳이 대륙과 더 가깝기 때문이었지.
해서 원,명 시절에도 중국본토의 행정구역에 속해있었지만, 너무 멀어서 그냥 내버려둔 곳에 가까웠다.
따로 놀던 시절이 오래 되서 그런지 몰라도, 과거 원말명초시절에 왜구를 비롯한 해적이 강세를 보였을 때에는 해적의 근거지로 활용된 역사가 있었다.
뭐랄까. 조선 입장에서 보면 대마도와 비슷한 면이 있지.
“어차피 때가 되면 팽호제도도 정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일을 같이 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야. 거길 놔두면 대만섬의 가치가 떨어진다.’
팽호제도의 섬들은 대규모 사람이 살기 힘들고, 식량 생산 및 수원으로 사용할 우물도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그렇다고 영 못 쓸 땅은 또 아니어서, 해적이나 무역상인이 중개거점지로 사용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장소.
여길 초토화시켜서 못 쓰게 해야 대만섬으로 다른 상인들이 모여들 테니, 언제가 됐건 정리해야 하는 게 맞았다.
“문제는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데... 6함대를 전부 동원할 수 있나?”
“예. 이번 보급대에 속해서 본토에서 가져온 쾌선이 있으니, 순찰을 나가 있는 전함은 5일내로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음...”
연오랑은 다시금 손가락을 튕기며, 머릿속에 주판을 굴려봤다.
남주도 신도시의 모든 항구를 동시에 공사하면 좋겠지만, 이러면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숙련된 기술자와 장인, 가용인력을 전부 한곳에 먼저 투사해서 빠르게 부두와 항구를 건설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항구를 어떻게든 활용해서 이문을 챙겨야 다음 공사가 오히려 더 쉬워진다.
해서 남주의 항구는 거의 완성에 가까웠지만. 남상주를 비롯한 신도시 항구는 보급품을 하역하고, 이주민을 실어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대충 만들어진 나무부두에 불가했지.
웃긴 건 이렇게 임시로 대충 만든 부두가, 지금껏 원주민과 이주민이 사용했던 부두나 항구보다 더 거창했다는 거다.
그래서 조선본토의 항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남주의 항구를 볼 때마다, 원주민과 이주민들이 깜짝깜짝 놀랐던 거고.
이렇게 만들어진 남주항구로 모든 보급품이 들어와 적재됐고, 6함대는 이걸 다시 실어서 신도시로 보내는 작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해적토벌을 시작하면, 한동안 보급품 운송이 막히게 될 텐데...”
“조금 과하게 준비해서 옮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태풍 때문에 비가 자주 오는 게 걱정이 되지만... 각 도시마다 관아를 비롯해 곡물창고를 최우선적으로 지어놨으니 얼추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
왕인이 말을 흐리고 누군가를 바라보자, 못 보던 무관 둘이 냉큼 나와서 입을 열었다.
“이번에 6함대에 배속된 함장 이중지입니다.”
“함장 김익생이라고 하옵니다. 대감.”
“오느라 고생했다.”
“예.”
왕인이 왜 저렇게 자신 있나 했더니, 전함 두척이 추가로 왔나 보다.
아마도 원정기간 동안에 찍어낸 따끈따끈한 신형이 분명하다.
“훈련은 충분히 하고 온 거겠지?”
“물론입니다. 6함대에 배속되기 전까지, 동해에서 훈련을 마치고 곧장 왔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따가운 햇볕과 바닷물에 반사된 햇볕을 이중으로 받아, 얼굴이 까맣게 탄 이중지와 김익생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냈다.
‘하긴 훈련기간에는 이곳보다 험한 동해에서 수송 작업을 했을 테니까...’
지금 조선은 기선군에서 넘어온 해군병은 많은데, 정작 이들이 운용할 전함이 부족한 상황.
그래서 육상에 머무는 해군은 사실상 어부와 공사인부가 되어 육상훈련을 하면서, 온갖 곳에 해군기지 건설 및 개간 작업을 하고 다녔다.
이 때문에 전함만 만들어지면 곧장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해군병은 남아돌았고, 드디어 배에 올라탄 해군병은 설주-경원-울릉도-원산-동래를 오가면서 항해술을 익혔다.
실전보다 더 빡세게 훈련을 받고 온 이들이니 만큼, 항로를 몰라서 헤매는 일이 있을지언정 전투에서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 거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까지 미뤄질지 모르지 않겠습니까? 태풍이 오니까요.”
“그건 맞는 말이지.”
연오랑은 왕인이 넌지시 던지는 말에, 냉큼 동의를 표했다.
‘지금 처리 안하면 늦가을이나 진행할 수 있을 텐데... 그럼 늦어도 너무 늦어. 사신을 보낼 정도면 모두가 우리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을 터... 남해를 장악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다들 군말 없이 따르게 될 거야.’
구심점 없이 난립하는 해적무리는 모두의 동업자인 동시에 골칫거리이니, 이들을 해치우는 걸 대놓고 반대할 세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
해적과 긴밀하게 엮인 이들이라면, 보나마나 팽호제도에서 벌어질 회합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사정없이 쥐어 패서, 소문으로만 듣던 조선해군의 무서움을 보여줘야 기가 죽을 것 아닌가.
“전함 8척이면 충분하겠지?”
“물론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왕인을 비롯해서 신입 함장 둘은 눈을 번뜩이며 답을 했다.
둘 다 신입이긴 하지만 본래 무관출신에, 기선군으로 넘어온 뒤로는 배만 탓을 게 분명하지 않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함장이 됐을 정도면, 실력은 아무리 못해도 평균은 넘을 거다.
“팽호제도는 깡그리 불태워서 지우고, 그곳에 사는 주민은 남주도로 이주시킨다. 작전계획을 짜서 보고하도록.”
“옙!”
“충성!”
오자마자 공훈을 세울 생각에 들떠 있는 함장들은 냉큼 답을 하고 자리를 비켰다.
“또 다른 세력은 없지?”
“예.”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 강남 상인회의 의견은 뻔하겠군? 조차지인가?”
“그렇습니다.”
정인지를 대신해 외교무역부 관원이 입을 열었다.
그들의 제안은 대동소이했다. 부활을 꿈꾸는 자동상인회는 청도와 상해의 예를 비추어 조차지를 만들어주길 바랐다.
“의외라면 광주상인회 또한 조차지를 만들어 주길 요청했습니다.”
‘광주라... 여긴 원래 역사에서도 비슷한 게 만들어지잖아? 마카오와 홍콩이 이 근처 아닌가?’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이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원래 역사에서 명은 포르투갈과 무역하기 위해서, 엄청난 세금을 받고 마카오 일대를 임대해줬다. 겸사겸사 근처에서 날파리처럼 굴던 해적들도 포르투갈이 대신 때려잡으라고 시키고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시기의 마카오는 그냥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
“광주라... 영향을 받을 건 예상했지만, 거기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아국과의 거래도 거래인데... 한족 유민문제와 다른 민족 간의 갈등이 저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전날의 왜구마냥 약탈을 하는 이족해적까지 등장한 모양입니다.”
“기존 해적단과는 다른 부류고?”
“예. 사실 해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무장과 배를 타고 다니지만, 그 숫자만큼은 만만치 않다고 하더군요.”
새로 온 외교무역부 관원은 남주에서 활동하던 선발대 관원의 업무를 이미 숙지했는지, 막힘없이 말을 털어놨다.
“흐음. 이족해적이라... 어디서 오는 놈들인데?”
“너무 중구난방이라서 전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고, 광동 서쪽은 물론이고 광서에서 오는 이족들도 있다고 합니다.”
광주상인은 물론이고 자동상인 또한 이들에게 당한 적이 있지 않나. 이들은 한풀이를 하듯, 조선관원에게 아는 거 모르는 거 가리지 않고 아낌없이 알려줬다.
이렇게 많이 부풀리면 부풀릴수록, 조선이 경계심을 높여 해적놈들을 다 때려잡아줄 테니까.
“그건 일단 더 알아보지. 어차피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문제 아니냐. 최대한 뜯어낼 수 있는 만큼 뜯어내봐라. 광동에도 조차지가 건설되는 건 나쁠 게 없으니까.”
“옙. 자동상인회와 광주상인회를 경쟁시켜 보겠습니다.”
“좋아.”
외교무역부 관원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월과 참파는 왜 왔다는 거냐?”
“그게 참. 어째 저희가 조차지를 만들 거라는 게 소문이라도 난 건지, 참파에서도 조차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그 놈들은 대체 왜?’
“참파가?”
연오랑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고.
“예.”
“그렇습니다.”
정인지를 비롯한 모든 관원들이 뜻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차지는 까놓고 말해서 자기 땅을 내어준다는 거다. 그런데 그 짓을 오히려 바라고 있다는 게 의아할 따름.
광주나 자동과는 상황이 또 다르다.
“이유가 뭐지?”
“그쪽 내부사정은 워낙 복잡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데... 간단히 보면 대월에게 속절없이 밀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한테 도움을 청할 정도로?”
“예. 그런가 봅니다.”
정인지는 그리 말을 하고선, 모두를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대월과 참파는 미래로 치면 대충 북베트남이 대월, 남베트남이 참파라 볼 수 있었다.
민족구성도 달라서 대월은 월족, 참파는 참족이 살고 있었지.
이들은 역사 이래로 꾸준히 싸워왔는데, 한마디로 참파의 역사는 대월의 남하를 막는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서로 옥신각신하며 치고 패고 싸우다가, 결국 대월에게 밀려 사라지게 되지.
하지만 지금 역사에선 큰 변곡점이 있었다.
‘음... 보자. 운석핵꿀밤으로 영락제가 없어졌잖아? 그 스노우볼이 이렇게 구르나 본데?’
과거. 대월에선 쿠데타가 벌어져서 진 왕조가 몰락하고 호 왕조가 들어섰다. 영락제는 이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원정을 감행해서 대월을 박살내 줬지.
허나 지금은 그런 역사가 없어졌으니 대월의 힘은 남아 있었고, 그 힘을 남쪽의 참파로 토해내는 모양이다.
“대월은 집안 단속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거기도 중앙집권을 하면서 난장판이지 않나?”
“내부의 불만을 해소하려면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요. 그리고 대월에게는 숙적인 참파가 있죠.”
“반대로 위에 붙어 있는 대리하고는 친하게 지내고?”
“예. 덩치부터가 차이나지 않습니까. 게다가 대리도 한족과 대립하는 중이니 서로 손을 잡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고요. 애초에 대월은 남하하는 중국세력을 막는 게 고작이지, 치고 올라갈 힘은 없으니까요.”
“흐음...”
정인지는 이런저런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일에 종사해서 그런지, 어째 생뚱맞게도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상황에 대해서도 나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옆에 있는 외교무역부 관원조차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