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 챕터49. 성장하다 (1)
다음 날이 되자 드디어 마무리가 됐고, 이제 이곳을 떠날 시간이 찾아왔다.
죄다 불태워버리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본보기로 남겨두기로 했다.
조선군이 남해 해적을 다 쓸어버렸다고 소문이 퍼지겠지만, 여길 지나가면서 보는 상인도 있을 수도 있지 않나.
또한 이곳도 이제 조선땅이 되었으니, 대만섬에서 자동,광주로 갈 때 써먹을 지도 모른다.
마을 주민들은 뜬금없이 대만섬으로 끌려가게 됐지만... 뭐 어쩌겠나.
당장 해적시체가 눈앞에 수북하게 쌓여있는데, 이주를 거부할 정도로 간이 배밖에 나온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항복한 해적들의 처우도 정해졌다. 전부 자동과 광주로 끌고 가서 상인회에게 싼값에 팔아넘기기로 한 것.
노예로 삼든,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 놈들을 다 잡아 죽이든,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일 아닌가.
그저 조선군의 위엄을 보여주고, 약간의 이득만 챙기면 그만이다.
“저희가 옮기란 말씀이군요.”
“그래. 배를 운용할 사람은 충분하지?”
“물론입니다.”
“옙!”
날이 꼬박 세도록 누구보다 바쁘게 전장정리를 했던 네 두목들.
그들은 조선군이 왜 자신들에게 배를 넘겨줬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조선군은 전함을 타고 다시 되돌아가는 것도 바쁘니, 해적포로와 이주를 이들에게 맡긴 것.
그리고 이번에 이렇게 연을 맺었으니, 앞으로도 꾸준히 조선군의 명령에 따라서 이것저것 짐을 옮기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조선의 하수인이 된 꼴인데... 오히려 좋은 일이다.
당장 두목들 모두가 십수척의 배를 거느린 대상인이자 운송상인으로 뛰어오른 셈 이니까.
조선군의 의뢰를 계속하면서 야금야금 이권을 집어먹다보면, 언젠가는 홀로 설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될 거다.
*****
따사로운 걸 넘어 후끈 찝찝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어느새 훌쩍 자란 청록빛 바다가 땅을 뒤덮고, 눈에 보이는 곳곳마다 웃음소리와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느긋하게 말을 몰아 다가가자, 새로 지은 티가 물씬 풍기는 가옥이 열을 맞춰 선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어떻습니까?”
“잘 만들어놨는데?”
“좋은데?”
“그렇죠?”
도시개발을 총 관리하고 있는 이순지는 연오랑과 정인지의 칭찬에, 미소를 숨기지 않고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확실히 본토 출신이 많아졌군.’
연오랑은 눈에 보이는 풍경을 흘리며 우두커니 걸음을 옮기면서, 지난날과 앞날을 그려봤다.
동쪽산맥 반대편 해안을 향해서, 남북으로 동시에 토벌을 진행했던 연대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동쪽해안가를 싹 훑으면서, 그곳에 사는 원주민과 산악부족을 전부 서쪽 신도시로 데려온 거지.
‘이젠 더 이상 손을 쓸 곳이 없어.’
대만섬의 인구는 대략 20만명 정도로 추산됐고, 그 중 2만명쯤 되는 산악부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원주민을 손에 넣었다.
나아가 산악부족은 이젠 거의 다 토벌하거나 흡수해서, 산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이들은 대략 오천정도.
이들은 시간을 두면 알아서 흡수당하거나, 조선이 산맥으로 더욱 파고들면 충돌하게 될 텐데... 그럼 그 때가서 토벌을 하든 말든 결정하면 될 일.
더 이상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산맥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은 상태였다.
그 결과. 9차 보급대까지 왔다간 지금 대만섬의 구조는 이러했다.
18만명 쯤 되는 원주민, 강남이주민 중에서 대략 6만 정도가 조선본토 평안도와 황해도로 끌려갔다. 반대로 조선본토에서 이주한 이들이 대략 4만명 정도.
거의 엇비슷한 수가 옮겨졌으니 이게 뭔 차이인가 하겠지만, 조선본토에서 온 이들은 조선팔도를 넘어 북방출신까지 전부 섞여서 오지 않았나.
전체 인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도, 인구구조는 완전히 바뀌게 된 거지.
그리하여 남주, 남상주, 남중주, 남하주의 신도시에 대략 3만명이 거주했고, 남은 사람들은 동쪽 산맥 근처에 작은 신도시를 만들어 거주했다.
대만섬은 자원부국은 아니지만, 인력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이 시대엔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광물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걸 활용해야 해안가의 신도시가 만들어질 것 아닌가.
‘그 결과가 저거지. 생각보다 빠르게 완성됐어. 본토에서 일하던 인부들과 장인들이 와서 그런가?’
연오랑은 말없이 물끄러미 이순지가 설명하고 있는 도시를 바라봤다.
이곳은 남중주 동쪽에 위치한 신도시였는데, 이곳에 자리 잡은 제재기업, 광산기업, 건설기업, 채굴기업, 자기기업이 무려 13개나 될 정도로 원시적인 공업도시가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쿵쾅거리는 소음이 귀를 때리는 공장지대로 들어서자, 이곳이 대만섬인지 조선본토인지 헷갈릴 정도로 잘 구성된 공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톱밥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게 눈에 들어오고, 크고 작은 거중기가 이리저리 긴 팔을 움직이며 통나무를 옮기고 있었다.
연오랑 일행이 다가갔지만 눈에 띄는 백호갑옷과 관복을 입지 않아서 일까? 이곳을 관할하는 이순지를 알아봤음에도, 그저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오... 다들 상투에 익숙해 졌나본데?’
연오랑은 인부들 모두가 상투를 하고 있는 걸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기병이 중심인 육군연대병은 상투를 거추장스러워 하는 것에 반해, 원주민들 입장에선 조선인 하면 떠오르는 게 조선식 상투 아닌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자기들이 알아서 따라하고 있었다.
‘상투라...’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옛 생각이 나서, 피식 웃고 말았다.
마상건을 만든 이유는 그가 상투를 트는 게 불편해서였지 않나. 십수년이 지난 지금은 그게 이제 유행이자 문화가 되어 연대병들 사이에서 자리 잡은 지 오래.
그가 편하려고 했던 일이, 어째 나라를 바꿔버린 판국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단발이라... 나쁠 건 없는데, 그렇다고 강제하는 것도 이상하단 말이지.’
그는 문뜩 원래 역사를 떠올렸다.
구한말에 단발령이 떨어지고 나서 극렬하게 반대하는 운동이 펼쳐지지 않았나. 헌데 더 과거인 이 시대에는 뭐랄까... 애매했다.
상투는 고려, 조선 이전부터 내려온 조선인의 문화인 터라, 이걸 왜 해야 하는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모두가 하지 않나.
원의 영향을 받은 고려 때엔 변발과 비슷한 땋은머리를 하는 게 관습처럼 변했는데 고려말에 폐지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학이 유교로 변해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헌데 지금 역사에선 운석핵꿀밤으로 인해 유학적 의식전파가 무너지면서, 효를 내세워 신체에 대한 구속을 강하게 하는 경향도 없어진 상황.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거지.
‘결국 지금은 내가 봐도 뭔가 어수선한, 뭐... 자유분방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지.’
그는 다시금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여기에 신분질서마저 양민 하나로 뭉쳐지는 방향인 터라, 양반과 천민 문화가 하나로 뒤섞이면서 머리를 놓고서도 다들 제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결국 상투는 무언의 압박이나 통제가 아니라, 그저 유행이나 멋처럼 인식되는 게 고작. 원래 역사처럼 상투가 없는 걸, 치욕이나 모욕처럼 느끼는 경향은 전혀 없는 거지.
더불어 말 사육두수가 늘어나면서, 갓의 재료가 되는 말총값 또한 엄청나게 떨어지지 않았나.
이러다보니 자연스레 상투와 갓 또한 신분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쓰고 다니는 유행처럼 번져가서, 심지어 원주민들 중에서도 조선갓을 쓰고 다는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당연히 기존의 갓에도 영향을 줘서, 초립이나 패랭이 모자조차도 말총으로 만든 변형갓이 등장할 정도로 자유분방 그 자체였지.
지금 연오랑의 눈에 보이는 조선인 인부들의 모습을 봐도 그렇다.
갓 대신 그냥 두건을 쓴 사람들이 있고, 설령 갓이라고 해도 챙 크기가 다른 여러 형태의 갓을 쓰고 있는 관리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나.
머리와 모자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세상 참 요지경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래도 머리를 자르는 게 솔직히 편하긴 편한데 말이야. 그렇다고 상투를 금지하는 건 또 뭔가 명분이 없고.’
그럼에도 상투는 솔직히 귀찮기 짝이 없는 물건이라 어떻게든 하고 싶은데... 영 감이 안 잡힌다.
백성들도 상투가 귀찮은 건 알지만, 그걸 감수하고 멋이자 유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걸 법으로 규제할만한 명분도 딱히 없으니까.
‘군인들만 확 그냥 잘라버리면, 그 다음부턴 알아서 풀릴 거 같긴 한데... 에라. 모르겠다.’
문뜩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게 뭐 엄청 중요한 것도 아니지 않나.
필요에 따라서 평상시엔 그냥 풀고 다니다가, 멋을 내거나 격식을 차릴 때만 상투를 트는 거라면 납득할 만한 수준 아닐까? 상투 안했다고 욕을 먹지 않고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정도면 충분한 거지.
“...?”
연오랑이 말없이 딴 생각에 빠져 있자, 이순지와 정인지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열심히 설명해주면 반응을 해줘야하는데, 아무런 말이 없으니 의아했던 모양이다.
“딴 생각.”
“그러시겠죠.”
“예에.”
그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자, 역시나 그러려니 하고서 슬쩍 빈정거렸다.
그래도 귀는 열어 놓고 있었으니 얼핏얼핏 들은 게 있지 않나. 괜히 민망해진 그는 이순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 슬슬 조선인 티가 나는데?”
“지금껏 이곳에 쏟아 부은 재원이 얼만데요. 티가 안 나면 억울하죠.”
“그건 그렇지. 옷은 제대로 입고 있어서 다행이다.”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전에는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을 하고 있던 이들이, 지금은 그래도 상하의를 갖춘 조선식 옷을 입고 있지 않나.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조선인과 원주민이 티가 안날 정도로 비슷해졌다.
“본토의 면직기업들은 살판났을 겁니다. 그치들은 안 그래도 면포 가격이 계속 떨어져서 울상이었으니까요.”
“대신 모직과 피혁기업은 배 아파 하고 있겠죠.”
“그래도 북방에서는 면직기업이 힘을 못 쓰잖아요? 일장일단이 있는 거죠.”
아는 게 많은 두 사람답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냈다.
시간이 흘러 면직기업이 자리를 잡을수록 당연히 생산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는 바.
그 생산량은 지금껏 계속 수직상승해서, 일본에 엄청난 양을 팔아넘기고도 가격방어가 제대로 안 되서 조정에서 사들이지 않았나.
다행히도 이번 대만섬에 진출하면서 기세가 한풀 꺾인 모양이다.
“가죽옷은 안 팔리나보군.”
“이렇게 습하고 더운데 가죽옷을 누가 입겠습니까. 작업인부가 아니고서야 수요가 그리 크지 않죠. 그래도 장갑과 작업화 덕분에 그나마 체면치레는 할 정도죠.”
“음...”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 이곳에선 면직물 말고도 삼베와 같은 통풍이 잘되는 마직물도 엄청나게 인기를 끌고 있었다.
“비단은?”
“당연히 양잠기업도 생겨났는데... 뽕나무가 어디 하루이틀 사이에 자라겠습니까. 묘목이라서 제대로 자랄 때까지는 한참 걸릴 겁니다.”
“여기도 뽕나무는 있을 텐데?”
“그래도 군락을 만드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요. 누에고치는 본토에서 가져올 수 있어도 나무는 가져올 수 없으니까요. 뭐... 그래도 열심히 캐서 새로 심고는 있습니다.”
이순지는 히죽 웃으며, 나무를 옮겨 심는 인부들이 얼마나 개고생을 하는지 늘어놨다.
“강남에서 들여온 누에고치도 있냐?”
“쉽진 않은데... 조금씩 가져오고 있긴 합니다. 다만 양잠기업을 만드는 건 또 다른 문제죠.”
‘흠... 그래도 이건 다행이군.’
중국이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연맹으로 쪼개져서 그런지 몰라도, 확실히 옛 명나라 시절에 비하면 반출불가한 품목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미 오래전에도 조선본토로 중국의 누에고치를 가져오곤 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 길이 끊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양잠기업이 그러면 면직기업도 비슷하겠군?”
“예. 이곳 기후에 목화가 잘 적응할지는 지켜봐야할 텐데... 크게 어려울 것 같진 않습니다. 그리고 목화가 실패하더라도 각종 마는 잘 키우고 있으니까요.”
“흠... 잘 돼야 할 텐데 말이야. 이게 보통 돈벌이냐.”
“그건 그렇죠.”
“아국의 광목이 팔려나가는 추세를 보면, 확실히 돈벌이는 맞죠.”
둘 모두 희망을 담은 대답을 던졌다.
비단이야 인도를 거쳐 중동, 유럽까지 수출되는 물건이니 더 말 할 필요도 없다.
허나 이 시대에도 인도산 면직물은 꽤나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중국산 면직물은 비싼값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소국과 심지어 인도본토에서도 면직물은 부족하니까.
‘인도산 면직물은 동방에 팔리는 것보단 중동과 유럽에 팔리는 게 더 많겠지.’
그쪽은 언제나 면직물이 부족한 상태 아닌가.
인도상인들은 경쟁자가 있는 동방보단 서방에 집중하는 터라, 조선 면직물이 남방시장에 진출할 틈은 충분히 있어 보였다.
공장에 더욱 가까이 다다가 일하는 걸 물끄러미 지켜봤다.
사실 공장이라고 해봐야 큼지막한 창고 몇 동에, 인부가 대략 이백여명 정도 일하는 수준이다. 물론 이 정도면 이 시대 기준으로 보면 기업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꽤 큰 건 맞다.
“원주민 인부들은 어때? 손에 익기 시작했냐?”
“예. 적어도 첫단추는 잘 꿰서 다음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기 보이시죠? 다들 자기가 맡은 부분에 익숙해져서,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순지는 거중기를 이용해서 큼지막한 통나무를 들어올려, 물소가 끄는 달구지에 옮겨 싣는 인부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