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 챕터50. 기틀잡다 (5)
“...!? 설마 효령대군저하를 말하는 건 아니지?”
“뭐. 말하지 않아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허...”
성억은 말해서 뭐하냐는 듯 가볍게 말을 던졌고,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효령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적극적이군.’
무려 조선 왕의 형제를 초빙하는 거니 적잖이 조심스럽게 접근했겠지만, 저런 제안을 먼저 했다는 게 꽤나 놀랍다.
“대군께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군.”
“예.”
연오랑은 효령의 의사를 물으려 했지만, 성억의 표정을 보며 냉큼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역사의 효령은 원래 역사와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고 있다.
불교에 심취해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게 아니라, 아마 조선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세상 구경을 많이 한 인물 아닌가.
중국일주도 하고 왔겠다. 이번엔 일본일주를 하고 싶어 할 게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렇지?”
“예... 사실 일본에 대해 저희가 아는 게 많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사절단이 오갔다곤 허나 경도(교토)에만 왔다갔다한 편이라서, 일본유람을 제대로 한 사람은 없었지요.”
“게다기 중국기행기가 꽤 잘 팔렸고 인기도 많았으니, 이번엔 일본기행기를 쓸 생각도 있을 테고?”
“...”
넌지시 묻는 연오랑을 보며, 성억과 온녕군 이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효령 성격으로 봐선 분명히 그랬을 테니까.
‘조선불교청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군.’
말해 뭐 할까. 일본이 먼저 조선불교를 받아들이겠다고 하고 있으니,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거다.
‘그럼 생각해야 할 건...’
“북방에 지은 사찰의 분위기는 어떻지? 포교는 잘 되고 있냐?”
“물론입니다.”
“그렇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깊은 주의를 기울이며 지켜보고 있는 터라, 모두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아는 사실을 털어놨다.
연오랑이 주장한 조선불교개혁은 단순히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일환이었다.
조선내부의 박수무당이나 북방과 남방의 토속 사제들을 전부 지워내고, 그 빈자리를 조선불교로 채워 넣는다. 지방마다 존재하는 미신이나 제사와 같은 걸, 전부 지워서 모두 불교식 제례로 통일.
이래야 분열의 단초가 없어지고, 민심을 호도할 사이비 사제가 날뛸 자리가 없어지니까.
몽골,요동인이 자주 드나드는 창주뿐만 아니라, 요동과 맞닿고 있는 만주신도시에서는 한발 더 나아간다.
그들에게 조선불교를 포교함으로서 비슷한 동질성을 주입시키고, 조선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며 나아가 조선문화를 받아들이게끔 유도하고 있다.
“조차지에서도 마찬가지지?”
“그렇습니다. 활발하진 않지만 점점 신도 수가 늘어나는 건 확실하고, 호족 중에서도 관심을 갖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물론 독실한 신도가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말입니다.”
“음...”
‘여기도 계획대로 잘 진행 중이야.’
청도와 상해의 조차지에도 사찰이 건립됐고, 조선인이 하나둘씩 거길 드나들기 시작하자 한족들이 기웃거리는 건 당연한 일.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종교에 의지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거고, 산동인이나 절강인들에겐 교세가 한껏 떨어진 중국불교보단 뭔가 거창한 조선불교가 세련되게 보이는 면이 있을 테니까.
더불어 사찰을 드나들면서 조선인과 인맥을 쌓으려는 의도도 있을 테고.
“그럼 당연히 막부와 대명들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겠군?”
“아국의 경전과 대군저하의 기행기가 퍼져나간 걸 보면, 얼추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강남 및 제주와 거래하는 구주(규수)의 대명들은 당연히 봤을 테고, 상인을 타고 소문이 흘러갔으니 동부의 대명들 또한 대충은 알고 있을 겁니다.”
‘흐음...’
이러면 어찌될까. 자신의 영지에 무역항이 생겨나면 당연히 조선사찰도 따라올 테고, 일본은 조선문물을 선진문물로 생각하며 적극 수용하고 있다.
위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퍼져나가는 건 시간문제지.
“막부가 선수를 치려는 거군.”
“...?”
“...”
다들 연오랑의 혼잣말에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조선불교를 수용하는 건 좋다. 하지만 어느 다이묘가 적극적으로 조선불교를 받아들여 덩치를 키우면 어찌될까.
조선 입장에선 아무래도 자신을 잘 따르는 다이묘를 지원할 게 분명하고, 그렇게 지원을 받아 무역항이 번창할수록 다이묘의 힘은 강해진다.
“아...”
“물론 시간이 걸릴 것이고, 말처럼 쉽게 되지도 않겠지. 허나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것만큼 명성을 쌓고 이름을 알리는 쉬운 방법이 또 있을까.”
일본에도 불교가 있는 만큼, 당연히 조선불교와 일본불교 간의 토론이나 교류가 생겨날 거다.
그 말은 이름세가 높아진 사찰이 있는 곳으로 관심과 사람이 집중된다는 뜻이고, 자연스레 시장이 활성화되는 건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다이묘의 이름이 오르내리겠지.
이 시대의 다이묘는 귀족이니 명분과 명성에 환장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름을 알면 알수록 막부도 신경을 써줄 수밖에 없는 바.
큰 전쟁이나, 업적, 막부의 대신 쯤 되어야 일본 전역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데, 이 방법은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지출로 명성을 올릴 수 있지 않나.
“그렇게 되겠군요.”
“보나마나겠지. 얼마나 쉽겠어.”
‘봐라. 선진문물인 조선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발전한 곳이 바로 나고, 우리 영지다.’라고 떵떵거리면서, 다른 다이묘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수 있지 않겠나.
“막부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공식적으로 아국에 요청해서 막부의 이름을 가장 먼저 올려놓겠다는 뜻이겠군요. 다른 대명들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말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
“호오...”
“흐음.”
연오랑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지, 다들 감탄을 흘리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막부 입장에선 지방 세력을 찍어 누를 절호의 패이기도 하지.’
종교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그 지역의 토착종교와 결합해 변질되는 건 모든 장소와 역사 속에서 벌어졌던 현상이다.
조선불교 또한 삼국시대의 토착종교와 유학, 도교를 흡수해 지금의 불교가 완성된 거니까.
다만 일본의 경우에는 그러한 경향이 훨씬 강했다.
자연숭배적인 다신교이자 조상신을 믿는 신토神道는 종교가 아닌 관습이자 문화로 뿌리내린 상태였는데,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와 신토가 결합되어 신토의 수많은 신들이 불교의 사천왕 비슷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연히 불교 또한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서, 뭔가 믿음이나 가르침이 중심이 되기보다는 불교식 의례와 관념이 자연스레 관습과 문화로 흡수되는 형태를 보이고 있었고.
“아...”
“오. 그렇게 또 다르군요.”
외교무역부 관원이니 만큼 중국, 몽골의 불교와 조선불교가 다른 점을 얼추 알고 있었기에, 다들 연오랑의 설명을 재깍 따라왔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을 거야.”
“...?”
일본불교가 신토와 결합해 일상으로 파고들면서, 일본사찰은 명확한 체계도 없고 구심점도 없는 상태로 각자 번성해나갔다.
종파별로 믿는 바도 조금씩 다른 건 당연.
조상신 숭배경향이 강하다보니, 사찰이나 종파를 세운 개산조사開山祖師와 사찰 주지의 영향력이 훨씬 강력했다. 뭐랄까. 석가모니나 부처보다는 개산조사나 주지를 더 중요시 생각한달까.
더불어 구도하는 수도승의 느낌보다는 직업의 일종과 비슷한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음... 전조의 모습과 비슷하군요.”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게 편할 거다.”
고려 때의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다가 퍼졌다.
고려 귀족의 후원을 받아 사찰이 흥성한 것처럼, 일본도 그와 흡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지금 일본에서 가장 흥성하고 있는 종파가 뭐라고 하디?”
“정토진종浄土真宗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뭐... 듣기론 흥한다고 해도 그게 불교인지 아닌지 헷갈리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럴 거야.”
연오랑 또한 들어본 게 있기에, 동의하며 말을 이어갔다.
고려 때에 복잡한 교리와 의식 대신 참오와 돈오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선종이 대유행한 것처럼, 일본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선종과 정토교가 결합,변질되어 정토진종이 탄생.
특히나 일본은 유학이 크게 발달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무식하고, 언제나 죽음을 걱정해야하는 무사층이 권력자 아니었나.
복잡한 교리 없이 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에 갈 수 있고, 스님이라고 수계를 받을 필요도 없고, 출가와 환속도 자유롭고, 승려가 결혼 및 자식도 낳을 수 있고, 육식과 음주에도 관대하다.
무사층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전조와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른 점은, 일본의 사찰은 중앙조정이 아닌 각 대명들의 후원을 받아 융성했다는 점이고 민간과 더욱 밀접하게 엮였다는 점이지.”
“음...”
“흠.”
안 그래도 무사층이 주를 이루고 있으니 종파별로 무력다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다이묘로 쪼개져 영지전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니, 이에 대응하고자 각 사찰마다 승군이 조직된다.
헌데 통합된 체계가 없고, 각 주지와 개산조사를 중시하는 습성 상 따로 놀기 쉽고, 믿음을 넘어 생활문화로 파고드니 민간백성들과 단단히 결합.
이 결과. 사찰은 자체무력과 땅, 땅을 일굴 사람을 모두 갖춘, 또 하나의 권력세력이 되어버린 거지.
이래서 전국시대에 가면 승려들이 성을 쌓고, 사찰에서 조총을 만들고, 장사를 하면서, 다이묘들과 직접 싸우게 된 거고.
“그래서 전조보다 훨씬 심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적어도 전조 때는 사찰과 종파끼리 대립했어도, 서로 창칼을 들고 죽이려 들진 않았으니까.”
“...”
“...”
둘의 얼굴에 “하여간 미개한 놈들.”이라는 비웃음이 슬쩍 서렸다 사라졌다.
“하지만 막부가 바라는 게 뭐지?”
“... 아!”
잠시 고민에 빠졌던 온녕군 이진은, 핵심을 짚는 질문에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토했다.
“중앙집권! 아아... 그래서 아국 불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거군요!”
“그게 얼추 맞을 거다.”
무로마치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린 후에 지금껏 꾸준히 중앙집권을 위해 노력해 왔고 나름 결실도 거두고 있다.
다이묘들의 권력을 야금야금 빼앗고 있으니, 또 하나의 권력층인 사찰 또한 처리해야 되지 않겠나.
“그런 면에서 아국의 불교만큼 좋은 게 없지.”
“그렇겠네요.”
“더욱이 막부도 아국의 역사를 얼추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거야.”
조선과 일본간의 무역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났으니, 막부도 조선이 어떻게 고려 불교계를 박살냈는지 얼추 알고 있을 거다.
조선처럼 완전히 밟아버리진 못하더라도, 세는 확 꺾어버리기를 기대하고 있겠지.
“게다가 이건 단순히 막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명들도 함께 겪고 있는 문제잖아?”
“아...”
“그들의 이권을 차지하고 싶겠군요.”
“뻔하지 뭐.”
연오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이권과 권력의 문제다.
무력집단인 사찰을 경계하는 게 오롯이 막부뿐일까. 다이묘 또한 자신영지 바로 옆에서 기생하고 있는 사찰세력이 거슬리는 건 마찬가지다.
어차피 신토를 믿는 탓에 사찰이 없어진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고, 조선불교를 들여와 진짜 수도승들로 바꿔버린다면... 사찰이 가지고 있던 땅과 이권은 다 어디로 가겠는가.
“막부가 주도할 테니 왕창 떼어먹더라도, 대명들 또한 부스러기는 주워 먹을 수 있겠네요.”
“그렇지 않을까? 특히나 멀리 떨어진 막부보다 가까이 붙은 대명이 더 잘 알고 있지 않겠어? 꼼수를 부려가며 갉아먹겠지.”
“음...”
“흠.”
일본의 속내를 얼추 알아내자,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문제는 이게 조선에게 도움이 되냐는 건데...’
그는 금세 해답을 내리고서 다른 이들을 바라봤고, 모두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뿌려댔다. 다 같은 마음인가 보다.
“아국이 손해 볼 건 전혀 없겠군요. 친조선파가 그만큼 늘어나는 거고, 설령 아국 승려들이 일본으로 가서 설법한들 일본종파가 무력으로 위협하진 못할 것 아닙니까.”
“맞아.”
안 그래도 조선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판국에, 승려를 건드렸다가 두들겨 팰 건수가 생기는 걸 누가 반기겠나.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막부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이묘들 모두가 힘을 합쳐서 주동자를 박살내버리고, 영지와 전리품을 갈기갈기 찢어서 나눠 갖을 거다.
“어차피 아국은 막부의 중앙집권을 간접적으로 도와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측면에선 나쁠 게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본다.”
‘게다가... 뜬금없긴 하지만 오닌의 난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겠어.’
연오랑은 동의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론 딴 생각을 이어갔다.
오닌의 난이 벌어진 복잡한 사정은 일단 제쳐두고, 어찌됐건 숙부와 쇼군의 어린 자식이 근본이자 명분, 얼굴마담이었다.
한참동안 자식을 보지 못한 쇼군은, 이런저런 이유로 속세에 환멸을 느껴 출가한 동생에게 양위하기로 약조했다. 헌데 뒤늦게 자식이 태어나자, 결국 쇼군직을 놓고 서로 싸운 거지 않나.
만약 조선불교가 교토와 막부에 뿌리내린다면, 그렇게 쉽게 출가할 수도 환속할 수도 없을 테니... 동생의 처지는 원래 역사와는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물론 이미 역사가 한참 비틀려서 오닌의 난이 제대로 터지는 것도 힘들어지겠지만, 뭐가 됐든 변수를 하나쯤 줄일 수 있지 않겠어?’
누구도 모르는 역사이고, 연오랑도 확신할 수 없지만... 나쁠 건 없다고 봤다.
“허면... 대감께서는 좋다고 판단하시는 겁니까?”
“어. 대군께서 어떻게 하실 지는 조정에서 결정할 문제이니 알아서 하고...”
“...”
“대신 아예 사절단을 대규모로 거창하게 꾸리는 건 어떠냐?”
“...?”
또 뭔가 꼼수를 부리는 것 같아, 모두는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