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49화 (349/538)

349. 챕터47. 모여들다 (10)

‘대리가 화포를 써서 싸울만한 이들이 있나? 이미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춘 중국대륙인데, 대리를 노리거나 대리가 확장할 곳이 있나?’

이미 안정을 이룬 대리가 추가로 화포가 필요하다는 건, 전쟁을 하겠다는 뜻. 그러면 전쟁을 할 대상이 있어야 하지 않나.

‘북쪽은 사천, 동쪽은 귀주와 광서, 남쪽은 대월, 서쪽은...!’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놓고 하나씩 집어보자, 답이 나왔다.

반쯤 동맹인 사천을 공격할 수 없다.

귀주와 광서를 건드리면 개미떼처럼 소수민족이 튀어나오는 건 물론, 내륙의 한족 연맹도 발작을 일으킬 거다. 그럼 그간 이어져온 거래는 다 끊긴다.

남쪽의 대월 또한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내륙국가인 대리가 다른 나라와 통교하기 위해선 바다로 나갈 길이 필요하고, 홍강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하니 대월과는 친교를 유지해야지.

“그러니 남은 건 남서쪽. 개판이 된 상황에 끼어들겠다는 거군? 자신이 있나 보지?”

연오랑이 또 다시 소설을 써봤지만, 어째 이번에도 때려 맞춘 걸까? 왕자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파간蒲甘국이 원에 의해 멸망하고 난 후.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그쪽은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소.”

파간은 버간왕국. 미래의 미얀마 지역을 다스리던 옛 왕국이다.

“진랍眞臘국 또한 섬라暹羅국에 의해 수도가 정복당했고, 여러번 천도해 남동쪽으로 밀려났소.”

진랍은 크메르제국, 섬라는 태국의 전신으로 지금은 아유타야 왕국일 시기.

‘하. 뭐야. 이쪽은 건들지도 않았는데, 또 꼬였네?’

정인지를 비롯한 관원들은 왕자가 하는 말을 열심히 받아 적으며, 내색하지 않고 놀람을 애써 감추고 있었지만... 미래를 아는 연오랑은 재깍 알아듣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영락제의 남방 원정은 대월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또한 위축되게 만들었지만, 지금 역사에선 그런 게 없지 않나.

크메르제국은 훨씬 더 빠르게 축소되고 있는 것 같고, 반대로 태국은 더욱 빨리 성장하는 모양새다.

“란쌍南掌국 또한 왕위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고, 대월은 이 틈에 란쌍도 함께 노리고 있는 중이오.”

란쌍은 미래의 라오스 지역을 다스리던 옛 왕국이다.

‘허... 대월이 이쪽으로 왜 끼어들어? 참파를 공략하는 것에만 힘을 다 쏟은 게 아니었나?’

영락제에게 얻어맞지 않아서 힘이 남아도는지, 여기저기 빈틈을 다 찔러대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만해.’

조금이나마 중앙집권을 이룩한 대월과, 느슨한 봉건제를 유지한 참파나 란쌍 등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은근히 차이가 크게 난다.

봉건제 특성상 “어디로 와라!”라고 하면 제대로 안 오는 경우가 허다하고, “남의 동네에 가서 왜 싸워?”라고 뭉그적거리는 일상 아닌가.

이러니 아무리 대단한 명장이 있어도, 병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건 어렵기 마련이지.

참파가 대월에게 쭉쭉 밀리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고... 훨씬 더 많이 밀려야 했음에도 아직 여유가 있는 건, 대월이 란쌍도 야금야금 집어먹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가 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남방을 노리겠다는 거군. 그치들도 화포를 겪어보지 못했으니 크게 어렵지 않을 거라 판단한 거고?”

“그렇소이다.”

‘이것 봐라?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권국이 되겠다. 이건가?’

연오랑 또한 이런 생각이 절로 떠오르며, 감탄을 내뱉었다.

그냥 허울만 좋은 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닌가.

애초에 인도차이나 반도의 수많은 민족은 운남과 광서에서 건너온 이들이고, 대리는 원과 명이 들어서기 전부터 중국과 인도차이나반도의 문명교차점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비록 원과 명이 들어서서 위를 장악했어도, 자치권을 남겨둔 이상 밑에서는 열심히 교류하고 있었다. 나아가 혼란기를 틈타 국경근처로 이주한 한족도 부지기수고.

그러니 대리가 부활한 지금. 충분히 그들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보는 것 같았다.

‘대리도 따지고 보면 명조정이 하는 짓을 똑같이 하고 있잖아? 조선이 가는 길과 비교하면 안 되겠지.’

대리 또한 세금 잘 바치고 충성만 하면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있으니, 인도차이나 반도의 수많은 지방호족이 혹할만한 버팀목이 되지 않겠나.

이쪽은 원래 이렇게 느슨한 봉건제로 유지되던 지역이니까.

“그리고. 아국은 이를 통해 비단길을 되살릴 생각이외다.”

“호오...”

“오...”

왕자의 자신만만한 말에, 조선관원들조차 이번엔 참지 못하고 감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하. 이건 생각 못 했는데? 아닌가. 오히려 이 시대 사람들이니까 더욱 생각하기 쉬운 건가?’

그는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거듭했다.

비단길. 그 중 남부의 바닷길은 중국남부 해안에서 시작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해 인도로 가는 길이었다.

허나 당송시절의 남부비단길은 이게 끝이 아니고, 운남에서 출발해 미얀마를 통과해 인도, 미래의 방글라데시 근방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원래 역사에선 명이 비단길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냥 잊혀 졌는데, 왕자는 이걸 다시 되살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지.

“가능한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고 있소. 그게 무력이로든, 재력으로든, 인맥으로든, 아국은 원이나 명과 다르니까.”

“호오...”

‘틀린 말은 아니야. 사활을 걸 정도로 중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대충 물리기에는 너무 아깝겠지.’

서방의 물산을 동남아시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곧장 대리로 가져오고, 그걸 중국내륙에 판다.

딱 봐도 꽤나 쏠쏠해 보이고, 그간 꿀을 빨던 절강, 광동, 복건의 상인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 아닌가.

대리가 굳이 중국내륙에서 패권을 차지할 수 없을 지라도, 내륙에서 한족통일왕조가 탄생하는 걸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이건 어떤 면에서 조선과 같은 마음이겠지.’

오히려 조선보다 경계심이 더 할 거다. 대리는 원, 명에 의해 연거푸 밟혔으니까.

“그대들 의견은 충분히 이해했다. 허나 그저 금은으로 대금을 치루고 화포를 팔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국이 비단길을 다시 열고, 홍강을 통해 서역물산을 남주도에 풀 수 있소이다. 그것만으로도 조선에는 큰 이득이 되지 않겠소이까?”

“글쎄... 엄밀히 말하면 그대들 또한 아국에 팔아야 이득을 볼 수 있지 않나? 우리만 딱히 득을 본다고 할 수 없지. 그리고... 우린 그렇게 안 해도 서역물산을 구할 수 있거든.”

연오랑이 히죽 웃자, 왕자를 비롯한 사신단은 알쏭달쏭한 눈빛을 숨기지 않다가...

“아!”

사신단 중 누군가 정답을 알아차리고서, 재깍 귓속말을 날려댔다. 그리곤 하나같이 눈이 번쩍 뜨였다.

요새 조선이 하도 남쪽에서 설쳐대서 잊었나본데, 조선은 본래 몽골과 붙어 있던 나라다.

오이라트가 서쪽으로 진출해서 비단길이 열렸다는 걸 알아차렸으니, 당연히 그 초원비단길 끝에는 조선이 있다는 것 또한 짐작했나 보다.

“음...”

왕자도 약점을 깨달았는지, 빠르게 사신단과 귓속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

“...”

조선관원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사신단은 옥신각신 말을 하다가... 결국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 자식들 보게? 플랜B, 플랜C 까지 다 짜가지고 왔나 본데?’

하는 짓을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사천을 도와주는 건 둘째치고, 이들은 이번 일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게 분명했다.

“보시지요.”

왕자가 내민 건 조잡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고지도. 허나 대충 윤곽과 지명은 얼추 알아볼 수 있었다.

“만약 조선이 아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다면, 아국이 조선에게 제안할 건 두 가지요.”

“두 가지나?”

연오랑이 흥미로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왕자는 “크흠.” 헛기침을 하고선 말을 이어갔다.

“그대들이 이주섬을 정복하고 경락하려는 것으로 보아, 남방으로 진출하려는 뜻이 있다고 보고 있는데... 맞소? 아국이 그걸 도와주겠소.”

“...?”

뜻 모를 소리를 내뱉고선, 왕자는 지도 옆에 툭 튀어나와 있는 섬을 가리켰다.

“경애도瓊崖島요. 이곳을 조선이 차지하는 걸 도와주겠소.”

“...!”

“허?”

조선관원들 모두가 눈을 번쩍 떴고, 연오랑 또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여기 해남도잖아? 지들이 어떻게 여길?’

모두가 황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왕자는 제대로 찔렀다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경애도에서 한족과 이족이 대립하고 있는 걸 알고 있을 것이외다. 명이 망한 후로 이곳은 대륙과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지금도 혼란스러운 상황이외다.”

“음.”

해남도는 한나라 시절부터 알려져 있는 곳이지만 당송시절에는 유배지로 활용됐고, 여기가면 죽는 곳이라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퍼졌던 곳이다.

원이나 명이나 마찬가지.

해남도를 행정구역으로 넣었긴 했지만, 관심을 가지고 관리하지 않았지.

이러는 와중에도 대륙본토의 전란을 피해 한족은 꾸준히 해남도로 넘어와 원주민 소수민족과 대립했고. 해남도의 한족관원들은 당연히 한족의 편을 들어주니, 명이 망하고 나선 개판이 되고 말았지.

“이곳의 이족이 광동의 광주를 약탈하는 해적이 된 걸 알고 있소?”

“아.”

“어쩐지.”

‘이게 또 이렇게 엮이는 고만?’

광주가 왜 그렇게 난리를 치나 했더니, 해남도가 엮여 있었나 보다.

‘아! 하나 더 있군.’

해남도가 요새 더욱 개판이 된 것도 이해가 된다.

광서, 광동에서 소수민족들에게 밀려난 한족유민은 한족이 사는 해안도시로 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무려 해적단을 통해 대만섬까지 이주했다.

그렇다면 대만섬보다 훨씬 가까운 해남도를 그냥 지나쳤을까. 그럴 리가 있나. 여긴 기존 한족, 소수민족, 한족유민이 뒤섞여서 통제가 안되는 게 분명하다.

“흠... 헌데 해적토벌을 명분으로 내걸면, 우리가 경애도를 차지하는 건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한족이라면 특히나 더욱 안정된 통치를 바랄 것이고.”

“그건 그럴 수 있겠지만, 이족들이 문제가 되지 않겠소? 대월을 통해 그들을 이주시키게 도와주겠소.”

“허...”

“오!”

‘이것 봐라? 이족 해적놈들 뒷배가 대월이고, 그 대월을 부추긴 게 대리였고만?’

연오랑은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냉큼 짐작하고서, 의뭉스럽게 모른 척 하던 왕자를 슬쩍 흘겼다.

“이족을 정리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오래 들어가야 할 텐데, 그렇게 낭비될 전비를 생각하면 아깝지 않소이까?”

-우리 손을 아주 제대로 빌리는 군요.

정인지는 쓱 자신의 생각을 연오랑에게 보였고, 그 또한 대리의 의도가 짐작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강남의 해안도시를 견제하기 위해 해적이 필요했지만, 조선이 등장한 이상 무용지물. 그렇다면 마지막 판돈으로 걸어서 이득을 챙겨야 하지 않나.

남부비단길이 완성되면 홍강을 통해 무역을 해야할 대리 입장에서도, 해적은 이제 골칫거리.

조선이 해남도를 차지하고 해군을 뿌리는 건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 된다.

‘이게 끝이 아니지.’

조선해군이 해남도를 차지하면 광동과 광서의 해안도시를 견제하는 건 물론, 바로 코앞의 대월 또한 견제할 수 있다.

‘대리와 대월이 지금은 손을 잡고 있지만, 이놈들도 대월을 믿을 수가 없는 거야.’

계획대로 남부비단길이 완성되면, 홍강의 중요성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진다. 그러면 대월은 이걸 욕심내서 인질로 삼을 지도 모르는 일.

마음만 먹으면 하노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조선을 앞세워서, 대월이 딴짓하지 못하게 막겠다는 거지.

‘하. 머리를 잘 썼는데? 지들 땅도 아닌 땅을 내주고선, 생색을 꽤 잘 내고 있네.’

어째 말려들어가는 꼴이지만, 조선에게 나쁠 게 전혀 없는 제안이다.

“...”

다만 다들 말을 안 하고 입을 다물고 있자, 왕자는 고지도의 다른 부분을 짚으며 입을 열었다.

“또 하나의 제안은 바로 이것이외다.”

그는 고지도를 관통하는 긴 강을 짚었다.

“아국은 미공하湄公河(메콩강)을 차지하고 싶소. 그러니 조선이 이곳 하류를 장악하는 것이 어떻소? 조차지의 예가 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허?”

“흐음.”

“으음...”

조선관원들은 낯선 지도와 지명, 그리고 거창해도 너무 거창한 이야기에 할 말을 잃고 머리에 김이 나도록 굴려댔다.

‘와... 이놈들 봐라? 진짜 제대로 해보겠다는 거네?’

연오랑은 대리국이 이번 일에 진심인 걸, 다시금 깨닫고 혀를 내둘렀다.

메콩강은 티베트고원에서 발원해서 운남을 거쳐, 인도차이나반도를 전부 관통해서 바다로 빠져나오는 거대한 강이다.

미래에는 모든 나라가 이 강과 엮여 있고, 지금도 그건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긴 진랍국의 영토일 텐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소이다. 섬라의 공격, 전염병,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진랍국은 세를 잃고 흔들린 지 오래고, 이곳은 진랍국이 강성했던 시절에도 요충지가 되지 못했던 곳이오. 북부와 남부가 따로 놀고 차별이 있기도 해서, 진랍국 밑에 있다고 해서 하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오.”

“음.”

연오랑은 왕자가 뭘 말하는 지 대충 알아차렸다.

메콩강 하류 삼각주. 흔히들 사이공이라 불리는 지역은 미래에 베트남 땅이 되지만, 지금은 크메르제국에 속해 있었다.

헌데 이것도 딱 정확하지 않은 게, 참파, 섬라, 크메르 모두가 한번 씩 들쑤시고 지나간 지역이기도 했지.

그리고 왕자가 짚은 곳은 사이공에서 더 남쪽. 미래에는 붕따우라 불리는 작은 반도였다.

여긴 대항해시대가 시작될 때야 무역선이 오가면서 거점지역이 되지만, 지금은 거의 빈땅이나 마찬가지라는 뜻.

“이족이 몇 살지도 않고, 산다고 한들 어부와 딱히 다를 게 없으니 문제가 없지 않소이까? 내륙 쪽에는 각 부족별로 살긴 하지만, 이곳은 습지가 많고 범람이 쉽게 일어나서 생각보다 많은 부족이 살고 있지 않소.”

“...”

모두는 왕자를 다시봤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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