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 챕터50. 기틀잡다 (1)
“그래서 식량조달은 문제가 없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많이 사서 쟁여놓으려는 생각이군.’
묵은쌀이 햅쌀에 비해 맛이 없는 건 당연하지만, 이 시대엔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쌀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흐음... 계획대로만 된다면 괜찮겠네. 남주도에서도 작게나마 추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벌써 수전을 만드신 겁니까?”
“아니. 수전은 못 만들었지만, 굳이 벼만 키워야 하는 법은 없잖아? 다른 작물을 키웠다.”
“아...”
다들 이해했는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동아시아에서 쌀을 중시한 건. 같은 기간과 노동력 대비 가장 효율이 좋은 작물이기 때문이지, 쌀 말고 다른 작물을 못 키워서가 아니다.
남주도에선 치수사업을 하면서 야금야금 논을 만들어놨지만, 파종시기를 놓쳐 벼를 못 키운 것일 뿐.
잘 정돈된 빈 땅을 놀릴 필요가 없으니, 파종시기가 늦는 작물을 심어서 대체했다.
“게다가 사탕나무밭을 엄청나게 크게 만들었거든. 중국에서 식량을 사오는 건 문제가 없을 거다.”
“그건 기대가 되는 군요.”
“맞습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조정에서도 내심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연오랑의 자신만만한 말에, 이정도 한마디 덧붙이며 눈을 반짝였다.
조선에선 결코 쉽게 맛보기 힘든 설탕이 수중에 들어왔으니, 아마 애어른 할 것 없이 전부 설탕을 기대하고 있나 보다.
“그리고...”
“...?”
놀랄 일은 그게 끝이 아닌지, 성억은 잠시 말을 끌었다.
“조정에서 드디어 노비철폐령을 내렸습니다. 유예기간은 2년으로 했습니다.”
“허...?”
‘이것 봐라?’
연오랑은 뜬금없이, 하지만 올게 왔다는 생각이 들어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지방에서 문제가 생길 일은 없겠지? 대처방안도 준비되어 있고?”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주집안보다 기업집안의 수가 웃도는 걸 넘어서 압도한지 오래인데, 그들이 어쩌겠습니까. 조정의 기조는 바뀐 적이 없었으니... 다들 이런 날이 올 걸 알고, 속으로는 준비하고 있었을 겁니다.”
“...”
지난날의 모든 작업을 눈으로 지켜본 성억은, 비릿한 미소를 숨기지 않고 능청스럽게 답을 했다.
‘하긴 개혁이 시작된 지 벌써 십년이 넘었고, 태종 때부터 이어져 온 걸 생각하면 이십년이 넘게 흘렀잖아? 아니지. 태조 때부터 신분제가 흔들렸던 걸 생각하면 사십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까...’
원래 역사에선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 역사에선 충분히 가능한 일.
연오랑은 지난날 태종의 발자취를 떠올리며, 잠시 과거를 돌아봤다.
새나라 조선은 타락한 고려를 대체하기 위해 탄생했고, 지난날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새로운 국가기조이자 근본을 찾아야했다.
그래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양반사대부가 등장했고, 왕실과 조정은 양반사대부를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삼아 힘을 키워나갔다.
이 당시에는 이게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다.
중국왕조나 한반도 왕조나 통치체제에 있어서 유학이 크든 작든 적용되고 있었으니, 유학의 최신판인 성리학을 기조로 삼은 건 어찌 보면 최선의 판단이었지.
하여 중앙집권과 왕권강화에 힘쓰던 태종은 지방호족들의 권력과 이권을 뜯어내어 조정으로 흡수하고, 그들의 이권을 양반사대부에게 넘기려는 작업을 진행하려 했다.
허나 운석핵꿀밤이 모든 걸 뒤집어 놓았다.
조선사상계는 갈기갈기 찢어져서 분열되었고, 고려의 색채를 지우고 지방호족을 찍어 누르는 일에 힘써야할 조정은 말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결국 성리학을 기조로 삼는 건 뒤로 미뤄졌고, 태종에게 남은 목표와 목적은 중앙집권과 왕권강화밖에 없게 된 거지.
안 그래도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일은 계속 벌어졌다.
원래 역사에선 없던 자잘한 반란이 연거푸 터지면서, 그 반작용으로 원래 역사보다 훨씬 과격한 사병철폐와 비대한 중앙군창설 및 광범위한 노비속량이 이어지게 됐다.
‘그걸 생각해보면... 개혁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신분제는 흔들리고 있었던 거야.’
원래 역사라면. 국정운영의 파트너가 된 양반사대부가 지방호족을 박살내며 떨어진 부스러기를 집어먹고 커야하지만, 도움도 안 되는 놈들을 태종이 예뻐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건데... 지방호족에서 양반사대부의 밑으로 들어 갔어야할 노비들이 대거 양민으로 속량된 거지.’
그 후로도 꾸준히 노비를 속량시켜 양민으로 만드는 작업을 이어왔으니, 원래 역사보다 훨씬 적은 수의 노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면서 진행했던 태조 때의 개혁시절에도, 고려귀족과 사원의 노비를 엄청나게 속량시킨 전례도 있었고.
‘태조,태종때에는 천민노비를 양민으로 만드는 것에 주력했다면... 세종 등극 후부터는 천민과 양민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던 신량역천인이 전부 양민이 됐고, 양반사대부와 향리로 대표되는 지방호족을 양민으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지.’
결국 조선 건국부터 지금까지, 신분제의 변동은 계속 진행되어 온 거나 마찬가지다.
‘무려 사십년. 두 세대에 가까울 시간이 흘렀으면, 그리 빠른 것도 느린 것도 아니겠네.’
“이제 끝을 볼 때가 되긴 됐군.”
“...”
“...”
연오랑의 속마음이 튀어나오자, 모두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문제는 역시나 돈인데...”
“...”
돈 문제를 거론한 건 사실 사노비가 아니라 공노비가 문제라서 그렇다. 지주집안은 어떤 식으로든 먹고 살만하니까, 사노비를 부리는 거니까.
그간 나라 소유의 공전을 붙여먹던 공노비는 이미 양민으로 속량된 지 오래. 남아 있는 공노비는 말 그대로 관아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필수적인 인력들이다.
앞으로는 이들을 전부 계약직 사원으로 고용해야 하니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걸 시행하지 못하고 뒤로 미루지 않았나.
‘달라진 게 뭐지?’
“이젠 감당할 수 있단 말이지?”
의구심 섞인 질문을 던져보지만, 성억은 자신만만하게 답을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올해 예상 세수는 역대최고를 기록할 예정입니다.”
“어째서?”
“남주도 원정에 전비가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반대로 그만큼 많은 물량을 남방시장에 팔 수 있었으니까요.”
이건 연오랑이 예측했던 건 아니었는데, 성억은 오해를 하고선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감탄을 표했다.
본래라면 훈련과 순찰에 열중했어야할 해군이, 지금은 수송선단이자 무역선단으로 활동한 꼴이 되지 않았나.
전에 없던 남방시장을 개척하고, 또 해군함선이 직접 찾아가 거래를 하다 보니 예상외의 부가소득을 쏠쏠하게 올린 거지.
조선전함 한척은 중국상선 3,4척의 물량과 맞먹으니, 보급함대가 한번 오갈 때마다 중국상선 백척이 넘는 물량이 시장에 풀리는 꼴이 된 거다.
“재정부 관원들의 눈이 뒤집혔겠군.”
“그렇습니다. 관의 무역만으로도 이 정도 소득을 얻었으니, 만약 중국처럼 민간상단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얼마나 많은 무역세수를 얻겠습니까. 관이나 기업이나 다들 몸이 달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조선기업에 진출하려는 집안도 덩달아 늘어나겠군.”
“그 뿐이겠습니까. 평안도의 광산기업들도 수익을 얻고 있고, 원주민을 동원해 본격적으로 개발을 하는 터라 새로운 광맥이 연이어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 여기까지 생각한 건가?”
“...?”
연오랑이 뜻 모를 소리를 내뱉자 다들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는 가볍게 손을 내저어 흘려보냈다.
‘노비제가 폐지되면 기존 지주집안은 기업으로 변모해야 할 터... 그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선 꽤나 탐스런 먹잇감이 필요할 거잖아? 큰돈이 들지만, 앉아서 헤엄치는 거나 마찬가지인 광산과 조선기업을 풀어주려는 거군.’
그는 세종이 분명 여기까지 생각하고 움직였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럼 공노비를 전부 속량시켜도 괜찮겠군.”
“적어도 먹여 살릴 돈은 준비해 놨습니다.”
“사노비야 뭐... 다른 기업 집안이 있으니 어련히 따라가겠고?”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노비를 이용한 사업은 금지되어 있고, 말을 안 듣는 집안은 사정없이 쥐어 팼다.
“아니. 내 노비 가지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데, 왜 나라에서 난리냐!”라고 외칠 수도 있지만, 씨알이나 먹히겠나.
조정은 둘째 치고... 기업집안은 월급 줘가면서 사원을 부리고 있으니, 노비집안이 꿀을 빠는 걸 가만 지켜볼 리가 없었지.
지금껏 계속해서 압박해 왔으니 아직까지도 지주로 남아 있는 집안은 땅 꽤나 있는 집안일 터. 소작이 금지된 이상, 월급 주는 농부를 고용하는 농산기업으로 변모하게 될 거다.
‘뭐. 실패해서 망하는 집안이나, 노비를 다 팔아넘기고 끝까지 버티려는 작자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알아서 양민이 되는 거니 세종은 신경도 안 쓰겠군.’
“하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닐 텐데.”
“...?”
“노비를 꼭 부잣집만 거느리고 있는 건 아니잖아?”
“음.”
노비는 양반이나 지주가 아니어도, 일반 양민들 중에서도 한두명씩 일꾼으로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앞으로는 그들에게 삯을 주고 고용해야 할 테니, 양민들은 “그 돈을 줄 바에는 그냥 소유를 안 하고 만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부지기수 일 거다.
‘작게 보면 한두명이지만, 조선전체로 보면 수만명이잖아? 세종이 이걸 놓칠 리가 없는데...’
그는 말없이 계속 생각에 잠겼고, 이내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잠깐만. 이거... 해남도 정복을 괜히 서두르는 게 아니잖아?’
노비철폐령이 뜬금없이 튀어나왔다 했는데, 이제보니 서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였다.
“어차피 경애도(해남도)를 경락하기 시작하면 조선백성들을 이주시켜야 할 텐데... 자리 잡지 못한 사노비와 공노비를 옮기려는 거냐?”
“그렇습니다.”
“아... 그게 그렇게 연결되는 군요.”
성억은 다시금 감탄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외교무역부 관원이지만 이쪽 일에 관련이 없던 이정은 이제야 깨닫고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어차피 노비들 대부분은 농사일이나 잡일을 하던 이들일 테니, 경애도에서도 농사를 짓게 되겠지. 기업집안 또한 진출을 하게 될 텐데, 어쩌면 노비철폐령에 따라 노비를 토해낸 집안 중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이주를 하는 집안이 있을 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남주도로 이주 한 백성들이 꽤나 성공적으로 정착하지 않았습니까? 남주도나 경애도나 빈 땅은 많을 테니, 자기 땅을 갖길 바라는 노비들이라면 이주를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음...”
노비는 평생 남의 밑에서 살면서 남의 땅을 일궜으니, 자기 땅이 생기는 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원하고 있을 거다.
이 시대 그리고 지금 역사에선 노비제가 완전히 고착되지 않아서, 조선중후기에 등장하는 부유한 노비 따윈 없고 진짜 일꾼으로서의 노비가 대부분이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사실 따지고 보면 다 똑같은 인력인데, 왜 생돈을 써가며 한족을 조선으로, 조선인을 해남도로 옮기냐고 물을 지도 모른다.
허나 조선화를 시키려면 무조건 섞는 게 정답.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끌고 가야, 해남도 한족들의 고정관념과 미련이 전부 박살나서 순순히 조선인이 되는 걸 받아들이지 않겠나.
더욱이 이렇게 강제적으로 노비가 대거 시장에 풀리게 되면, 조선백성들 사이에서도 묘한 분위기가 흐를 게 분명. 그럴 바엔 아예 싹 다른 곳으로 치워버리는 게,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해는 되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전부 머릿속으로는 납득이 되지만, 아직도 근본원인은 감이 안 잡혔다.
왜 이렇게 급하게, 잘못하면 탈이 날 수도 있는 정책을 밀어붙이는 걸까?
‘왜지? 왜 벼랑 끝으로...’
그는 입속에서 “왜지?”라는 의문을 혀로 계속 굴리다가... 번쩍 번개가 머리를 때리는 기분이 들고 말았다.
‘잠깐만.... 참나. 뭐야. 내가 쓰던 걸 따라하는 거잖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보니, 이게 어째 많이 보던 행태 아닌가.
연오랑의 표정이 변하는 걸 똑똑히 지켜보던 성억은, 자기도 모르게 빙긋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제보니 다 알면서 그를 시험하고 있던 모양이다.
“청출어람이 따로 없군.”
그가 허탈한 목소리를 토해내자.
“...?”
“역시 대감이십니다.”
온녕군 이정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눈동자에 물음표를 그렸지만, 태종,세종과 밀접한 성억은 자기도 모르게 읍을 하고 말았다.
“한번 더 조선을 흔들려는 거구나.”
“대감께 배운 수법 아니겠습니까. 사람이나 나라나... 참으로 묘해서 죽을 고비까지 다다르면 없던 힘도 생기는 법이더군요.”
“허참...”
과거. 연오랑은 대마도민 거지떼 폭탄을 떨어뜨려 조선을 벼랑 끝으로 밀어붙였다.
“야. 이거 처리 못하면 나라 망한다. 어쩔래? 지금과는 전혀 다른 통치와 제도를 꺼내들지 않으면 답도 없어.”라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지.
흡사 갑각류가 외피를 깨고 탈피를 하는 것 마냥, 기존 조선이라는 틀을 깨부수고 새로운 조선이 나오게끔 밀어붙인 거다.
그래서 전대미문의 착호군과 기업이 등장할 수 있었던 거고.
이후에도 마찬가지. 대마도민을 해결 할 때 쯤 되자, 요동 고려인과 몽골 및 한족 포로폭탄을 집어던졌고, 여진인 수십만명을 던졌으며, 끝내는 대만섬 원주민까지 던졌다.
이 때 마다 조선은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며 성장한 게 아니라, 계단을 오르듯 한 단계씩 껑충 뛰어오르게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