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379화 (379/538)

379. 챕터51. 뽑아먹다 (1)

이 시대는 봉건제가 일방적인 체제이고, 전제정이 섞여 있다고는 해도 봉건제적인 성격이 깊었다.

유럽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천년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동로마제국 또한 제후와 토호를 유지하고 있고, 오스만제국, 티무르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운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지만... 저 먼 곳에서 온 조선은 세계최고 수준의 중앙집권을 이룩하고, 유례없이 꼼꼼한 행정조직을 구축한 나라 아닌가.

원래 역사에서도 조선은 동시대 기준. 과할 정도로 중앙집권을 이룩한 나라인데, 지금 역사의 조선은 거기서 몇발 더 나아간 상태.

누르알딘과 바카스가 꿈꾸던 나라가 알아서 자신들을 찾아온 꼴이니... 조선관원들이 말하는 체제와 제도 하나하나를 빼놓지 않고 귀담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거지.

이곳 타나항을 장악해 무역항을 만들고, 조선물산을 비롯해 초원물산을 팔고, 그 자금을 이용해 식량을 구입해 오고, 루스인들을 납치해 데려와서 이곳에 정착시켜 농지를 일구게 하는 일.

이런 작업은 킵차크 칸국 사람들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계획이지만... 조선인들에겐 조차지 및 양전사업을 할 때 매번 하던 일 아니었던가.

기상천외한 사건이 아무렇지 않게 버젓이 벌어지는 까닭은 이러했다.

‘내가 이곳에 와 있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지.’

중앙집권을 이룩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선, 유목국가의 관습이나 마찬가지인 형제상속을 완전히 날려버려야 했다.

천만다행이도 혼란한 시국을 틈타 에디구에서 누르알딘으론 잘 넘어갔으니, 이젠 바카스가 그 대통을 이어받아야 할 차례.

후계에게 공적을 밀어줘서 명분을 쌓고 명성을 올리는 방법은, 유사 이래로 반복되어 온 유구한 전통 아닌가.

반농반목이나 마찬가지인 킵차크 칸국을 정주국가 비슷하게 만들려는 작업은 지금껏 없던 대역사나 다름없다.

바카스의 지도하에 타나항이 킵차크 칸국의 돈줄이자 목줄이 된다면, 그 누구도 왕위 승계를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이는 없을 거다.

‘제대로 번성한다면 말이야.’

그는 속으로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건 뭔가 멀리 떨어진 느낌이지만... 자신의 권력을 탄탄히 만드는 건 직접적으로 와 닿았고, 그랬기에 이렇게 말단마냥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순시를 하고 있는 거였지.

“도시개발은 어느 정도 진행됐지?”

“항구는 기존의 것을 보수해서 쓰고 있는 데, 훗날을 생각하면 보다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주거지 증축 또한 이미 진행중입니다.”

“곡물창고를 새로 짓고 있는데, 그들의 방식이 퍽 낯설지만 한편으론 효율적이더군요.”

“그렇습니다. 로마국 기술자를 데려와서 부려먹고 있는데, 조선관원과 꽤나 죽이 잘 맞아서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흠... 로마국이라.”

‘나쁘지 않군.’

킵차크 칸국과 동로마제국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동로마제국이 발전된 나라라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비록 요새 오스만제국과의 충돌에서 계속 밀리고, 군사적으로는 힘이 줄었다고 한들, 그들이 쌓아올린 문명과 기술, 지식만큼은 킵차크 칸국과 비교할 바가 못 되지.

‘그들의 기술을 빼올 수만 있다면 무조건 남는 장사다.’

종교와 인종이 다른 게 무슨 상관이랴.

뭐가 됐든 하나라도 뽑아먹을 수 있다면 좋은 거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하겠지.’

오스만제국에게 동로마제국이 위협당하고 있는 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고, 흑해 반대편에 있는 킵차크 칸국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오스만제국이 팽창하는 건 킵차크 칸국 입장에서도 꽤 거슬리는 일이라서, 매서운 눈으로 유심히 살피면서 이득을 챙기는 중이었지.

“역참도 같이 관리하나보지?”

“그렇습니다. 이곳으로 가져온 식량은 불가강을 타고 재건 중인 사라이로 가고 있습니다.”

“그곳에도 노예가 많으니까?”

“예.”

바카스는 머릿속에 빠르게 지도를 그리고서, 조선인들이 하고 있는 짓을 떠올려봤다.

사라이는 킵차크 칸국의 수도로, 과거 티무르제국에 의해 함락 당했던 곳이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쭉 재건을 이어가고 있었고, 지금은 본격적으로 루스인 노예를 대거 동원하고 있는 상황.

당연히 이들을 먹여 살릴 식량이 필요했는데, 그 식량은 타나항을 통해 동로마제국, 이탈리아 남부, 이집트 등에서 수입해 오고 있었다.

이 시기엔 아프리카 남부. 미래의 알제리, 모로코 등지를 거쳐 스페인까지 이슬람세력이 진출해 있었지만, 오스만제국의 힘이 그리 크지 않아서 오스만제국의 밑에 있는 건 아니었지.

그랬기에 로마제국 시절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이집트는 지금도 여전히 유럽의 식량창고이자 동로마제국의 식량창고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일부가 킵차크 칸국까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곧장 정세를 파악하고 움직였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

그는 번개처럼 움직이는 조선관원들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물론 조선물산을 사려는 서역상인들이 마구잡이로 자신의 패를 꺼내들었고, 그 중 식량이 걸려든 것이겠지만... 일을 이렇게까지 끌고 간 것 자체가 능력이 있다는 뜻 아닌가.

‘그 식량을 수로를 이용해 옮겨서 사라이를 재건한다. 간단하면서도 놀라운 계획이다. 아마... 조선이라는 나라에선 이런 식으로 수로를 운용하는 거겠지.’

바카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선관원들 옆에 달라붙어 있는 수하들이 제대로 배우고 있기를 희망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이게 퍽 낯설고 놀라운 일이지만, 조선인들 입장에선 지금껏 매번 해왔던 일 아닌가.

의주로 중국곡물을 가져와 수로를 통해 북방신도시로 옮기는 일에는 이골이 나 있는 상태였고, 그 작업을 이곳에서도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지.

‘문제는 이 대금을 전부 조선의 특산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 지금 당장은 서로가 이득이 되니 문제가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문제가 생기게 될 거다.’

“...”

바카스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론을 떠올렸다.

조선이 참으로 고약한 수법을 썼는데, 이건 거부할 수가 없지 않나.

조선에게 무관세의 혜택을 주긴 했지만, 킵차크 칸국은 그보다 더 큰 이득을 얻고 있으니 지금 당장은 손해가 아니다.

손해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건, 이 땅이 제대로 정비되어 소출이 나기 시작하면서 부터인데...

‘하루아침에 불가강 유역이 재정비 될 리가 없으니 한동안은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할 터, 결국 동방특산물은 계속해서 이곳으로 흘러들어오게 되는 건가.’

그 때가 되면 동방무역은 완전히 자리 잡아서, 엮여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게 될 터.

“야.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너무 손해인데? 앞으로 우리 주도로 진행한다.”라고 딴지를 걸었다가는... 손을 잡은 동방 칸국들이 전부 들고 일어날 거다.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결국 우리도 뭔가를 팔아야 하는데... 모피 밖에 없나?”

“지금 당장은 그렇습니다.”

바카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옆에 있던 노인은 용케 알아듣고서 한마디 덧붙였다.

러시아제국이 동쪽으로 뻗어나간 이유가 뭔가.

소빙하기가 찾아오면서 모피 수요가 급등한 것도 있지만, 이 지역은 킵차크 칸국이 성립되기 전부터 북방의 모피, 비단길을 통한 동방물품, 남부의 이슬람 물산이 교차하던 중계무역지였다.

이 무역로가 끊겼다가 되살아났으니, 제대로 된 특산품이 없는 킵차크 칸국이 취해야 할 건 역시나 모피무역이지.

‘조선과 동방에서 흘러들어오는 모피가 있겠지만, 우리가 훨씬 가깝지 않나.’

무두질기술이 발전한 동방이 품질면에선 더 나을지 몰라도, 오는 데 거리가 있기 때문에 물량에서는 킵차크 칸국을 따라올 수가 없다.

유럽과 중동의 모피 수요는 꾸준하니, 어떻게든 챙기기만 한다면 무역적자를 해소할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결국 북방으로 나아가야 하니, 카잔놈들이나 루스인, 코사크놈들을 전부 처리해야한다는 거군. 이 또한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겠어.’

그는 또 다시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미래의 노가이 칸국이 킵차크 칸국을 대체했고, 분열되어야 할 칸국을 사전에 정리했다.

이 말은 칸국으로 뭉쳐야 할 부족들이 박살나서 킵차크 칸국에 흡수되기도 했지만,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을 하려는 이들도 꽤 된다는 뜻.

원래 역사에선 노가이 칸국과 모스크바 공국 사이에 카잔 칸국이 생겨났는데, 지금 역사에선 카잔인들 중 일부가 킵차크 칸국에 흡수되고 나머지는 어지럽게 흩뿌려진 상태였다.

‘우리로서는 어차피 치워야 할 놈들인데, 조선은 또 노예를 필요로 하지 않나. 손을 잡고 싶지 않아도 잡을 수밖에 없군.’

사정이 이러하니... 어째 이걸 조선이 바라는 건지, 아니면 자신들이 바라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결국 홀로서기 위해선 이곳과 불가강 일대의 경작이 시작되어야 하겠지.’

그런 결론이 내려지자, 되물어야 할 질문 또한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

“파종은 어떻게 되고 있지?”

“루스인 노예들을 통해 밀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것 같습니다.”

“조선인들이 도움을 주고?”

“그렇습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만큼은 확실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엔 일가견이 있는 것 같더군요. 수로정비 하는 기술 또한 남달랐습니다.”

“음.”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노인뿐만 아니라 모든 호위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단순한 호위가 아니라, 옛 몽골제국의 호위대인 케식처럼 유력부족장들의 자제들을 모아 바카스의 직속부하로 점지한 이들이다.

나중에 조정이 완성되면 고관직을 차지할 예정이지.

이들이 모두 동의한다는 건, 칸에게 복속한 대다수의 부족들이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

나름 고무적인 성과다.

“그대들이 보기에도 확실한가?”

“그러합니다.”

“예. 배울 수만 있다면 배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다만 치수공사에 있어서는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바, 지금처럼 많은 루스인 노예가 있지 않다면 다른 지역에서 행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맞는 말이야.’

바카스는 부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농사를 적게 짓는 게 아니다.

옛 몽골제국이야 농지를 전부 초지로 바꿔버리려는 생각이 있었다지만 그건 옛날이야기고,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았나.

더불어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몽골인도 아니라서, 농사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그럼에도 반농반목생활을 해온 건, 제대로 된 대규모 농지를 만들기 위해선 치수공사가 필수였기 때문. 수전이 워낙 손이 많이가서 그렇지, 밭농사도 다르지 않다.

정교한 기술력과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지 않으면 시작조차 불가능하니, 이들 입장에선 옥토가 아까운 걸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초지로 쓸 수밖에 없던 거지.

허나 지금은 그 모든 게 해결됐으니, 이렇게 조선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내년에 수확을 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타나항과 돈강 일부만 경작에 성공해도, 타나항의 식량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한 해만 버티고 나면, 다음 해는 더 많은 경작지를 만들 수 있을 거고?”

“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경작지는 늘어갈 테니, 칸께 복속되는 이들도 늘어날 겁니다.”

유목민에게 생필품과 식량을 쥐고 흔드는 것만큼 강력한 수단이 없지 않나.

지들끼리 잘났다고 흩어진 부족들도, 식량을 찾아 하나둘씩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찾아올 거다.

‘이걸 위해서는 결국은 또 농부가 늘어나야하니, 어찌됐건 루스인과 코사크, 리투아니아에 대한 공격은 멈출 수가 없겠군.’

“큭.”

바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이건 꼭 꼬리 물기를 하는 것 같지 않나.

유목민 부족을 흡수하기 위해선 식량이 필요하고,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선 농사를 지어야 한다.

농사를 짓기 위해선 노예가 필요한데, 노예가 늘어나면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식량을 만들기 위해 농사를 더 많이 지어야 한다.

이런 노예를 데려오는 건 또 유목민 군대이니... 식량을 중심으로 돌고 도는 거지.

“시작한 이상 돌이킬 수가 없게 됐군.”

“예...”

“...”

가볍게 던진 말이건만, 다들 그 무거운 속뜻을 읽고 침을 꿀꺽 삼켰다.

핵심을 짚는 정확한 말이었다.

이건 연오랑이 조선에 포로폭탄을 집어던져, 체제를 깨트리려는 것과 같은 이치.

이게 성공하면 후계자인 바카스가 성공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중앙집권을 이룩한 새로운 킵차크 칸국이 탄생하는 거고... 실패하면 예전처럼 흩어져서 알아서 살게 되는 거다.

그런데 나라의 존망을 건 대업에 있어서, 생전 있는 줄도 몰랐던 조선인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헛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조선왕자가 사라이에서 어제 돌아왔다고 했지?”

“예.”

“만나봐야겠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

오늘도 고된 하루를 끝마치고 해가 서서히 잠에 들려던 때.

타나항이 비좁다하고 사방을 돌아다니던 조선관원들이 시장관저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곳은 입식생활을 하는 터라 조선의 회의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여기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다들 익숙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붙였다.

따뜻하게 데운 차가 줄줄이 탁자 위에 놓이고, 다들 오늘 일을 벌어졌던 사건을 이야기 하며 목을 축였다.

이윽고 잠시 지나지 않아, 목욕을 막 끝마치고 온 공녕군 이인이 상석에 자리했다.

“다들 모였나?”

“예.”

“잘 먹고 지내나 보네? 얼굴에 기름이 흐르는군.”

“흐흐...”

“크흠.”

이인은 히죽 웃으며 관원들을 훑었고, 다들 미소를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도 이곳의 물과 음식은 나름 먹을 만했고, 오히려 새로운 식자재를 발견하고서 다들 하나라도 더 가져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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