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 챕터49. 성장하다 (9)
요새 하도 사람들을 섞어 대서 그나마 차별이 줄어들었지만, 당장 개혁전만해도 여진인은 조선인과 불구대천의 원수지간 아니었나.
헌데 또 삼남지방의 백성들은 함길도,평안도의 백성들을 여진인과 붙어먹는 놈이라고 멸시하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수도인 한성에 사는 사람들은 “엣헴. 난 왕이 사는 곳에서 산다.”라며 우쭐거리는 건 당연했고.
이건 통교와 만남이 미비해 뜬소문을 사실로 믿고 편견이 굳어진 거라서, 요즘은 그러한 경향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남주도와 북방은 멀어도 너무 멀다.
“이들을 가만 놔두면 어찌될까? 분열의 단초가 될 뿐이니, 궁극적으론 귀화인 모두가 스스로가 다 같은 조선인이라고 믿게 만들어야 하지.”
“그걸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킨다는 거군요?”
“지리와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도 같은 이치겠군요?”
“맞아. 뭘 아는 게 있어야 어렴풋이 라도 짐작하지 않겠냐? 좁은 고향땅에 벗어날 일이 없는 양민백성들은 정작 조선땅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북방이니 남방이니 하는 말이 머리에 와 닿겠냐고.”
“음...”
“게다가 돈과 사람이 남아돌아서 쓸데없이 옛 고려와 발해, 요, 금의 역사를 아국의 역사에 끌어오는 게 아니잖냐. 이젠 전부 조선인이 되는 거니... 이곳 남주도의 역사 또한 아국의 역사로 들어와야 하고, 이걸 통해 남주도 원주민이든 북방의 야인여진이든 전부 같은 조선인이라고 믿게 만들어야지.”
“아...”
“음.”
“모두가 동등한 교육과정을 거쳐 배우게 된다면, 한 세대만 지나도 서로가 같은 생각과 역사, 문화를 품게 될 거다.”
아직 뚜렷하게 발현되지 않은 민족성과 정체성을 교육을 통해 억지로 심어주려는 거니, 많이 배웠다고 자부하는 이순지와 정인지조차도 혀를 절래절래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실상은... 지금껏 없던 조선인이라는 걸, 교육을 통해 억지로 만들겠다는 거군요.”
정인지는 연오랑의 무서운 속내를 읽고 조심스럽게 평을 내렸다.
“맞아. 앞으로 중국과 경쟁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조선이 추구해야할 방향이지. 이렇게 같은 의식으로 뭉치고, 직업선택의 기회가 생겨 자유롭게 통교를 하게 되면, 조선백성들 모두가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넓어질 거다.”
“북방으로 남방사람이 유람을 가고, 남방으로 북방백성들이 유람을 떠나면... 서로 동질감은 더욱 깊어지고, 하고 싶은 것도 더 많아져서, 땅에 얽매이지 않는 진취적인 생각을 품게 되겠군요.”
지리에 밝은 이순지는 그런 의견을 먼저 냈고.
“그것도 그렇고... 아는 게 많고, 보는 게 많을수록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욕구도 커질 터, 어르신이 말한 기술의 발전도 영향을 받게 되겠군요.”
정인지는 교육과 기술이 엮여, 시장에 어떤 영향을 줄지 읽어냈다.
“이제 왜 교육을 시켜야 하는지 알겠냐? 이건 조정관원이나 일개 기업가들이 이끈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
“조선이 살아남고 부강해지기 위해선 영토확장을 거듭하고, 신문물을 흡수해 적용하고, 귀화인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민심이 따라주지 않으면 강제나 겁박으로 느껴질 거다.”
“그렇겠죠?”
“그런 불만이 쌓이고 지역별로 차별이 발생한다면, 또 분열로 이어지겠지. 그걸 미연에 방지하고 확장기조를 유지하려면 백성들 모두가 스스로를 갈고 닦아 성장하려는 마음을 품어야 할 거다. 조정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모험을 감행할 마음을 심어줘야지.”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넵!”
연거푸 이어지는 발언에 모두가 각오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일은 개입을 해야겠다. 내가 조정에 제안서를 보낸 게 벌써 언제야?”
“...”
연오랑이 한소리하자, 괜히 정인지와 이순지의 목이 자라목이 됐다.
향교와 교육에 관해서 의견을 제시한 게 벌써 2년을 넘었는데, 무사부를 제외하곤 뭐 제대로 진행된 게 없지 않나.
“조정의 일에 개입하는 걸 꺼려왔지만, 더 이상 두고봐선 안 될 것 같아. 추수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남주에 머물면서 계획을 짜야겠다. 한성에서 데려온 관원들 중에서, 이 일에 관련이 있는 관원들을 준비해 놔라.”
“흡...”
“예에...”
연오랑이 당차게 말을 내뱉자, 모두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이 흐려졌다.
그가 직접적으로 움직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익히 알지 않나.
다들 “나 죽었다.” 생각하고 밤샘작업을 계속해야 할 거다.
순시를 마치고 남주에 돌아오자, 낯익은 이들과 낯선 이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오랑과 남주도 관원들의 의견을 첨부한 각국의 외교서안에 대해서, 드디어 조정의 답서가 내려온 건데... 연오랑은 마중을 나온 이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인물은 한동안 뜸했던 인수부윤 성억과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며 일을 배우고 있던 원창명.
헌데 그보다 앞에 나와서 히죽히죽 웃는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가 어색한 눈빛을 숨기지 않고 다가가자, 청년이 먼저 환하게 웃으며 넙죽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감. 저 온녕군溫寧君 이정입니다.”
“아...!”
연오랑이 아는 척을 하자 그게 꽤 기뻤던 걸까? 청년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인 친동생이고만? 어쩐지 조금 닮았다 했다.’
“오랜만이구나.”
“헤헤. 예. 대감.”
그래도 나름 왕자인데 채신머리없이 실실 웃어댔지만, 관원들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연오랑 앞에서 저러는 게, 엄청 이상한 건 아니니까.
“오느라 고생했는데... 일단 씻고 보자.”
“예. 대감.”
연오랑이 성억에게 눈빛을 뿌리며 말하자, 모두가 얼른 자리를 비켜줬다.
이윽고 깨끗하게 씻고 밥도 다 차려먹고 난 후에, 어둑해지는 노을빛을 뒤로하고 등잔불을 밝게 키운 관청 꼭대기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정식으로 진행될 이야기가 아닌 터라, 모인 사람은 연오랑과 성억과 원창명, 온녕군 이정뿐이었다.
“편히 앉아라.”
“예. 형님. 여기도 이 의자가 있군요?”
“내가 만든거니까.”
온녕군 이정은 썬베드 마냥 거의 눕듯이 앉는 의자에 냉큼 몸을 날리면서 연신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친한 척을 하며 달라붙는 게 퍽 낯간지럽긴 하지만... 나쁠 건 없지 않나.
연오랑은 피식 웃으며, 옆에 놓인 미지근한 차를 들고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한 오년쯤 됐나?”
“예. 아마 그쯤 된 것 같습니다. 여전하시군요?”
“너는 조금 큰 것 같다?”
“헤헤.”
이정은 허물없이 머리를 살포시 긁으며 웃고 말았다.
온녕군 이정은 태종의 서자이자 공녕군 이인의 친동생으로. 이인이 착호군에 처음 들어왔을 때, 꼬마 이정이 자주 찾아와서 본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이인과 연오랑이 떨어져서 각자 업무에 충실했으니, 자연스럽게 이정과도 볼 일이 없었지. 연오랑은 애초에 왕족에게 별 관심도 없었고.
그때를 기억하면 훌쩍 커버린 지금의 모습이 낯설긴 한데... 또 자세히 보면 어릴 적 모습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네가 어쩐 일이냐?”
“흐흐.”
온녕군이 웃으며 답을 흐리자, 원창명이 조심스럽게 답을 대신했다.
“온녕군께선 이번 사절단의 대표로 오게 되었습니다. 정식으로 외교무역부 관원이 되셨고요.”
“오...?”
“열심히 배웠습니다. 형님.”
연오랑이 살짝 놀란 눈빛을 숨기지 않자, 온녕군 이정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야... 얘들도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고만?’
그는 아무도 모르는 미래를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역사에서 안 그런 사람이 어디있겠냐만... 연오랑으로 인해 인생이 가장 많이 바뀐 이들을 꼽으라면, 아마도 왕족일 거다.
당장 이인이나 이정이나 역사에 별 족적을 남기지 않고 쓰러져 갔을 인물이지만, 지금은 정반대니까.
“조정대신들이 별 말 없었고?”
“제 형님도 일을 하고 있는데, 제가 문제될 건 없지 않습니까. 저 정말로 열심히 배웠습니다. 나름 우수한 실력으로 과거에 합격했고요.”
연오랑이 믿지 못해 슬쩍 성억을 바라보자,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이거 확실히 뭔가 틀이 잡히는 건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조선은 개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정에 출사한 왕족이 꽤 된다. 다만 이들은 계승권을 포기한 이들로 태조의 자식들이나 태조형제의 자식들이지 않나.
그들과 세종의 이복형제인 서자들이 조정에 출사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지.
‘하지만... 이인이 일을 너무 잘했단 말이지.’
허나 공녕군 이인은 반강제로 착호군 1기에 들어왔지만, 지금껏 혁혁한 공을 세우고 평판도 좋지 않나.
어쩌다보니,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버린 꼴이 된 거다.
“착호군에만 있었을 텐데, 용케도 외교무역부로 들어갔네?”
“형님이 천하가 좁다하고 주유하고 있는데, 저도 한몫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서신은 그만 보고, 제 눈으로도 세상을 보고 싶어져서 말이죠.”
“음...”
‘너무 적극적이라서 오히려 낯설긴 한데....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군.’
연오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게 나름 격려라 생각했는지 이정은 다시금 함박웃음을 짓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꼬인 건, 사실 당연한 수순이었다.
태종은 착호군을 이끌었고, 거의 분조나 마찬가지인 덩치를 이끌고 조선팔도를 돌아다녔다.
각 도의 중심도시에 행궁을 만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문제는 태종이 그렇게 궁 밖에서만 살고 있으면, 왕비들과 왕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양녕,효령대군이야 나이도 많고 이미 각자 갈 길을 가고 있으니 따로 나와서 살면 그만이지만, 세종보다 어린 왕자들은 처지가 묘해진 거지.
해서 태종은 왕비와 자식들을 행궁이나 마찬가지인 착호군으로 돌아가면서 불러들였고, 이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인 그놈이 부채질을 엄청 했을 거 아냐.’
이인은 연오랑을 따라다니면서 천하를 싸돌아다녔으니, 그가 친동생과 이복동생들에게 보낸 서신은 별천지와 같았을 거다.
평범한 양민백성들도 조선 밖 낯선 세상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고, 궁에서만 사는 왕족도 크게 다를 건 없다.
그렇게 이정은 어린 시절부터 펌프질을 당했고, 태종 밑에서 머물며 착호군에 합류해서 온갖 일을 다 배우기 시작.
‘더불어 얘들은 운석핵꿀밤 세대와 개혁 세대에 걸쳐 있잖아? 생각하는 게, 기존 대신들이나 나이 먹은 왕족들과는 아예 다를 거야.’
세상이 벌써 두 번이나 개벽했는데, 일반백성들보다 아는 게 많은 왕족이라면 더욱더 체감하는 게 다를 터... 원래 역사의 왕족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다른 왕자들도 마찬가지인가?”
“음...”
왠지 말하기가 껄끄러웠는지 잠시 머뭇거리자, 역시나 가장 말단인 원창명이 입을 조잘거렸다.
“경녕군께서는 내수사 일을 돕고 계시고, 혜령군과 근녕군께서도 외교무역부에, 희령군께서는 임시로 악학정비를 담당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호오...”
‘이거 봐라.’
연오랑은 대충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아차렸다.
태종의 착호군은 실무행정기관이나 마찬가지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왕자들이 굴렀다면 여느 관원 못지않은 실력과 경험을 쌓았을 거다.
그렇게 각자 특기를 발현했으면 조정부서에 뿌려야 하는데... 왕실기업이라 할 수 있는 내수사가 발족한 이상, 돈 관리를 하는 부서에 보내는 건 무리.
군부에 보내는 건... 지금은 문제가 안 되겠지만, 훗날을 대비해야하니 무리.
역시나 만만한 건 교육이나 외교 쪽 아니겠나.
‘왕자라면 얼굴마담으로는 제격이겠지.’
예전 명나라 시절에도 사은사로 왕족이 포함되는 경우가 흔했으니, 외교무역부의 활동을 그 연장선쯤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
특히나 상하관계가 명확하지 않는 지금의 외교관계에서, 조선 왕자가 끼어들면 그 무게감이 훨씬 중해지지 않겠나.
‘더욱이... 혈기 왕성한 어린 왕족들이라면, 대신들의 꼼수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반겼을 거야.’
지금껏 조선의 시선은 오롯이 중국에만 향해 있었으니, 다른 외국에 대해서 아는 게 뭐 얼마나 있을까.
허나 이젠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답지. 순백의 설원에 첫발자국을 찍는 꼴이니, 사서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우는 것 아닌가.
이 영광을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왕자들이 외교무역부를 선호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네가 이번에 사절단을 이끌고 움직인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일단은 자동,광주에 들린 후에 참파에서 조차지를 마무리 짓고, 대리에 가선 한동안 머물면서 구경하고 올 생각입니다. 흐흐. 형님은 저 먼 서역으로 갔지만, 대리에 가본 사람은 제가 처음이 될 겁니다.”
“...”
어째 콩고물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 나쁠 건 없어 보였다.
“조정에선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대감과 남주도 관원들의 의견이 거의 수용됐고, 약간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자 성억이 말을 받아 간략히 설명을 해줬다.
조차지를 만드는 건 그대로 진행. 건설부 관원이 가서 설계를 하겠지만, 인력과 자재는 전부 자동, 광주상인회가 해결해할 거다.
참파의 현항(다낭)도 마찬가지. 이쪽도 바로 진행할 계획이라서, 아예 배 한척에 가득 철괴를 실어서 가져왔단다.
“실물을 가져왔으니,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지 않겠습니까? 척 봐도 아국산 강철의 품질이 으뜸인 걸 알아차릴 테니, 현항의 조차지는 문제없이 진행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