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챕터48. 파고들다 (2)
인도차이나반도의 정치,경제 상황 상 대리가 수월하게 진출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홀로 독박을 쓸 필요는 없지 않나.
조선이 조차지를 통해 직접 진출하면, 진랍국이나 진랍국을 열심히 패는 섬라나, 그간 진랍국과 무수히 싸워온 참파나.
위에서 내려오는 대리와 밑에서 올라오는 조선을 견제하는 움직임을 보일 테고, 그럼 대리 입장에선 조금이나마 압박을 덜어내는 셈이 되는 거지.
조선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어차피 남방으로 진출할 거라면, 대리와 마찬가지로 시선을 돌리는 편이 낫지 않나.
대리는 “너희나 우리나 어차피 진출할 거, 차라리 같이 진출해서 압박을 줄이는 게 어때? 앞으로 더욱 친하게 지내자고.”라고 제안하는 거지.
“궁극적인 문제는 이거다.”
“...?”
연오랑이 딱 끊고 말을 하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대리의 팽창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 내 생각으론 나쁠 게 없어 보인다. 우리의 영원한 주적이자 경쟁상대는 중국본토니까.”
“아...”
“음.”
모두는 핵심을 집는 연오랑의 말에,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석핵꿀밤 세대들인 만큼, 관원들은 중화와 사대보다는 자주화에 훨씬 가까운 경향을 보이지 않나.
이들도 말은 안 해서 그렇지, 언제나 통일중국왕조를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있다. 그걸 막는 방편으로 대리가 튀어나온다? 순망치한과 같은 형국이 되지 않을까.
‘서남쪽은 대리, 서북쪽은 오이라트와 섬서몽골, 북쪽은 초원몽골, 동쪽과 남쪽은 조선. 뭐... 시간이 흘러 계획이 성공하면, 일본도 우리의 한축으로 포함되겠지.’
연오랑은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고서, 먼 미래를 함께 그려봤다.
이러면 이른바 대중국포위망이 만들어지는 꼴 아닌가.
이 상태로 더 팽창하지 못하게 막고, 반대로 중국내부의 각 지역마다 연맹을 이용해 주체성과 독립성을 심어서 분열시키면...
통일왕조가 등장하는 걸 최대한 늦추고, 설령 등장하더라도 중국을 포위한 모두가 힘을 합쳐 견제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대리가 아무리 팽창한다 한들, 이 남방 땅을 전부 중국본토처럼 지배할 수 없다. 뭐랄까... 대리가 맹주가 된 조금 더 큰 연맹처럼 되겠지.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대리라는 하나의 구심점으로 이족들이 뭉칠 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그게 과연 얼마나 걸릴까.”
“흠.”
“이족연맹이라...”
다들 알쏭달쏭해서 고개를 내저었고, 연오랑은 속으로 비웃어줬다.
‘이게 쉽게 되면, 미래에도 해결 못하고 그 난리가 나겠나.’
연오랑이 지독할 정도로 귀화인들의 조선화교육을 밀어붙이고, 민족의식을 만들기 위해 교육에 신경 쓰는 까닭이 뭔가.
저걸 그냥 놔두면 독립세력이나 반란세력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따로 놀면서 정체성이 강해져 민족성이 나타나고, 그러면 통합은 더더욱 힘들어진다.
대리는 지금 쉬운 선택을 하고 훗날의 어려움을 감내하든지, 지금 어려운 선택을 하고 훗날의 쉬움을 택해야 하는데... 당연히 전자를 택할 수밖에 없을 거다.
조선이 만주나 대만섬에서 그러한 것처럼. 밀림으로 우거진 땅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온갖 이족마을을 전부 토벌하고 다니는 게 가당키나 할까.
‘애초에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도 없고.’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은 송,원,명 시절에도 없던 일이니, 대리 입장에선 그들의 방법이 오히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통치방법 아닌가.
수백년 후의 미래를 그리는 건, 아무리 천재가 있다고 해도 시대 정황상 불가능한 일이다.
“대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무역이고, 남방의 패권국으로 자리 잡는 것이겠지요. 겸사겸사 대월도 견제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아국이 손을 잡는 건 나쁘지 않는 선택 같습니다. 앞으로의 미래를 그려 보건데, 대리와 아국이 부딪칠 일은 없고 협력할 일은 많지 않겠습니까.”
정인지가 다시금 의견을 종합해 결론을 내리자, 또 한번 오뚝이들이 하나처럼 움직였다.
“맞습니다. 생각해 보건데, 대리가 남부비단길에 욕심을 내는 것도 사천과 연계되어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차마고도가 끊어진지 오래니, 대리뿐만 아니라 사천 또한 비단길이 개척되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음... 그럼 단순히 화포에 국한된 게 아니라, 사천과 대리가 보다 긴밀하게 통교하고 있다고 봐야한다는 건가?”
“그렇네.”
“그렇지 않겠습니까? 대감.”
“흐음...”
연오랑은 매서운 질문을 던지는 관원을 보며, 동의한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남-사천-티베트-인도로 이어지는 차마고도는 고대부터 존재했던 무역로지만, 원이 망한 후론 끊긴 거나 다름없었다.
티베트는 내전이 벌어져 혼란을 거듭하고 있고, 인도로 가는 길은 몽골계 칸국으로 인해 끊어졌으니까.
지금은 사천에서 티베트로 가는 루트를 이용해서, 오이라트가 거꾸로 사천으로 넘어오려고 발악하고 있는 상황.
“그들이 아무리 중국내륙과 무역을 한다고 해도, 예전의 성쇠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방향을 바꿔서 사천이 아닌 운남이 주가 되어 무역을 하려는 것일 테지요. 그들이 아무리 힘을 모았다고 해도 무력으로 중국내륙으로 진출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요.”
“대리가 무역에 진심인 게, 단순히 자신들의 팽창뿐만 아니라 사천의 의지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거군.”
“사족이긴 한데... 어쩌면 아국이 이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토번에 들어가는 차가 바로 아국의 차니까요.”
“오...?”
“흐음?”
모두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만들자, 외교무역부 관원 중 한명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차마고도의 무역이 중요했던 건, 티베트에 운남의 차를 내다팔고 그 대가로 티베트의 말과 서역물산을 사들일 수 있었기 때문.
차는 야채를 쉽게 먹을 수 없는 티베트인들의 필수품이나 다름없는 물건인데, 명이 망한 후론 구할 수가 없게 되지 않았나.
이걸 대신한 게 바로 창주의 조선차로서, 제왕부를 비롯한 아자이 부속부족들이 건너건너 티베트에 가서 조선차를 내다팔았다.
티베트입장에선 운남차와 다른 조선차라서 어색하긴 했지만, 없으면 이거라도 써야지 별 수 있나. 해서 몽골뿐만 아니라 티베트까지도 조선의 차가 퍼지게 된 거지.
“예상외로 수입이 꽤 많이 나옵니다. 몽골상인들은 토번뿐만 아니라 더 서쪽의 천축국에도 차를 팔았으니까요. 그리고 이젠 더욱더 먼 서쪽까지 나가게 되겠지요.”
“그렇고만.”
“하긴 그쪽은 무역량이 더 늘어날 일만 남았으니까.”
‘음... 내 생각보다 훨씬 잘 팔리는 걸?’
모두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연오랑 또한 속으로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개혁 초창기 때부터 그는 차기업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나.
십여년이 흐른 지금은 여진,몽골에게 차가 널리 퍼진 건 당연하고, 일본의 차시장도 중국차와 함께 양분하고 있는 중.
헌데 알게 모르게 티베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까지 조선의 차가 퍼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젠 진짜 유럽과 중동에까지 퍼져나가고 있을 거고.
“아무튼... 사천과 대리는 생각보다 가깝고, 어쩌면 이번 대리의 확장에 사천이 도움주고 있다는 거군?”
“예. 대리가 강역을 얼마나 넓히든, 사천 입장에서 그걸 막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차라리 도움을 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걸 바랄 겁니다. 아국도 순망치한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천과 대리의 관계야 말로 순망치한이니까요. 대리는 사천이 몽골에게 밟히는 걸 절대 지켜보지 않을 겁니다.”
“음...”
“맞는 말입니다.”
결국 사천과 대리는 서로 속으로 티격태격할 순 있어도, 큰 덩어리에서 보면 어떻게든 한 덩어리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말.
‘그러면 말이 되긴 되는군. 우리 입장에선 화포가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저들 입장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왔었나 보군.’
“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대리의 의중을 제쳐두고라도 대계를 봤을 때. 사천을 아국이 지원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
정인지의 말에 다들 물음표를 그렸으나.
“몽골이 크는 걸 그냥 놔둘 순 없지 않습니까? 지금 상태를 유지해야죠. 저들이 우리 손을 벗어날 수 없게 말입니다.”
“아...”
“그건 맞습니다.”
“옳으신 판단입니다.”
이어지는 말에 다시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과 이어지는 이야기다.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그 왕조가 몽골계왕조면 더욱 골치 아파진다.
원나라 시절에 고려가 당한 게 있지 않나.
지금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서 몽골과 한족왕조가 서로 견제하는 방향이 최선이지, 만약 오이라트가 사천과 운남까지 집어삼키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화포를 넘겨주고 몽골의 팽창을 막는다고 생각하면, 아국이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겁니다. 아국의 화포를 가져갔다고 한들. 그걸 공세용으로 써먹기도 힘들 거고, 또 따라 만들 수도 없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야.”
연오랑 또한 동의하자, 하나같이 맞장구를 쳤다.
애초에 청동덩어리 하나로 구성된 화포인데, 이걸 뭐 어떻게 역설계를 하고 분해해서 따라 만들겠나.
연오랑은 화포 그 자체만 팔 생각이지, 포가를 비롯한 물건은 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대리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포가가 정확히 뭔지도 모를 거고.
‘산동과 절강에서 야전화포를 보긴 했지만, 최대한 감추려고 노력했잖아? 봤어도 그게 뭔지도 모를 테고, 그저 화포를 옮기는 수레로만 보였겠지.’
이러니 화포를 판다고 기술이 유출되는 건, 우려할 문제가 아니다.
“결론은 화포를 제값 받고 파는 건 문제가 안 된다는 거고, 제안을 받아들여 아국이 얼마만큼 더 뜯어낼 수 있냐가 문제인데... 제가 보기엔 지금 당장은 어려움이 많아 보입니다.”
“...?”
관원 중 하나는 화제를 돌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포야 만들면 그만이니 넘겨 줄 수 있겠지요. 허나 지금 아국이 대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더욱더 남방으로 팽창할 여력이 있겠습니까? 남주도조차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황 아닙니까?”
“음...”
“하긴. 본토도 바쁠 텐데 말이야.”
“그건 그렇긴 하군. 벌여 놓은 일이 워낙 많으니...”
모두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자, 대화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넘어갔다.
대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좋다.
헌데 대리와 장단을 맞춰서 조선이 움직일 여력이 있을까? 뭐라도 뜯어먹으려면 함께 움직이는 게 좋은데 말이다.
‘음... 될까? 애매하네.’
연오랑조차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조선은 지금. 역사에 없을 팽창과 발전을 이어가고 있다.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진행되고 있을 양전사업은 제쳐두자. 그쪽은 태종이 진두지휘할 터, 지난 십여년간 개척과 개간을 담당했던 태종이라면 이제 땅파는 건 도가 텄을 거다.
허나 그 외에도 수십년의 미래를 건 대계가 무려 세 개나 함께 진행되고 있다.
첫째는 초원길 부활 및 색목인 노예 흡수문제.
초원길 부활은 단순히 무역에 국한된 게 아니고, 작게는 조선의 모든 생산력을 끌어올려서 전국방방곡곡과 창주를 잇는 물류유통망의 완성과 연결되어 있고.
크게는 제각각 따로 놀던 몽골계 칸국을 느슨하게 연결하는, 적어도 경제협력체 비스무리하게 엮는 작업과 닿아 있었다.
이를 위해서 조선의 대규모 사절단이 떠났으며, 그들은 제왕부 및 아자이와 만나 협상을 하고 아자이의 사절단이 합류해 서쪽으로 계속 나아갔을 거다.
서쪽으로 가면 갈수록 합류하는 사절단은 계속 불어나서, 킵차크 칸국에 닿았을 쯤에는 크고 작은 수십개의 몽골계부족 통합사절단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킵차크 칸국은 동방의 의지를 봤을 테니, 비단길 부활이 진심이라는 걸 확실히 알아차렸을 거고... 결코 반대하지 않았을 거다.
‘킵차크 칸국은 분열되기 직전이니, 어떻게든 다시 뭉칠 계기가 필요할 터. 그걸 위해서 그간 까불던 루스인을 패는 일에 더욱 진심으로 달려들겠지. 그렇게 루스인을 약탈하고 사로잡아 동방에 팔아넘길수록 힘이 강력해 질 거고....’
그렇게 칸국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분열하고 독립 혹은 반란을 일으키려는 세력들도 다시 칸국에 붙어 꿀을 빨려고 할 거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니, 이번 일이 동방몽골계와 연관이 깊다는 걸 알아차릴 터, 지금까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거지.’
몽골제국이 무너진 후. 몽골계 칸국은 각자 알아서 놀기 바빠서 서로를 신경써주지 못했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나.
각 칸국에서 반란을 일으킬 세력 또한 궁극적으로는 동방몽골계와 손을 잡아야 안전을 보장받고 무역의 이권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이 된 바.
그럴 바엔 뭐 하러 칸국과 싸워서 독립을 꽤할까.
승리를 완전히 담보할 수도 없고, 설령 승리한다고 한들 피투성이가 돼버리면 다른 칸국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적어도 루스인과 동유럽 약탈이라는 꿀단지가 남아 있는 이상, 칸국에 붙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는 거지.
‘이렇게 되면 원래 역사에서 갈기갈기 찢어졌어야할 킵차크 칸국이나 모굴 칸국도 다시 하나로 합쳐져서 명맥을 이어가게 될 거야.’
이렇게 되면 도미노처럼 다른 곳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러한 움직임을 티무르 제국이 알아차리면 동참할 가능성이 있지. 그들 입장에선 원래 자신들의 무역로를 빼앗긴 셈이 되는 거니까. 티무르 제국도 아직 혼란이 가시질 않았으니, 서방 칸국처럼 이번 일을 통합의 명분이자 재원으로 쓸 가능성이 있다.’
본래 비단길은 티무르제국의 영역을 지나 오스만제국을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이어지지 않나. 허나 지금은 이 영역보다 위쪽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되어, 티무르제국은 꿀을 빨지 못하는 상황.
티무르제국은 오스만의 팽창을 견제하고 있으니, 원래 역사의 비단길처럼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을 생각은 없을 거다.
티무르제국의 영역을 통과한 후 새로 만든 무역로인, 킵차크 칸국의 영역인 크림반도 위쪽을 지나 동유럽과 발칸반도로 이어지는 루트를 이용할 텐데... 이러면 오스만이 발칸반도로 진출하는 걸 더 늦추게 되는 효과가 나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