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 챕터50. 기틀잡다 (6)
“이번처럼 대놓고 일본을 염탐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겠냐? 내륙으로 가본 적이 없으니 지리나 풍습, 대명간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알아보는 건 나쁘지 않지.”
“아!”
“더불어 무역항을 바라는 대명이 많은 만큼, 무역항 입지를 알아본다는 핑계로 온갖 곳을 다 돌아다닐 수 있지 않겠어?”
“아국 고승들이 오는 걸 대명들이 거부할 리는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 명성과 체면에 목숨 거는 대명들이라면, 아국 사신이 방문하지 않으면 치욕으로 여길지도 모르잖아? 오히려 온갖 것을 던져주면서 사절단을 스스로 부르지 않을까?”
“흐흐. 그러면서 저흰 열심히 조사를 하고 말이죠.”
연오랑의 의미심장한 말에, 다들 실실 웃음을 흘려댔다.
“흐음. 막부가 끼어들 수도 있겠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 막부 입장에서도 아국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기만 해도 절로 위엄을 차릴 수 있을 테니, 적극 반기겠지.”
아마도 “봤냐? 막부가 조선사신을 이렇게 불러왔다. 우린 이만큼 친하니까 까불지 마라.”라고 은연중에 말하고 다니지 않을까?
“대충 장단만 맞춰주면 우리도 좋고 막부도 좋고 대명도 좋은 일. 진짜로 조선불교청이 일본에 뿌리 내리는 건 시간이 한참 걸리겠지만, 그 시작을 하는 건 결코 나쁠 건 없을 거다.”
“예. 특히나 경도(교토)에서 시작하면 더욱 그렇게 되겠지요.”
“맞아.”
조선은 조선불교에게 “정치와 행정은 조정이 할 일인데, 니들이 뭔데 끼어들어? 또 고려 때처럼 하고 싶은 거냐?”라고 협박하는 데, 다이묘와 막부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문화와 유행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법이니, 만약 막부대신들과 다이묘들이 하나둘씩 조선불교를 믿기 시작하면 민간으론 자연스럽게 퍼져나갈 거다.
‘위에서는 그렇게 될 거고, 아래서도 아마... 효과는 있을 거야.’
연오랑은 머리에 김이 나도록 머리를 굴려댔다.
미래에 떠도는 말로. 일본인은 태어나면 신사를 찾아가고, 결혼할 땐 교회를 찾아가고, 장례는 절에서 치른다는 말이 있지 않나.
이 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신토와 불교가 결합하면서 신사와 사찰이 합쳐진 곳이 상당했기에, 사찰에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오히려 조선이 제대로 가고 있잖아? 일본이라고 다르진 않겠지.’
조선불교청이 완성되기도 전부터, 각 사찰에선 봉헌당을 건립해 매장문화가 아닌 화장문화를 완전히 뿌리내렸다.
이건 조정에서 나선 일이기 때문에, 매장문화를 고수하던 근본성리학자 집안이 오히려 이상한 취급을 받아야 했지.
더불어 왕릉조차도 하나둘씩 이장해서 현충사 옆에 단체로 모아놨으니, 아무리 유학식 장례를 고수하는 집안이라도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지.
조선백성들의 반응은 당연히 대환영이었다.
제사를 지내고, 묫자리를 만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닌데, 이걸 절에서 전부 해결할 수 있지 않나.
돈과 편의성, 그리고 항상 부처가 함께 하는 절에서 부모가 지내는 것에 왠지 모를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시대가 달라서 확신하긴 힘들지만 일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일터, 만약 봉헌당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민간에 더욱 빠르게 파고들 수 있을 거야.’
일본백성들은 조선백성들보다 훨씬 궁핍하고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니, 제사나 묘지에 대한 압박도 훨씬 강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건 너무 먼 이야기긴 한데...’
연오랑은 미래를 굽어보며, 한수두수 하나씩 집어 나갔다.
체계와 지위를 확실하게 갖춘 조선불교청이 일본에 뿌리 내리기 시작하면, 기존의 신토나 일본불교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막부와 다이묘가 지켜보고 있으니 무력충돌은 벌어지지 않을 거고, 그럼 논리와 이론으로 누가 더 선진적인지 다투게 되겠지.
‘다만...’
일본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조선불교도 신토와의 결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인들에겐 종교가 거의 문화나 관습에 더 가까우니까.
‘앞으로 벌어질 일은 반반이야. 아예 고등종교로서 자리잡거나, 조선불교가 변질되거나.’
그리 생각해 보건데, 후자 쪽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조선불교는 엄연히 조선불교청이 중심이 되어 피라미드 구조로 조직된 조직이다.
밑에서 괴상한 짓을 하면 이단으로 찍히거나 배척당할 수밖에 없으니, 변질되어 조선으로 넘어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거다.
‘그럼 아예 이분되어 버릴 가능성도 있겠군.’
막부와 다이묘는 일본불교의 이권을 차지하고 싶어 하니, 정치권력에 관여하지 않고 수양을 강조하는 조선불교를 내세우고자 할 거다.
다만 아무리 조선불교가 선종계열의 깨달음을 중시한다고 해도, 조선불교청은 교종을 흡수해서 교리와 불교이론, 다양한 경전을 어느 정도 중시하고 있다.
고려 때 땡중의 범람을 겪어본 이상, 거름망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 측면에서 조선승려들이 보기에, 일본불교. 그것도 규율이 한없이 느슨한 정토진종이야말로 땡중의 온상처럼 보일테고.
허나 반대로 말하면 조선불교는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아서, 민간백성들에게 쉽게 전파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음...”
“흐음.”
“그게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요.”
연오랑이 생각을 풀어놓자, 다들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었다.
일리가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럼 어쩌면 종교계가 양분될 수도 있어. 귄력자나 지도층이 믿는 조선불교와 민간백성들이 믿는 일본불교로 말이야.”
“그래도... 신도(신토)를 흡수한 일본불교라지만 어찌됐건 불교는 불교이니 교리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텐데, 조선불교가 더 유리하겠지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아무래도 우리가 더 선진적이기도 하고, 일본불교가 변질이 많이 되기도 했으니까.”
‘이건 분명한 사실일 거야.’
고려는 불교국가로서 많은 결함과 부작용을 일으켰지만, 불교 그 자체만 보면 내부적으로 꾸준히 사상논쟁을 이어오면서 발전해왔다.
일본처럼 각 사찰이 따로 놀면서 자기가 최고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그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입싸움을 해온 거지.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성리학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서, 피땀을 흘려가며 논리를 발전시킨 점도 있고.’
“음... 만약 그리 된다면 확실히 정토진종의 교세는 줄어들 수밖에 없겠군요. 다른 일본불교종파는 정토진종보다 조선불교에 더 가까우니,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일어날 테니까요.”
“아마 그럴 거야. 극적으로 일이 진행된다면, 조선불교청의 체제와 교리를 흡수한 일본불교종파가 등장할 지도 모르고.”
“음.”
“흠.”
만약 일이 이렇게 진행된다면, 신토를 적극 흡수한 정토진종이나 다른 일본종파 또한 분리가 벌어질 터...
‘그럼 신토의 위치 또한 변할 수밖에 없겠지. 과연 이게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신토는 불교에 흡수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인데, 훗날 일본에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이러한 상황이 깨어지게 된다.
유학으로 불교를 찍어 누르는 방식을 신토가 받아들이고, 유학적 근왕론을 중심으로 천왕숭배사상까지 이어지게 된 것.
시간이 흘러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 천왕중심의 교단성립으로 나아가, 불교를 밀어내고 일본인의 종교인 신토의 우월성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곤 정신 나간 일본제국주의의 근본이 되지.
허나 조선불교청이 등장하면서 원래 역사의 시발점이 무너졌다.
조선은 숭유억불정책을 그만 뒀고, 운석핵꿀밤으로 성리학은 저절로 쓰러졌으니까.
‘지금부터 흔들어 놓으면 이걸 바꿔버릴 수 있을 지도 몰라. 막부가 수립되고 나서 천왕과 신의 혈족이라는 공가의 영향력은 하염없이 줄어들었고 신토도 마찬가지지.’
막부입장에선 천왕과 공가가 힘을 되찾는 걸 결코 바라지 않을 테니, 당연히 신토를 바탕으로 한 천왕숭배사상이 퍼지는 걸 결단코 막으려 할 거다.
수백년 후에 벌어질 일이니 지금 걱정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첫걸음을 다른 방향으로 디디면 미래가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차라리 지금이 적기야. 지금 당장은 신토가 불교에 흡수되어 있고, 자립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잖아? 여기에 조선불교까지 등장하면 완전히 찍어 누를 수 있어.’
일이 이 정도까지 진행된다면, 신토는 종교가 아닌 문화나 관습 수준으로 격하되어 종교로서의 위치를 상실할 지도 모른다.
“흠. 그럼 이번 일을 가볍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무래도 그렇지?”
연오랑은 살짝 머쓱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미래의 일본이 어떻게 제국주의로 변해갔는지 말을 해줄 수가 없으니, 논리와 추론이 빈약할 수밖에.
신토를 찍어 누르고 정토진종을 박살내는 일에 왜 힘을 써야하는지, 명확하게 말을 해주기가 애매했다.
“어찌됐건 아국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건 나쁠 게 없잖냐? 고승들을 왕창 보내서 교리논쟁을 펼쳐 다 박살을 내주는 건 나쁠 게 전혀 없을 거다.”
“음.”
“막부와 대명들도 반대하지 않을 거야. 그들은 자기 수중을 벗어나서 맞먹으려 하는 일본불교종파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잖아? 아무나 승려가 되는 걸 문제 삼는 거지, 불교신자가 늘어나는 걸 문제 삼는 건 아니니까.”
조선불교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갑자가 관습, 문화나 마찬가지인 신토문화를 다 지워버릴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건 그거대로 가고, 이건 이거대로 간다.
장례나 제사를 비롯한 영역을 시작으로 야금야금 파고들어, 신토를 신앙의 영역에서 완전한 관습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면 된다.
"알겠지?"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연오랑이 그리 말을 끝내자, 다들 납득하고 말았다.
“그리고...”
“...?”
헌데 연오랑이 이번에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자, 한숨 돌리려는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오면서 조정관원들을 꽤 데려왔지?”
“예. 헌데...?”
‘그걸 왜 묻냐?’는 듯 바라보자, 그는 냉큼 말을 토해냈다.
“그대는 나와 일을 조금 해야겠어. 조정에는 너 혼자 돌아가라.”
“...?”
뜬금없이 지목받은 원창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오래전에 향교의 설립 및 발전 방향에 대해서 제안서를 올린 거 알고 있지?”
“예.”
“넵.”
“그런데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 모양이냐? 돈이 적잖게 들어가는 문제니 진행하진 못하더라도, 계획은 짜놨어야 하는 거 아냐?”
“...”
“어지간하면 간섭을 안 하려고 했는데,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어쩔 수 없더라고.”
“...”
꾸중을 하는 건지 한탄을 하는 건지 헷갈려서, 다들 답을 하지 못했다.
“뭐. 할 일이 워낙 많으니 조정이 신경을 못 쓴 것 같으니까. 내가 조정의 일거리를 덜어줘야지 별 수 있나. 그러니 나랑 같이 일을 해야겠다.”
“...”
연오랑이 그리 말을 하고 빙긋 웃자,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그나마 일거리 지옥에서 벗어난 걸 알아차린 원창명이 성억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필 따름이다.
*****
일본의 미래를 뒤흔들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을 때.
대륙 반대편에서도 역사를 흔들 작업이 진행 중에 있었다. 아니다. 이미 미래는 비틀렸고, 이 비틀림을 더욱 크게 할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진짜로 여기서 도자기가 나왔단 말이지?”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이미 눈으로 봤잖아요?”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말이야.”
밝으면서도 살짝 그을린 피부. 환한 갈색 머리칼. 진한 남색 눈동자를 가진 상단주과 수하는 만담을 늘어놓으면서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이미 한발 늦어도 한참 늦었다.
더 지체하면 상품을 챙길 틈도 없이 다른 상단에게 다 빼앗길지도 모른다.
‘이미 소문이 쫙 퍼진지 오래됐잖아? 그 놈들은 당장 배가 없어서 오지 못하고 있지만, 어떻게든 뚫고 찾아올 거야.’
그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마냥, 속으로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서 연신 뜀박질을 이어갔다.
이곳은 타나. 미래에 아조프라 불리는 지역으로 흑해의 크림반도 안쪽에 위치한 아조프해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항구다.
해상왕국 제노바 공화국은 지중해와 흑해 여러 곳에 식민지 항구를 건설했는데, 이곳도 그중 하나.
사실 지금까진 그다지 인기가 많은 항구가 아니었다.
바로 앞. 아조프해로 들어오는 크림반도 입구에는 카파항이라는 훌륭한 대체제가 있었기에, 굳이 아조프해 안쪽까지 들어올 필요는 없었던 거지.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오... 신이시여!”
상단주는 부두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자기도 모르게 신을 외치고 말았다.
눈앞에 새로운 도시가 생겨나고 있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형형색색의 머리칼을 한 인부들이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있고, 머리를 요상하게 밀어버린 이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고, 그와 행색이 비슷하게 생긴 이들 또한 짐수레를 끌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쇠락했던 타나항이 이렇게 변하게 될 줄이야. 감히 상상도 못했다.
제노바 공화국이 타나항을 식민지로 만든 건 오래됐지만,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고 특히나 최근엔 더욱 그랬다.
킵차크 칸국과 타나항의 어색한 동거는 티무르제국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박살났고, 이 후 킵차크 칸국이 흔들리면서 또 다시 박살.
제노바 공화국은 베네치아 공화국 및 오스만과 대립하는 일에 열중하는 터라 이곳까지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이번엔 반쯤 죽어가던 킵차크 칸국이 부활해서 아예 타나항을 날름 집어 삼켜먹은 것 아닌가.
이는 곧장 크림반도에 자리 잡은 카파항 및, 크림반도 남쪽을 장악한 테오도르 공국에 알려졌다.
안 그래도 테오도르 공국은 크림반도 남쪽 일부만 지배하고 있었고, 그 외에 나머지 지역은 튀르크 계열의 유목민인 크림 타타르인이 살고 있지 않나.
킵차크 칸국의 아래에 있던 크림 타타르인들인 만큼, 타나항을 정복했다는 뜻은 킵차크 칸국이 크림반도 전체를 노릴 수도 있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