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챕터48. 파고들다 (4)
어찌 보면 얌체 같은 짓이긴 한데... 조선에게 손해가 되는 건 없지 않나.
어차피 조선도 본토에서 식량을 가져와 남주도와 경애도에 푸는 것보다는, 가까운 중국본토에서 가져와 보급하는 게 훨씬 이득이다.
조선에게는 그 역할을 중국본토가 하든 대리가 하든, 상관없는 문제 아닌가.
“그런 식으로 아국과 거래선을 늘려 놓고, 훗날 그들이 바라는 대로 남부비단길을 열면... 북방물산을 천축국을 비롯한 서역으로 옮기는 무역시장을 대리가 장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오.”
“물론 배로 옮기는 양과 육로로 옮기는 양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바다건너 남방소국들의 영향력을 줄이는 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은근히 큰 판을 짰고만. 그래.”
연오랑이 한마디로 정리하자, 다들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는 영토의 팽창과 무역로 획득, 조선과의 친교, 사천의 방비. 이 모든 걸 하나로 엮어서 일을 진행하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나쁠 건 전혀 없지. 대리가 남방무역을 장악한다고 해도 아까 말한 것처럼 바닷길이 막힐 리는 없어. 어쩌면 대리가 파는 아국물품이 샘플이 되어서, 인도상인들을 더 충동질할 수도 있겠지.’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현실의 벽에 막혀 이내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사라지진 않는 군. 결국 전함이 부족하다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잖아?”
“그러니... 대리와 무관하게 차근차근 진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남주도에 그러했던 것처럼, 선발대를 보내서 경애도를 조사하는 게 먼저라고 파악됩니다.”
“그래야겠지...”
“어차피 화포를 만들어 대리에게 넘기기까지 시간이 걸릴 테고, 대리는 아마 지금도 남방으로 진출하고 있을 터. 아국이 경애도를 언제 본격적으로 경락하든 언제든지 무역을 개시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어쩌면 더 빨리하자고 채근할 지도 모르고요.”
“음...”
“그러니 남주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일단은 연대 하나를 파견해서 경애도의 정보를 수집하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연대 하나라면 해군의 지원이나 대규모 보급 지원이 없어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는 편이 나아보이는 군요.”
다들 이제야 얼굴이 펴져서, 적극적으로 해남도 진출을 반기고 있었다.
이 정도는 해군의 도움 없이도 진행할 수 있는 일이고, 대리가 선발대의 정착을 도와주면 일이 더 빨리 진행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허나 대리와 무역하기 위해선 결국 아국의 물산을 경애도로 넘겨야 하는데, 본토의 함대를 동원할 순 없고... 남주도 함대가 그럴 여력이 있을 것 같나?”
“음... 이번 해적토벌을 끝마치면 여유가 생길 것 같습니다. 올해 파종은 할 수 있을 만큼 이미 했습니다. 남은 건 잘 키우는 일만 남았고, 수확을 하게 되면 지금처럼 많은 보급품을 옮길 필요는 없어질 테니까요.”
정신없이 흘러가는 논의를 따라잡으며, 머릿속에서 김을 내고 있던 함대장 왕인.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나오자, 드디어 입을 열고 의견을 털어놨다.
보급품 중에서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게 바로 식량과 건초인데, 둘 모두 이제 자급자족을 할 준비를 끝내지 않았나.
앞으로 부피는 작으면서 값어치는 높은 귀중품이나 북방특산품 위주로 경애도로 옮기면, 무역선 한척의 양만으로 대리의 식량수송선 십수척은 감당할 수 있을 거다.
“남해 전체를 순찰하는 건 힘들어도, 어차피 자동,광주-남주를 잇는 항로는 순찰을 이어가야 합니다. 광주와 경애도는 그리 멀지 않으니 순찰경로에 포함시키더라도 빈틈이 크게 생기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경애도를 차지한 이상, 경애도와 남주도, 그리고 본토로 이어지는 항로를 또 찾아야 하니 거길 돌아다니긴 해야겠군.”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거기에 무역품을 싣고 가는 일을 추가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조금 빠듯하긴 하겠지만... 전함은 계속 만들고 있으니, 차차 풀리지 않겠습니까.”
왕인은 긍정적인 답을 내놨고, 다들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배. 결국 배가 문제란 말이지...”
연오랑의 혼잣말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남주도에서 신형전함이나 무역선을 만드는 건 무리지?”
“예. 아무리 설계도와 대목장이 있다고 해도, 원주민과 이주민의 숙련도로는 큰 배를 만드는 건 무리입니다.”
“제재소에서 자재를 모아두고 있긴 하지만, 지금 당장 써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가 혹시나 싶어서 묻자, 다들 반대의견을 토해냈다.
나무를 깎는 것도 기술이고, 아무리 신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강철대패나 강철톱, 강철정등을 가져왔어도 손에 익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또한 대만섬의 넘쳐나는 원시림에서 엄청난 목재를 얻어내긴 했지만, 이걸 선박자재로 써먹는 건 또 다른 문제.
집을 만들 때 쓰는 기둥조차 잘 말려야 써먹을 수 있는데, 항상 바닷물을 마셔야 하는 선박자재는 훨씬 더 잘 불리고 말리기를 반복해야 써먹을 수 있다.
이건 시간만이 해결해 줄 문제라서, 당장은 해결할 수가 없지.
“지금은 신형어선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입니다. 이 또한 중요한 작업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여기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식량문제는 빡빡하고, 곡물을 대체할 생선은 필수적이다.
조선에서 토끼와 사슴, 가금류를 가져와 농장을 일구곤 있지만 걸음마 단계이니, 한동안은 주구장창 절인생선만 먹어야 할 터... 신형어선을 만드는 건 결코 미룰 수가 없지.
‘게다가 작은 배를 만들면서 숙련공이 돼야, 큰 배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연오랑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넘어갔다.
“본토의 선소도 다들 마찬가지일 테고.”
“...”
이번에도 역시나 고개만 끄덕인다.
이미 조선의 선소는 풀가동 중이고, 그것도 부족해서 선소를 새로 만들고 장인을 교육시키고 있는 상황.
이미 안간힘을 써서 이 정도까지 올라온 거고, 굳이 독촉하지 않아도 조정은 어떻게든 선박제조량을 늘리려고 기를 쓰고 있을 거다.
“강남상인들처럼 민간 상인이 있으면 보급문제는 훨씬 쉬워질 텐데 말이야.”
“...”
괜한 넋두리를 해보지만, 그런다고 뭐 달라질 게 있나.
조선은 해양진출을 이제 막 시작했고, 고작 십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 정도까지 성장한 게 오히려 비정상적일 정도다.
연오랑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국가 단위의 대대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일이지. 나아가 무역상인이 등장하는 걸, 조정에서는 우려의 눈초리로 보지 않았나.
“무역상인이 등장하려면 아직 멀었지?”
“예. 아무래도... 본토에서도 할 일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더불어 무역기업을 키우는 건 한두푼으로 될 일이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조폐부 관원이 조심스럽게 연오랑의 물음에 답을 던졌다.
조선에 상업이 본격적으로 인정된 건, 채 십년도 지나지 않았다.
조선건국시절에 내세웠던 명분과 기조를 완전히 거꾸로 바꿔버렸는데, 이게 바로 진행되면 웃기는 일 아닌가.
해서 행상을 비롯한 상인집안은 본토 내에서 우후죽순 성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할 일은 아직도 너무 많다.
북방은 본토에 비해 땅이 무지하게 넓다.
상인이 아무리 많이 늘어나도 여전히 포화상태에 이르지 못했고, 굳이 조정의 견제와 우려가 없었어도 조선상인들은 애초에 해외로 눈을 돌릴 정도로 덩치를 불리질 못했다.
“배도 문제고, 사람도 문제겠지?”
“그렇습니다. 창주를 통해 몽골초원으로 나가려는 상인기업의 움직임은 있지만 그건 소규모 자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배를 띄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맞는 말이야.’
기껏해야 마차나 낙타, 말로 움직이는, 중동의 카라반과 비슷한 수준의 상인이 요새 북방을 싸돌아다니고 있지만... 이들이 옮기는 물량과 배로 옮기는 물량은 비교하는 게 민망하다.
“그래도 욕심을 내볼만 한데 말이야.”
“상인기업도 보는 눈이 있지 않습니까. 아국의 신형무역선은 중국의 사선이나 복선보다 몇 배나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는데, 굳이 지금 당장 조정의 눈치를 보며 배를 만들어 띄울 이유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아국의 모든 선소는 안 그래도 다른 배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데... 상인기업이 요구하는 배, 그것도 중국식 배를 만드는 건 낯설기도 하거니와 관심도 없을 겁니다.”
연오랑의 말에 관원들을 사정없이 반론을 토해냈다.
지금도 중국상선은 바다를 누비고 다니고 있으니, 조선상인도 중국식 배를 타고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수지타산을 따져보면,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조정에서 사들여 쓰기도 바쁜 신형무역선을, 민간 기업에 팔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신형무역선은 중국의 사선, 복선에 비해 3,4배에 가까운 짐을 실을 수 있고, 대신 가격 또한 3,4배에 가까운 건조비용이 요구됐다.
하지만 유지비용의 측면에서 보면 작은 배 3척을 운용하는 것보다, 큰 배 1척을 운용하는 게 훨씬 이득이지 않나.
조선상인들 입장에선 신형무역선을 사고 싶어 하지, 누가 중국식 배를 사고 싶겠나.
배를 만드는 선소도 같은 생각이다.
집안들끼리 힘을 합쳐 만든 조선기업은 본토 이곳저곳에 생겨났고, 이들은 매일같이 신나서 노래를 부르며 배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조정에서 사들이는 전함이나 무역선, 쾌선 말고도 신형어선과 조운선 또한 여전히 만들고 있는 상황.
특히나 조운선의 경우에는 대맹선을 2,3배 뻥튀기해서 선수와 선미를 날렵하게 깎은, 개조된 판옥선처럼 생긴 신형조운선을 만들지 않았나.
이건 애초에 만들 때부터 강과 근해에서 활용할 수 있게 만든 물건이라서, 기존의 조운선이 전부 이걸로 대체되고 있었다.
나아가 상인들 중에서 이걸 사서, 만주땅과 조선내륙을 오가며 장사하는 상인기업이 부지기수고.
이러니 조선소 입장에선 안 그래도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배가 천지인데, 굳이 크기도 작은 중국식 배를 만들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지.
“배만 그렇겠습니까. 선원도 문제입니다.”
“맞습니다. 해군 전역병이 아니고서야, 바다를 누빈 경험 있는 선원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건 돈이나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신형어선을 타고 먼 바다까지 조업을 나가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걸 신형무역선과 비교하면 곤란할 테고요.”
“항로를 모르는 문제도 있을 겁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소낙비처럼 우수수 반문이 쏟아졌다.
신형무역선은 범선이고, 범선은 수십개의 닻줄을 인형술사처럼 정교하게 다뤄야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이다.
당연히 숙련된 선원이 필요하고, 선원을 지휘할 선장, 목적지를 찾아갈 항해사 등의 진짜 뱃사람들이 필요한 법.
허나 조선에 이런 이들이 있는 곳은 오로지 해군 밖에 없고, 상인기업이 대외무역을 하기 위해선 결국 해군전역병들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다.
헌데 해군전역병이 얼마나 되겠나.
말을 탈줄 알고 기사를 할 줄 알아야 우대받는 육군에 비해서, 해군은 지원문턱이 한참 낮은 터라 온갖 출신이 해군으로 밀려들었다.
이치들은 전함이 만들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육상훈련만 받고 있고, 해군은 계속해서 확장을 거듭하는 중.
버티고 있으면 무조건 진급할 기회가 있는데, 전역하려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애초에 늦게 창설된 해군이니 만큼, 해군착호군에 들어간 이들조차도 아직 의무복무기간이 끝나려면 멀었다.
“음...”
결국 연오랑은 민간의 지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싹 지우고 말았다.
“...”
잠시 침묵이 감돌기 무섭게, 재정부 관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경애도 진출은 그렇게 하더라도, 아직 남은 게 있습니다. 현항과 진랍국 조차지 문제입니다.”
“끄응...”
“그걸 논의할 이유가 있겠나? 전함이 없으면 거기까지 가는 건 무리 아니겠나?”
“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포기할 문제는 아닙니다. 게다가 현항의 경우에는 참파가 지원할 사안이니, 해군과 관계가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으흠.”
“흠...”
대리의 제안과 참파의 제안은 다르면서도 같은 맥락이었기에, 다들 열변을 토하는 관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조차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제 모두가 아실 겁니다. 그 효용성이 빼어난데 쉽게 포기해서 되겠습니까. 어떡해서든 조금이나마 발을 담가놔야 훗날의 이득을 챙길 수 있을 겁니다.”
재정부 관원은 그리 서두를 떼고서, 침을 튀기며 의견을 피력했다.
처음 조차지를 만들었을 땐, 다들 “이게 의미가 있나? 괜히 멀리 있는 조그마한 땅을 차지하면 일만 더 늘어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었다.
허나 시간이 지난 지금 와서 보건데, 이게 단순히 관리의 문제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이 시대의 배는 물론이고 앞으로 수백년후 동력선이 나오기 전까지. 배라는 물건은 결국 바람을 타야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이다.
문제는 바람이 항상 같은 방향으로 부는 게 아니고, 계절풍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아무리 삼각돛이 있다고 해도 역풍을 맞아가며 가는 건 힘든 일.
삼각돛을 사용하지 않는 일본, 중국, 남방소국의 함선은 더욱더 그런 경향을 보였다.
그럼 바람이 불지 않고, 혹은 태풍이 오는 기간에 상선은 뭘 해야 할까.
안타깝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냥 바람이 오기를 기다리며 푹 쉬는 거지.
대항해시대 때 유럽 국가들이 알박기를 하듯 식민지개척에 열을 올렸던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세계 곳곳에 상선과 선원들이 쉬면서 머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던 거지.
“지금 아국의 조차지가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당장 남주도로 진출할 때를 보시지요. 청도와 상해를 거치지 않았으면 보급계획이 제때 이뤄지고, 남주도로 이어지는 직항로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