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47화 (347/538)

347. 챕터47. 모여들다 (8)

“그런데... 대월이나 참파나 거기서 거기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 속절없이 밀리고 있는 거냐?”

“그게...”

외교무역부 관원은 자신도 확신을 못하는지, 양해를 구하고선 추론을 늘어놨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지형이 워낙 지랄 맞고, 분포되어 있는 민족도 다양해서, 각 지역마다 독자성을 유지해 왔다.

하나의 나라라고 칭한다고 해도 느슨한 봉건제로 묶일 수밖에 없었고, 지방호족은 진짜 작은 왕이라고 해도 무방한 권위와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왕이나 대호족은 “그래. 세금이나 잘 내고 말썽부리지 마라.”라고 다독이는 정도에 그쳤고.

게다가 왕조에 충성하는 게 아닌 왕에게 충성하는 편이라서, 만약 왕이 바뀌면 지방호족끼리 “후계자에게 충성하는 게 낫겠냐? 아니면 다른 대호족에게 붙는 게 낫겠냐?”라고 토의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서 쿠데타가 시도 때도 없이 터졌고. 기존의 이권만 보장해준다면 위에 누가 올라서든, 심지어 속국신세가 되도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던 거지.

대월이나 참파를 비롯한 모든 인도차이나 반도의 나라가 같은 상황이었고, 중앙집권을 강력하게 추진한 건 중국물을 많이 먹은 대월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호왕조가 집권한 후로, 지방호족을 끊임없이 압박하지 않았습니까. 지방호족들 입장에선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결국 먹힐 수밖에 없는 바. 적국인 참파를 공략해 그 땅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흐음.”

이건 어쩌면 태종이 지난날 해왔던 짓과 얼추 비슷한 터라, 관원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 마냥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사실 조선과 대월,참파의 사정은 완전히 다르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비슷하니까.

“참파가 밀리는 이유도 같은 이유입니다. 참파의 지방호족들은 비록 대월과 다른 족속이라고는 허나, 어차피 한족을 비롯한 온갖 족속이 섞여 있는 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

“그들에겐 참파왕이 아닌 대월왕을 모신다고 해도, 자신의 이권만 보장해준다면 상관없는 일이니... 쉽게 대월에 넘어갈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월에 붙는 지방호족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존 대월호족은 차지할 땅이 줄어드니 어떻게든 남하해서 새 땅을 정복하려고 하는 거고 말이야.”

“예...”

단일국가를 이룩해서 살아온 조선인들 입장에선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지만, 또 한편으론 고려 때도 귀족의 영향력이 막강했었기에 마냥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선에서는 적어도 다 같은 조선인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타민족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것에 격한 반응을 보였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에선 온갖 민족이 다 섞여 사는 터라 그런 거부감이 훨씬 덜한 모양이다.

‘난장판은 확실히 난장판이야. 그러니 대월이 중앙집권을 아직도 끝내지 못하고 피를 보고 있지.’

오죽했으면 대월 호족이 보트피플이 되어, 멀고먼 조선까지 도망쳐 와서 귀화했겠는가.

호왕조는 중앙집권을 명목으로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잘 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럼... 만약 아국이 참파를 도와줘도 대월을 쉽게 막을 거라고 낙관하면 안 되겠군? 어쩌면 현항을 우리가 얻어내도, 결국 대월의 강역에 포함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그게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참파가 물러나면 그 땅은 주인 없는 땅이 되는 것이니, 앞으로는 완전히 아국의 강역이 되지 않겠습니까?”

“...”

누군가 자신만만한 말을 내뱉자, 다들 알게 모르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식들 봐라. 땅장사를 하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고만?’

참파가 망하거나 말거나, 그 땅을 그냥 꿀꺽 해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다.

대월도 조선과 싸우고 싶지 않을 테고, 원래 자기 땅도 아니니 조차지를 쉽게 넘겨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너희가 보기에 참파를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고 보는 거지?”

“그렇습니다. 손해보다 이득이 더 많고, 철괴거래를 제외하더라도 조차지를 만들면 실제로도 무역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다른 부수적인 이득을 떠나서 참파의 특산물을 사오는 건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참파가 남아 있는 게, 아국에게 더 이득 아니겠습니까.”

‘연맹 만드는 것에 맛이 들렸고만.’

연오랑은 관원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횡횡하는 느슨한 봉건제는 중국에서 만든 연맹과 크게 다를 게 없고, 그 대표가 대호족이자 왕이라는 점에서만 다르지 않나.

조선 입장에선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 반도 또한, 하나로 통일되는 것보단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는 게 이득이다.

‘참파는 이쪽으로 의견이 굳혀지는 것 같고... 그럼...’

“대월의 사신은 뭐라고 하냐?”

“여기 있습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인지는 냉큼 국서를 내밀었고,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을 풀어놨다.

“대만섬을 정복해서 축하한다.” “과연 조선은 대단하구나.” 등등의 수사를 빼면, 대월의 제안은 간단했다.

지금 열어준 무역항인 제주 말고도, 대만섬에도 무역항을 열어달라는 말이 끝이었다.

“참파에 비하면 약하군?”

“아마 참파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왔는지 모르는 모양입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요.”

“대리국 사신과 함께 왔는데, 서로 의도를 교류하진 않은 모양이야?”

“그건 정확히 모르겠으나... 대월 입장에선 지금 잘 풀리고 있는데, 괜히 아국을 자극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치들 입장에선 호의만 전해도 충분하다고 보고 있을 겁니다.”

“흐음...”

연오랑은 다시금 손가락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고, 모두는 또 한번 튀어나올 쪽지시험에 긴장했다.

예상대로 매서운 질문이 날아온다.

“우리가 현항에 조차지를 건설하면, 대월이 어떻게 나올 거 같냐?”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도 고민을 해봤는데... 딱히 대월이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조차지 문제는 어디까지나 참파와 아국사이의 문제이니 대월이 끼어들 여지가 없고, 설령 반대한다고 한들 실효가 있겠습니까.”

“만약 대월이 악감정을 품고 무역을 끊는다고 해도, 실상 대월의 무역은 얼마든지 다른 상인들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대월의 특산물 중에서 아국이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또한 참파와 전쟁을 하고, 또 지방호족의 세를 약화시키는 것도 바쁜 호왕조가 아국과 적대해서 전쟁을 걸겠습니까. 그들도 천진과 남통의 소문은 익히 들었을 겁니다.”

군사에 관해서는 이들도 잘 알지 못하지만, 이건 어린아이라도 예측할 수 있는 문제다.

조선과 대월은 바다를 통해 만날 수밖에 없다.

헌데 제대로 된 화포도 없는 대월이, 화력전함을 운용하는 조선과 싸우겠다고? 대월의 땅을 지키는 건 가능해도, 해안도시를 비롯해서 홍강 하류의 삼각주는 초토화 될게 불을 보듯 뻔한 일.

헌데 홍강 하류는 승룡昇龍, 미래에 하노이라 불리는 곳이다.

당나라 때 안남도호부를 건설한 후로, 지금까지 왕조가 바뀌는 와중에도 대월의 수도였던 곳 아닌가.

여길 판돈으로 내걸고 도박을 하는 건, 누가 봐도 정신 나간 짓이다.

‘게다가 수도가 개박살나면, 지방호족을 어떻게 다스리고 찍어 누를 수 있겠어. 대월의 왕은 죽었다 깨나도 여길 포기할 수가 없겠지.’

“그럼 대월은 제안은 그냥 받아주면 되겠군. 어차피 남주에 무역항을 열려고 했으니까.”

“예.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정리가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니, 한동안은 자동이나 광주를 비롯한 강남해안도시를 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아. 참파도 끝났고, 대월도 끝났으면... 이제 남은 건 대리인가? 그 왕자는 누구냐?”

“단종림이라고 했는데, 첫째 왕자는 아니고 둘째 왕자라고 했습니다.”

“오...”

대리도 중국문화권에 속해 있으니 세자를 아무데나 보낼 순 없을 터, 둘째 왕자를 보낸 거면 꽤나 조선에게 예우를 표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죄송합니다. 상인들과 대월 사신에게 얻은 정보가 전부인데... 진위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음.”

연오랑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관계도 없던 대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지난날 국서를 교환한 후로 서로 사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신년에는 서로 축하사신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명이 망한 후로 조선이 언제 그런 걸 해봤겠는가.

이것도 어쩌면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이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

내색하진 않아도 “명 다음은 우리다!”라고 생각하는 조선 입장에선, 딱히 사신을 보낼 나라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대리도 뭐 대리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했을 거고.

해서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한 거고, 이곳에 머물면서 지켜본 게 전부일 거다.

“객관客館에 머물고 있냐?”

“예.”

과거. 조선에는 외국 사신이 머무는 객관을 만들어 놨고, 한성에는 중국사신이 머무는 태평관太平館, 일본사신이 머무는 동평관東平館, 여진인들이 머무는 야인관野人館 등이 있었다.

그 외에 평양에도 대동관大同館이라는 객관이 있었지.

허나 지금은 전부 없어졌고, 사신을 무역항에 머물게 하면서 무역항에 객관이 만들어졌다. 이곳 남주 또한 앞으로 무역항의 역할을 해야 하기에, 미리미리 객관을 만들어놨었지.

특히나 이곳 남주는 남주도의 주도로 남주부로 설정되지 않았나.

양전사업을 하면서 난잡했던 행정구역과 행정조직을 개편.

미래로 치면 특별시와 흡사한 도를 총괄하는 부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부로 설정된 지역은 고래로부터 사람이 많이 살던 대도시였던 터라, 착호군을 이끌던 태종이 거처하던 곳이었고... 그 결과 부에 속한 관아는 한성궁궐을 축소시킨 행궁처럼 건설되게 됐다.

엄청나게 불어난 관원들이 순환근무를 시작하면서, 당연히 관청이 커질 수밖에 없고 그 식솔이 거주할 장소 또한 필요하지 않나.

이곳 남주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3층관아를 비롯한 수많은 관사가 빼곡하게 들어선 행궁을 만들 게 됐지.

허허벌판이 아닌 관아의 객관에서 머문 사신들은, 아무것도 없던 남주에 뜬금없이 낯선 형상을 한 조선행궁이 만들어진 걸 보며 까무러치게 놀랐을 거다.

“대감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전했으니, 준비를 끝마쳤을 겁니다. 오라고 할까요?”

“어. 그래라. 얼굴이라도 한 번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연오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원은 발을 놀렸고, 이내 곧 정인지를 필두로 한 각 부서의 책임자만 남고 다른 이들은 대전에서 벗어났다.

그가 부르기만을 기다렸던 걸까? 정인지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얼마 기다리지도 않아서, 대리국 왕자가 왔다는 걸 알리는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들어오라 해라.”

“옙!”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리국 사신들이 들어왔고, 중국식 옷을 입은 그들은 예상과 다른 장내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전에는 단상도 없이 그저 상석에 연오랑이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길쭉한 탁자가 놓여서 양옆에 조선관원들이 앉아 있지 않나.

“대체 이건 뭔가?” 싶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하나? 이게 예법에 맞는 건지 모르겠네.”

“이런 상황에 맞는 예법이 있기나 하겠습니까. 그냥 대충 하시죠.”

연오랑과 정인지가 시답잖은 하지만 중대한 문제를 놓고 말장난을 하자, 관원들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허나 둘이 하는 말이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오랑이 워낙 소탈하고 제멋대로 행동해서 그렇지, 그는 무려 정1품 용연군인 동시에 공주의 부마다. 다른 나라 입장에서 보면 왕족이라고 봐도 무방한 지위에 있는 인물이지.

다만 지금 온 대리국 사신 또한 왕자 아닌가. 그러니 상하관계를 따지기가 애매해진 거지.

“용연군 연오랑이오.”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볍게 목례하며 입을 열자, 왕자를 비롯한 사신단은 재빠르게 눈을 굴리며 마주쳤다.

대리국 사신들도 북방한어를 할 줄 아는 터라 연오랑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들었지만, 여기서 명나라 예법대로 해야 하는지, 대리, 혹은 조선 예법대로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

사신단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은 조선관원들을 슬쩍 흘겨봤지만, 다들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른척 하고 있으니 별 수 있나.

연오랑보다 어려보이는 왕자는 살짝 기가 눌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 대리의 왕족. 단종림이오.”

왕자는 소개를 마치고 엉거주춤한 모습을 취했고, 연오랑은 일부러 기를 죽이려는 듯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그러면 그럴수록 왕자뿐만 아니라 흰수염을 곱게 정돈한 사신들 또한 슬쩍 허리가 굽혀졌다.

아무리 대리왕족이라고 해도 백호가죽을 볼 일이 어디 흔할까.

그걸 갑옷으로 만들어 입고 있고, 머리 하나는 더 큰 거한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으니, 절로 가슴이 졸여질 수밖에.

조선군을 이끌고 다니며 온갖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백호장군에 대한 위명은 이미 퍼질 대로 퍼져서, 대리 사람들이라고 모르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뜬구름과 같은 살이 덕지덕지 붙은 소문을 접했기에, 연오랑을 무슨 사두육비의 괴물로 생각했을 건데... 실제로 봐도 보통은 아니라는 걸 직감하고 말았다.

“낯선 방식이긴 하지만 여기가 편전도 아닌데 따져서 뭐하겠소. 그냥 편히 앉으시오.”

연오랑이 말을 하고 자리에 앉자, 눈치 있는 조선관원이 냉큼 일어나 왕자와 사신들이 앉을 의자를 빼줬다.

동시에 “여기 앉아라.”라는 눈빛을 뿌리자, 용케 알아듣고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엉덩이를 붙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