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 챕터50. 기틀잡다 (7)
요새를 정비한다. 전쟁 준비를 한다. 사방에 지원을 요청한다. 등등 난리가 났는데... 어째 킵차크 칸국의 반응이 요상했다.
타나항을 자기 것으로 삼은 건 맞지만, 거기에 살던 제노바 주민을 학살하지도 않았고 폐허로 만들지도 않았다.
그저 온건하게 “앞으로 여긴 우리 땅이다. 하지만 세금만 내면 거래를 가능하게 해주마.”라고 사신을 보내 알려온 게 아닌가.
더불어 크림 타타르인의 준동 또한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이어졌고 말이다.
여기까지야 뭐 변방의 사정이니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그들이 타나항을 개방하면서 샘플처럼 보내온 동방상품이었다.
그간 엄청나게 귀하게, 인도와 오스만을 거치지 않고서는 구할 수 없던 물건을 왕창 들고 온 게 아닌가.
코앞의 카파항은 당연히 난리가 났고, 제노바 공화국도 난리가 났으며, 흑해 입구에 위치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도 난리가 났고, 자연스럽게 베네치아 공화국을 비롯한 해상왕국도 난리가 났다.
상단주 또한 그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으니, 아마 전 지중해가 이 소문에 뒤숭숭해졌을 거다.
“상단주님. 저기!”
“어...!?”
수하가 손짓으로 한쪽을 가리키기 무섭게, 상단주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아주 제대로 차려 입은 사제들이 줄줄이 십자가를 앞에 세우고서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그것도 이곳에선 쉽게 보기 힘든 동로마제국의 엉덩이 무거운 사제들이 직접 온 걸로 봐선... 이번 사건이 분명 보통 일이 아닌 게 분명했다.
킵차크 칸국은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아무리 타종교에 관대하다지만... 저렇게 대놓고 움직일 수가 있나.
어지간한 확신과 증거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 일은 진짜다.’
상단주는 다시금 자신의 모험이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다.
다만 마음은 급한데, 몸은 따라주질 않는다.
‘쓰벌... 여긴 어디야?’
“다 바뀌고 있어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군. 어디로 가야 하지?”
“이쪽입니다.”
상단주는 타나항을 자주 드나들진 않았지만 몇 번 온 적이 있었는데, 온통 공사판인터라 길을 제대로 찾기가 힘들었다.
타나항을 흡수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대체 이 많은 인력들이 어디서 나서, 이렇게 거창한 공사를 하는 건 모르겠다.
“이 난리판에 제대로 찾을 수 있겠어?”
“걱정 마시죠. 시장관저에 있다고 하더군요. 요상한 모자를 쓰고 있다고 하니 못 찾기도 힘들 겁니다.”
“이상한 모자는 무슨. 여긴 죄다 이상한 모자를 쓰고 다니잖아.”
상단주는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질을 하고 말았다.
소문을 듣고 온 사방에서 상인들이 몰려왔고, 그간 보기 힘들던 유목민족은 물론, 저 먼 북방의 루스인들까지 우글거리고 있다.
상인 눈에는 죄다 낯설 게 보이는데, 이상한 모자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듣겠나.
허나 수하는 가슴을 쿵쿵 때리며 연신 자신감을 표했다.
“저도 똑같이 물었는데, 뭐라고 한 줄 압니까?”
“뭔데.”
“그냥 척하면 척. 딱 보면, 아 동방에서 왔구나. 라고 바로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
이게 뭔 개소리인가.
상단주는 눈을 살벌하게 흘겼지만, 수하는 두고 보라는 듯이 눈빛을 튕겨냈다.
부산스러운 공사판을 헤치며 계속 나아가자 낯익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시장관저는 그나마 멀쩡히 남아 있는 모양새였고, 입구에는 기병 몇이 지키고 서 있었다.
앞에 줄줄이 상인들이 모여 있는 걸로 보였는데, 딱히 별다른 검사 같은 건 하지 않았고 그저 돈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후...’
상단주 또한 무사히 정문을 지나쳤고, 자기도 모르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관저 앞에 발을 딛기 무섭게 수많은 경쟁자들의 눈빛이 그에게 쏠렸으니까.
“와... 진짜 다 몰려왔군요.”
“그러게 말이야.”
‘망할 놈들. 그간 발도 내밀지 못한 놈들이 다 몰려왔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퉤 뱉고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멀리서 보면 다 똑같은 이탈리아인처럼 보이겠지만, 아는 사람은 옷차림만 보고도 한눈에 구분할 수 있다.
“피렌체, 베네치아, 라구사... 허? 저치들은 로마 사람들 아닙니까?”
“어. 맞아.”
그간 타나항은 제노바 식민지라서 다른 도시국가 상인들은 어지간하면 발길을 닿지 않았는데, 개방되기 무섭게 죄다 몰려온 것 같다.
‘흐음... 사이가 엄청 좋은가 보군.’
다만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어째 눈에 익은 이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시장관저는 타나항에서 가장 권위 있고 웅장한 건물인데, 여길 동방인들에게 전부 내어준 모양새 아닌가.
여길 정복한 게 엊그제인데 이러는 걸로 보아, 그 무서운 유목민들조차 동방인들의 눈치를 보는 모양이다.
“...”
안을 힐끔거리며 순서를 기다리기 무섭게, 옆에 있던 수하가 옆구리를 콕콕 찔러댔다.
“저기. 저기 보시죠.”
혹여나 찍힐까 싶어서, 수하는 귓속말을 하며 관저 한쪽을 가리켰다.
“헙!?”
“제 말이 맞죠?”
상단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딱 보면 알아볼 수 있다더니 그 말이 정답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던 특이한 모자, 뭐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챙 달린 반투명한 검은 모자를 쓴 인물이 갑옷을 입은 이와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저게 그 유명한 맹수모피갑옷인가 보네요. 진짜로 저런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자들이 있긴 있군요. 저게 얼마짜리인데...”
“허...”
수하는 모자에는 적응했는지 다른 부분을 콕 집었고, 상단주는 여전히 놀란 눈을 숨기지 못하고 신음을 흘려댔다.
조선군이 입고 있는 두정갑은 겉으로 보기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도 브리건딘이라고 해서 비슷한 구조로 된 갑옷이 있었으니까.
허나 그 재료가 너무나도 놀랍다.
‘곰 가죽이군!’
유럽에도 곰과 늑대가 많이 살았으니 가죽이 낯선 건 아닌데, 그 통짜 모피를 가지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모피면 모피고 갑옷이면 갑옷이지, 저게 뭐하는 짓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설마... 진짜로 그 호. 호랑이? 맞나?”
“줄무늬가 그려진 사자를 닮았다는 맹수 말입니까?”
“어. 그 맹수로 만든 모피갑옷이 진짜 있는 걸까?”
“저런 갑옷을 아무렇지 않게 입고 있는 걸 보면, 헛소문은 아니겠죠. 본 사람이 한두명도 아니고...”
“허허.”
저런 해괴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니, 저들이 진정 저 멀고먼 어딘지도 모를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게 실감난다.
‘진짜 그런 맹수가 있다고?’
이 시기엔 유럽에서 사자가 멸종된 지 오래지만, 이집트나 에티오피아, 인도 일대에서 수입한 사자모피가 무지막지한 값으로 팔리는 경우가 있었다.
헌데 생전 본적도 없는 호랑이 모피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아마 관저에 모여 있는 상인 중 태반은 상품을 사러 온 목적도 있겠지만, 운 좋게 호피갑옷을 보려고 안 떠나는 사람도 있을 거다.
“...”
놀란 가슴을 애써 억누르고 기다리며, 관저에서 나오는 상인들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헌데 환하게 웃는 이들보다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상품을 왕창 싸들고 나오긴커녕 손에 들 정도로 적은 수량만 받고 나오고 있었다.
‘거래가 잘 안 풀리는 건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어 불안감이 치솟았고, 이윽고 자기 차례가 돌아오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땠다.
‘허...!’
“와...”
관저로 들어가기 무섭게 눈이 번쩍 뜨인다.
거래가 진행되는 장소니 만큼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울 줄 알았건만, 자기도 모르게 몸가짐을 바로 할 정도로 고요하고 정적이었다.
다만 분위기만 그럴 뿐, 눈은 제대로 호사를 한다.
관저 안을 싹 비워놓고 긴 탁자 위에 이런저런 상품이 줄줄이 올려 있었는데, 처음 보는 물건과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고가품이 줄줄이 놓여 있다.
‘진짜 동방 도자기군. 저건 면포 아닌가? 설마 비단도 있나?’
상단주는 침을 꼴깍꼴깍 삼켜가며, 다른 상인들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꼬리를 잡고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전시된 상품 구경을 모두 끝내자, 자연스럽게 낯선 동방인 앞에 도착했다.
뭔지 모를 종이뭉치가 탁자 위에 왕창 쌓여 있었는데, 아까 봤던 모자를 쓴 인물이 의자에 앉으라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과연... 특이하군.’
딱 봐도 옷차림부터가 이곳 사람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상의와 하의를 완전히 구분한 것도, 그 위에 두루마기를 걸친 것도, 심지어 의복의 재질조차 범상치 않아 보인다.
‘최상급 면직물이군! 과연 동방에서 온 게 맞구나.’
닳고 닳은 상인답게, 그는 순식간에 동방인 탐색을 끝마쳤다.
“어디서 왔지?”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상단주는 살짝 억양이 어색한 몽골어를 용케 알아듣고서,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답을 했다.
“제노바에서 왔습니다.”
“오...?”
역시나 제대로 점수를 딴 걸까? 동방인은 눈을 끔뻑거리며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몽골제국이 분열되어 킵차크 칸국이 생겨났지만, 애초에 몽골제국은 몽골인만으로 구성된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수의 몽골계가 지배층이 되어 토착민족을 피지배인으로 삼아 군림했지.
이곳도 마찬가지로. 킵차크 칸국의 민족분포를 세세하게 구분하면 너무 복잡하고, 어찌됐건 전부 튀르크 계열의 유목민이었다.
허나 머릿수가 부족하면 결국 동화될 수밖에 없는 바.
시간이 흐르면서 몽골과 튀르크 문화가 뒤섞여 거의 흡사해졌고, 일반적으론 튀르크 어를 썼지만 상류층은 몽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상인은 권력자의 비호를 받을 수밖에 없으니, 상단주는 킵차크 칸국과 쉽게 거래하기 위해서 몽골어를 익혔는데... 그 고된 어려움이 이렇게 빛을 발휘하고 있다.
“우린 조선에서 왔다. 이 땅의 동쪽 끝에 위치한 나라지.”
“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건만, 당연하게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풍문으로 들은 게 있어서 질문을 던져봤다.
“그... 중국을 말하는 겁니까?”
“시나sina? 아. 중국? 그보다 더 동쪽에 있다. 여기서 가면 3,4개월쯤 걸리지.”
“오...”
중국도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는데, 조선을 알 리가 있나. 상단주는 그저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3,4개월이나 걸린다고 하니, 오히려 더 헷갈린다.
“어떤가? 사고 싶은 물건이 있나?”
“물론입니다.”
말해 뭐할까. 상단주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럽에서 수입하는 동방물산은 사실 인도를 통해 얻은 향신료가 대부분이다. 오스만제국이 등장해 이 무역로가 끊기면서, 향신료를 찾기 위해 대항해시대가 펼쳐지지 않나.
그럼에도 작게나마 진짜 동방물산이 흘러오곤 했다.
고래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비단길의 주 상품. 도자기, 비단, 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사실 이 시기의 유럽은 차를 많이 소비하지 않아서, 대다수는 중동과 오스만에서 소비됐다. 그럼에도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넘어오는 차가 종종 흘러들어왔지.
비단의 경우에는 오스만과 인도에서 일부 생산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품질 면에 있어서는 중국산이 최고. 이 또한 없어서 못 샀다.
도자기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헌데 이 모든 게 지금 한자리에 모여 있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온갖 것들이 옆에 있으니...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던 거지.
“여기...”
상단주는 관원이 말을 물릴까 싶어서 얼른 은화 뭉치를 내밀었으나, 관원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수북이 쌓여 있던 서류뭉치를 거꾸로 내밀었다.
‘허. 이건 또 뭐지?’
종이조차도 동방물건은 특이한 것 같다. 어째 누리끼리한 종이책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읽어봐라. 우리가 원하는 물건이다.”
“헉!”
상단주는 조심스럽게 책자의 첫장을 넘기기 무섭게, 자기도 모르게 기겁해서 헛기침을 내뱉고 말았다.
친절하게 아랍어와 이탈리아어로 적어 놓은 건 좋은데, 그 품목이 많아도 너무 많다.
‘이게 뭐 하는 거지?’
장사를 하러 온 게 맞기나 한 걸까? 책자 안에는 이 세상의 모든 걸 담겠다는 듯이 별의 별 온갖 사소한 것들이 다 적혀 있었다.
‘나무묘목? 종자씨앗?’
대체 이걸 가져가서 뭐에 써먹을지도 모르겠는데,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점입가경이다.
“그 중에서 가져올 수 있는 품목을 정해라. 그러면 선수금으로 물건을 하나 내어주지. 다음 거래 때에 만족할만한 수량을 가져온다면, 그 때 제대로 거래를 하게 될 거다. 우린 대략 2개월 정도 머물 테니, 그 안에 와야겠지.”
“아...”
“오...”
이런 식의 거래는 또 처음이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다. 일단 시험을 해보고, 능력이 증명되면 제대로 팔겠다는 뜻 아니겠나.
‘흠... 보아하니 돈을 받을 생각이 없군.’
자금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게 무색한 결과가 나왔는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당최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책장에 코를 파묻고 살피며 수하와 이야기를 나눴고, 그 중 몇몇 품목을 고를 수 있었다.
“다 정했나? 따라와라.”
“...”
오리새끼마냥 관원의 뒤를 졸졸 따라가자, 관저 벽면 한쪽에 큼지막하게 붙인 벽보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또 뭔가?’하고 살펴보니... 언젠가 한번쯤 들어본 이름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설마...!? 이게 다 거래를 하고자 하는 상인이라고?’
유심히 살피다보니 대략 견적이 나왔다.
벽보 한쪽에는 동방인들이 원하는 상품목록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상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독하군.’
이건 대놓고 경쟁을 붙이겠다는 뜻 아닌가. 동방상품을 구매하는 건 둘째치고, 이런 대사업에서 경쟁상단에게 밀리는 건 앞으로 장사를 하는 데 있어서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자. 선택해라. 뭘 책임질 수 있지? 우리가 바라는 품목과 수량을 가져올 수 있다면, 네가 원하는 물품과 수량은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다. 설마 여기 있는 게 전부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예? 예.”
약 올리듯 히죽 웃는 동방인을 보며, 상단주는 넋이 빠진 것마냥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