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 챕터50. 기틀잡다 (4)
“그런 의견이 나오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지금은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허나 차지해서 손해 볼 건 없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아직은 무리다.”
“예. 알고 있습니다.”
연오랑이 연거푸 반대의사를 표하자, 성억도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곳의 대명인 남부(난부)씨가 아국의 무역항이 열리기를 적극 바라고 있었습니다. 해군 말로는 이곳은 일본 중에서도 가장 궁핍하게 사는 곳 같다고 하더군요. 사람들 또한 왜인이 아닌 에조인(아이누인)이 섞여 있고 말입니다.”
성억은 훗카이도 바로 밑. 미래에는 아오모리현으로 불릴 지역을 짚으며 답을 했다.
“흐음...”
‘뭔 일이 벌어졌을지, 눈에 훤히 보이네.’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일본 쇼군을 정이대장군이라 부르는 데, 정이의 이夷는 곧 오랑캐를 뜻하지 않나.
조선 입장에선 오랑캐가 오랑캐를 때려잡는 게 뭔가 웃기게 들리지만, 일본인 입장에선 동쪽에 사는 에조인(아이누인)이 바로 오랑캐였다.
일본의 역사는 이 에조인을 때려잡으면서 영토를 계속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고, 지금 시기에도 마찬가지.
무려 메이지유신 시대가 돼서야 훗카이도가 일본에 편입되는데, 이 시기에는 더 말할 필요가 있나.
훗카이도는커녕, 혼슈 북부조차도 다 정리를 못한 상태다.
교토에서 멀어도 너무 멀어서 그야말로 깡촌 중에 깡촌이고, 영지라기보다는 개척촌에 가까운 게 현실.
이런 와중에 엄청나게 큰 배를 타고서, 말로만 듣던 조선인이 선진문물을 들고 등장했다?
이건 뭐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거지.
“완전히 우리 쪽으로 기울었나 보군?”
“속내야 아국을 통해서 힘을 키우고 부귀를 누리려는 거지만, 아국에게 있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만약 저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막부와 관계없이 에조섬 남부에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말을 하면서 성억이 짚은 곳은 훗카이도 남부 반도.
“이곳에 에조인(아이누인)이라는 야인들이 산다고는 하지만, 아국 입장에선 문제 될 게 없지 않습니까? 만약 주둔지를 건설할 수만 있다면, 그 뒤는 술술 풀려나갈 겁니다.”
“...”
왠지 신나서 희망찬 미래를 그려내는 성억을 보며,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나이도 꽤 먹은 성억이 저 정도면, 상대적으로 어린 조정관원들 사이에선 “여기 빈 땅 아니야? 먹자!”라는 꽤나 진취적인 의견이 많이 튀어나왔을 거다.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니냐?”
“비록 에조섬이 춥다고는 허나 북방만 못할 거고, 에조인들이 거칠다고는 허나 야인여진이나 남방의 산악부족만큼은 못할 것 아닙니까?”
성억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
‘... 틀린 말은 아니잖아?’
너무도 당연하게 답을 하는 모습에, 오히려 연오랑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말이 안 통하는 야인이 있다고? 그럼 조선인으로 만들자!”가 지금 조선이 밀고 있는 조선화교육 아닌가.
연오랑이야 미래를 아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만, 조선인들에겐 야인여진, 만주북방의 유목민, 대만 산악부족민, 심지어 색목인과 이 에조인까지.
전부 조선인으로 만들어야 할 오랑캐로 보일 거다.
‘차별 없이 공평하게 취급하는 걸, 오히려 대단하다고 해야 되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튼 난 에조섬으로 진출하는 건 반대다. 일단 무역항을 열고 동부의 대명과 친교를 쌓아 그들의 힘을 키우는 게 먼저다. 그렇게 친조선파 대명을 많이 만들고 그들이 꿀을 빤다면, 우리와 손을 잡고자 하는 대명이 더 많아 질 거다.”
“...”
“그러면 자연스럽게 막부에 입조하는 친조선파 대명이 많아질 테니, 결과적으론 막부 또한 아국에 친화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겠지. 우리가 굳이 막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도 말이야.”
“그렇게 될 겁니다.”
모두는 같은 생각을 한 듯 고개를 마구 끄덕여댔다.
“또 다른 제안을 던진 곳이 있냐?”
“여기...”
성억은 망설임 없이 다음 장소를 짚었다.
‘이 자식들 보게. 죄다 뒷주머리를 차려는 모양이네.’
이제 보니, 조선전함이 머물렀던 영지의 다이묘들이 전부 역제안을 던진 모양이다.
“이곳 돈하(쓰루가) 또한 무역항을 바라고 있습니다.”
“호...? 여긴 우리가 바라던 곳이잖아? 그런데도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예. 아무래도 옛 영광을 되찾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 물산이 풀리면 경도(교토)까지 지척이니까요.”
“흐음...”
연오랑은 교토 바로 위에 위치한 쓰루가를 콕콕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조선이 일본에게 사절을 보내면, 보통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에 도착해서 육로로 교토나 도쿄까지 가는 식이었다.
다만 이 시대에는 사절단을 몇 번 보내지도 않았고, 원래 역사에서 임진왜란 후에 보내기 시작한 조선통신사가 보통 이 루트를 이용했지.
허나 지금 조선은 굳이 힘들게 몇 달에 걸쳐 육로로 이동할 필요가 없지 않나.
사절단은 북부바다를 지나 쓰루가에 도착했고, 거기서 곧장 남하해 교토로 향한 것. 아무리 오래 걸렸어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을 테니, 막부입장에선 기겁했을 거다.
“수도와 너무 지척이라서 아국 군대가 주둔하는 건 힘들겠지만, 무역항이 열리는 건 돈하의 대명뿐만 아니라 막부도 바라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더 말이 필요한가. 조선물산을 교토에 앉아서 바로바로 소비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거다.
“그리고 이곳. 산명(야마나)씨는 아국과 손을 잡고 광산을 키우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광산?”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번뜩이며 지도를 살폈다.
‘여기... 아무리 봐도 이와미 광산이 있는 곳 같은데?’
위치를 보아하니 확실히 맞는 것 같다.
‘이와미라...? 하긴 개발은 안됐어도 유명하긴 했으니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아귀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무려 이와미 은광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산명씨라고? 그 놈들이 왜 우리와 손을 잡으려고 하는 거냐?”
“그게...”
연오랑이 다이묘의 이름을 다 외우고 있는 건 아닌 터라, 성억은 가볍게 배경설명을 풀어놨다.
전국시대에 들어가면 이와미 영지의 소유권을 놓고 오우치로 갔다가, 아즈모로 갔다가, 끝내는 모리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지만 이 시대엔 아니다.
야마나 가문은 오닌의 난 때. 서군 총대장을 할 정도로 위세 있는 가문이고, 지금은 이와미 지역을 다스리는 다이묘였지.
“그런 놈들이 왜 우리 도움이 필요한 거지? 알아서 하면 되잖아?”
“돈을 더 벌고 싶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안 그래도 아국에 납,은광석을 팔아넘기고 있는데, 아예 무역항을 열어 본격적으로 넘기고 싶은 모양입니다. 저희 배와 일본 배를 비교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
이어지는 설명을 듣다보니, 얼추 이해가 됐다.
제주왜관을 통해 무역이 시작되고 기존의 수입품을 조선이 알아서 수급하면서, 일본은 거의 대부분의 대금을 광석으로 지불했다.
연은분리법을 모르는 일본에선 힘들게 제련해서 파는 것보다, 그냥 조금 웃돈을 주고 광석채로 파는 게 훨씬 이득이니까.
문제는 이 광석을 실어 나르는 것도 엄청난 인력과 공간낭비이다 보니, 생각만큼 조선물산을 수입해 오는 게 쉽지 않은 거지.
광석을 많이 싣겠다고 더 큰 배를 만드는 건 하루이틀 사이에 될 일이 아니고, 이렇게 배를 크게 만들면 그 유지비용 또한 증가하니까.
이런 판국에 조선의 거대한 배가 알아서 찾아왔다?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광석을 실어 나르는 건 조선이 알아서 할 일이니 광산개발에 더욱 열을 올려도 되고, 혹여나 제련법을 조선에게 배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는 거지.
“물론 제련법을 알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당연하지.”
연은분리법을 알려준 게 연오랑 아닌가. 성억은 연오랑이 쌍심지를 켜기 전에 얼른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조정신료들이나 기업가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광석채로 가져오면 무조건 이득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원래 역사처럼 허무하게 기술이 유출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게다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움직인 걸 보면, 확실히 광맥을 찾은 모양입니다.
“...”
‘원래 역사보다 수십년 빠르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지금 일본은 조선,중국과 무역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광산개발 붐이 일어난 지 꽤 됐다. 이제 유의미한 성과를 얻을 시기가 되고도 남았지.
이와미 광산의 주광맥이 아니어도, 이미 근처의 자잘한 광맥에서 채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국과 손을 잡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습니까? 막부는 물론이고 경쟁자인 대내전(오우치), 세천(호소카와)가문의 견제를 떨쳐내려면 말입니다.”
“흠. 그럴 듯 해.”
지금이 전국시대처럼 하극상이 만연하고 영지전이 만연한 시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영지간의 전투는 벌어지고 있다.
은광을 개발해서 꿀을 빨기 시작하면 이걸 노리고 사방에서 늑대 떼가 달려들 터, 그 대비책으로 조선이라는 호랑이에게 지분을 조금 넘겨주는 건 충분히 남는 장사지.
“개발을 도와준다면 말이지.”
“예. 아국이 손해 볼 건 없지 않습니까? 채굴된 광석의 일부를 공짜로 받아낼 수 있고, 막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산명씨를 친조선파로 만드는 건 손해 볼 게 없을 겁니다.”
“너무 커지면 막부가 견제할 수도 있는데...”
“거기까지 가기 전에 아국이 개입할 수도 있고, 설령 다툼이 벌어져 소유권이 바뀐다고 해도 아국은 상관없지 않습니까?”
성억은 실실 웃으면서도, 무시무시한 대답을 내놓았다.
주인이 바뀌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조선이 “야. 이거 개발하는 데 우리가 투자한 거 알지? 계약은 그대로 간다.”라고 생떼를 부려도, 다들 냉큼 손을 잡을 거다.
그렇게 파낸 광석은 결국 조선의 무역항을 통해서 팔아야 할 테니까.
“이곳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으로 집은 곳은 적간관으로 불리는 시모노세키. 조선에게도 나름 유명한 지역이다.
“대내전(오우치)은 아국과 가장 긴밀하게 통교한 대명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통교는 무슨, 거지떼 마냥 구걸했지.”
연오랑의 신랄한 평가에, 모두가 해쓱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허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아국 물산을 수입하는 꽤 큰손이 됐습니다.”
오우치가문은 규슈와 혼슈가 이어지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고, 이걸 이용해서 꽤나 쏠쏠한 수입을 얻고 있었다.
이렇게 얻은 수익을 다시 조선물산을 수입하는 데 사용해서, 자본을 뻥튀기를 시키고 있었고.
“그래서? 이치들은 딱히 아국에게 제안할 게 없을 것 같은데?”
“그게... 그들은 무역항을 구주의 다른 지역에 만들지 말라고 부탁하더군요. 오히려 적간관에 집중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군?’
연오랑과 마찬가지로 성억 또한 모사꾼마냥 음흉한 미소를 지었는데, 제대로 먹혀서 꽤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애초에 조선은 규수 지방에 진출할 생각이 없었지만, 오우치가문은 그걸 모르지 않나. 그러니 후한 조건을 내걸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 거지.
“대내전의 조건을 받아준다면, 산명씨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게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만약 시모노세키에 무역관이 열리지 않는다면 오우치는 거꾸로 산명씨에게서 수입을 해야할 터... 안 그래도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데, 상대의 배를 불려줄 선택은 절대 하지 않을 거다.
“게다가 대내전은 아국의 경전을 팔아서 꽤나 쏠쏠한 수익을 얻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이걸 금지해버리면, 타격이 적지 않을 겁니다.”
“음...”
이건 연오랑도 익히 들은 소식이라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본에 파는 많은 수출품이 있지만, 그중 특별한 게 있다면 다름 아닌 불교경전이었다.
조선불교청이 완성됐다는 말은, 그간 종파별로 중시하던 경전의 재정비가 끝났다는 뜻.
조선불교가 가장 중시해야할 기조를 각 경전에서 뽑아 재편집했고, 신학문을 퍼트리기 위해 금속활자 및 신형인쇄기가 완성된 지 오래.
지금도 미친 듯이 찍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조선불교가 단순히 조선에서만 반향을 일으킨 게 아니라는 것.
효령대군을 필두로 한 고승들이 중국을 순회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고, 동남아시아와 일본 또한 그 소문을 듣지 않았나.
효령 등은 중국승려들과의 대담을 엮은 기행기를 집필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관심 또한 생각보다 엄청났다.
게다가 오우치가문은 예전부터 팔만대장경에 관심이 많았고, 항상 재정압박에 시달리던 호조는 돈이 될 건 가리지 않고 죄다 팔아재꼈다.
그 중에선 팔만대장경을 인쇄한 책자도 있었고, 오우치가문은 엄청난 가격에도 나오는 족족 사들였었다.
이러한 물꼬가 트이자 조선불교경전 또한 온 사방에 팔려나갔고, 자연스레 효령대군의 기행기도 일본에 퍼지기 시작한 거지.
“일본에 퍼지고 있는 경전 대다수를 대내전이 독점하고 있는데, 이걸 막아버리면 환호할 대명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이미 충분히 이득을 보고 있는데,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흠...”
연오랑은 사람일은 모르는 일이라고 말을 하려다가... 성억의 의뭉스런 표정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아직 말하지 않은 뭔가가 또 있나 보다.
“또 뭔데?”
“이게 대내전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막부에서 조금 뜬금없는 제안을 보냈습니다.”
“...?”
“조선불교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군요. 아니군요. 적어도 고승들이 방문해 주기를 간곡히 바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