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77화 (377/538)

377. 챕터50. 기틀잡다 (9)

이들이 몽골초원의 부족 하나를 옆으로 밀어낼 때마다, 흡사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듯 밀려난 유목민의 준동에 맞춰 더 많은 유목민이 움직이기 일 수.

이게 계속 반복되면서 몽골초원 전체가 흔들렸고, 이 변화에 맞춰 힘을 응집한 이들이 섬서로 쳐들어가서 자리 잡게 된 거지.

또한 이러한 흔들림은 결국 투쟁과 연합, 분열과 흡수를 일으키게 됐고, 몽골뿐만 아니라 서방의 칸국도 이 여파를 그대로 맞았다.

살아남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덩치를 불려야 했으니, 전처럼 갈기갈기 찢어지고 분열했어야할 부족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무리를 이루게 된 것.

나비효과처럼 몽골초원 동쪽에서 일으킨 바람이 서쪽 끝 킵차크 칸국에 이르렀을 땐 쓰나미로 바뀌어 있었고, 그로 인해 이곳의 역사가 완전히 뒤집히게 된 거지.

더불어 조선이 만주를 정복하고 막대한 양의 물자를 풀기 시작하니, 당연히 생필품이 부족한 몽골초원의 관심은 동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는 바.

중앙아시아 초원에 사는 유목민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어서, 중국, 티베트에서 와야 할 생필품 대신 조선물산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서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던 거지.

결국. 세상 끝에서 끝이라 할 수 있는 조선까지 루스인 노예가 오게 된 건... 뜬금없는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지난 삼십년 가까이 물밑에서 진행된 변화의 결과물이었던 거다.

그 산증인이 바로 이 노인. 양요였다.

“...”

‘그 땐...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세월 참 빠르군.’

그는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연오랑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웃고 말았다.

연오랑은 개혁 한참 전부터. 의주에서 한혈마를 수입해 전마를 키우고, 우두에 걸린 유럽산 소를 들여와 종두법을 실험했다.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건, 이미 초원길이 얼추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뜻 아니겠는가.

연오랑이 움직인 행상의 주문을 받고, 몽골부족과 협상 및 의뢰를 진행한 인물이 바로 요동상인 양요였으니... 그때의 인연이 지금의 역사를 만들어 낸 거지.

그렇게 나름 조선과 친분이 깊었던 양요는 조선이 여진을 흡수해 만주를 장악하자 아예 조선으로 귀화했고, 그 후로는 꾸준히 창주를 통해 기존의 거래선을 유지하며 말과 가축, 서역물산을 수입해 왔었다.

그런 인물이라서 이번 사절단에 포함될 수 있었고, 그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노구를 이끌고 움직였지.

그 또한 여기까지 직접 와보지도 못하고, 온갖 유목부족을 거쳐 거쳐서 서역물산을 수입하지 않았나. 자신의 가업을 완성시켜준 뿌리를 보고 싶은 건, 누구라도 품게 되는 당연한 마음일 거다.

이러니 매일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믿을 수가 없어서, 하늘을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 들 수밖에.

“양 단주.”

“아.”

멍하니 과거를 반추하던 양요는 옆에서 부르는 연대병을 보며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다른 마장을 보러 가겠습니까?”

“그럽시다.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익혀야 하는 법이니...”

“물론입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장구보 또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봐야할 말들이 어디 한둘인가. 품종도 엄청나게 다양하고, 소문을 듣고 알음알음 흘러들어오는 마상이 한둘이 아니다.

발품을 팔면 팔수록 무조건 이득이다.

다만 거래를 바로 하지 않아서 일까? 털모자 말장수는 애써 쓰린 속을 다스리면서도, 감히 심기를 건드릴 수가 없어서 연신 미소를 머금었다.

마시장이 열린 공터 반대편에선, 일단의 군병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여긴 널린 게 초원이니 특별할 건 없지만, 딱 봐도 생경한 검은 두정갑을 입은 이들이 모여 있었으니 이 역시도 눈에 띈다.

게다가 그냥 모여 있는 게 끝이 아니고, 생경한 갑옷과 복장을 한 이들이 원을 그리고 모여 목청을 높이고 있지 않나.

“와아아!”

“쳐! 때려!”

“옆으로 피해야지!”

후훕. 판금갑옷을 입은 용병은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똑같이 몸으로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상대를 노려봤다.

둘다 똑같은 갑옷과 똑같은 롱소드로 싸우고 있으니 승패가 바로 날 리가 없었고, 둘은 먼지구름을 피워가며 연신 엎치락뒤치락 반복하며 땅을 굴러댔다.

“흠...”

“승부를 내는 게 쉽지가 않겠네.”

“그러게 말입니다. 생각만큼이나 단단하군요.”

착호군이 창설될 때부터 기사대에서 활약했던 장호와 빛나는 경력으로 이번 사절단 호위를 맡게 된 이징옥.

둘은 대결을 유심히 지켜보며 품평을 늘어놨다.

사절단에 속한 모든 관원은 각자 맡은 바 임무가 있었고, 호위를 맡은 연대병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장사나 하고 여행이나 할 생각이었으면, 관원들을 이렇게나 많이 대동하고 올 필요가 없지 않나.

사절단은 낯선 서방에게 조선물산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건 물론, 조선이 접하지 못했던 서방의 기술,서적,지식 등을 뽑아내기 위해 전문가들을 엄선해서 보낸 거지.

연대병들 또한 그냥 호위만 하려고 온 게 아니라, 서방의 무기류, 군수품, 편제, 전략 등을 알아내는 임무가 있었다.

“확실히 다르긴 다릅니다.”

“그래 보이는군. 갑옷 양식도 천차만별에, 편제도 그렇고.”

“예.”

이징옥의 말에 장호 또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까지 겪은 유목민 군대는 조선이 생각하던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민족과 종교가 달라도 유목민인건 마찬가지니, 우랑카이 3위나 중앙아시아의 칸국이나 군대는 엇비슷했었다. 허나 온갖 문명의 교차점인 이곳에 도착하고 나니, 확연히 달라진다.

“체제의 차이 때문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만 여긴 정말 너무 많이 뒤섞여서, 하나로 뭉뚱그려 묶어보기에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음...”

장호는 그간 봐왔던 걸 떠올리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몽골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킵차크 칸국의 군대와, 본래 타나항의 주인이라는 해상왕국의 군대, 서역 상인들의 호위로 딸려온 동로마제국 용병과 이탈리아 반도의 용병들까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볼거리는 점점 풍성해지고, 장호와 이징옥이 써내려가야 할 보고서는 점점 두꺼워졌다.

“기사라는 무사계급 때문에 그럴 지도 모르겠군?”

“예. 여긴 전조 때처럼 사병을 보유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어쩌면 일본과 더 흡사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과 비교하니 확 와 닿는다.

그곳도 무사계급과 장원이 발달하고, 무사신분과 백성신분이 구분되고, 무사들의 갑옷 또한 농민징집병과 다르지 않았나.

‘물론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였지만, 여긴 차이가 조금 심하게 나는 것 같네.’

장호는 일본의 군대를 떠올리자, 이런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각 영지마다 군사를 유지해야 하니 대규모 병력 동원은 힘들 테고, 그러면서도 전력은 유지해야 하니 정예병을 중심으로 무장이 발전하게 됐단 말이군?”

“예. 저 강철갑옷은 딱 봐도 꽤나 값비싸 보이는데, 징집된 병사들이 입기에는 무리 아니겠습니까. 일본의 대명이나 무사층, 전조의 호족과도 같은 위치에 있을 테니, 소수정예를 추구한 모양입니다.”

“음.”

이징옥이 다시금 덧붙이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듯하다.

지금은 조선이지만 고려 때의 기억은 아직 남아 있었기에, 장호에게 봉건제가 엄청 낯선 건 아니지 않나.

딱 들어맞진 않지만 얼추 끼워 맞춰보면, 어째서 저런 식으로 발전한 건지 대충 감이 왔다.

“용병이라는 것도 특이하고요. 돈을 받고 싸워주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이상하지만, 엄밀히 보면 그런 게 없던 것도 아니지 않나? 몽골이나 옛 여진도 비슷한 짓을 하기도 했고.”

“음... 크게 보면 비슷한데, 또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징옥은 당최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동양에선 중앙집권적인 왕조가 항상 있어왔고, 군호를 지정해 농민병을 써먹었을지언정 돈으로 고용하는 전문 군사는 없었지 않나.

중국왕조가 이민족 부족에게 대가를 주고 부려먹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처럼 난잡하면서도 자유롭게 돈으로 군사를 사고팔진 않았다.

조선은 더더욱 그런 경우가 없었기에, 아무리 고려 때의 사병을 생각해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는 거지.

‘민족도 다르고 나라도 많고, 역사도 뒤죽박죽이라서 그런 거겠지?’

결론은 이쪽으로 귀결됐다.

둘을 비롯해서 지켜보고 있는 연대병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뒤쪽에 엉거주춤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에게서도 작게 소란이 일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뭐라고 하는지 알겠나?”

“...”

상인이 그리 투덜거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용병 또한 피식 웃고 말았다.

상류층 언어인 몽골어조차 못 알아듣는데,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르는 동방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오래전부터 거래를 해온 사이건만, 지금처럼 초조하게 구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왜. 거래가 잘 안될 것 같소?”

“표정을 봐도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어때?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글쎄... 저치들은 좋아하는 것 같은데?”

상인의 전담호위를 맡은 용병은 조심스럽게 저쪽에서 누군가를 응원하고 있는 조선군들을 가리켰다.

“그야 다 똑같은 칼잡이들이니까, 싸움질 구경하는 걸 즐기는 거고. 갑옷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냔 말이야.”

“난들 아나? 그래도 싫어하진 않을 것 같은데? 저들이 입고 있는 갑옷과 다르잖아? 나아보이기도 하고.”

“끄응...”

용병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서, 상인은 다시금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조선이 유럽의 갑옷을 신기해하며 유심히 관찰하는 것처럼,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두정갑은 유럽에서 쓰이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고, 동로마제국의 양식이나 오스만,티무르의 양식과도 또 달랐으니까.

“사실 난 그런 것보다, 저들이 다 똑같은 갑옷을 입고 있는 게 걸리는 걸?”

“...?”

용병의 말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해 상인은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껏 보면 모르오? 우리가 언제 무장을 똑같이 하고 다니는 거 봤소? 다 여유가 되는대로 알아서 입고 다녔잖소. 헌데 저들은?”

“똑같지.”

상인은 망설임도 없이 답을 털어놨다.

갑옷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인인데, 아무리 낯선 양식의 갑옷이라고 해서 그 특성을 못 알아볼까.

죄다 검은색으로 염색한 갑옷은 누가 봐도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양산품이다.

“뭐... 이 먼 곳까지 온 걸로 봐선 나름 상품으로 골라 입힌 걸 수도 있지만, 저들이 막 구르는 걸로 봐선 그건 아닌 것 같거든. 결국 저게 그. 뭐시냐...”

“조선.”

“그 조선이라는 동방 나라의 표준갑옷이라는 건데... 저것도 은근 비싸지 않나? 대충 봐도 우리가 입는 브리건딘보다 좋아 보이는 걸? 게다가 건틀렛도 끼고 있고, 그리브(정강이방어구)비슷한 것도 차고 있고.”

“그렇지.”

상인은 냉큼 고개를 끄덕여댔다.

겉으로 보기엔 가죽과 천으로 된 갑옷처럼 보이지만, 징이 박혀 있는 게 티가 나니 안에는 철판을 겹쳐 넣었을 거다.

그 철판의 품질이 어떨지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가죽이나 면포가 하품은 아닌 게 확실해 보이니, 결코 싼 가격은 아닐 거다.

애초에 유럽에선 면포 자체가 비싼 물건 아닌가.

“한마디로 저 나라는 돈이 꽤 많고, 군사도 꽤 많다는 뜻이군?”

“그게 아니고서야 갑옷을 양산품으로 만들 리가 없잖소. 당신도 이번에 공방을 확장하면서 엄청 고생한 걸로 알고 있는데?”

“맞지.”

말해 뭐 할까.

그런 이유가 아니었으면 밀라노 출신인 그가, 이름만 들어봤지 한 번도 와보지 않은 타나항까지 헐레벌떡 달려왔을까.

“저런 고품질의 갑옷을 양산할 수 있는 나라라면, 당연히 당신 갑옷에도 관심을 보일 거요. 그러니까 애처럼 칭얼대지 좀 마쇼.”

“으...”

애 취급을 당했건만, 상인은 할 말이 없어서 그저 이만 갈고 말았다.

한바탕 격투시험을 끝내고 나선, 줄줄이 걸음을 옮겨 다음 시험장으로 향했다.

흉갑을 대충 허수아비에 걸쳐 놓자, 조선군들은 거리를 두고 서서 활을 꺼내 쏴대기 시작했다.

쉭! 파공성을 내며 매섭게 날아간 화살은 캉!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갑옷에 맞고 튕겨나갔다.

“오!”

조선군들은 놀라서 웅성거리며 감탄성을 내뱉었지만, 상인은 화살이 갑옷에 맞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서 몸을 떨어댔다.

이미 충분히 실험을 하고 완성한 물건이니 쉽게 뚫리진 않겠지만, 혹시 또 모르지 않나.

재수 없게 뚫리기라도 하면, 거래는 전부 물거품이 될 거다.

“흠. 저건 조금 걸리는 군.”

“뭐가?”

“저들이 들고 있는 활 말이오.”

“아...”

용병은 조선군이 연신 화살을 갈겨대는 각궁을 가리켰다.

복합궁의 일종인 각궁은 이곳에서도 그리 드문 물건이 아니다.

유목민족은 보통 복합궁을 사용하니 동방은 당연한 거고, 티무르제국이나 오스만제국, 심지어 동로마제국의 제후 토호들 중에서도 복합궁을 쓰는 이들이 있었다.

문제는 복합궁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조선군이 죄다 복합궁을 들고 있다는 뜻.

“깨작깨작 궁병대를 써먹을 거면 굳이 비싼 복합궁을 쓸 필요가 없으니 결국 궁기병이 있다는 말이고... 그럼 기병 전력도 엄청나겠군.”

“...”

복합궁이 유목민족에게 각광받은 건, 활이 작아서 말 타고 달리면서 쏘기 편하기 때문.

나아가 기사騎射를 하는 건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니, 효율을 내기 위해선 궁기병을 대규모로 양성할 기반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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