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챕터47. 모여들다 (9)
이내 자리에 앉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완전무장을 한 호위들이 성큼 다가와 차주전자와 찻잔을 사신들 앞에 대령했다.
“조선의 차요. 대륙의 차와 비교해도 나쁘지 않을 거외다.”
연오랑은 그리 말하고서 먼저 차를 따랐고, 이내 모두가 찻잔을 채우자 사신들 또한 자기 손으로 차를 따랐다.
그간 알고 있던 사신을 대하는 예를 한참 벗어나긴 했지만, 사신이 아닌 그냥 친분 있는 사이에선 이러는 경우가 흔치 않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왕자는 냉큼 연오랑을 따라하며 차를 할짝거렸다.
“그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아국은 어느 누구의 머리 위에 올라설 생각이 없소. 아마 산동과 절강의 소식을 들었으면 익히 알거라 생각하오.”
연오랑이 노래를 부르듯 말을 이어가자, 사신단은 한 단어도 빼먹지 않겠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이면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소.”
“...”
연오랑은 그리 말을 끊었고, “헛소리 하지 말고, 속내를 바로 털어놔라.”라는 눈빛을 왕자를 향해 강렬하게 투사하며 입을 열었다.
“허니... 시간도 없는데, 거두절미 하고 묻겠소.”
“...?”
“국서로 말하지 못할 일이 대체 무엇이오? 아국과 대리는 서로 교류가 깊지 않고, 또 엮일 일도 없지 않소? 속이려 들지 말고 말해보시오. 아국에게 이득이 된다면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
연오랑이 다짜고짜 속을 파고들자, 왕자는 슬쩍 사신들의 눈치를 살폈다.
바로 넘어오지 않고 뜸을 들이자, 그는 더욱 강력한 패를 내밀었다.
“나를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어차피 아국 조정에서 논의가 된다 한들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거요. 그리되면 손에 쥐는 것도 없이 차일피일 시간만 잡아먹으면서 빈둥거릴게 될 텐데, 그래도 상관없소?”
다시금 가슴을 언어로 된 송곳으로 후벼 파자, 사신단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치야 전부 맞는 말이지만, 원래 이런 사신들은 외교적 수사법을 통해서 이리 찌르고 저리 찔러서 반응을 보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허나 연오랑이 무식한 야만인처럼 굴고 있자, 이들의 머릿속에서 김이 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
다들 말없이 눈빛만 교차하고 있는데, 속으로는 원래 세웠던 협상 계획을 전부 수정해서 어떤 게 좋을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연오랑의 실체는 모르지만, 외국인이 보기에 연오랑은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그런 그가 딴지를 걸면, 이 안건이 통과될 리가 없지 않나. 연오랑의 생떼가 마냥 장난만은 아니었던 거지.
어째 막무가내로 나오는 연오랑을 보며 기싸움을 하려는 걸까. 아니면 예법은 이미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자기들도 편하게 하려는 걸까.
왕자는 아예 대놓고 사신단과 귓속말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반대로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기라도 했던 걸까? 연오랑을 비롯한 관원들은 태연자약하게 차를 마시며 기다려줬다.
그가 개입해서 상식적으로 진행된 일이 언제 있었던가. 관원들 대다수는 착호군 전역자인 터라,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음...”
끝내 소곤소곤 귓속말을 끝마치고 왕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말을 이어가기 전에 장내를 쓱 훑었다.
그 속내를 읽고서 연오랑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들은 이곳 남주도를 다스릴 이들이오, 어차피 아국 조정으로 가면 퍼질 이야기이니, 들어도 되는 지위에 있는 이들이오.”
“...”
왕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국은 조선의 화포를 구입하고 싶소. 다른 곳에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
‘뭐야 뜬금없게. 조선 화포가 좋다고 소문이라도 났나? 왜 다들 무기를 구하겠다고 난리야?’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고, 정인지를 비롯한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참파와 대리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참파야 죽기 직전이니 지푸라기라도 잡을 생각이지만, 대리는 오히려 잘나가는 상황.
미끼가 아니라 진짜로 화포를 사고 싶어 하는 거다.
“대리도 화포를 만들 수 있지 않소?”
“물론 그러하오. 허나 소문의 반만 되더라도, 조선만큼은 못하지 않겠소?”
“그건 그렇긴 하오만...”
왕자가 아무렇지 않게 조선화포를 치켜세우자, 연오랑 또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연오랑이 개입하지 않았어도 조선의 청동주조기술을 매우 뛰어난 편이었고, 이는 곧 화포제조기술로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노가다반복작업이라는 연구로 인해, 주물기술이 조금 더 상승한 지금은 세계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다만 대리가 이걸 알 리가 없지만, 그간 조선군이 보여준 성과만 놓고 보더라도 조선화포가 충분히 쓸만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몇 문이나 사려는 거오?”
“최소 백문입니다.”
“흐음...”
‘허. 백문?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네.’
연오랑은 다시금 신음을 흘리며 관원들을 힐끔 살폈고, 관원들 모두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먼저 시작했는데 거리낄 게 있나. 아예 항상 들고 다니던 휴대용 공책에 글을 써가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정인지 또한 마찬가지. 녀석은 뭔가를 쓱쓱 적더니 연오랑 앞으로 슬쩍 내밀었다.
-화약.
‘화약을 말하지 않았다고? 흠. 잠깐만...’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대리의 사정을 유추해봤다.
운남은 명이 가장 나중에 정복한 곳. 무려 요동을 정복하고 나서야 명의 지배 하에 들어온 곳이다. 다른 지방에 비해 명의 지배를 적게 받은 곳이지.
‘그만큼 화약무기를 접한 게 늦었고, 명 또한 운남에서 화약장과 화포병을 키우려 하지 않았을 거야.’
원나라는 화포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으니 운남은 대륙에서 쳐들어온 명나라에 의해 화포를 처음 봤을 거다.
또한 단씨는 운남을 지배하던 몽골족 양왕의 뒤통수를 쳐서 명에 붙었고, 독립을 꿈꾸는 그들을 때려잡은 게 명나라다.
배신을 연거푸 한 이들을 쉬이 믿지 않았을 테니, 운남을 정복했다고 해서 최신기술이자 기밀인 화약병기를 마구 양산하진 않았을 거다.
‘화포도 그렇고 화약도 제대로 만들기 힘들었을 거야. 물론 명이 망하고 나서 시간이 한참 흘렀으니 다른 지방에서 기술을 알아왔겠지만... 조선의 화약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겠지.’
아마도 조선이 처음 들여왔던 중국의 화약제조기술을 그대로 써먹는 게 아닐까 싶다.
‘결론은 화약이 그리 충분치 않을 텐데, 이걸 논하지 않았다는 거군.’
본래 대리가 바라는 최상은 화포제조기술과 화약제조기술을 받아내는 건데, 조선이 미쳤다고 이걸 넘겨주겠나.
연오랑이 앞뒤 다 자르고 본론으로 가버리자, 이들 또한 밀고 당기려던 계획을 바꿔서 진짜 목적을 꺼내든 모양이다.
‘그렇다면 화약은 어찌됐건 해결할 수 있다는 건데...’
“화약...”
그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왕자를 비롯한 사신단이 찔끔 당황하는 몸짓을 보였다.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역시나 걸려든다.
이심전심인지 쓱. 사신단의 분위기를 읽은 정인지가 다시금 뭔가를 적어 내밀었다.
-사천.
‘사천이라고? 아... 하긴.’
사천에는 산동 못지않은 초석광산이 존재했고, 명나라 시절에도 열심히 뽑아먹었던 곳. 대리와 사천은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다만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을 거래할 정도면, 알려진 것과 달리 사이가 훨씬 돈독하다는 뜻일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민족이 다른 대리와 사천이 손을 잡는 건 쉽지 않을 거야.’
사천의 주류민족이 한족이라지만 지리적 특성상 중국본토와 따로 노는 경향이 원래 심했고, 명이 망하고 나서 군벌로 쪼개진 후에도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았다.
조선이 산동에 연맹을 만들었을 때, 그쪽에선 그와 유사한 형태의 연합체가 이미 완성 직전이었지.
사천상인들은 장강을 타고 내륙으로 내려와 상행을 했으니, 산동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 연맹이 만들어지는 걸 봤을 터.
그 결과. 사천에서도 비슷하면서도 다른 연맹체가 만들어졌다.
“화포는 우리에게 받고, 화약은 사천에서 받는다. 하지만 화약을 쉽게 내어주지 않을 테니 분명 큰 대가를 줘야 했을 텐데... 그게 대체 뭘까.”
“...!”
연오랑이 대놓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자, 왕자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어느새 그의 말투는 평대로 바뀌었지만, 사안의 중대함에 밀려 사신단은 그걸 꼬집을 겨를도 없는 모양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데 특별할 건 없다. 사천과 운남을 비교하면, 대부분의 물산에서 사천이 앞서지 않나. 사천에 없는 특별한 걸 내어줘야 했단 말이지. 아무리 운남에 금은을 비롯한 광물이 많아도 사천이 없는 건 아니니까.”
“...”
“게다가 사천은 와라(오이라트)와 대립하는 중이니, 화약을 쉽게 넘기지 않았을 거야... 어떤가? 내 생각이. 맞나?”
그가 히죽 웃으며 ‘빨리 진짜 속내를 털어내봐.’라고 압박하자, 왕자를 비롯한 사신단은 ‘그게 뭔 소리냐?’는 듯 모른 척 의뭉스럽게 굴었다.
허나 그렇게 잡아 땐다고 해결 될 일인가.
“...”
“...”
아쉬울 게 전혀 없는 조선은 이대로 협상을 깨면 그만.
“말 안 해? 그럼 더 이상 대화가 진행이 안 될 텐데?”라는 자세를 침묵으로 고수하자, 결국 굽히고 들어온 건 왕자와 사신단이었다.
또 다시 귓속말을 나누더니, 끝내 왕자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입을 열었다.
표정이 전보다 훨씬 굳어진 걸로 보아,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밀을 꺼내려는 모양이다.
“방금 용연군께서 말한 와라 때문이오. 그치들이 사천을 모든 방면에서 강하게 압박하고 있소. 사천이 그간 소원했던 우리에게 손을 내밀 만큼.”
“...!?”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오. 본래 와라와 달단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들이 서북방을 침공했을 때도 분란이 벌어질 거라 봤소. 허나 예상과 달리 그들은 섬서와 한중에 눌러 앉아 북원을 부활시키려고 하오.”
이건 대리보다 조선이 더 잘 아는 사안. 헌데 멀리 떨어진 조선과 바로 코앞에 맞붙어 있는 사천이 느끼는 위험성은 차원이 다른 모양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둘 사이는 오히려 더욱 공고해지고 있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오히려 서쪽 초원으로 나아가 영역을 확장했다는 말도 있소.”
“흐음.”
“...”
왕자의 침울한 어투에, 연오랑을 비롯해 조선관원들은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며 모른 척 잡아 땠다.
‘스노우볼이 또 이렇게 굴러갔네.’
연오랑은 러시아제국의 발호를 최대한 늦추고 가능하다면 아예 없애버릴 속셈으로, 조정은 초원길을 되살리고, 루스인 포로를 데려와 인구를 늘리고, 서북방의 평온을 도모할 속셈으로.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해 제왕부, 아자이가 이끄는 동북방 북원잔당, 초원남쪽의 항명출신 군벌들, 서쪽초원의 북원잔당 및 옛 서방 칸국과 조약을 맺으며 나아갔다.
그게 벌써 몇달전이니, 지금쯤이면 루스공국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킵차크 칸국에 다다랐을지도 모르지.
조선의 제안은 간단해서 “너희끼리 그만 싸우고, 초원길을 되살리고 서방의 색목인들이나 패자. 초원길을 되살리면 서로 이득을 보는 일이니 좋잖아?” 라는 것.
무제한적으로 동방물건을 파는 판매자이자, 무제한적으로 노예와 서역물품을 사들이는 구매자. 조선이 있는 이상, 이 무역은 성황을 이룰 수밖에 없다.
이걸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서방칸국이든 몽골대부족이든 자기들이 먼저 마적떼와 잡스런 소부족을 알아서 때려잡을 거고.
이로 인해 오이라트와 북원잔당 사이의 신경전이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색목인 포로를 끌어오고 무역으로 돈을 버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
이렇게 힘을 비축한 오이라트는 원래 목표였던 사천을 다시 두들기기 시작한 것이다.
“아까 최소 백문이라 했지만, 실은 이백문 이상도 바라고 있소.”
“이제 보니 대리도 대리지만, 진짜로 화포를 원하는 쪽은 사천인 모양이군? 그대들은 사천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신 구입해주고 화약을 받기로 한 거고?”
“그렇소이다.”
사천에게 화포를 팔 내륙지방연맹은 아무도 없을 테니, 손을 뻗을 곳은 조선 밖에 없을 터.
헌데 사천과 조선은 관계도 없고, 지리적으로 닿을 수도 없지 않나. 그래서 대리가 징검다리가 될 수밖에 없던 모양이다.
‘아마 일이 꽤나 급하게 진행됐을 거야. 시간상으로 보면... 그게 얼추 맞고.’
지금쯤이면 서방에서 루스인 포로를 비롯한 온갖 서방물산이 하나둘씩 동방에 도착할 시기.
오이라트가 사천 공격을 준비하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반대로 조선이 대만섬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사천은 대리국을 통해서 대리구매를 할 생각도 못했을 것 아닌가.
사천이 왜 이렇게 급하게 움직였는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속 시원하게 다 털어놔서 일까? 왕자는 오히려 더 느긋해진 표정을 지었다. 털어놓을 거 다 털어놨는데, 마음 졸일 게 있나. 남은 건 조선의 선택이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자, 정인지가 다시금 글을 적어 밀어 넣었다.
-사천에 주는 것 치고는 너무 많다. 다른 의도는?
‘흠. 이백문이라...’
이백문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 많은 거다. 그 거대했던 거용관에 배치된 화포가 백문이 안됐으니까.
한중과 사천을 막는 요새에는 이미 화포가 배치되어 있을 테니, 조선에서 사가는 화포는 새로 만든 요새에 배치할 게 분명.
거용관만큼 거대한 곳이 아니고서야, 나눠서 배치할 텐데... 애초에 한중과 섬서고원에서 사천으로 쳐들어갈만한 길은 그리 많지가 않다.
결국 대리가 사들인 화포는 사천으로 넘어가는 것 말고도, 대리 자신이 쓸 양도 있다는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