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 챕터49. 성장하다 (3)
그 결과. 화장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는 못해도, 시키면 투덜거릴지언정 곱게 따라올 정도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리고.... 조선 백성들이 그러했듯이, 이건 한번 익숙해지고 나면 다시는 더럽고 지저분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이들이 아무리 원주민에 잘 안 씻는 한족이라고 해도. 길가에 똥오줌 널려 있는 것보단, 없는 게 깔끔하고 악취가 덜 나는 건 느낄 것 아닌가.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라도, 화장실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지.
가옥의 뒤쪽 벽은 벽돌을 사용해 마감했고, 앞쪽은 한옥 특유의 넓은 나무마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더워서 그런지 몰라도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서 대들보에 걸쳐놨는데, 그 탓에 집안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
‘저런 건 처음 봤을 텐데, 용케 적응했나 보네.’
저건 전형적인 조선식 한옥의 양식인데, 다들 익숙해진 모양이다.
‘사실 별거 없잖아? 이렇게 더운 곳에선 굳이 창문을 내는 것보단, 차라리 문을 크게 내는 게 낫지.’
그래도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맞추긴 했나 보다.
정면뿐만 아니라 옆면의 벽 절반정도가 나무로 만들어져 열리게 만들어져 있었고, 마루 또한 살짝 높인 형태를 하고 있었다.
딱 봐도 꽤 잘 만들어진 기와집. 예전이었다면 양반집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가옥이지만... 여기 있는 모든 집이 죄다 똑같은 형태와 크기를 하고 있다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만주땅에서 여진인 신도시를 만든 경험을 제대로 녹여 냈는지, 이순지는 그야말로 극한의 효율을 뽑아냈나 보다.
“집이 다 똑같은데, 안 헷갈리냐?”
“처음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죠. 자기 집을 못 찾아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마당과 담벼락에 알아서 나무도 심고 그래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
“흐음...”
‘주소지라도 만들어야 하나? 어차피 죄다 네모반듯하게 만들어놔서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문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껏 신도시를 만들면서 주소지를 생각하지 않은 건 굳이 그게 필요가 없기 때문.
도시가 아무리 커도 구역별로 정해져 있고, 사는 사람도 정해져 있지 않나.
그런 거 없어도 충분히 도시행정은 돌아가니, 안 그래도 바쁜 관원들의 일거리만 더 늘어나는 셈이지.
‘하지만 이젠 그 수준을 넘어간 거 같은데? 알게 모르게 이와 관련해서 문제가 생겼을 지도 모르겠군.’
연오랑은 자신의 생각을 둘에게 풀어놨고, 둘은 뜬금없는 숙제에 미간을 찌푸렸다.
“편하긴 할 거 같은데... 조정에 알려봐야겠네요.”
“어차피 지금도 토지대장과 인명대장을 작성하고 있으니까... 가옥대장을 만드는 게 결과적으론 더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이야 이사를 가는 사람도 없고 집을 파는 사람도 없지만, 나중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맞아.”
이순지는 연오랑의 동의에 히죽 웃음을 머금었지만... 정인지는 한성에 있을 동료들이 “일거리 좀 그만 만들어!”라고 외치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천편일률적인 주거지역을 벗어나자,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석재와 벽돌을 이용해서 만든 다리인데, 아치형 구멍이 여러개 뚫린 전형적인 석교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새로 만든 다리입니다. 무려 50척이나 되는 다리죠. 어때요?”
“좋구나.”
연오랑은 연신 자랑질을 하는 이순지를 보며, 히죽 웃고 말았다.
저걸 다리라고 자랑하고 있으니 답답하지만... 조선의 기술력으로 이 정도 다리를 만든 건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높이는?”
“3척입니다. 꽤 높아졌죠? 이게 평평하게 만드는 것보다, 오히려 볼록하게 만드는 게 더 튼튼하더라고요. 대신 안쪽의 반구형의 구멍은 더 많이 만들어야 했지만 말이죠.”
“음.”
“흐응.”
연오랑이나 정인지나, 이순지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저 오뚝이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둘이 아는 게 많아도, 이 시대 기준으로 말하는 공학적 지식은 다 알아들을 수가 없다.
‘역시... 천문학 쪽으로 나가지 않아도, 알아서 대성할 놈이었어.’
연오랑은 아무도 모르는 미래를 읊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조선의 교량건설 기술은 솔직히 대단한 게 없었다. 한성과 살곶이벌을 이어주는 다리가 가장 길다고 하는데, 채 백미터를 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높이도 낮아서, 쪽배조차도 그 밑으로 지나갈 공간이 없었지. 당연한 말이지만 강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파묻히는 건 일상이었다.
원래 역사에선 태종이 살곶이벌을 자주 오가면서, 그를 위해 살곶이다리를 만들려고 하다가 그가 죽고 나서 흐지부지 됐고... 훗날 교통로서의 이점이 부각되어 성종시절에 완성되게 된다.
허나 지금 역사에선 정반대로, 세종이 등극하기 무섭게 완성됐다.
중랑천은 배봉마을과 바로 붙어 있는 곳이고, 배봉마을을 비롯해서 근처의 마을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교통량도 엄청나게 증가할 수밖에 없었지.
게다가 조정에게 핍박받던 서얼들은 그 울분을 원동력 삼아, “조정이 못하는 걸, 우리는 할 수 있다! 봐라. 이 자식들아!”라며 기를 쓰고 잡학을 익혀 달려들지 않았나.
그 결과. 중랑천의 물길을 조정해 거대수차를 돌릴 정도였으니, 중랑천을 건너는 다리를 건설하는 건 조정에게 한방 먹일 수 있는 강력한 패였다.
사족이지만, 꼬마 이순지는 그걸 보고 홀라당 빠져서, 아예 이쪽 길로 들어선 거고 말이다.
아무튼. 그게 벌써 십여년은 훌쩍 넘은 오래전 일이니, 지금은 원래 역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량건설기술이 발전한 상태였다.
‘하지만... 조정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연오랑은 열심히 침을 튀기며 설명하는 이순지를 뒤로하고, 계속 과거를 더듬었다.
육로교통망이 개판인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수로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크고 작은 하천까지도 어떻게든 배를 끌어 올려서 사람과 짐을 싣고 다녔으니까.
나아가 육로를 통해 운반하는 양과 수로를 통해 운반하는 양은 비교자체가 불가하지 않나.
문제는 이 시대의 기술력으로 다리를 놓는다는 건, 수로를 끊는다는 말과 동의어였던 것.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가동교는 아예 불가능하고, 케이블을 이용한 현수교 또한 당연히 불가. 무조건 석재를 이용해 지어야 했으니, 그 길이와 크기에 제한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렇듯 수로와 육로다리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수로를 택할 수밖에 없지.
‘그래서 이런 게 발전하게 된 거고 말이야.’
그는 짐을 옮겨 싣는 사람이 우글거리는 다리와 그 다리 양쪽에 펼쳐진 부두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허나 개혁과 양전사업이 진행되면서, 육로교통망도 슬슬 이어지기 시작. 나아가 착호군 및 육군이 각도에 주둔해 활동하면서, 기병대가 움직일 수 있는 도로가 필수적인 상황.
비록 자갈도로는 못 만들어도, 어떻게든 대로의 폭으로 규정한 울퉁불퉁한 흙길이라도 만들 수밖에.
그렇다보니 이젠 육로와 수로를 연결하는 지점이 필요해졌고, 나아가 육로교통량이 많아질수록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게 오히려 손해가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됐다.
그러니 이젠 수로와 육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하는 모순에 빠지게 됐고... 그 결과가 바로 다리와 수참의 연계.
본래 나루터로 운용되던 지역에 다리를 놓고, 아예 역참, 수참과 같은 포구도시로 만들어서 기존 백성들을 전부 흡수해버린 거지.
“그래서. 원주민들은 이런 걸 겪어보지 못했을 텐데, 잘 돌아가고 있는 거냐?”
“예. 보시면 아시겠지만. 숲 안쪽에 있는 제재소에서 잘라온 목재가 뗏목이 되어 이곳으로 모이고, 그 뗏목에는 채석장에서 채굴한 석회와 바위도 함께 오고 있죠.”
“...”
“그렇게 끌어올린 자재는 공장에서 재가공해서 다리 건너편 부두로 옮겨서, 배를 타고 남중주까지 보내는 겁니다.”
“다리가 없었으면 많이 불편했을까?”
“당연한 말이죠. 육군연대병이 매번 부교를 놓으면서 다닐 수도 없잖아요? 기병만 문제겠습니까. 짐마차는 또 어쩌려고요.”
이순지는 연오랑을 보며 눈을 씰룩거리며 툴툴거렸다.
조선본토에서 다리를 놓아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말과 마차 때문이니, 여기서도 상황이 다를 건 없나 보다.
“배가 지나갈 정도로, 다리를 높고 크게 만드는 건 어때?”
혹시나 싶어 물어보지만, 대번에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아직은 무리에요. 안 그래도 요새 조운선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한참 멀었습니다. 그래도 연구는 계속하고 있죠.”
이순지는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냉큼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불살랐다.
‘하긴 교량건설기술보단 선박제조기술이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니까.’
다리는 없으면 조금 불편한 정도지만, 배는 없으면 안 되는 물건 아닌가.
조정은 물론이고 민간에서도 총력을 기울여 더 큰 배로 개량하고 기존의 배를 만드는 데 열중인터라, 이러한 경향은 획기적인 기술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지속될 것 같다.
“삼물회를 잔뜩 이용해서 만들어 보는 건?”
“그것도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서 말이죠. 삼물회가 튼튼하긴 하지만 삼물회 자체만으로는 무게를 지탱할 수가 없잖아요? 안에 들어가는 석재는 어쩔 수 없는 거라서, 결국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질 거란 말이죠.”
“...”
“속재료를 석재 말고 다른 걸로 바꿔봐야 할 텐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음...”
마음 같아서는 철근콘크리트를 하고 싶지만, 강철이 아무리 많이 생산된다고 해도 건축물에 쓸만큼 많이 나오는 건 아니다.
게다가 이 시대의 삼물회는 시멘트의 열화판이지, 진짜 시멘트가 아니지 않나.
철근콘크리트가 나온다고 확신할 수가 없다.
‘시간이 걸릴 문제니, 나중을 기약해야겠어. 용연연구소에서 놀고 있는 건 아닐 테니, 더 값싸고 튼튼한 시멘트가 나오길 기대하는 수밖에.’
삼물회를 처음 선보인 용연연구소에선 지금도 꾸준히 이것저것 집어넣어가며 삼물회를 개량시키고 있지 않나.
앞으로는 중국산 재료뿐만 아니라 남방산 재료도 첨가할 수 있으니, 기다리는 것 말곤 답이 없다.
다리를 건너 수참마을을 지나 계속 남중주로 향하자, 퍽 기이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원주민들 중에서는 벌써 거중기에 익숙해진 이들이 꽤 많은지, 긴 팔을 내민 거중기에 매달린 줄을 끌어당기며 뿌리채로 쓰러져 있던 나무를 다시 땅에 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대로도 아닌데, 뭐하는 거냐?”
“흐흐. 가서 보시겠습니까?”
이번엔 정인지가 해답을 아는지, 실실 웃으며 둘을 이끌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확실히 땅 색깔이 티가 나는 게, 다른 곳에서 가져와 이곳에 심은 나무가 한둘이 아닌 것 같다.
“설마?”
“예. 과수원입니다.”
“아...”
연오랑은 히죽 웃는 정인지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표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 아냐? 조선인들이 언제 열대과일들을 접해봤겠어.’
문뜩 이런 생각이 치솟았고, 동시에 돈벌이를 용케 찾아내서 벌써 행동으로 옮긴 조선인들에게 감탄을 하고 말았다.
미래의 대만 과일들은 상당수가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품종이지만, 이 시대에도 동남아시아를 통해 들어온 토종열대과일이 은근히 있었다.
토망과土芒果라고 불리는 망고나, 딸기와 비슷한 여지荔枝, 중국강남에서도 많이 먹는 용안龍眼, 사과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왕대추에 가까운 조자棗子, 향초香蕉라 불리는 야생바나나, 흔할지도 모르는 코코넛 등등.
그야말로 조선에서는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고, 연오랑 또한 이곳에 와서 알음알음 원주민을 통해서 먹지 않았나.
당연히 조선인들이 환장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돈이 된다는 걸 알아차렸나 보군.”
“당연하죠. 연대병이 여길 돌아다닌 지 벌써 몇 달이 지났고, 특히나 원주민 훈련병들을 교육시키며 남주도를 왕복하지 않았습니까. 원주민 훈련병과 친해진 연대병이 한둘이 아니고, 그들을 통해서 본토에 연락이 간 경우도 흔했죠.”
“허...”
미래의 우체국과 엇비슷한 체신처는 이미 완성됐고, 그들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건 역시나 고향과 집을 떠난 연대병들 아니겠나.
남주도에 파병된 연대병은 이곳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적어서 본가로 보냈을 거고, 연대병들 중에서는 양반출신이거나 나름 꽤 사는 집안자제들이 부지기수.
이게 돈벌이가 될 거라고 생각한 이들 중에선,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인 집안도 있는 모양이다.
“그 정도야?”
“물론이죠. 남주도로의 이주를 장려하는 건 아니지만, 은근히 밀어주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곳에선 한동안 세금도 없고, 연대병이나 원주민 인력을 이용해서 기업을 빠르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돈 꽤나 있는 집안 중에서도, 자식들이 아예 떨어져 나온 집안이 은근히 있단 말이군.”
“예.”
“흐음... 과일이 그렇게 돈이 된단 말이죠?”
“물론이지. 예전을 생각해 봐라. 너 어렸을 때, 생과일 먹어본 기억이 있기나 하냐?”
“많이 먹었는데요?”
이순지는 정인지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은 워낙 어릴 때부터 배봉마을에서 살았고, 배봉마을에선 별 희한한 연구를 다 했으니 당연히 초창기 과실연구소도 그곳에 있었다.
“큭큭.”
한방 먹은 정인지를 보며 연오랑이 피식 웃어대자, 정인지는 냉큼 표정을 바꾸고선 말을 이어갔다.
“크흐흠. 너야 특별한 경우였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과일 구경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어. 지금을 생각하면 상전벽해도 그만한 상전벽해가 없을 거다.”
“예...”
“아무튼 과수원은 생각보다 많이 늘었고, 과수원의 소득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조선본토 내에서도 그렇지만 북방에서의 소비와 수출이 두드러지죠.”
“하긴... 저도 북방에 있을 때 건과를 사먹곤 했죠. 여진인들이 엄청 좋아하긴 하더라고요.”
“당연한 말이지. 들어봐.”
이순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정인지는 열심히 침을 튀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