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 챕터51. 뽑아먹다 (2)
미식가가 된 것도 아니건만, 온 사방에서 몰려든 생경한 음식을 매일같이 먹으며 품평을 하고 있는 중이었지.
“사라이에서는 어땠습니까?”
“별 거 있나. 전과 같은 이야기였다. 다 똑같은 놈들이 뭔 말이 그렇게 많은지... 하나라도 더 달라고 난리법석이더군.”
“음...”
“크흠.”
말은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표정은 밝은 걸로 보아, 일이 잘 처리된 것 같아 보였다.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군요.”
“다행이 그렇게 됐네. 이젠 누구 하나가 큰 목소리를 내기에는 일이 너무 커지지 않았나. 다들 살얼음판을 걷는 판국이니, 애들 마냥 막무가내로 떼를 쓸 수 없는 일이 됐지. 그래서 원안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 정도로 결론이 났네.”
“오...!”
“하긴.”
“다행입니다.”
히죽 웃는 이인의 말에 하나같이 반색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외교무역부는 조정에서 자리를 탄탄히 굳혀가고 있고, 이인은 지난날 무수한 공적을 세우지 않았나.
특히나 창주에 머물면서 몽골인과 밀접하게 접했으니, 이번 사절단의 대표가 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조정은 왕자를 외교관으로 활용해 꽤 재미를 보고서 온녕군 이진마저 대리로 보낼 정도. 경력이 충분한 이인이 사절단의 대표로 참여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좋군. 다들 제몫을 하는 모양이야.’
“시작하지. 누구부터 하겠나?”
이인은 쓱 회의장의 인물들을 훑고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워낙 험하고 멀지 않나.
고된 사행길을 나이가 찬 노신들은 올수가 없어서, 나름 중진급 인사가 다수 포진되어 있었고... 착호군 시절부터 구른 보람이 드러나듯, 그가 없이도 열심히 일을 해오고 있었다.
“...”
잠시 순번을 놓고 눈싸움이 벌어졌지만, 먼저 입을 연 건 택리부의 이춘보였다.
원래 역사와 지금 역사 모두에서, 조선의 지리학에 큰 족적을 세운 이회의 아들 이춘보. 이회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이춘보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그는 몽골원정 때부터 이회를 따라 지리감에 속해 돌아다녔고, 지금까지도 북방에서 머물며 지도제작에 열중하던 인물이었지.
“다른 내용에 앞서,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기존의 계획을 폐기하고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살짝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다들 내심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을까? 모두가 반문하지 않고 잠자코 그의 설명을 기다렸다.
“보시지요. 이번에 지나온 사행로를 엮은 지도입니다.”
그는 두툼한 책자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책자는 지도를 분철해서 모아놓은 형태였는데, 이걸 낱개로 풀어서 옆으로 쭉 이어붙이면 창주에서부터 타나항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지도가 완성된다.
“헉?”
“오...!?”
“저렇게나 많이...?”
다들 이미 몸으로 경험했으면서도 놀란 이유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두꺼웠기 때문.
올 때는 이런저런 일이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하나로 모아두고 보니 세삼 “참 멀리도 왔구나.”라는 게 실감났다.
“옛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온 길이 무려 이천리(8천키로미터)입니다. 가늠이 됩니까?”
“헙.”
“허허...”
이어지는 이춘보의 말에, 다들 경악성을 내뱉었다.
이제 보니 진짜 엄청나게 멀리도 왔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곳에서도 또 서쪽, 남쪽으로도 족히 천리를 가야 바다가 나온다고 하더군요. 그 안에 속해 있는 나라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겨울이 오기 전에 정보수집을 끝마치고 돌아가는 건 절대 불가능합니다.”
“음.”
“그건 그렇지.”
“나도 그렇게 들었네.”
다들 외국상인과 만나서 열심히 뽑아먹고 있던 터라 들은 게 있는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댔다.
‘음... 역시 같은 생각이군.’
이인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계획에 문제가 생긴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선은 중국이 큰 나라. 땅도 넓고 사람도 많은 대국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얼마나 거대한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옛 명나라 시절에도 기껏해야 북평이나 남경을 왔다갔다했을 뿐인데, 내륙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어떻게 알겠나.
그저 “크겠지.”라고 막연히 상상하고 있었을 뿐이었고, 가장 밀접한 중국조차 그렇게 생각했으면 몽골을 비롯한 다른 외국에 대해서는 당연히 아는 게 없었지.
남방으로 진출하면서, 기존의 세계관이 깨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지만 아직도 한참 부족.
창주에서 몽골상인을 통해 꾸준히 서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그들 또한 이곳까지 직접오가지 않고 그저 파편화된 정보만 가지고 있었지 않나.
조선은 정보를 짜집기해서 “여기서 여기까지 가고, 여기서 또 여기까지 가면. 대충 이 정도 거리가 나오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하고서 사행단을 출발시켰던 거지.
더불어 이 서역이라는 곳이 이렇게 정세가 복잡하고, 또 있는 줄은 알지도 못했던 나라가 수북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보의 부족으로 인한 뻔한 착오가 발생하고 말았다.
“아무리 못해도 올해는 이곳에서 머물고, 내년 봄에 날이 풀리면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하기야 색목인 포로들을 데리고 가려면...”
“맞습니다. 상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곳 앞바다를 건너면 또 지중해라는 바다가 나오고, 그 바다 건너에도 나라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곳에 소식이 닿아 상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면 족히 몇 달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바다 건너 남쪽뿐만 아니라, 땅으로 이어진 서쪽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렇소이다.”
이춘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런저런 의견이 두서없이 터져 나왔다.
하나같이 말하는 결론은 여기서 오래 머물러야 한다는 것.
“문제가 되겠습니까?”
누군가 이인에게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속뜻을 읽고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칸은 우리가 더 오래 머물기를 바라고 있더군. 머문다고 하면 얼마든지 편의를 봐줄 거다.”
“잘됐군요.”
“하긴... 저들도 우리를 뽑아먹고 싶을 테니까 말입니다.”
“같은 마음이지.”
회의실에 가볍게 웃음꽃이 피었다.
조선, 킵차크 칸국, 서방왕국들 모두 다 똑같은 마음 아니겠나.
낯선 이들에게서 필요한 걸 뽑아먹기 위해서 서로 뭉친 셈이다.
“더불어 우리야 전부 말을 타고 빨리 이동한 터라 네달을 조금 넘겨서 이곳에 도착했지만, 색목인 포로들이 그 정도 속도로 움직이긴 힘들지 않겠습니까?”
“...”
“대규모 인원을 옮기려면 족히 반년 이상 걸릴 텐데, 겨울에 움직이는 건 무리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당장 수로를 이용한 수참도 이제 막 건설하고 있는데, 틀이 짜여 지기도 전에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하는 건 시기상조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춘보의 이어지는 말에,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
“그럼 전처럼 장계만 보내야 겠군?”
“예.”
이인이 깔끔하게 결론을 내리자, 논의는 가볍게 일단락 됐다. 확실히 다들 공감대가 형성되었었나 보다.
이곳에 오기 무섭게 호위연대병 둘,셋을 유목민 상단에 끼워서, 꾸준히 조선으로 보내지 않았나. 계획이 바뀌었다고 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럼 안건으로 넘어가지. 지도는 어떤가?”
“서방의 지도는 아국보다 조금 못하긴 하지만 충분히 배울 점이 있습니다. 다만 서방의 나라가 워낙 많은 터라, 수집을 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하긴. 지도라는 게 그렇게 쉽게 민간에 풀리는 건 아니니까.”
“예. 그건 여기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이인도 얼추 짐작은 했었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시대에 지도는 관이나 군인들이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민간에 퍼진 지도라는 건 사실상 애들 낙서와 크게 다르지 않고, 서방이든 동방이든 거기서 거기였지.
거의 기밀이자 군수품에 가까운 지도를 구하는 건, 꽤나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구할 수는 있겠지?”
“물론입니다. 지도가 아무리 귀하다고 한들, 저들이라고 아국의 존재를 알기나 했겠습니까. 도자기 몇 개에 지도를 구해온다고 계약한 상인이 부지기수입니다.”
“이곳 상인들도 역시 권력자와 연을 맺고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이 또한 동방이든 서방이든 다 마찬가지.
상인이 아무리 잘났어도, 권력과 군력을 가진 인물과 척을 치고서는 살 수가 없는 법. 당연히 권력자와 결탁해서 이문을 얻고 있으니, 그 연줄을 이용하면 구할 수 있을 거다.
“여기. 대진국. 음... 그러니까 로마국에서 구한 지도입니다.”
이춘보는 냉큼 말을 바꾸고선, 조심스럽게 지도 한 장을 꺼내 탁자에 펼쳐보였다.
헌데 어색한 발음과 국명이 흘러나왔음에도, 관원들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이해하고선 지도에 집중했다.
기존 조선의 세계관은 중국에 중심을 두고 있었고, 당연히 중국의 명칭을 따라 써왔지 않나.
몽골을 달단이라 불렀던 게, 그 극명한 증거지.
허나 자주화의 바람에 맞물려 훈민정음이 등장한 이후론, 그냥 음차해서 적는 방식이 어느새 조정에 자리 잡았다.
직접 외국인과 맞부딪치는 민간백성들이 한어를 다시 조선말로 바꿔서 부르는 음역방식에 익숙할 리가 없고, 나아가 그런 음역단어가 있는 걸 알기나 하겠는가.
훈민정음은 그냥 들리는 대로 바로 적을 수 있는 문자이니, 그 장점을 한껏 활용했지.
특히나 남방에 진출하고 나서부터는 민간의 경향이 조정에 이식됐다.
남방 원주민들은 한족들조차 부르는 명칭이 제멋대로 인데, 굳이 그걸 음역해서 다시 조선말로 부를 필요가 있나.
차라리 그냥 소리 나는 대로 훈민정음으로 적는 게, 훨씬 행정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이 탓에 이춘보가 동로마제국을 그냥 로마국이라고 부르는 것에,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거였고.
이들이 과연 알까 만은... 지금 역사에선 독일을 덕국이나 덕의지, 프랑스를 불란서나 법국 등으로 부를 일은 없게 될 거다.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곳 옆에 베네치아를 비롯한 여러 해상왕국이 존재하고, 이 위쪽으로도 프랑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민족도, 종교도, 언어도 전부 제각각이라고 하더군요.”
“들어는 봤소. 옛 대진국의 로마와 서쪽의 로마가 다른 나라라고 하더군요.”
“남쪽도 신기하군. 이렇게나 많은 나라가 있나 보군.”
“복잡하군. 복잡해.”
다들 외국상인을 통해 몸으로 겪었으면서도, 지도를 보고 있자니 눈이 빙빙 돌아간다.
조잡한 지도임에도 사방에 국경선이 죽죽 그어 있는 게 확연히 보이지 않나. 조선이 그간 겪어왔던 단조로운 국경선과는 아예 비교조차 불가한 수준이다.
“이곳의 원래 주인이었던 나라는 제노바라는 나라로, 이렇게 여러 곳에 조차지 비슷한 곳을 다스리던 나라더군요. 그런 나라가 몇 개 있습니다.”
“허...”
“특이하군. 저렇게 떨어진 땅을 어떻게 다스릴 수가 있으며, 또 어째서 저들은 하나의 땅 덩어리에 붙어 있으면서도 수많은 소국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이인은 지도에 표시된 이탈리아 반도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그런 감상이 튀어나왔다.
중앙집권적인 왕조에 익숙한 조선인으로서는, 유목민도 아닌 정주민들이 저렇게 제멋대로 분열되어 사는 게 퍽 이상하게 느껴졌다.
“옛 대진국의 근본이 이곳이니, 역사가 오래 되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당장 중국조차도 통일왕조가 없었으면 이런 형국을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음...”
“저걸 보고 있자면... 앞으로 중국이 어찌될지 모르지만, 서방의 나라처럼 분열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희망찬 미래를 읊자, 다들 가볍게 피식 웃고 넘어갔다.
조선은 그걸 누구보다도 바라지만, 세상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도 모범이자 목표로 삼을 만한 게, 확실히 눈에 보인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춘보는 동로마제국에서 흘러들어온 지도를 보며 이런저런 지역 설명을 늘어놨고, 이내 다른 나라상인을 통해 구한 지도 또한 몇 개 꺼내서 보여줬다.
“확실히 아국의 지도만은 못하군?”
“그건 맞습니다만, 군사용으로 쓰이는 지도가 어떨지는 또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최대한 구해보고, 더불어 지도제작자 또한 수소문하고 있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지도제작술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지.”
이인은 이춘보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미소로 화답했다.
지도가 중요한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고, 군인이 아닌 관원들조차 모두 동의하는 내용이다.
제대로 만들어진 지도가 그간 이어온 양전사업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했는지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착호군 창설 이후 조선의 지도제작술을 새전기를 맞이했고, 지리감에 속해 구르면 구를수록 점점 더 정확하고 면밀한 지도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나아가 도량형이 조선척으로 통일되어 더욱 명확한 기준을 갖게 됐고, 수많은 해도를 만들면서 지도제작술은 개혁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나뉠 정도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배울 게 있다면 배우는 게, 자본유학에서 말하는 개화자강 아닌가.
이춘보는 앞으로의 할 일에 대해 늘어놓는 걸로, 보고를 끝마쳤다.
다음으로 입을 연건, 재정부의 정갑손이다.
그는 과거 호조에 속해 의주와 호주에서 무역을 담당해 왔었는데, 그 돈놀이 경력을 이어가 재정부의 중진으로 성장한 상태.
“이게 이곳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화폐입니다.”
“...”
정갑손은 두카트 금화와 은화를 탁자 위에 올려놨고, 다들 지겹도록 봤으면서도 한 번 더 관심을 갖고 살폈다.
“이것 말고도 각국이 다양한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더군요. 명칭 또한 제각각, 품위도 제각각, 제조방식도 제각각입니다.”
정갑손은 그리 말을 하고선,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우르르 주화들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