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 챕터49. 성장하다 (10)
“계획보다 더 뜯어내서 말이지?”
“예. 일단은 저희에게 일임됐는데, 이곳에서 정보를 모아보니 참파의 사정이 좋지 않더군요. 대월과의 싸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으니, 현항을 최대한 빨리 아국에게 넘기고 싶어 할 겁니다. 더 뜯어내야겠지요.”
“음.”
성억은 세종,태종,연오랑 사이를 오가면서 연락책 역할을 담당해왔고, 연오랑이 잠시 휴식기를 갖는 동안에도 역할은 바뀌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세종,태종의 의중을 더 잘 알 테니, 참파를 뜯어먹는 것 또한 두 왕의 의중이 담겨 있을 거다.
“전하께서도 현항(다낭)을 중히 보시는 모양이군?”
“예. 조차지로 인해 남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이 완성되고 있지 않습니까. 일단은 현항을 차지하고나서, 여유가 된다면 참파 남부에 또 하나의 조차지를 얻어낼까 생각중입니다.”
“호오...?”
‘땅따먹기에 진짜 맛이 들렸나 본데?’
연오랑은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조정을 보며,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디로 잡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해군전함 두척을 따로 빼서 이에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현항에 도착하고 난 후에는 남방반도 해안가를 위아래로 훑으면서 측량을 하고, 동시에 조차지에 어울릴만한 지대를 찾을까 합니다.”
안 그래도 빠듯한 함선을 동원할 정도면, 진심으로 움직일 생각인가 보다.
“북쪽 해안을 돌게 되면, 대월과 마찰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전함이긴 허나 일단은 무역품을 싣고 움직일 계획입니다. 대월이 뭐라 할지도 모르지만, 거래를 하러 왔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더욱이 해안 가까이를 돌면서 움직이는 게,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지요.”
“흐응.”
오리발을 내미는 꼴이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시대의 상선은 망망대해보다, 눈에 육지를 두고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는 게 오히려 보편적이다.
조선전함이 측량을 하는 게 뭔 뜻인지도 자세히 모를 거고, 설령 안다고 한들 남들 다 하고 있으니 뭐라고 하기도 힘들 거다.
“물론 선물은 잔뜩 싣고 있겠군?”
“예. 뭐... 그치들은 아국과 다르지 않습니까.”
연오랑은 대답대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뇌물이 선물로 통용되는 시대이니, 설령 각을 세우더라도 북방특산물을 몇 개 던져주면 좋다고 환영할 거다.
‘다만 남쪽에도 조차지를 만들 생각이라는 건...?’
“대리가 제시한 제안을 받아들인 모양이군? 참파와 진랍국 남부의 조차지를 얻어내는 것 말이야.”
“예. 일단은 조차지를 하나 더 얻고 난 후에, 상황을 보면서 움직일 계획입니다. 저희가 해안을 순찰하면서 대월을 압박하면, 참파가 더욱 몸이 달지 않겠습니까?”
“여유가 되나?”
“경흥의 나진포구에 새로운 선소를 건설하지 않았습니까. 자재와 장인은 준비되어 있었으니, 그곳에서 새 전함을 만들기 시작하면 조금 여유가 생길 것 같습니다.”
“오... 거긴 쾌선을 만들기로 한 곳 아니었어?”
“당장은 쾌선이 급한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쾌선은 다른 민간선소로 넘길 예정입니다.”
“좋군.”
‘벌써 만들었어? 나쁘지 않네.’
자기도 모르게 흥이 올라 박수를 치고 말았다.
조정이 진심전력으로 달려들고 있는 게 확실한 모양이다. 이렇게나 빨리 선소가 완성될 줄은 연오랑도 몰랐으니까.
“그럼 대리도 별 건 없겠군?”
“음. 그게... 백문이 아니라 이백문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
전부 순탄하게 흘러가서 싱겁게 물었건만, 되돌아온 대답이 뒤통수를 치고 말았다.
“대리가 원하던 물량의 두 배나 되는데? 갑자기 왜?”
“다른 건 아니고... 조정에선 경애도(해남도) 진출을 내년에 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끄응...”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해남도를 경락하는 게 얼마나 골치가 아플지 모를 리가 없지 않나. 그럼에도 이러한 계획을 짰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
“왜 갑자기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려는 거냐?”
그가 살짝 싸늘한 기운을 담아서 묻자, 성억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상왕전하께서 평안도의 개간사업에 속도를 내고자 하십니다. 동부산맥을 빠르게 개간해서 그곳의 광산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허...”
‘그 영감이 갑자기 왜 이래?’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평안도 동쪽은 개마고원과 닿아 있다. 그곳은 연오랑조차도 착호군으로는 답이 없어서, 함길도 해안가를 중심으로 개척하는 걸로 방향을 돌리지 않았나.
그럼에도 노인네가 조바심을 내기 시작하는 건, 단 하나의 이유 밖에 안 떠올랐다.
“설마...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지?”
“예? 아닙니다. 대감.”
연오랑이 혹시나 싶어서 묻자, 성억은 반색하면서 얼른 손을 내저었다.
“진짜야?”
“예. 예전처럼 정정하십니다.”
“흐음.”
‘잠깐만... 그러고 보면 벌써 몇 년이 지난 거지?’
태종은 원래 역사보다 거의 8,9년은 더 오래 살고 있는 상황.
연오랑은 제발 오래도록 팔팔하게 살길 바라는데, 지금 역사에선 진짜로 환갑을 넘기지 않았나.
‘태조도 오래 살았잖아? 태종도 충분히 오래 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세종이 즉위한지 십년이 넘어서 조선이 흔들릴 일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태종이 뒤에서 받치고 있는 거랑 없는 거랑은 차이가 있지 않나.
‘괜찮겠지... 태종이 천수를 누리라고 고생한 게 얼만데.’
다시금 혹시나 하는 우려를 다독였다.
자신의 손끝 하나로 산이 깎이고, 도시가 생기고, 길이 열린다. 스트레스 받을 일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
위생상태가 개선되었으니 쓸데없는 잔병에 걸릴 일도 줄어들었고, 매일 같이 말 타고 돌아다닐 테니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을 거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 예전 궁궐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착호군 행궁에서 더 잘 먹고 지낼 거야.’
조선이 온갖 외국문물을 받아들여 조선화시켰는데, 식재료와 요리가 여기에 빠질 리가 있나.
더욱이 착호군에는 귀화한 외국인이 많기 때문에, 그간 없던 다양한 조리법 또한 흡수되고 있을 터... 농담이 아니라 수라상보다 더 거창하게 차려먹고 있을 거다.
‘의원도 마찬가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잖아?’
의술이 발달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노인들에게 치명적인 치과치료 또한 알게 모르게 발전하고 있다.
당연히 연오랑이 시작한 양치질 때문으로, 그는 착호군에게 버드나무잎이나 구운 소금으로 강제로 이를 닦게 만들었지.
돼지털 등을 이용한 칫솔을 안 만들어본 건 아닌데, 아무래도 썩는 물건이다 보니 오래 사용할 수가 없어서 폐기했다.
그야 미래인이니 세균의 존재를 알고 한 달쯤 사용하다가 버릴 수 있지만, 뭐든 아까운 조선인이 칫솔을 함부로 버리겠는가. 그건 오히려 병균을 몸에 집어넣는 꼴이다.
집집마다 검사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터라, 애초에 시작조차 안 했다.
다행이라면 치통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모든 백성들이 충치로 고생하지 않는다는 점.
아마도 설탕이나 당분이 많은 음식이 흔치않다보니 그런 건데... 이걸 다행이라고 봐야할지 궁핍하다고 봐야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시대에도 어설프게나마 틀니 비슷한 게 있는 터라, 태종은 나이를 먹었어도 고기도 잘 먹고 지낼 터... 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막말로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해줘? 실력 있는 군의관과 의원이 죄다 태종에게 달라붙어서 식습관과 운동까지 관여하고 있는데.’
태종은 과연 그가 보이지 않는 뒤에서,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확실하지?”
“예. 확실합니다.”
혹시나 싶어서 다시금 되묻자, 모두가 단오하게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럼... 심중에 뭘 품고 있는지는 모르고?”
“예...”
물어본들 의미가 있나.
음흉한 태종이 속내를 시원하게 밝힐 리가 없을 거다.
보아하니 세종도 착호군을 이끄는 태종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데... 어찌됐건 가능하다고 봤으니 말리지 않은 걸 테다.
“흐음... 경애도(해남도)에 사는 이족들을 대월이 빨리 데려가기 위해선 대리가 힘을 꽤 써야할 테니, 그 대가로 화포를 후하게 제공한다는 거군? 나아가 개척에 필요한 자재 또한 대리를 거쳐 코앞의 대월에게서 얻어내고.”
“그렇습니다. 그들도 내심 백문도 많다고 여기고 찔러 본 걸 테니, 이백문을 제시하면 꼼짝 없이 얽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에 따른 대금은 빠짐없이 받아낼 겁니다.”
“흐흐. 제가 가서 아주 탈탈 털어오겠습니다. 예전에 형님이 북평부와 산동의 물산을 쏙쏙 빼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엔 제 차례죠.”
온녕군 이정은 자기 형에게 뒤쳐질 수 없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토해냈다.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이 꽤 있습니다.”
연오랑이 영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서 그런지, 성억은 얼른 설명을 이어갔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경애도(해남도)의 한족 중 대략 7,8만명은 본토로 이주할 겁니다. 남주도를 거쳐서 가야하긴 하지만, 이미 남주도를 오가며 경험을 쌓았으니 보다 매끄럽게 진행되겠지요.”
“경애도에서 거주할 사람이 그만큼 줄여서, 보급 부담을 줄인다는 말이군.”
“예. 또한 큰 재해가 없는 이상 올해는 본토와 중국내륙 모두 풍작이 예상됩니다. 특히 삼남으로 보낸 농부들이 적응을 빨리해서, 그곳에서 나올 소출양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음.”
양전사업을 대만원주민으로 진행하고 그 대신 평안도와 황해도의 농부를 삼남으로 이주시켰는데, 그 수가 무려 5만명이 넘었다.
제대로 씨를 뿌렸다면 자연재해가 없던 올해는 당연히 풍작을 거뒀을 거다.
“눈에 띌 정도로?”
“작년에 수확을 시작한 김포,철원,함흥평야에선, 올해 그 배에 가까운 소출을 기대하고 있고... 만경평야 또한 얼추 수확이 기대되고 있습니다.”
“허...”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미래에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로 유명한 호남평야는 사실 일제시절에 대규모 치수공사를 진행하고서 만들어진 평야다.
이 시절에는 습지, 갈대밭, 잡초밭이었는데, 툭하면 만경강이 범람해서 물바다가 되던 곳이지.
그럼에도 옥토인건 분명해서, 알음알음 농사를 짓던 곳이었다.
이곳은 무려 십년전에 황희가 전라도의 양전사업을 진행하면서, 만경강 치수공사를 시작했는데 그게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
워낙 만경강 물줄기가 길기도 하거니와, 현대문물의 도움이 없이 인력과 축력으로 치수공사를 해야 되지 않나.
그렇다보니 상류에서부터 야금야금 진행해 왔고, 완성된 구역을 중심으로 개간지가 만들어졌는데... 그게 드디어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모양이다.
“제대로 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벌써 가시적인 성과가 보인다고?”
“예. 워낙 옥토이기도 하고, 그간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곳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빈 땅이 대부분이라서 양전사업을 하기도 편했고요.”
“오...”
자신만만하게 답을 하는 성억을 보니,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저렇게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오고 효과가 보인다면, 더욱 가속화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와... 진짜 김제평야가 슬슬 나오는 건가? 그럼...?’
“사람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 그저 우는 소리는 아니겠군.”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김제 일대에서 치수사업을 진행하려면, 사람은 많을수록 좋을 겁니다. 해서 경애도(해남도)의 한족은 평안도로도 가겠지만, 전라도로 갈 겁니다. 거긴 고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니, 조선화교육도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겠지요.”
‘확실히... 조정관원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열심히 일을 하는 모양이네.’
지금의 조선이 쌀에 진심인 건, 굳이 농본주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쌀이 곧 화폐로 취급되는 조선에서, 중국산 쌀에 의존하는 건 누가 봐도 위험한 일 아닌가.
그러니 식량자급화. 적어도 쌀만큼은 100%의 자급률을 이루길 바랐고, 무역을 끊을 수 없는 현재상황상 무엇보다 우선시될 필요성이 있었지.
‘어쩌면 조정대신들이 이앙법과 양전사업에 크게 반대하지 않은 건, 개혁 이전부터 진행되어 온 의주의 무역 때문에 자극을 받은 걸 수도 있겠군.’
이미 그 시절에도 의주를 통해 중국곡물을 들여왔으니, 위기감이 눈에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본토는 문제가 없다는 거고... 중국은?”
“마찬가지입니다. 그쪽도 이젠 함부로 저희의 손을 놓을 수가 없는 형국이죠. 경애도를 차지하더라도, 문제없이 쌀을 넘길 겁니다.”
중국의 미곡시장의 경우에는, 축소되고 분열된 지금의 형세가 오히려 조선에게 이점을 주고 있었다.
옛 명나라처럼 통일왕조 시절에는, 강남의 풍족한 물산을 농사가 힘든 변방오지로 나르는 게 국가사업이었다.
조선만큼은 아니지만 중국도 나름 환곡정책을 실시했으니, 자기 백성인 이상 어떻게든 먹여 살려야 했으니까.
허나 지금은 섬서몽골에게 쌀을 팔 리가 없고, 사천과 대리는 자급자족을 완성. 호시탐탐 다른 성을 노리는 북평부에게도 쌀을 팔 리가 없다.
결국 내륙의 옥토를 가지고 있는 미곡상들은 언제나 쌀이 남아돌았고, 그래서 조선이 중국미곡시장의 큰손이 되어 매년같이 쌀을 수입할 수 있었던 거지.
또한 관이 없어지고 호족이 중심이 된 이상, 방대한 농지를 소유한 대호족들은 전보다 더욱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성으로 쪼개져 연맹을 이룬 이상, 같은 미곡상이라고 해도 다른 연맹에 속해 경쟁을 해야 하는 바.
전처럼 전국단위의 담합이나 매점매수와 같은 행동을 하는 건 힘들어졌고, 판매처 또한 중국대륙에 국한된 게 아닌 조선, 요동, 일본, 남방등으로 다분화 되지 않았나.
결국 거래처를 유지하고 어떻게든 곡물을 팔아야 곧 자신의 힘이 강해지는 거니,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농업기술을 끌어올리고 생산력 증대에 힘을 쓸 수밖에 없다.
결국 해가 지날수록, 생산량을 조금씩 늘어가고 있는 추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