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 챕터49. 성장하다 (6)
이 시대엔 조정이 배포하는 신문이라 할 수 있는 조보朝報도 없었으니, 신문은 아직 한참 시기상조.
조선인들조차 자신의 나라가 부강해지고 있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는데, 굳이 신문을 이용해 민간의 여론을 흔들 필요도 없지 않나.
혹여나 누가 이용해먹을 수도 있으니,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꼴이지.
‘지금은 그저 관리 하에 열심히 책을 찍어내 널리 알려서, 다른 나라가 쉽게 따라오지 못하도록 백성들의 전반적인 교육수준을 높이는 수밖에 없어.’
“어르신?”
삼천포로 빠졌던 생각은 정인지의 부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잡설을 교과서로 만드는 걸 문제 삼는 이들은 없었냐?”
“있긴 했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그게 효율이 훨씬 나은데요. 요샌 삼국지연의도 번역해서 쓸까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재밌잖아요?”
“그건 그렇겠지.”
정사 삼국지는 오래전에 조선으로 들어왔지만, 소설로 된 삼국지연의가 들어온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미래에도 인기가 많은데, 이 시대엔 오죽하겠나.
관심 있는 관원들이 은근히 많아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판본을 알아서 만들 정도였지.
“나름 꽤 기니까, 단어 익히기엔 나쁘지 않군.”
“예. 중국역사라서 조금 그렇긴 하지만 효과는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도 관원들 사이에도 그게 찔렸는지, 삼한의 옛 설화들을 모아서 책을 내는 걸 준비하는 걸로 압니다.”
“그래?”
“우리도 전조시절 이전에 혼란한 시대가 있었잖아요? 기록이 자세히 남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추 맞춰보면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후삼국시대의 이야기는 분명 재밌는 이야기가 많고, 오히려 이 시대는 미래보다 사료가 더 많지 않나. 꽤 흥미로운 프로젝트다.
“나쁘진 않은데... 사료를 엮는 거하고, 이야기로 엮는 건 또 다른 문제잖아?”
“어련히 알아서 잘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이름이 찍힌 저서를 내는 것에, 목을 매는 관원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게 설령 잡서라고 해도 말입니다.”
정인지는 그리 말을 하고선 히죽 웃었고, 이순지 또한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원래 역사하곤 많이 다르군. 소설에 대한 거부감이 내 생각보다 훨씬 옅은 모양이야.’
연오랑 또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얼른 표정을 바꿔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조선말과 조선어를 가르치는 게 중요한 건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오지 않았습니까.”
연오랑의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정인지는 히죽 웃으며 자화자찬을 늘어놨다.
대만섬은 한어, 원주민어, 조선어가 전부 쓰이고 있고, 초장부터 강력하게 조선어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 변질될지 모른다.
조금 과장하면 셋이 전부 다 섞여서, 조선본토와 다른 괴상한 문법과 어휘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
이건 방언. 사투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제다.
적어도 방언은 같은 문법과 어법을 쓰면서 악센트와 특정 단어가 혼용되는 거지만, 세 언어가 혼합되면 아예 조선말과 다른 말이 튀어나올 테니까.
이는 곧 차별과 분열을 일으키는 전조나 마찬가지니, 대만섬을 완전한 조선땅으로 만들고자 하는 조정 입장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제주부사가 꽤 도움이 됐습니다.”
“그 인간이?”
“흐흐. 예.”
제주부사는 예전 하동현감이었고, 당연히 정인지도 아는 인물 아닌가. 연오랑이 미심쩍어 하는 모습을 보이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주부사는 하동에 있을 시절에 어르신을 보면서 이것저것 훔쳐 배우지 않았습니까. 제주에서 자기 방식대로 요긴하게 써먹었죠. 방언을 없애는 데 아주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오...”
연오랑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자, 정인지는 부연설명을 늘어놨다.
미래에는 제주어를 전통문화유산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에 살던 제주백성들 입장에선 전혀 아니라고 볼 거다.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제주는 조선시대 내내 차별과 핍박을 받아왔고, 알아듣기 힘든 제주방언을 쓰면 무시당하기 일 수였지 않나.
다른 지방의 방언도 마찬가지라서, 교육부에선 표준말사전이라 할 수 있는 조선정운을 강력하게 설파해 재교육을 시키고 있었지.
원래 역사에선 각 지방끼리 통교가 많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었지만, 지금 역사에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온갖 사람들이 죄다 고향 사투리를 쓰고 있으니, 이걸 싹 정리하고 가야 괜한 차별과 무시를 없앨 수 있는 거지.
나아가 중앙집권을 위한 통합 또한 쉽게 될 거고.
“그래서 제주방언을 최대한 없앴다는 거군?”
“예. 오히려 말과 글을 새롭게 익힌 북방의 여진과 귀화인들이 더욱 제대로 된 표준말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치들 때문이라도 방언은 점점 줄여가고 있습니다.”
“무시받기 싫고, 조정의 요직에 오르려면 말이지.”
“그런 것도 있지만, 당장 관원들 스스로가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전례 없던 모든 관원의 순환근무가 시작됐으니, 저 먼 함길도 출신과 전라도 출신이 섞여 사는 건 일상이 됐다.
서로 알아듣기 힘든 방언을 고수하느니, 차라리 표준어인 한성말을 모두가 쓰는 게 더 편한 거지.
‘시간이 흐르면 또 당연히 방언이 생겨날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유동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그 격차는 점점 줄어들겠지.’
연오랑은 그리 결론을 내리고선, 조금 떨어진 옆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선 조금 더 큰 아이들이 정과 끌, 망치나 톱, 조각칼을 쥐고서 나무탁자와 의자를 만들고 있는 게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꼭 공작기업의 신입사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엄연히 수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흐음...’
미래에선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로 보이지만, 이 시대는 다르지 않나. 저 나이 때가 되면, 얼추 집안일과 각종 잡일을 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직업교육당에서 가르치는 직업교육 같은데?”
“딱히 틀린 건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실습교육입니다. 공작기술만 가르치는 건 아니고, 수공업으로 할 수 있는 기초적인 공구기술은 전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자애들도 있고?”
“예. 길쌈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데, 겸사겸사 다 배워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호오...”
연오랑이 살짝 감탄한 기색을 보이자, 정인지는 영문을 몰라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아무리 봐도 학교와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가르치는 건 나쁘지 않네.’
원래 역사를 아는 탓에,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조선, 중국, 여진할 것 없이, 저런 건 다 집에서 부모에게 배우는 것. 남자는 농사일에 필요한 온갖 수리기술을, 여자는 길쌈이나 바느질 등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허나 이곳에선 부모는 물론 조부모까지 죄다 일을 하러 나갔으니, 이걸 배울 방법이 마땅치 않다. 해답은 부모를 대신해서 조선관원이 직접 가르치는 거지.
북방에 설치된 귀화교육당과 직업교육당이 이러한 역할을 처음부터 해왔고, 향교의 역할이 변질되어 직업교육당의 영역까지 집어삼킨 거다.
이렇게 남녀가리지 않고 기술을 가르치다보면, 자연스럽게 진짜 글과 책을 읽는 교육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
물론 예전에도 양반집 규수들이 학문을 알음알음 배운 건 맞지만, 이렇게 조정에서 직접 가르치는 건 또 다른 문제지.
“효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주먹구구식으로 경험을 쌓은 부모에게 배우는 것보다, 전문 장인에게 훨씬 고급기술을 배우는 게 낫죠. 뭐라도 배워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하는지, 원주민들의 호응이 큽니다.”
‘확실히 기술교육은 환영을 받는 군.’
어쩌면 밤에 집에 돌아가서, 아들과 아비가 서로 오늘 배운 기술을 비교하는 풍경이 펼쳐질지도 모르겠다.
“기술 말고 학문교육은 어떠냐?”
“에휴... 그건 솔직히 말해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정인지를 보며, 모두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운석핵꿀밤으로 인해 근본성리학은 갈기갈기 분해됐고, 자본유학을 받아들이면서 거꾸로 근본유학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나 인간의 도와 세상의 도라 할 수 있는 성리학의 요체인 이기론은 정면으로 공격받았고, 조선불교청이 생겨나면서 굳이 도교,불교사상을 끌어들여 만들어진 성리학의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따라야할 필요성도 없어진 거지.
여기에 노가다반복작업. 달리 말하면 과학적실증론이 대두되면서, 추상적인 이기론의 해석이 허물어지고 있는 상태다.
결국 근본성리학은 통치이론에서 순수철학처럼 변모해 갔고, 조선을 지탱할 기조로 자본유학이라는 유학의 변종이 자리잡은 거지.
문제는 그럼에도 유학은 여전히 조선의 대들보이고, 인의예지라는 인간의 본성과 이 본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문제 아닌가.
이건 “조선을 어떻게 다스리고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나침판이자 표지판과 같은 거니까.
“이미 사상논쟁은 지겹도록 해서 얼추 정리가 된 건 맞지만, 그건 진짜 학문을 익힌 학자들 사이에서의 이야기고... 어르신께서 주장하신 향교의 기초교육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됐죠.”
“...”
“뭐 인마.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언제까지고 뭉개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연오랑은 눈을 씰룩거리는 정인지와 이순지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약 올리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가 올려 보낸 제안서 때문에 조정이 풍파에 휩쓸렸던 걸 생각하면, 한 대 때리고 싶은 표정이다.
논란이 많은 어렵고 복잡한 문제는 다 제쳐 두더라도, 가장 기본부터 발목이 잡혔다.
애초에 조선이 추구해 왔던 학문이라는 건, 기초교육이라는 게 없으니까.
유학은 시작점은 어디까지나 통치원리에서 시작됐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것저것 참가되긴 했지만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이어진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공부라는 것도, 옛 경서를 해석해서 현실에 맞춰 꺼내 쓰는 게 보통이었으니... 결국은 달달 암기하는 수밖에 없었던 거지.
“아무리 논란이 많은 부분을 거르고 걸러도 배워야 하는 부분이 너무 많고, 또 어느 게 우위에 서야 하는지도 논란이 있죠.”
“예전에도 소학을 배웠잖아? 그럼 소학을 배우면 되지.”
연오랑도 유학적 지식이 깊은 건 아니지만 발은 담갔기에 그리 물었지만, 정인지의 불꽃 튀기는 쌍심지를 보며 얼른 시선을 피했다.
“소학이 그냥 소학으로 끝납니까? 그걸 먼저 읽으라고 한 건 다른 사서삼경의 기본이 되는 내용이니까 그런 거고, 그만큼 포용하는 범위가 넓어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끝도 없이 배워야 하는 거라고요.”
“...”
“게다가 소학만 기초교육으로 삼으면, 다른 사서삼경은 어쩝니까. 고등교육으로 넘겨요? 그 안에서 논란되는 부분은 또 어쩌고요? 학자들 사이에서야 누구 말이 맞니 틀리니 싸우는 건 상관없지만, 어르신이 주장한 대로라면 이건 앞으로 조선백성들 모두가 익혀야 하는 상식이자 기본이 되는 건데, 그걸 그렇게 얼렁뚱땅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야야. 지금껏 지겹도록 논의했을 거 아냐. 대충 결론은 나왔을 텐데?”
머리 좋은 세종이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리가 없을 터, 당연히 얼추 정리가 끝났는데 앓는 소리를 하고 있다.
“...”
세종을 들먹이자 정인지의 입은 다물어졌지만, 여전히 눈에서는 김이 풀풀 흘러나왔다.
“예.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런 겁니다. 과거 시험을 볼 생각도 없는 양민백성들에게, 서생처럼 달달 외우고 다니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고요.”
“흐음.”
“유학만 문제겠습니까. 잡학도 마찬가지에요. 어디서부터 기초고, 어디서부터 고등교육인지 자르기가 애매해서 말입니다.”
그는 푸념을 하듯 계속해서 침을 튀겨댔다.
미래야 초등,중등,고등 교육으로 쉽게 나뉜다지만, 그건 수백년간 쌓아올린 경험과 지식의 결정체다.
이 시대엔 아예 땅바닥에 터를 잡는 수준일 수밖에 없지.
그간 연오랑은 착호군을 운용하면서 억지로 구구단을 외우게 시키고, 산학을 배우게 만들었지만... 그걸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나.
간단한 사칙연산에 불과한 거고, 진짜 산학을 익힌다면 산가지를 통해 고차방정식까지 파고들 정도다. 당장 이순지가 연구하고 있는 공학계산은 같은 관원이라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대다수지.
의약? 거긴 더 답도 없지 않나. 침,뜸,약 전부 중요한데 어디서부터 기초고 어디서부터 고급인지 구별하는 기준조차 없다.
“흐음... 그러니까 쉽게 가면 한없이 얇아지고, 반대가면 한없이 두꺼워진단 말이군.”
“예. 그걸 모두가 납득할 정도의 수준으로 의견을 모으는 게 아직 안 끝난 겁니다.”
“결국은 돈 문제네?”
“돈도 돈이지만 인력도 문제죠.”
향교에서 너무 대충 가르치면 안하니 못한 꼴이 되고, 제대로 가르치면 몇 년씩 붙잡는 꼴이 된다.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할 나이가 된 백성들이 죄다 앉아서 공부만 하고 있는 꼴이지.
미래에는 이래도 되지만, 인력이 주력인 이 시대에 이러면 나라가 망한다.
“흐음. 그럼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냐?”
“어쩌긴요. 일단 조선말을 떼면 알아서 하는 거죠. 배우고 싶은 녀석들은 더 배우고, 사정이 있으면 그만 두고, 집안일을 시작하면 관두고 그렇습니다.”
“제멋대로란 말이군?”
“예. 애초에 북방에 만든 향교는 통치를 위함이었지,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요.”
‘골치 아프고만... 역시 괜히 전근대 시절에 대학은 있어도 초등학교가 없던 게 아니었어.’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주물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