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 챕터50. 기틀잡다 (10)
그 말은 저 낯선 이들도 유목민군대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뜻인데... 반대로 또 허리춤에 끼고 있는 도끼나 장도, 대도와 같은 물건은 중병기 아닌가.
“말도 엄청나게 사들이는 걸로 봐선 기병이 주력인 건 맞긴 맞는 모양인데, 우리와도 다르고 튀르크인들하고도 조금 다른 모양이오.”
“그래서 좋다는 거야, 안 좋다는 거야?”
아직도 조바심을 떨쳐내지 못한 상인이 쏘아붙이자, 용병은 피식 웃으며 답을 했다.
“좋다는 거요.”
“...?”
“가벼운 궁기병을 운용하면서도 중기병도 함께 운용한다는 뜻이니, 중갑옷에도 관심을 가지겠지.”
“오...”
용병의 결론이 진실인지는 둘째 치고, 상인인 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시험은 나름 성공적으로 끝났다.
비싼 갑옷 하나가 화살 수십발을 얻어맞고 걸레짝이 됐지만, 어찌됐건 버티긴 버텨냈으니까.
“이 갑옷을 만든 장인이라고?”
“그렇습니다.”
통역을 거쳐 흘러들어오는 물음에, 상인은 넙죽 고개를 숙였다.
눈빛부터가 딱 봐도 피맛을 아는 칼잡이로 보이는 터라, 절로 몸이 움츠려 든다.
“강철갑옷 삼십벌과 장인 가족 둘. 맞나?”
“그렇습니다.”
“거래를 하지.”
“옙!”
상인은 드디어 승낙이 떨어지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낯선 동방 땅으로 가게 될 장인 가족이 안타깝긴 하지만, 거래는 거래 아닌가.
그간 해준 게 있고 빚진 게 있으니,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거다.
‘됐어! 이거면 공왕의 눈에 들 수 있다!’
상인은 속으로 연신 만세를 외치며,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이 시대는 화약병기가 등장하기 전, 판금갑옷의 짧은 전성기가 막 시작되는 시기였다.
기존의 사슬갑옷에서 판금을 결합한 트랜지셔널 아머가 등장하고, 이내 몸 전체를 판금으로 감싸 독립된 한 벌의 풀플레이트 아머가 등장한다.
이러한 판금갑옷은 크게, 독일에서 생산된 고딕양식과 밀라노에서 생산된 밀라노양식으로 나뉘어 발전하게 되지.
이 상인은 밀라노 공방에서 온 인물이었는데, 밀라노양식의 특징은 대량생산하는 양산품 아닌가.
밀라노 갑옷공방에선 나름 선진제도인 분업을 활용해, 멋은 없지만 가성비가 좋은 판금갑옷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됐어! 됐다고!’
상인이 계속해서 속으로 환호를 내지르는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 시대에도 군수품은 혁신보단 안정을 더 중시해서 보수적인 편이었다.
그는 공방을 확장해 판금갑옷을 찍어낼 준비를 끝마쳤지만, 이걸 제대로 홍보하고 판로를 구축할 비책이 필요했는데... 이게 웬 걸. 낯선 동방에서 흘러들어온 맹수갑옷이 있다는 게 아닌가.
권력자에겐 돈이 아니라 희귀성이 더 가치가 있는 법.
이 호피갑옷을 누구보다도 빨리 얻어서 밀라노 공왕에게 바쳐서 공방의 이름을 알리고, 또 공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갑옷 구입의 우선권을 얻고.
더불어 “봐라! 저 낯선 동방인들도 내 갑옷이 좋다고 사가는 거 봤지?”라고,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
이를 위해서 갑옷장인이라는 기둥뿌리까지 뽑아서 가져온 거지.
“...”
속으로 환호를 외치며 잠시 기다리고 있자, 깨끗하게 세탁한 호피갑옷들이 자단목 상자에 포장되어 눈앞에 놓였다.
“쓰던 물건인데 상관없는 게 확실한가?”
“예.예. 물론입니다.”
상인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여댔다.
이 갑옷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거야 입을 잘 털면 그만 아닌가.
무력과 무용을 중시하는 유럽에선, 훌륭한 기사가 직접 사용한 물건이 더 큰 가치가 있는 법. 오히려 사용 흔적이 있는 게, 사기 아닌 사기를 치기에는 더 좋았다.
사실 이들이 몰라서 그런 건데, 호피갑옷의 주인은 정호, 이징옥을 비롯한 기존 기사대원이 쓰던 물건이었다.
호피갑옷이 아까운 건 사실이지만, 여기선 말 그대로 천금의 값어치를 하지 않나. 조선에선 어렵지 않게 또 구할 수 있으니, 냉큼 팔아넘긴 거지.
“몇벌 더 있는데, 같은 대금으로 가져올 수 있나?”
“음...”
은근한 제안에 상인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보다 빠르게 공왕에게 예물을 바칠 수 있는 상인은 없을 거다. 하지만 호피갑옷이 많이 풀릴수록 약발이 떨어지는 건 당연지사.
호피갑옷은 전례 없는 물건에, 기사들이라면 끔뻑 죽을 물건 아닌가. 이걸 사서 귀족영주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작자들이 한둘이 아닐 거다.
‘그럴 바엔 무리를 해서라도 내가 싹 쓸어오는 게 좋은데... 어차피 공왕에게 전부 팔지 않더라도, 시간을 두고 천천히 팔면 되지 않을까?’
상인은 그런 앙큼한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놈들이 다음번에도 또 호피갑옷을 왕창 풀면 어떡하지?’라는 우려가 뒤섞였다.
허나 그런 침묵을 오해한 걸까? 장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국이 강철갑옷을 따라 만든다고 해도, 이곳에서 팔진 않을 거다. 당장 우리가 쓰기에도 부족할거고, 동방도 시장은 넓은데 굳이 이곳까지 올 필요가 있을까.”
“아...”
딴 소리를 하는 정호였지만, 상인 입장에선 나쁠 게 없는 터라 냉큼 고개를 끄덕여댔다.
“갑옷으로 수량을 맞추기 힘들다면, 다른 무기류나 서적, 교본등으로 대체해도 괜찮다. 어떻게 하겠나? 힘들면 우리야 다른 상인에게 넘기면 그만이다.”
“...”
혹할 말을 던지다가 끝에가서 협박을 늘어 놓으니, 정호도 나름 장사꾼이 다 된 모양이다.
상인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고, “이놈들 참 성질도 급하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갑질이긴 하지만 슈퍼갑질인데, 이걸 버텨낼 수가 있나. 죽이되든 밥이되든 호피갑옷을 싹쓸이해서 나중에 이득을 챙기기로 마음 먹었다.
“하겠습니다. 필요한 목록을 말씀해 주시지요.”
“시원시원하니 좋군.”
정호와 이징옥은 히죽 웃었고, 상인 또한 얼떨떨하게 따라 웃고 말았다.
조선관원들이 타나항 일대가 좁다하고 싸돌아다니고 있을 때.
붉은 비단옷으로 온몸을 치장한 청년과 그를 호위하는 기병 무리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고 있다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게, 이들은 별다른 걸 하지도 않고 그저 돌아다니면서 구경만 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무리는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
무심한 듯, 하지만 이글이글 타오르는 열망이 피어오르는 눈동자를 숨기지 않는 청년.
바카스는 물끄러미 밭을 갈고 있는 루스인과 그런 루스인들 및 튀르크인들을 지도하는 조선인을 굽어봤다.
“가서 보시겠습니까?”
“됐다.”
청년은 답을 하고선,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될 것 같나? 저들이 말한 대로, 이 땅을 우리가 경작해서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나?”
“힘이 들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고 왕자님께서 직접 이곳까지 온 것이니까요.”
“...”
‘그래야겠지.’
청년 바카스는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선,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다.
원래 역사에서 킵차크 칸국은 일 칸국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티무르 제국과 경쟁관계에 있었으나,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티무르의 후원을 받은 에미르 에디구.
몽골계 망기트부의 후손인 에디구는 티무르에게 얻어맞고 도망쳐서, 리투아니아로 망명한 전 토크타미쉬 칸과 리투아니아의 침공을 막아냈고.
혼란을 틈타 은근슬쩍 떨어져나간 모스크바 공국을 다시 복속시키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다만 킵차크 칸국의 부활은 요원해서 결국 온갖 칸국으로 분열되었고, 그의 아들인 누르알딘 또한 노카이 칸국을 건국했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아니었다.
동방에서 시작된 파도는 대규모 유목민 이주행렬을 이끌고 킵차크 칸국에 닿았다.
땅은 넓은데 사람은 없고, 제대로 된 국경이나 나라의식도 없는 유목민들 아닌가.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려 흡수된 이들도 많지만, 그 파도를 피해 제각각 흩어져 파편이 되어 흘러들어온 이들도 적지 않았던 거지.
이 파편을 가장 많이 집어먹을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실질적인 총사령관 역할을 하던 에디구 아니었겠는가.
그의 아들인 누르알딘 또한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주워 먹으면서 힘을 키웠고, 끝내는 칸을 몰아내고 킵차크 칸국의 칸 자리를 차지했다.
여기서 끝일 리가 있나.
티무르제국은 티무르 사후에 개판이 되어, 킵차크 칸국에 신경 쓸 여유가 없으니. 지금이 바로 기회.
에디구 사후 누르알딘은 원래 역사에서 각 칸국으로 분화되어야할 에미르(영주)들과 부족들을 때려잡아 복속을 이어갔다.
이 또한 어렵지만 그나마 가능했던 건, 이들이 유목민족이기 때문.
각 부족과 씨족으로 나눠져 있다고 하더라도, 승패가 얼추 짐작되면 강한 자 밑에 붙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
그렇게 미래의 킵차크 칸국의 후신인 이흐 칸국을 집어삼켜 볼가강 일대를 장악하고, 아스트라한 칸국을 집어삼켜 카스피해 일대를 장악.
하나씩 때려잡을 때마다, 기존 군벌에서 이탈해서 누르알딘에게 붙는 부족이 계속 늘어났으니 시간은 그의 편이었던 거지.
끝내 크림 반도에서 일어서야할 크림 칸국마저 무너뜨리고서, 흑해와 우크라이나 동부 일대를 장악.
이로서 노가이 칸국 대신 부활한 킵차크 칸국이 탄생하게 된 거지.
이런 위업을 계속 쌓아가고 있는 누르알딘의 후계자가 바로. 지금 타나항에 나와 있는 그의 아들 바카스였다.
“루스인 노예들이 지금껏 얼마나 왔지?”
“대략 삼만명 쯤 됩니다.”
“삼만...”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 놀라서, 삼만이라는 숫자를 계속 혀에 굴렸다.
‘많다. 이렇게 많은 포로를 한자리에 몰아넣은 적이 있던가.’
비록 나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도 아버지를 따라 수많은 전장을 전전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이번 일은 비정상적인 처사다.
“그런데도 통제가 된단 말이지...”
“조선인들의 물건이 예상대로 꽤 잘 팔리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식량을 사오는 건, 전혀 문제되지 않더군요.”
“음... 그치들이 우릴 도와주는 건, 분명 흑막이 있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든, 아국은 이득만 챙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바카스의 말동무를 해주는 노인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개구쟁이와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동로마제국은 오스만의 직접적인 위협을 당하고 있으니, 동맹까지는 아니어도 손을 도와줄 세력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터.
오스만을 한번 두들겨 패준 티무르 제국은 물론이고, 죽는가 싶더니 다시 부활해 버린 킵차크 칸국에게도 손길을 내미는 모양이다.
“헌데... 조선인들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우릴 도와주는 걸까?”
“...”
근원을 짚는 질문을 읊어보지만, 바카스를 보좌하기 위해온 재상노인 뿐만 아니라 호위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일이 잘 풀리는 건 무조건 환영할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
장사를 하니, 비단길을 여니, 뭐니 하면서 온갖 핑계를 가져다 붙여도, 저 멀고먼 동방의 나라가 뭔 이득이 있다고 이렇게까지 자기 일처럼 도와줄까.
“그들 말대로, 루스인 노예들을 데려가고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야 노예상인을 이용하면 그만인데... 그대가 보기에 조선인들의 반응이 그 정도인가?”
“...”
다시금 되묻는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대체 뭔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조선인들은 흡사 누르알딘의 직속부하마냥 굴면서 적극적으로 그들의 개혁 작업을 도와주고 있으니까.
“그 또한 이유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린 그들에게서 최대한 이득을 취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확실히 동방왕조가 다르긴 다르지 않습니까? 그들의 도움이 없다면 칸께서 바라는 개혁은 어려워질 겁니다.”
“그야 그렇지만...”
동로마제국의 사정과 똑같으니, 이번엔 바카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너무도 맞는 말이군. 이건 알면서도 당해줄 수밖에 없구나.’
바카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좋은 건 좋은 건데, 신발에 들어간 돌멩이마냥 거슬렸다.
킵차크 칸국은 망했고, 티무르 제국도 개판이 됐으며, 그 동쪽의 모굴 칸국도 개판이 됐다.
“이게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라고 곰곰이 생각해 보건데, 에디구와 누르알딘이 찾은 답은 간단했다.
하나로 뭉치지 못해서 그렇다.
왕인 칸이 존재하는 동시에, 에미르나 부족,호족이 존재하는 봉건제가 결합된 탓에, 중앙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걸핏하면 사방에서 들고 일어서는 거지.
다만... 이걸 쉽게 해결할 수가 있나.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룰 수 있었다면, 이미 전대 칸 시절에 진행했을 거다. 유목민족이라고 한들, 자신들이 다른 부족들 다 때려잡고 지배층이 되고 싶은 건 당연하니까.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동방에서 밀려온 파도에 휩쓸린 파편들은 부족과 씨족으로 찢어져 구심점을 잃어버리거나, 설령 있다고 해도 충분히 흡수하고 찍어 누를 수 있는 작은 덩치였다.
에디구와 누르알딘은 전처럼 자율권이나 자치권을 주지 않고, 그들을 직접 복속시켜서 그의 친위대로 만들어 버린 거지.
이 때문에 칸국들을 다 때려잡고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거고, 드디어 제대로 된 중앙집권을 향해 발이라도 뻗어볼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곳이야 말로 앞으로 아국의 중심이 될 곳이 되겠지.’
바카스는 조선의 왕자라는 자가 열심히 풀어놓던 경험을 떠올리며, 다시금 고개를 들어 개간 중인 평야를 굽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