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챕터47. 모여들다 (7)
“국서는 가지고 왔냐?”
“예. 여기 있습니다.”
조선이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서로 대체하는 일이 당연해졌으니, 국서의 필사본을 만들어 담당관원이 직접 보는 것 또한 당연한 말.
연오랑이 국서를 읽는 건 하등 문제될 게 없었기에, 그는 냉큼 받아 챙겨서 쓱쓱 읽어나갔다.
‘쓸데없는 소리가 많고만.’
참파도 중국의 영향을 적잖게 받은 나라고, 그 예법 또한 딱히 바뀐 게 없다보니 옛 시절의 양식을 그대로 띄고 있다.
있는 지도 몰랐던 조선, 그리고 고려시절 때에 있었던 양국의 우애를 성현의 말을 빌러 잔뜩 적어 놓더니, 결론은 끝자락에나 나왔다.
‘그래서 결국 조차지를 줄 테니, 와서 무역을 하자는 말이군?’
허나 이게 진짜 목적일 리가 없다.
‘무역? 참파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은 다른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북방물산은 우리 밖에 안 팔지 않나? 손해를 엄청 봐야할 거래인데, 이걸 먼저 제안했다고?’
이걸 생각해 봤을 때 조차지를 내어준다는 건, 분명 다른 속셈이 있는 거다.
“국서에 적지 않은 제안이 있을 거 같은데?”
“예. 금은을 대가로 줄 테니, 무기를 달라고 하더군요.”
“호오.”
“오...”
나름 관리가 되고 있던 걸까? 국서를 돌려보진 않은 모양이다.
외교무역부 관원의 말에, 이 사실을 몰랐던 다른 부서의 관원들이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참지 못했다.
“무기라... 화포?”
“화포도 좋고, 뭐든지 다 좋다고 합니다. 하다못해 창날이라도 말입니다.”
“흥.”
연오랑은 코웃음을 치며 비웃어줬고, 다들 같은 심정인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군이 시도 때도 없이 화포를 쏴대니까 뭔가 만만한 것 같지만, 대월이나 참파나. 그 외에 동남아시아 소국들은 화포가 있지도 않고 화포를 어떻게 쓰는 줄도 모른다.
그런 놈들이 감히 화포를 달라고 요청해? 이건 자기들도 안 들어 먹힐 줄 알고서, 다른 목적을 위해 겉에 씌운 미끼에 불과하다.
“진짜 원하는 건, 창칼과 같은 무기겠군?”
“예. 저희가 판단하기에도 그럴 것 같습니다.”
“흐음... 대월을 상대하는 데 무기가 모자라려나...”
“그런 것도 있고, 아국무기가 강건하다는 소문은 익히 퍼지지 않았습니까? 다른 나라에 없는 여러 무기가 있다는 소문도 함께 퍼졌고, 요청 항목에는 각궁도 있었습니다.”
“각궁을 쏠 줄도 모르는 놈들이 바라는 것도 많군.”
“참파인들은 그걸 모르지 않습니까? 아마 자기들이 쓰는 목궁과 큰 차이가 없는 걸로 알고 있을 겁니다.”
대만 원주민이 쓰던 목궁은 각궁과 비교할 수 없는데, 참파나 대월이 쓰는 궁도 사정은 엇비슷할 거다.
복합궁의 탄력을 따라가려면 활대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져야 하고, 그래서 키를 넘을 정도로 거대한 일본활이나 영국의 롱보우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대월이나 참파에선 이런 활을 쓰지 않고 중국활과 흡사한 활을 사용했고, 대신 쇠뇌계열은 나름 발달한 걸로 알고 있었다.
‘어째 조선제 강철에 대한 소문이 퍼지긴 퍼졌나 본데? 하긴 십년 넘게 전쟁을 했으니, 이제 알 때도 됐지.’
이런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사실 다른 건 뭐 그렇다 치고, 화살촉만 조선제 강철로 바꿔도 눈에 띄는 차이가 나지 않을까.
참파는 아마 이런 효과를 바라고 있을 거다.
“흠... 너희 생각은 어떠냐?”
연오랑이 넌지시 되묻자, 관원들은 서로 눈빛을 마주치고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오랑은 임시직위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세종,태종과 다이렉트로 통교할 수 있는 최측근이다.
그의 의견을 담은 서신이 세종에게 날아갈 게 분명하니, 자신들이 열심히 입을 놀린다면 연오랑의 서신도 내용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 또한 시험이자 기회인 걸 재깍 알아차리고선, 관원들은 연오랑을 기다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려 내놓은 답안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어차피 조정에서 결정을 내리겠지만... 저희가 보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대신 완제품이 아닌 철괴 그 자체를 보내는 게 모양새가 좋을 것 같습니다. 참파인들은 참파인들 손에 익은 무기를 선호할 테니까요.”
“...”
연오랑이 계속해 보라는 듯 손짓하자, 설명을 이어갔다.
“참파에 줄 무기이니 아국의 양식이 섞여 있으면, 여러모로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럼 참파식 무기를 저희가 만들어서 주는 것보단, 차라리 원자재만 주고 알아서 만들라고 하는 편이 효과적일 겁니다.”
“...”
“또한 참파인들의 사정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강철생산량이 부족해 충분한 무기를 확보하지 못한 걸로 보이니, 저희입장에선 그걸 보충만 해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나라에서 설령 이와 같은 사정을 알아차리더라도, 무기를 파는 것과 철괴를 파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요.”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쉽게 말해 대월이 “아니. 조선형님. 형님이 왜 끼어들어서 무기를 팝니까?”라고 불만을 표할 때. “난들 저걸 무기로 쓸 줄 알았냐? 농기구 만드는 줄 알았지.”라고 발뺌할 수 있는 거지.
“철괴라... 본토에서 쓸 양이 부족해지진 않겠지?”
연오랑이 혼자 중얼거린 말에, 관원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광업부와 공업부 관원을 찾았다.
“현재 아국에서 골탄(코크스)을 이용해 강철을 생산하는 제철소는 총 세곳. 용연,경원,석주(무순)인데, 이번에 송주(길림)에도 새롭게 제철소를 완공했습니다.”
‘이야... 감개무량하고만.’
조선인이 보기에 거지같던 똥땅인, 만주를 집어삼킨 보람이 있다.
농사는 힘들어도 광물자원은 많은 요동과 만주인데, 지금껏 주구장창 식량을 퍼먹던 지역이 드디어 밥값을 하나보다.
“지금껏 그곳에서 생산된 철괴는 대다수가 농기계와 농기구를 만드는 데 사용됐으나, 이제 본토에서는 그 수량이 줄어들 걸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남주도 원주민을 끌어갔고, 또 이곳에 보낼 물량이 추가됐을 텐데?”
“그 양을 생각해도 충분합니다. 원주민 무리가 아무리 많아봐야, 아국 전역에 퍼져 있는 농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숫자니까요.”
“음...”
‘틀린 말은 아니군.’
원주민 무리는 아무리 많아봐야 이십만을 못 넘어가지만, 조선 농부의 수는 족해도 수백만을 넘어간다.
그간 세곳의 제철소에서 꾸준히 생산한 물량으로 조선농부를 책임졌고, 강철 부품은 쉽게 달아 없어지는 게 아닌 만큼 이제 슬슬 잉여물량이 나올 때가 됐다.
‘물론 그 잉여물량도 알뜰살뜰하게 써 먹을 계획을 세워놨겠지만... 지금은 예외상황이니까. 사실 참파에 보내는 양이라고 해도, 배 한척 정도면 차고 넘치는 수준이잖아?’
말이 배 한척이지, 조선의 무역선은 대월이나 참파가 쓰는 상선과 비교하면 족히 두세배는 크지 않나.
그 안에 실리는 양은 곱절로 차이날 거다.
아니나 다를까. 연오랑과 비슷한 생각을 공업부 관원도 했나 보다.
“솔직히 저희가 우려하는 부분은, 참파가 저희가 보내주는 철괴의 대금을 과연 다 치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철괴 몇 덩어리 던져주는 걸로는 의미가 없고, 그걸 바라지도 않을 텐데 말입니다.”
“맞아.”
무려 무기를 수출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면, 못해도 연대 정도 규모의 병력을 무장시킬 무기를 달라는 뜻 아니겠나.
고작해야 수십명이 무장할 무기의 지원은 있으나 마나다.
“그에 관해서 들은 소식이 있습니다.”
“...?”
관원 중 누군가 입을 열었고, 누군가 했더니 택리부 관원이다.
“상인과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해 봤는데, 참파에는 금은이 꽤 많아 보이더군요. 대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나아가 당장 적이 코앞에 왔는데, 재물을 아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호오...”
“흐응.”
그의 말에 다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적과 싸울 때 무거운 금괴를 집어던져서 싸울 게 아니면 창칼이 있는 게 나은 편이지.
“더불어 저희 입장에선 손해 볼 게 없지 않습니까. 대금이 준비되지 않으면 철괴를 내어주지 않으면 그만이고, 팔지 못한 철괴는 남주도로 가져와서 농기구로 만들면 그만일 겁니다. 이곳에서도 제련기업, 공작기업을 키워야 할 테니까요.”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만 이번 거래가 단발이 아니라 지속된다면... 과연 참파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연오랑이 매섭게 찌르고 들어가자.
“예...”
“그건 그렇습니다.”
“관원을 파견해 확실히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들 참파의 내부사정을 낱낱이 아는 건 아니라서, 누구도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 매력 있는 제안임은 분명하다.
조폐부가 만들어지고 화폐를 제조하고 있는 건, 알만한 관원은 다 아는 상황.
인력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은행금고에 금은을 쟁여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건 아깝기 그지없다.
허나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만약 무기를 원했다면 그냥 금은을 싸 짊어지고 와서 바꿔 가면 그만. 굳이 조차지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조차지는 어디를 내어준다고 했지?”
“이곳 현항이라는 곳입니다.”
관원은 냉큼 지도를 내밀어 집었다.
여기저기서 정보를 긁어모아 재편집해서 만든 지도인 만큼, 택리부 관원이 직접 발로 뛰어 만든 지도에 비하면 개판이지만... 그래도 얼추 알아볼 정도는 됐다.
헌데 그 현항이라는 곳은 미래의 베트남 정중앙에 위치한 곳.
‘여기... 아무리 봐도 다낭 같은데? 이 미친놈들은 여길 내주겠다고 하는 거야. 지금?’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다낭은 참족이 처음 참파를 세운 근본 있는 도시이고, 이곳에서 발원해 남북으로 뻗어나갔다.
허나 역사는 깊지만 오히려 쇠락한 상황.
북쪽으로 뻗어나갔던 영역은 대월에 의해 다 빼앗기고 말았고, 다낭 또한 대월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곳에서 고작해야 백키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오려烏麗, 미래에는 후에라 불리는 지역까지도 대월이 장악한 상황이었으니까.
‘이것도 역사가 비틀려서 그렇게 된 거겠지?’
연오랑은 아무도 모르는 속사정을 읊조렸다.
원래 역사에서는 다낭이 아닌 후에지역이 대월과 참파의 국경지대로 남았고, 후에지역은 영락제에 저항하던 핵심거점 중 하나였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그냥 쓱쓱 밀려버려서, 국경지대가 한참 남쪽으로 내려온 모양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 것 같냐?”
연오랑이 또 다시 쪽지시험을 내자, 관원들은 빠르게 눈을 마주치고선 외교무역부 관원 중 한명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흴 방패막이로 삼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호오...?”
‘이것들 봐라? 진짜로 생각보다 외국사정에 빠삭한데? 보는 눈이 확실히 넓어지긴 넓어졌어.’
연오랑은 가볍게 감탄을 흘리며, 대표관원 뿐만 아니라 다른 관원들 끝으로 정인지까지, 만족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않고 훑었다.
‘나이대도 얼추 비슷한 거 같은데... 신입인가? 아니군. 벌써 몇 년 됐으니 신입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찌됐건 운석핵꿀밤 세대다. 이거지? 좋군!’
그는 속으로 박수를 마구 치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간 조선의 외교라는 건 명 중심이었다.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명을 중심으로 뭉쳐 있으니 명의 의사가 중요했고, 조선은 티격태격하면서도 명조정의 정보를 수집해 명의 의도를 따라가는 일에 집중했지.
그 밑에 있는 나라들이야 그냥 친교만 나누면 그만이었고, 왜국영주의 경우에는 “거지새끼들. 이거나 먹고 왜구들 단속해라.”라는 정도에 불과했다.
허나 운석핵꿀밤은 모든 걸 뒤집었고, 이젠 자주화를 외치는 운석핵꿀밤 세대가 조정의 모든 부서에 포진했다.
나아가 조선의 강역이 점점 넓어져서, 그간은 엮일 일도 없던 우량카이 3위, 북원잔당, 심지어 지금은 남방소국과도 직접 부딪치고 있지 않나.
기존에 조선이 추구하던 폐쇄적인 외교 전략은 아예 꿈도 못 꿀 상황이 됐고, 오히려 조선이 흑막이 되어 주물러야 하는 상황.
안 그러면 지금 조선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혁이 꼬이게 될 테니까.
결국 드디어 외교다운 외교를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됐고, 의주에서 무역하면서 경험을 축적한 이들이 연오랑이 벌여놓은 난장판을 수습하며 성장하게 된 것.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 보이고 있다.
원래 역사에선 참파나 대월의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고, 인도차이나반도의 속사정이나 지도조차 없었겠지만... 지금은 그들의 꼼수를 역으로 파악해서, 이용해 먹을 수준으로 성장하지 않았나.
세상 보는 눈이 넓어졌다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방패막이라...”
“예. 조차지에 아국군대가 주둔하는 건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만약 현항에 조차지가 만들어지면 대월 또한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겠지요.”
“또한 현항의 위치가 참으로 묘합니다. 대월과 참파의 국경 분쟁지대에 딱 붙게 됐으니... 아국이 현항을 지켜주면 참파입장에선 전선을 줄여, 다른 곳으로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다 또한 그러합니다. 아국의 해군은 대월의 수군이든 해적이든 사실상 구별할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배에 무장병력이 왕창 타 있으면, 그게 해적인지 정규군인지 어떻게 알겠나.
당연히 의심을 품은 조선전함이 하나씩 문정하고 다니게 될 거다. 그럼 바다를 이용한 대월의 공격은 애매해질 테고.
“게다가 대월 또한 저희를 무시하지 못할 테니, 현항 근처에서 활동할 때마다 저희에게 허락까진 아니어도 통보는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현항에 머무는 참파인에게 당연히 정보가 세어나갈 테니, 대비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얻게 될 겁니다.”
“오...”
연오랑이 작게 감탄을 표하자, 하나같이 뿌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