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 챕터48. 파고들다 (8)
“붙어! 붙으라고!”
“이대로 있으면 다 죽는다!”
“화살을 못 쏘게 달라붙어!”
방패인지 문짝인지 모를 엄폐물에 숨어 있던 두목과 소두목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조선군이 자신들을 다 잡아 죽이려고 왔는데, 이러고 있으면 몰살 아닌가.
가만히 집안에 처박혀 있다가는, 분명 화포에 맞아 관짝에 들어갈 사체조차 건지지 못할 거다.
상대가 모습을 드러낸 이상 어떻게든 달라붙어야 한다.
“저기! 저쪽으로 붙어라!”
“저기가 허술해 보이잖아! 달려!”
쿵쿵. 조선군은 어느새 사십보까지 다가왔고, 이젠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 말은 이제 죽기 살기로 달려가면, 적어도 칼을 한번 휘두를 수는 있을 거다. 그렇게 백병전이 시작하면, 약한부분을 뚫어 포위망을 찢어낼 수도 있을 터.
해적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딱 봐도 무시무시해 보이는 장창벽이 아닌 장창보다 짧아 보이는 단창벽이 있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와아!!”
“이 씹어 먹을 놈들!”
“죽어라!”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리고, 기운차게 외치며 손에든 무기를 허공에 붕붕 휘두르며 달려들지만... 쿵쿵. 제자리에 멈춰선 조선군은 침착하게 그들을 보며 단창을 앞으로 세웠다.
“조준!”
중대장과 소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1중대원 전원이 단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대기.
투다닥. 어찌나 빨리 달려오는지 해적들의 뜀걸음에 맞춰 먼지구름이 일어날 정도지만, 다들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대기했다.
온갖 소음이 몰아치는 터라 들리지도 않지만... 움직임을 멈추고 단창으로 보이는 물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연대병의 귓가에는, 치이익.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이내 심지가 완전히 사라져 단창이 불꽃을 집어삼켰고, 악귀처럼 찌그러진 해적의 얼굴이 눈에 생생하게 들어오자.
파파팡! 단창처럼 보이는 물건이 굉음과 함께 불꽃을 뿜어냈다.
“끄억!”
“악! 안 보여! 앞이 안 보여!”
“켁...”
명나라 시절에는 화포 말고도 다양한 화약무기를 사용했지만, 그 명맥이 끊기고 약해진 게 벌써 몇 년인가. 해적들이 총통과 같은 소형화약병기를 겪어본 적이 없으니, 총통을 그저 단창인줄 알고 달려들고 만 것.
이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든 꼴이 되어서, 이십보도 안 되는 지근거리에서 총통탄을 얻어맞은 해적들은 말 그대로 육편이 되어 쓰러졌다.
파파팍! 작은 쇠구슬들은 해적들의 온몸을 헤집어 피보라를 일으켰고, 스치고 지나간 파편에 뒤따르던 해적들마저 무너뜨렸다.
쇠구슬이라고 약해보일지도 모르지만, 사람 몸에 틀어박히면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위력이 있지 않나.
호기롭게 총통병을 향해 달려들던 해적들은 발목이 묶인 것 마냥 동시에 무너졌다.
“장전!”
허나 일제사격이 한번으로 끝날 리가 있나.
총통병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총통병은, 발사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바꿔 앞으로 나왔고.
파바방! 쓰러진 동료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해적무리를 향해 다시금 강철의 파편을 쏟아냈다.
“끄억. 컥!”
“붙어! 가! 달리라고!”
“죽기 싫으면 달려!”
이미 땅바닥은 피바다가 되어 시체가 수북이 깔려 있건만, 뒤쪽에 있던 해적들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지 않나.
계속해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전진시켰고, 그에 맞춰 사격을 끝마친 총통병들은 뒤로 빠지고 장창병이 그 자리를 대신 메꿨다.
자연스럽게 일자진을 형성하고 있던 전열은 해적들이 돌격해 오는 쪽을 향해 완만한 V자 형태를 그리며 진영을 변경.
중대별로 모인 연대병들은 자기도 모르게 포위망에 들어온 해적무리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눈앞에는 악귀처럼 몸부림치는 해적이 날뛰고, 코는 피냄새와 화약냄새가 찌르고, 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민남어 욕설과 비명, 고함소리가 들려오지만.
“찔러!”
“합!”
장창을 든 연대병들은 삐빅! 중대장의 호각소리에만 집중해, 명령에 맞춰 기합을 내질렀다.
장창이 왜 단병접전의 제왕이라 불리겠나. 리치가 닿지 않으면 제 아무리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막는 건 어려울 수밖에 없는 법.
그것도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는 일대일의 대결도 아니고, 제대로 딛을 곳조차 찾기 힘든 전장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찔러 들어오는 장창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거나 막을 수 있을까.
“크헉.”
“컥.”
빽빽한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뭉쳐 있는 벽에, 맨몸이나 다름없는 꼴로 꼴아 박은 해적들은 선두열의 발끝조차 만지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찔러!”
“오합!”
게다가 얇긴 하지만 그래도 이열로 만든 방진 아닌가.
운 좋게 첫열이 내지른 장창을 피했다고 한들, 뒤에서 장창을 역수로 잡고 머리 위에서 내리 찍는 창날까지 피해낼 수 없는 법.
“꺽.” “컥.”
배나 팔다리가 뚫리지 않은 해적들은 하나같이 머리나 어깨에 구멍이 뚫려 주저앉았다.
삐이이빅!
“뒤로!”
“합!”
돌격하던 무리를 모조리 무너뜨린 장창벽은 다시금 천천히, 하지만 바위처럼 단단하게 한걸음씩 뒷걸음질치며 뒤로 물러섰다.
허나 이러는 와중에도, 뒤에 있던 궁병중대는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기동!”
장창병이 포위진을 만들 때부터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자리를 바꾼 궁병중대.
“발사!”
그들은 어느새 포위진 옆에 위치해 있었고, 장창방진을 향해 달려드는 후발대에게 화살비를 먹여주고 있었다.
본래 궁병대는 전장의 상황을 파악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쏘는 게 보통이고, 이걸 막기 위해서 기병대를 동원하거나 전장의 지형을 이용해 움직임을 강제해야하는 법.
허나 기습을 당했고, 애초에 중대 단위의 작은 무리로 움직이는 궁병대를 통합도 안 된 해적무리가 무슨 수로 따라잡을 수 있겠나.
“기동! 후위로 돌아간다!”
“합!”
다섯 번의 일제사격을 쏟아낸 중대는 냉큼 활을 챙겨들고 뒤로 후퇴. 그 꽁무니를 쫓아온 해적들을 맞이한 건, 한차례 살육을 끝마치고 재장전을 끝마친 총통중대였다.
“조준!”
파파팡!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는 총통중대를 보며, 해적들은 “장창병도 아닌 놈들이 가만히 서서 뭐하는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보이지도 않게 날아온 쇠구슬은 해적의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 의문의 답을 해소시켰다.
너무도 뜬금없이 얻어맞은 기습에 난장판이 됐고, 단일 명령체계를 구축하지도 못했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주변상황을 읽기는커녕 자기 무기조차 찾기 힘든 상황.
당연히 앞서 나섰던 해적무리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지 못해서, 불나방처럼 총통병에 꼴아 박아 또 다시 피보라를 만들어내기를 반복했다.
“...”
“...”
엄중한 호위 속에서, 얼렁뚱땅 유응부 옆에서 머물려 전투를 지켜보게 된 두목들.
그들은 저기 바로 밑에서 펼쳐지는 대학살극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꼴깍 삼켜댔다.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생각조차 싹 사라져서, 그저 놀라고 경악해서 수전증에 걸린 것 마냥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선군이 잘 싸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변화무쌍한 방진 운용을 보여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최고지휘관인 유응부는 바쁘게 명령을 내리지도 않고 그저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인데, 그 밑에 있는 이들이 알아서 전투를 풀어가고 있지 않나.
기병인 이들이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데도 이 정도면, 말에 올라타 기동력을 얻었을 때는 그야말로 동해번쩍 서해번쩍하면서 몰아칠 게 분명했다.
두목들과 해적들이 넋을 놓고 침을 흘리며 구경하든 말든, 유응부는 계속해서 전장을 살폈다.
조선전함은 항구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고, 전함과 부두의 거리는 150미터를 조금 넘는 정도의 근거리였다.
이 정도면 포격을 하기에 딱 좋은 거리이고, 쏘는 족족 맞출 수 있는 거리.
게다가 산중턱에 올라 있는 유응부가 망원경을 통해 지휘함의 신호깃발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잠시 쉬는 동안. 아침해와 함께 밀려온 바닷바람에 포연도 거의 흩어졌으니, 함장과 함포장들 또한 항구의 상황을 정확히 지켜보고 있지 않겠는가.
“다들 정신을 차리고 기어 나왔나보군?”
“그렇습니다. 저기 마을 안쪽으로 병력이 집결하는 군요.”
수백발의 포탄을 얻어맞았겠지만, 땅에 머무는 사천의 병력을 포격으로 일망타진하는 건 불가능한 일.
원체 정신없이 얻어맞아서 몇이나 상했는지 모르겠다만, 살아남은 이들은 정신줄을 붙잡고 해적단별로 모이고 있는 게 보였다.
“퇴각신호를 보내라.”
“옙!”
피유융! 이번에는 노란빛을 뿜어내는 폭죽이 터졌고, 부우웅! 그간 조용히 있었던 대라소리가 전장을 집어삼키며 흔들었다.
삐이이빅! 중대장들과 소대장이 내지르는 호각소리 또한 새소리를 내며 길게 늘어지자, 연대병들은 재빠르게 발을 옮겨 본래 위치로 몰려들었다.
“폭죽신호를 보내라.”
이내 이어지는 명령에 하늘이 한번 더 붉게 물들었고, 망원경의 둥근 시야 너머로 지휘함의 신호깃발이 휘날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답장을 하는 폭죽도 함께 했다.
하늘은 짙은 회색빛과 탄내 나는 검은 연기에 몸살을 앓고 있었으니, 해적들이 난데없는 폭죽에 신경을 얼마나 썼겠는가.
몇몇이 화들짝 놀라 정체를 알아차리긴 했지만, 대세에는 변화를 주지 못했다.
아군오사의 가능성이 없어졌으니, 이제 확 트인 시야를 다시 검게 물들일 시간이 돌아왔고...
콰콰쾅!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전함은 또 다시 강철의 벼락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크헉!”
“또 온다!”
“어...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 산으로 달려!”
해적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하늘이 무너진 듯 울부짖으며 목청을 높여댔다.
조선군이 붙어 있으면 포격을 못 쏠 줄 알고 뭉친 거다.
시간벌이용이자, 몇 명인지 알지도 모르는 포위망을 뚫기 위해 무작정 해적들이 움직이지 않았나.
그들이 이 짧은 시간에 벌써 다 죽고, 조선군이 뒤로 빠졌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게 실수다.
쾅쾅쾅쾅! 모여 있던 만큼 피해는 누적되고, 해적들은 해적단 끼리 모이지도 못하고 그저 옆에서 함께 도망치는 이들과 함께 뭉텅이가 되어 도망쳤다.
생과 사의 줄타기를 하며 극도의 정신적 한계에 직면하자, 시야 또한 극히 좁아져 자신의 발끝 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
생각조차도 짧아져서 “포격을 피하려면 바다에서 멀어져야한다.”라는 단편적인 결론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누군가 그렇게 몸을 일으켜 허둥지둥 달리자, 어쩔 줄 몰라 하던 다른 해적들은 자기도 모르게 선지자를 따라 몸을 움직이기 마련.
허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죽음의 그물이었다.
쉐에엑! 중구난방 달려드는 해적들을 향해 또 다시 화살비가 몰아치고, 파파팡! 화살비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덩어리를 향해선 총통이 불을 뿜었다.
그 화력망을 뚫고 다다른 이들에겐 장창의 벽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몰이사냥을 당하듯 해적들은 피의 수레바퀴를 자신의 몸을 던져 끊임없이 굴려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포격은 말 그대로 끝도 없이 계속 터져서, 항구는 제대로 남은 가옥이 없을 정도로 허물어졌다.
건물과 선박을 부수는 데 재격인 장군전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런 꼴이 되었으니, 살붙이로 이뤄진 해적들의 꼴은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정신을 먼저 차린 이들은 다 죽어서, 남은 이들은 완전히 넋이 나가 벌레처럼 땅을 기면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이들 뿐이었다.
포연과 굉음이 점점 잦아들자, 엉망진창이 된 항구의 모습이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끝났군.”
“예. 움직이는 이들은 없어 보이는 군요.”
“있어도 딱히 문제될 건 없어 보이고?”
“그렇습니다. 돌입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유응부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라소리가 우렁차게 퍼져나갔다.
대대별로 뭉쳐서 움직이던 연대병들은 장창과 활을 거두고, 자신의 독문무기를 꺼내들고 소대별로 응집.
그리곤 거침없이 피바다를 헤치고 지나가 전장에 돌입했다.
쓰러져 있는 해적들과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는 이들, 아직도 집에 숨어서 나무기둥을 붙잡고 벌벌 떠는 이들, 시체와 시체 사이에 껴서 죽은 척 하거나 기절한 이들을 골라 챙겨갔다.
“자네들도 할 일이 있을 텐데?”
“...!”
유응부가 넌지시 던진 말에, 손발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네 두목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대충 봐도 조선군 사상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인데, 반대로 사천이 넘던 해적은 씨몰살을 당하지 않았나. 이 판국에 조용히 오줌지리며 구경만 했던 자신들이, 대체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사람을 나눠서 살아남은 해적들을 수습하고, 해적선을 살펴봐라. 부두에 묶여 있던 배들은 부서졌겠지만 멀리 있던 배들은 멀쩡할 테니까.”
“...?”
뜻밖의 말에, 하지만 충분히 일리 있는 말에 두목들은 머리를 마구 끄덕였다.
“...”
동시에 혹시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차마 무서워서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허나 유응부가 먼저 알아차린 걸까? 그는 지금껏 살벌하게 해적을 때려잡은 장군답지 않게,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배라면, 너희들에게 줄 수도 있다.”
“헙!”
“흐헉!”
모두는 화들짝 놀라서 경망스런 소리를 내뱉고 말았고, 자기도 모르게 입을 막으며 냉큼 허리를 굽혀댔다.
무려 육십척에 가까운 배가 저 부두에 빼곡하게 쌓여 있다. 부두 근처에 있던 배들이 부셔졌어도, 못해도 사십척이 넘는 배를 공짜로 챙길 수 있지 않나.
그들은 ‘조선과 손을 잡길 천만다행이다! 드디어 나에게도 성공이 찾아오는구나!’라고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