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 챕터51. 뽑아먹다 (3)
제노바와 피렌체의 플로린. 베네치아의 두카트, 은화인 그로스, 동로마제국의 은,금화. 오스만의 은,금화 등.
다양한 크기에 다양한 모양을 가진 주화가 모두의 손에 번갈아가며 들렸다.
“중국의 마제은과 다르면서도 비슷하군요.”
“여긴 확실히 금이 많이 나는 모양입니다. 금화를 이렇게나 다양하게 쓰는 걸 보면 말이지요.”
“그래도 아국이 새로 주조한 주화에는 미치지 못하는 군요.”
누군가 그리 말하자, 다들 오뚝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조정의 중진들이니 조폐부에서 만들고 있는 조선주화를 본적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곳의 주화가 조잡하게 느껴질 정도.
‘그건 확실하지.’
이인은 은화의 모난 테두리를 쓱쓱 매만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형태가 완전한 원형을 이루지 못한 것부터가 이미 뒤쳐지는 모양새고, 주화 안을 채워 넣은 음,양각의 문양은 확실히 화려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조선주화만큼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하다.
“특기해야할 점은 이렇게 미흡한 주화임에도 널리 퍼져서 사용된다는 점이겠지요.”
“음.”
다들 자기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이걸 보면 다시금 몸으로 확 와 닿는 게, 나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조선에게도 뒤쳐진 면이 있다는 게 체감됐다.
“이곳에서 화폐가 통용되는 방식을 익힌다면, 아국에도 도움이 되겠군?”
“그야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이미 완성된 표본이 있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화폐의 뿌리는 옛 한나라 시절부터 있었던 대진국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허... 그렇게나 오래?”
“오...!”
로마제국 시절을 꺼내면, 천년도 훨씬 지난 과거의 일 아닌가.
그때부터 금화와 은화를 사용해서 써먹었다고 하니,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주화를 사용해 왔으면, 그야말로 온갖 사건을 다 겪었겠군?”
“그렇습니다. 이곳의 사서를 모아 확인해보면 역사적 사건들을 알 수 있을 터, 아국의 화폐유통에 있어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지적이다.”
이인의 동의가 뒤따르기 무섭게, 다들 한마디씩 덧붙였다.
“종류가 이렇게 다르면, 거래를 할 때 품위를 따지겠군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정갑손은 히죽 웃고선 말을 이어갔다.
“이 은화는 제노바의 플로린 은화인데, 이곳뿐만 아니라 서방에서도 많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다만 주조권한을 각국의 조정이 가지고 있는 터라, 이 베네치아의 두카트 은화의 품위에 맞춰 만든다고 하더군요.”
“...”
대략적으로 두카트 1개가 플로린 2개의 값어치를 한다는 뜻이었고, 다른 주화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장난을 치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텐데?”
싸구려 위조주화를 만들어서 차액을 얻으려는 사기꾼은 어디서나 나타나는 법.
허나 이인의 당연한 질문에, 정갑손은 고개를 살포시 내저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생각만큼 쉽게 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
“주조권한을 민간이 아닌 조정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나라살림을 하는 이들이 그런 장난질을 치면 망하기 딱 좋지 않겠습니까? 특히나 이곳은 아국이나 중국과 달리 각국간의 교류와 교역이 활발하니,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
정갑손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은,금화라고 한들 합금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양과 순도에 비해서 높은 가치가 책정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래서 직접 화폐를 찍어내면, 그 차액만큼 이득을 거둘 수 있는 거고.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돈을 찍어내면 내, 외부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십상이지요.”
인플레이션의 개념을 완전히 아는 건 아니지만, 조선인들도 돈을 마구 찍어내면 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오르는 건 익히 알고 있다.
직접 경험해 봤을 뿐더러, 중국역사에서 매번 등장하던 단골소재니까.
“만약 자국의 화폐가치가 하락하면, 백성들이 어떻게 움직이겠습니까. 닫힌 시장이라면 화폐의 가치보다 물건의 가치가 계속 치솟겠지만, 열린 시장이라면 당연히 다른 나라의 화폐를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이곳은 아국이나 중국과 사정이 다르니...”
“그렇겠군. 타국의 화폐를 사용하는 게 어렵지가 않겠어.”
“예. 그렇게 타국화폐가 많이 흘러들어오면, 내부적으론 자국화폐가 자리를 잃어서 화폐주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줄어들겠지요. 또한 자국시장의 움직임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지지 않겠습니까.”
“음...”
“그렇겠지...”
“외부적으론 어떻겠습니까? 만약 타국화폐가 많이 들어온 상태에서, 전쟁이나 기근, 역병과 같은 재앙이 닥쳐서 문제가 생긴다면... 고스란히 그 여파를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런 불가항력적인 재앙이 아니더라도, 타국조정이 시장을 흔들기 위해서 모략을 꾸밀 수도 있는 일이고요.”
“끄응.”
“큼...”
정갑손이 우려하는 바를 곧장 알아차리고서, 다들 침음을 흘려댔다.
이건 원나라가 망할 시절에 고려가 그대로 겪었던 문제 아닌가.
이곳은 화폐유통의 역사가 오래되었으니 비슷한 문제를 여러 번 겪었을 거고, 그래서 민간 위조범은 있을 조정이 나서서 장난질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품위와 순도가 다른 각국화폐를 주조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규율이 잡힌 편입니다.”
“그 기준은 이 주화고?”
“예.”
이인이 두카트 은,금화를 들어 보이자, 정갑손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가장 활발하게 무역을 하는 터라, 베네치아의 주화가 기축통화 비슷한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다행이라면 아국의 조폐부와 은행에선 이 문제에 대해서 이미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의 사례와 화폐유통방법을 조사해서 보고하면, 보다 정밀한 대비책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무역항과 조차지에서 조선주화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 왕실은행을 통한 전표를 사용하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 아닌가.
정갑손의 자신만만한 발언에, 다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문제는 중국일 텐데...”
“다양한 마제은이 유통된다는 점에선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라면 이곳은 주화를 주조하는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겠군요.”
“사실 이들이 방식이 맞는 거겠지. 중국이 이상한 것 아니었나?”
“맞네. 옛 명조정이 화폐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해서 발생한 문제였겠지. 지금은 안 그래도 연맹별로 마제은을 정리한다고 들었는데... 어찌됐는지 모르겠군?”
누군가 다시 말꼬리를 잡자,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조선이 날개를 달고 하늘로 떠오르고 있는데, 중국이라고 가만히 있었을 리가 있나. 연맹을 만들어 혼란을 종식시켰으니, 그들도 나름 발전을 시작해야하는 법.
그 첫 시작점이 바로. 민간 조제소에서 주조하던 마제은을 연맹별로 통일 및 균일화 하는 것.
같은 연맹 내부에서 거래할 때조차도, 서로를 믿지 못해서 은의 품위를 확인하는 건... 엄청 귀찮고 불필요한 일 아닌가.
“연맹이 이곳의 방식을 따라할 수도 있다는 건가?”
“이곳의 사정을 당연히 알 리가 없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허면 이곳의 예를 비춰서 중국연맹이 나아갈 길을 가늠할 수 있으니, 조사를 더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맞는 말이야.”
“그렇소이다.”
정갑손의 의견에 다들 동의를 표했다.
화폐 이야기를 끝마친 후에도, 정갑손은 서방의 시장상황을 간단히 풀어놨다.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조선관원들이 다 알 수는 없는 법이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만큼 동,서문명의 교차점이자 교역로였던 터라, 유럽의 문제와 중동의 문제가 섞이고 북아프리카가 엮였으며 동유럽과 북쪽의 루스공국이 엮여들었다.
“열심히 조사하게. 앞으론 아국도 이렇게 될 수 있을 테니까.”
“염려 마시지요.”
가볍게 던진 이인의 잔소리에, 정갑손은 그저 히죽 웃는 걸로 대신했다.
지난날 의주와 호주에서 활동한 관원들은 미래의 경제학과 유사한, 재정학이라는 신학문을 만들고 연구하던 이들 아닌가.
돈놀이에 두각을 나타낸 정갑손도 마찬가지.
그 입장에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곳 시장은, 중국이나 조선이 겪지 못했던 무한한 연구 자료이자 실험체처럼 보였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다들 밤잠을 지새워가며 연구하는 중이었지.
다음으로 입을 연건, 건설부의 정분.
토목건축성애자 정분은 개혁이 시작된 이래로 꾸준히 신도시를 건설해오면서, 그렇게 바라던 대로 토목건축에 심취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낯선 세상으로 가는 사절단에 참여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확실히 기후도 풍토도 다른 터라, 이곳의 건축물들은 색다른 게 많습니다. 배워야 할 점도 많고요.”
“그럴 겁니다.”
“당장 이곳도 그러하니...”
서두를 떼기 무섭게,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여댔다.
이들도 오면서 두 눈으로 봤으니, 이 땅의 건물과 조선의 건물이 얼마나 다른지는 똑똑히 확인하지 않았나.
“다만 봐서 알겠지만... 이곳의 건축물은 특별할 게 없지만, 로마국 장인들의 기술력은 놀랍더군요.”
모두는 더 설명해 보라는 듯, 눈빛으로 정분을 압박했다.
과거 이 땅은 이슬람세력권에서 살짝 비껴나 있어서 크게 번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도시와 소왕국이 존재했었다. 다만 몽골제국이 서방원정을 진행하면서 다 박살이 났지.
그 후로는 유목국가인 킵차크 칸국이 들어서서, 토목건축에 있어서는 조선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다.
허나 로마제국을 이어받은 동로마제국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나.
“건축, 도로, 성곽. 모든 면에 있어서 아국보다 나은 점이 있고, 배울 것도 많습니다.”
“하긴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다면야...”
“게다가 서방에선 전란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성곽과 건축 또한 발달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들도 들은 풍문이 있는 터라, 다들 쉽게 납득했다.
말이 쉬워 천년이지, 조선으로 치면 고려 이전 삼국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하지 않나. 조선인들 입장에서도 로마국은 기가 질릴 나라다.
“도로의 경우에는...”
정분은 동로마제국 및 이탈리아반도의 건설장인을 통해 얻은 지식과 기록을 가볍게 읊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비록 이곳까지 로마가도가 이어지지 않았지만. 시대가 이른 터라 그에 관한 기록은 무수히 많고, 실제로 그걸 운용보수하고 있는 이들 또한 버젓이 존재하는 상황.
“아국이 만든 자갈도로에 비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는 대로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있다고 하더군요.”
“만드는 공법은 배우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아국의 공법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문제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선 자갈도로가 더 나은 면도 있습니다.”
이인이 혹시나 싶어서 되묻자, 정분은 냉큼 우려를 날려 보내줬다.
도로의 핵심은 배수를 원활하게 해서 깨지지 않게 하는 거고, 이걸 하기 위해선 결국 사람을 갈아 넣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니 공법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고, 유지보수의 진짜 문제는 사실 기후에 달려 있었다.
“건축의 경우에는 이곳도 석재, 목재, 벽돌을 모두 사용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더군요. 아무래도 돌이 더 물러서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그럼에도 배울 점은 충분합니다.”
“오...”
“물론 뭐... 이 땅이나 이 일대의 건물은 조선과 크게 다를 게 없고,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땅에 사는 노비들의 집은 지저분한 게 사실입니다.”
“음.”
“그건 그렇소이다.”
“가축과 함께 사는 걸 좋다고 봐야할지, 나쁘다고 봐야할지...”
정분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덧붙이자, 이번에도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통나무와 토벽을 조합해 만든 큰 집에서, 돼지나 양,염소,개 등을 껴안고 사는 걸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않았나.
그런 집이 한둘이 아니고, 끌려온 농노들이나 원래 살던 농노들이나 꼬락서니는 비슷했다.
이 시대의 조선인 눈에도 “저건 조금 더럽지 않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한편으론 “여긴 그래도 집집마다 가축들을 키우는 구나.”라는, 다른 의미의 부러움도 들었지.
지금 조선은 목장과 농장이 엄청나게 늘어나긴 했지만, 모든 백성들의 집집마다 가축을 키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까.
“허나 로마국의 건물은 확실히 다릅니다.”
건물을 짓는 것도 기후의 영향을 받는 건 마찬가지.
동양이 목재 건물을 선호한 건 그게 더 싸기도 하지만 우기와 비슷하게 비가 많이 내리는 탓이 적지 않다. 기와가 발달한 이유도 목재로 지어진 지붕이 젓지 않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이로 인해 서방이 벽채구조로 된 건축양식이 발전하고, 동방은 기둥을 중심으로 한 양식이 발전하게 됐고.
또한 로마와 유럽하면 뭔가 웅장한 성곽과 성당 등을 떠올리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극소수의 건축물다.
일반 백성들, 농노들이 사는 집들은 조선의 초가집이나 토벽집과 크게 다르지 않는 수준이고, 왕조가 번성하지 못한 이 땅은 그보다도 더 뒤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북방에 새로 지은 북방식가옥과 흡사한 면도 있어서, 확실히 배워 가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렇겠지요.”
“어찌됐건 추위를 피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
다들 얼추 이해가 돼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서방인이든 동방인이든 추위에는 장사 없으니, 어떻게든 보온에 힘을 써야 하는 법.
비록 온돌이 발달하진 않았지만 그와 유사한 형태의 집이 만들어지거나, 단열을 위한 여러 형태의 양식이 등장해 있었다.
반대로 더위를 쫓아내기 위한 건축양식도 중동에서 흘러들어온 터라, 정분 입장에선 배우고 익혀야할 게 너무 많았지.